[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시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가, 빼앗기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시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가, 빼앗기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AI로 보고서 초안을 10분 만에 끝냈다. 예전 같으면 반나절은 걸렸을 일이다. 남은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밀린 메일을 처리하고, 다른 업무를 당겨서 시작하고, 또 다른 업무 자료를 준비했다. 점심도 그냥 대충 때웠다. 근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시간을 벌었는데, 하루는 전보다 더 빡빡했다. 벌어들인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매일을 하나의 온전한 삶처럼 살라”고 권했다. 2천 년 전 말이 오늘따라 아프게 다가온 건, 기술이 시간을 아껴준다는 약속과 실제 삶의 체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말 시간을 절약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정교한 방식으로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건 아닌가? AI는 분명 놀라운 도구다. 몇 시간 걸리던 문서 정리가 몇 분으로 줄고, 긴 보고서는 순식간에 요약되며, 번역과 검색의 속도는 인간의 손을 가볍게 만든다. 반복 노동은 줄고 생산성은 높아진다. 기술의 약속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더 많은 시간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AI가 인류에게 ‘시간의 선물’을 안겨줄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술은 빨라졌는데 삶은 왜 더 분주해졌을까? 답장은 더 빨라져야 하고, 판단은 더 즉각적이어야 하며, 성과는 더 자주 증명되어야 한다. 절약된 시간은 휴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개 더 많은 업무와 더 촘촘한 요구로 다시 채워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미 그런 풍경이 일상이 되어 있다. 메일 회신 속도가 빨라진 만큼 상대방의 기대치도 올라갔고, 보고서를 빨리 쓸 수 있게 된 만큼 보고서의 양도 늘어났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밀어 넣는 기술을 익힌 것인지 모른다. 여기서 시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같은 한 시간이라도 병실의 한 시간과 여행지의 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기다리는 한 시간은 길고, 사랑하는 사람 곁의 한 시간은 짧다. 누군가의 임종을 지키는 한 시간은 시계가 멈춘 것처럼 무겁고, 오랜 친구와 나누는 한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가볍다. 시간은 시계 위에서 균일하게 흘러가지만, 인간은 그것을 의미로 살아낸다. 바로 그 지점에서 AI와 인간의 길이 갈라진다. AI는 문장을 줄일 수 있지만 상처의 무게를 줄이지는 못한다. 정보를 정리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실패를 통과하며 얻는 성찰까지 대신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나 역시 AI에게 글의 초안을 맡길 수 있지만, 몇 문장에 한참을 붙들려 있었던 밤의 고투까지 위임할 수는 없었다. 슬픔을 견디는 시간, 관계가 익어가는 시간,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은 AI가 건너뛸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대개 느리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고, 사랑은 효율로 설명되지 않으며, 지혜는 검색창에 도착하지 않는다. 오랜 대화, 오래된 침묵, 한 사람을 끝까지 기다려주는 마음. 그런 비효율적인 시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깊어진다. 문명은 시간을 압축했지만, 영혼은 압축된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은 “얼마나 빨리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절약한 시간을 나는 어디에 쓸 것인가.”이다. 만약 AI가 비워준 시간이 더 많은 경쟁, 더 많은 피로, 더 많은 불안으로만 채워진다면 기술은 우리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더 정교하게 길들인 셈이다. 반대로 그 시간이 돌봄과 관계, 성찰로 이어진다면, 비로소 기술은 인간 편에 선 것이 된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중요한 장면들은 대부분 비효율적이다. 아이의 첫걸음을 기다리는 시간, 아픈 사람 곁을 밤새 지키는 시간, 책을 덮고 한참 생각에 잠기는 시간,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망설이는 긴 침묵. 이런 시간은 성과표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품위는 대개 그런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대개 빠른 답이 아니라, 함께 견뎌주는 시간이다. 오늘 우리의 피로는 일이 많아서만이 아닐지 모른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표를 채우는 법은 익혔으나 영혼을 채우는 법에는 여전히 서툴다. 더 빨리 연결되었지만 더 깊이 만나지는 못한다. 현대인의 허기는 단순한 과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시간에서 오는 허기일 수 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무엇에 바쁜지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이 늘어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AI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더 잘 활용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기술은 인간의 시간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기계는 시간을 계산할 수 있지만, 그 시간을 의미로 바꾸는 일은 오직 인간만의 몫이다. 사랑도, 돌봄도, 책임도, 기다림도, 모두 그 의미의 시간 안에서만 자란다. 세네카의 말처럼 하루를 한 생애처럼 살아야 한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AI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줄 수 있느냐가 아니다. 그 시간을 우리가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느냐다. 문명의 미래는 속도에 달려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미래는 그 속도 안에서 무엇을 지켜냈는가에 달려 있다 ㅌ

