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늦은 밤, 한 사람이 휴대폰을 들고 오래 앉아 있다. 검색창에 한 줄을 적는다.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몇 초 만에 답을 내놓는다. 죄책감의 정체,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 성경 구절의 뜻, 기도의 문장까지 차분히 정리해준다. 문장은 매끄럽고 답은 빠르다. 그런데 화면을 끄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서늘하다. 화면은 말해주지만, 화면은 바라봐주지 못한다. 우리는 질문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 답이 넘치는 시대를 산다. 병원에 가기 전 증상을 묻고, 계약서를 쓰기 전 절차를 확인하고, 강의안을 짜기 전 AI에게 개요를 부탁한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교리의 역사, 성경의 배경, 본당 소식지 문안, 외국인 신자를 위한 번역, 어르신 안부 명단 정리까지 – AI가 거들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바쁜 사목 현장에서 AI는 신부님의 시간을 덜어주는 손이 될 수 있다. 다만 이 주제 앞에서는 조심스러움이 먼저 든다. 필자 역시 스무 해 가까이 성당을 오가며 미사와 본당 공동체의 온기를 곁에서 겪어온 사람이라, 신앙의 언어를 함부로 빌려 쓰고 싶지 않다. 고백하자면 나부터 편리함에 길든 사람이다. 책상 앞에서 글을 쓰고 자료를 뒤지며 사는 처지라, 궁금한 게 생기면 사람을 찾기 전에 화면부터 켠다. 빠른 답이 좋은 답이라 믿은 적도 많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어떤 물음은 답을 받는 순간 오히려 더 외로워진다. 정확한 설명을 다 듣고도 “그래서 내 곁엔 누가 있나?” 하는 자리가 남는다. 그래서 이 글은 “신부님이 AI를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반복되는 행정과 자료 정리에 쓰던 시간을 줄여 더 많은 신자를 만나고 더 오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AI는 고마운 도구다. 문제는 도구가 제자리를 넘볼 때 생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24년 미국의 한 가톨릭 단체가 신부 모습을 한 ‘AI 사제’ 캐릭터를 내놓았다. 교리를 안내하는 문답용이었는데, 이 디지털 사제가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사해줄 수 있는 듯 답하면서 비판이 쏟아졌다. 단체는 하루 만에 그 사제 옷을 벗겨 평범한 조력자로 바꿨다. 우려를 듣고 스스로 바로잡은 셈이다. 비웃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사람은 절박할수록 문장과 존재를 혼동하고, 위로가 필요할수록 정보와 만남을 착각한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앱의 응답창이 아니다. 성사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거룩한 만남이다. 교황청도 이 점을 일찍 짚었다. 2025년 문헌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은 AI가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AI를 사람인 양 오인하게 만드는 일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기술을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술을 인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AI는 답을 준다. 그러나 답이 늘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감정은 정상입니다”라는 분석보다 “많이 힘드셨지요?”라는 한마디다. 어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한 정의보다, 무너진 마음을 들키고도 부끄럽지 않은 자리다. 복음서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린다. 길에 쓰러진 사람 앞에서 그는 치료법을 설명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갔다.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갔다. 신앙은 멀리서 옳은 말을 던지는 데 있지 않다. 가까이 가서 함께 젖고 함께 무거워지는 데 있다. AI는 길을 설명할 수 있지만, 피 흘리는 사람 곁에 무릎 꿇지는 못한다. 물론 신부님도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이기에 지치고, 더러 말문이 막히고, 어떤 고통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사목은 더 인간적이다. 완벽한 대답보다 깊은 위로는 “나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을 혼자 두지는 않겠습니다”라는 태도에서 온다. AI가 정답을 말하는 시대일수록, 신부님의 침묵은 더 큰 언어가 된다. 여기서 “안아준다”는 말은 신체의 동작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픔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품는 마음,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고 기다리는 태도, 필요하면 전문 상담과 의료로 이어주는 분별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대신 설 수 없는 자리 – 은총이 사람을 통해 건네지는 자리 – 를 끝까지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사목은 감정만으로 서지 않는다. 정확한 지식과 윤리적 판단, 책임 있는 연계, 그리고 한 사람을 향한 존중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니 AI는 신부님의 경쟁자가 아니라, 사목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도구여야 한다. 자료를 찾는 손, 문서를 정리하는 손, 언어의 벽을 낮추는 손이 될 수 있다. 다만 마지막 손은 사람의 손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슬픔이 화면 밖으로 흘러넘칠 때 그 곁에 앉아 있어 줄 존재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답이 많아질수록 더 귀해지는 것이 있다. 들어주는 귀, 기다려주는 눈, 말없이 품어주는 마음이다. 인공지능은 질문에 응답하지만, 신부님은 한 사람의 인생에 응답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무너진 영혼은 결국 사람의 온기로 다시 일어선다. 그래서 답이 넘치는 시대에도 신부님의 자리는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설명은 기계에 맡길 수 있어도, 누군가의 곁에 앉아 함께 침묵해주는 일까지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도 가만히 묻게 된다. 