[손영미 칼럼] 왕과 ‘사는’ 남자, 권력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남을 것인가

[손영미 칼럼] 왕과 ‘사는’ 남자, 권력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남을 것인가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최근 개봉한 영화 ‘ 왕과 사는 남자‘ 가  2026년 2월 4일 개봉 후 흥행을 이어가며 3월 6일 1천만 관객을 돌파했고, 3월 8일 기준 1,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영화는 폐위된 단종 이홍위(박지훈)와 촌장 엄흥도(유해진)의 관계를 중심으로, 유배지 영월에서의 시간을 그린 사극이다.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는 이 작품이 단순한 사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왕을 모시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권력에서 밀려난 한 인간과 그 곁을 끝내 떠나지 않는 또 다른 인간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왕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우리는 지도자를 말할 때 흔히 힘을 떠올린다. 결단력, 카리스마, 통치력 같은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익숙한 문법을 조용히 뒤집는다.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은 더 이상 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왕관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한 인간의 품위뿐이다. 그리고 엄흥도는 그 곁에서 묻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람 곁에 남는가. 장항준 감독이 이 작품의 핵심으로 말한 인간의 마지막 ‘도덕의 마지노선’이라는 화두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각박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효율과 계산을 먼저 배운다. 손해 보지 않는 법, 휘말리지 않는 법, 마음을 깊이 주지 않는 법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 모든 계산 밖에서도 누군가가 마지막 선을 지키기 때문이다.…

[손영미 칼럼] 비참함 가운데 명랑하게, 삶이라는 캔버스에 대하여

[손영미 칼럼] 비참함 가운데 명랑하게, 삶이라는 캔버스에 대하여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은 산부인과 의사의 손에서 시작해 장의사의 손에서 끝나는 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세상을 떠난다. 그 사이의 시간만이 우리가 직접 걸어야 할 길이다. 그 길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그리고 생각보다 거창하지도 않다. 인생의 대부분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차 한 잔을 마시고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저녁이 되면 하루를 접는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씩 자신의 생을 조금씩 사용한다. 하지만 그 길이 언제나 환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몇 번쯤 자신의 삶이 설명되지 않는 구간을 지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시간,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는 매듭,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독.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삶이란 축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태주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비참함 가운데 명랑한 것이다.” 이 문장은 삶의 모순을 말하는 동시에 삶을 견디는 태도를 말해 준다. 명랑함은 조건이 좋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손영미 칼럼] 일모도원(日暮道遠), 저무는 해를 사랑하는 법

[손영미 칼럼] 일모도원(日暮道遠), 저무는 해를 사랑하는 법

– 인류의 스승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의 인생 일침을 살펴보며…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우리는 무엇을 품고 걸어야 하는가.” 살다 보면 문득 ‘일모도원’의 심경에 놓일 때가 있다. 이루어 놓은 것보다 남은 시간이 적어 보이고, 서산으로 기우는 노을이 못내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이 막막한 길 위에서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는 두 대문호,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각기 다른 색깔의 등불을 건네준다. 톨스토이의 등불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권리에서 시작 되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인생의 10훈을 통해 ‘시간을 내는 행위’가 곧 삶의 주인으로 사는 법임을 역설한다. 그는 생각하고, 일하고, 독서하는 시간이 능력과 성공, 지혜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강조한 것은 ‘효율’이 아닌 ‘마음의 여유’였다. 행복으로 가는 길인 ‘친절’에 시간을 내고, 구원받은 자의 특권인 ‘사랑’에 기꺼이 자신을 던지라는 권유는 이기적으로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는 뼈아픈 통찰에서 기인한다. 웃음이라는 영혼의 음악을 연주하고, 꿈이라는 대망을 품기 위해 시간을 내는 사람에게 노년은 쇠락이 아니라 완성의 과정이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등불은 품격’이라는 이름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중년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내려놓음과 인정’의 미학을 가르친다. 그의 조언은 서늘하면서도 명쾌하다.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늙음이 시작되니 영원한 학생으로 남으라 조언하며, 과거의 훈장을 자랑하기보다 현재의 아름다움을 즐기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와 경쟁하며 기를 쓰기보다 그들의 성장을 응원하는 여유, 부탁받지 않은 충고를 아끼는 사려 깊음이야말로 중년의 품격을 완성하는 요소다. 특히 “철학이 줄리엣을 만들 수 없다면 그런 철학은 지워버리라” 라는 그의 일갈은 관념에 매몰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뜨겁게 탐닉하라는 강력한 주문이다. 죽음을 미리 마중 나가지 말고,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인 ‘살아있음’ 그 자체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들꽃처럼 피어 호수처럼 머물다 간 두 문호의 지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결국 ‘사랑과 현재 ’가 남는다. 바위틈에 이름 없이 피어난 들꽃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진정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그 삶은 결코 이름 없는 삶이 아니다. 비록 내 집은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제 집은 연락하고 오라는 자식들의 서운한 ‘불공평’이 서러울지라도, 우리는 그 서러움을 해학으로 녹여낼 줄 아는 어르신들의 지혜를 배웠다. 인생은 저녁 먹고 가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돌아섰던 후회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라도 톨스토이처럼 시간을 내어 곁을 돌보고, 셰익스피어처럼 늙어감을 불평하지 않으며 걷는다면, 우리의 황혼은 ‘금빛 노을’로 타오를 수 있다. “노래는 끝나지만, 울림은 계속됩니다.” 어느 음악회의 갈무리 멘트처럼, 우리 인생의 화려한 무대는 조금씩 막을 내릴지라도 그 인격의 울림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잔잔한 호수로 머물 것이다. 일모도원(日暮道遠)의 길, 해는 저물었어도 우리가 품은 지혜의 등불이 있다면 그 길은 결코 어둡지 않다.우리는 오직 ‘살기 위해’ 이곳에 왔고, 충분히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강대옥 칼럼] 이란 이후는 쿠바인가

[강대옥 칼럼] 이란 이후는 쿠바인가

– “트럼프의 다음 타겟은 쿠바? 마코 루비오가 설계하는 카리브해 잔혹사” ▲사진=강대옥 국회입법정책연구회 수석연구원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강대옥 칼럼니스트] 도널드 트럼프의 예고된 귀환, 그리고 카리브해의 거센 파도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전 세계 지정학적 체스판을 뒤흔드는 강력한 신호탄이었다. 이란과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강대옥 칼럼] 트럼프의 ‘쿠르드 카드’와 중동 지정학

[강대옥 칼럼] 트럼프의 ‘쿠르드 카드’와 중동 지정학

– 대리전의 도구인가, 배신의 희생양인가 [강남 소비자저널=강대옥 칼럼니스트] 21세기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은 근본적인 전환기를 맞이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값비싼 교훈은 미국으로 하여금 대규모 지상군 투입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피하게 만들었다. 자국 군인의 희생은 곧 여론 악화와 정권 위기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결과다. 이에 따라 현대 미국 전쟁…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언어: AI는 한글을 이해하는가, 흉내 내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언어: AI는 한글을 이해하는가, 흉내 내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난해, 40년 지기 벗을 보냈다. 추도사를 부탁받았다. 마음은 간절한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래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결국 AI에게 도움을 청했다. ’40년 우정을 함께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추도사를 써줘.’ 몇 초 만에 문장이 완성되었다. 격식도 갖추었고, 애도의 표현도 정중했다. 누가 읽어도 흠잡을 데 없는 글이었다. 그런데 그걸 찬찬히 읽어보는 순간, 나는 노트북을 접었다. 거기에 그 친구가 없었다. 신입사원 시절 퇴근 후 치맥 한 잔 하며 서로의 꿈을 떠들던 밤도, 내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말없이 봉투 하나 건네던 손도,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으며 지었던 그 억지웃음도 없었다. AI는 추도를 쓸 수 있었지만, 내 추도를 쓸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AI는 한글을 이해하는 것일까, 흉내만 내는 것일까? 이 질문 앞에서 세종대왕을 떠올리게 된다. 훈민정음 서문의 그 문장.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세종은 더 많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한글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언어는 태생부터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제도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또 하나의 존재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AI는 놀라울 만큼 언어를 잘 다룬다.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하고, 단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지 패턴을 찾아내고, 문맥에 맞는 문장을 조합해낸다.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AI와 대화하며 문법을 교정받기도 하고, 글쓰기가 서툰 사람이 AI의 도움으로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기도 한다. 언어의 문턱을 낮추는 도구로서 AI의 가치는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인간에게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가 지나온 시간을 함께 사용한다. ‘집’이라는 글자 하나에 어린 시절 마당의 냄새가 있고, ‘미안하다’는 네 글자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어느 저녁이 있다. 언어는 사전 속 뜻풀이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고스라히 배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단어라도 사람마다 무게가 다르다. AI의 언어는 다르다. AI는 의미를 경험하지 않는다. 수많은 문장 속에서 단어들이 어떤 확률로 이어지는지를 계산할 뿐이다. 그래서 문장은 자연스럽지만, 그 문장 뒤에 삶의 무게가 없다. 내가 벗 앞에서 읽으려던 그 추도사처럼, 격식은 갖추었지만, 40년의 세월은 담기지 않은. 물론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인간도 어릴 때 수많은 문장을 들으며 패턴을 익히지 않느냐고. 맞다. 그 지적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패턴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로 약속을 만든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에 묶인다. ‘책임지겠다’고 쓰면 그 문장이 자신을 따라다닌다. 말 한마디가 관계를 세우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리기도 한다. 기계는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문장에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요즘 나는 묘한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지인의 SNS에 올라온 긴 추모 글이 AI가 쓴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함. 지인이 생일축하 카드를 AI로 만들었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줄 때의 묘한 서운함. 오래된 동료가 보낸 새해 인사 메시지의 문장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질 때의 거리감. 우리는 어느새 문장이 어디에서 왔는지보다, 얼마나 자연스러운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창함이 진심을 대신하는 시대. 그게 지금이다. 그래서 다시 세종대왕을 생각한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핵심은 문자의 효율성이 아니었다. 핵심은 ‘내 생각을 내 말로 쓸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AI가 대신 써주는 문장에 기대어, 정작 자기 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AI는 훌륭한 도구다. 글을 정리하고, 정보를 요약하고, 표현을 다듬는 데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문장의 마지막 한 단어를 고르는 건, 그 단어에 자기 삶을 거는 건,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할지 모른다. AI가 한글을 이해하느냐, 흉내 내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 우리는 아직도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있는가? 결국 나는 그 추도사를 직접 썼다. 문장은 어눌하고 서툴렀다. 중간에 말이 막혀 한참을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맥주잔 너머로 꿈을 떠들던 밤은 들어갔고, 말없이 건네던 봉투도 들어갔고, 병실의 그 억지웃음도 들어갔다. 쓰다가 읽다가 끝내 울었다.

[정봉수 칼럼]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근로자를 고소, 고발과 해고한 사례

[정봉수 칼럼]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근로자를 고소, 고발과 해고한 사례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I. 사실관계 2025년 8월 18일 먼 지방에서 30대 후반의 여성근로자가 직장 내 괴롭힘 신고한 사건에 대해 상담을 받고자 찾아왔었다. 이때, 근로자는 그 지역에서 직장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년 때까지 계속해서 근무하고 싶다고…

[김종우 칼럼] 반려동물산업 에세이_104 유실·유기 동물 예방 정책과 성숙한 반려문화 구축 방안

[김종우 칼럼] 반려동물산업 에세이_104 유실·유기 동물 예방 정책과 성숙한 반려문화 구축 방안

“돌봄의 기준은 제도로, 반려문화의 가치는 일상으로” ▲사진=김종우 대한반려동물협회 회장 ⓒ강남구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김종우 칼럼니스트] 유실·유기 동물 문제는 단순한 관리 부실의 결과가 아니다. 한 사회가 생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책임을 어떻게 분담하며, 돌봄의 윤리를 얼마나 내면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조적 지표다. 전문가들은 예방 정책과 시민의식이 동시에 작동할 때…

[하정언 칼럼] 1912년, 어진화사의 탄생

[하정언 칼럼] 1912년, 어진화사의 탄생

한 청년 화가에게 맡겨진 조선의 얼굴   [강남 소비자저널=하정언 칼럼니스트]   1912년. 조선이라는 국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붕괴되었고, 왕실은 권력을 잃은 채 덕수궁에 머물고 있었다. 정치적 주권은 물론 재정과 행정의 실질적 권한까지 조선총독부로 이관된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