나는 답을 많이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아픔 앞에 잠시라도 곁이 되어줄 사람인가? 참고자료 [1]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성경』 루카복음 10장 25–37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편, 『성경』. [2] ‘AI 사제’ 사건 미국의 가톨릭 교리 안내 단체 Catholic Answers가 2024년 4월 23일 신부 형상의 AI 캐릭터 ‘Father Justin’을 선보였으나, 이 AI가 고해성사를 듣고 사죄할 수 있는 듯 답한 것을 비롯한 응답 논란으로 하루 만에 평신도 캐릭터 ‘Justin’으로 바꾼 사건. ゚ Gina Christian, “AI ‘priest’ sparks more backlash than belief,” OSV News, 2024. 4. 25. ゚ “Catholic Answers’ AI ‘priest’ laicized after backlash,” America Magazine, 2024. 4. 25. [3] 교황청 문헌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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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셰프: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손맛의 비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며칠 전 책상 앞에서 두바이의 한 식당 영상을 보았다. ‘AI 셰프’가 메뉴를 짜고 맛의 조합을 설계한다는 뉴스였다. 주방은 깔끔했고 추천된 요리는 그럴듯했다. 그런데 영상 끝에서 한 사람 셰프가 국자를 들어 한 입 맛을 보더니, 무언가를 아주 조금 더 넣었다. 그 작은 동작에서 나는 오래전 부엌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늘 불을 끄기 직전에 숟가락을 들었다. 한 모금 머금고, 잠깐 멈추고, 소금을 조금 더 넣거나 그냥 두었다. 우리는 그 머뭇거림을 손맛이라 불렀다. 음식은 완성되기 직전의 몇 초에서 갈린다. 같은 된장, 같은 냄비, 같은 불 앞에서도 누군가는 한 번 더 끓이고 누군가는 그때 불을 끈다. 레시피에는 ‘소금 약간’이라 적혀 있지만, 그 약간은 늘 다르다. 김치가 익은 정도, 국물의 온도, 먹는 사람의 나이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그 자리에도 인공지능이 들어선다. AI는 냉장고 속 재료를 읽어 메뉴를 짜고, 로봇은 볶고 튀기고 굽는 일을 일정한 속도로 반복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푸드테크 핵심기술로 AI·로봇 기반 식품 제조와 외식 자동화, 맞춤형 식단 서비스를 꼽았고, 지난해 국내 전시장에서도 AI 로봇 교반기와 자동 조리기기가 주목받았다. 두바이의 그 식당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다만 거기서도 음식을 실제로 조리하고 맛을 보고 고치는 일은 사람 셰프의 몫이었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AI가 요리를 모르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요리를 안다는 것과 누군가를 먹인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요리는 재료를 익히는 기술만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하루를 받아내는 일이다. 배고픈 사람의 속을 채우고, 지친 사람의 마음을 데우고, 오래 떠나 있던 사람을 집으로 데려온다. 음식 한 그릇에는 영양성분표에 적히지 않는 것이 담긴다. 국을 데우며 기다린 시간, 불 앞에서 흘린 땀, 누군가를 떠올리며 다시 간을 본 마음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손맛을 막연한 정성으로만 풀이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전문 셰프의 손맛은 우연이 아니다. 수없이 반복한 칼질, 숱한 실패, 재료를 보는 눈, 불의 세기를 읽는 감각, 위생과 안전에 대한 책임, 손님 앞에 내놓는 한 접시의 자존심이 쌓여 만들어진다. 손맛은 오래 훈련된 몸의 지식이다. AI는 레시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간을 보는 마음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기술을 밀어낼 일은 아니다. 외식 현장은 인력난과 원가 상승, 음식물 쓰레기와 싸운다. 뜨거운 기름 앞에서 사람을 덜 위험하게 하고, 허드렛일을 덜어주고, 알레르기와 영양 정보를 더 정확히 관리하는 데 AI와 로봇은 분명 힘이 된다. 기술은 좋은 셰프가 더 좋은 음식을 만들도록 돕는 또 하나의 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어디까지 맡길 것인가다. AI는 맛의 조합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손님에게 이 음식이 너무 매운지, 막 퇴원한 어르신에게 이 국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처음 먹는 음식 앞에서 아이가 겁내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일은 사람에게 남는다. 계산이 끝나는 자리에서 배려가 시작된다. 손맛은 손끝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향한 기억과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AI 시대의 위험은 기계가 음식을 만든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더 큰 위험은 우리가 맛을 너무 빨리 숫자로 바꾸려는 데 있다. 별점과 리뷰, 조회수와 추천 알고리즘이 기준이 되면서 어느새 ‘맛있다’는 말이 ‘많이 팔린다’는 말과 뒤섞였다. 그러나 입맛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떤 음식은 완벽하지 않아서 오래 남는다. 조금 투박한 김치찌개, 모양이 고르지 않아도 따뜻했던 전, 명절 아침 부엌에 번지던 기름 냄새가 그렇다. 훌륭한 셰프는 새로운 맛을 발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먹는 사람의 삶을 상상한다. 재료를 고르는 손에는 계절이 있고, 불을 다루는 손에는 인내가 있고, 접시를 내는 손에는 존중이 있다. 인공지능은 세상의 레시피를 한순간에 훑지만, 한 사람의 허기를 알아채는 표정까지 익히기는 어렵다. 기계가 맛을 분석하는 동안, 사람은 추억을 차려낸다. 미래의 주방은 지금보다 똑똑해질 것이다. AI는 더 정교하게 맛을 예측하고, 로봇은 더 안정적으로 조리하고, 건강에 맞춘 식단도 더 쉬워질 것이다. 두려워할 변화가 아니라 잘 써야 할 변화다. 다만 그 길에서 셰프의 자리를 ‘대체 가능한 노동’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셰프의 숙련과 창의, 감각과 윤리는 기술이 가져갈 낡은 짐이 아니라 기술이 존중해야 할 중심이다. 손맛의 비밀은 손에만 있지 않다. 그 손이 지나온 시간에, 그 손이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 손이 끝내 놓지 않는 책임에 있다. 그러니 인공지능이 아무리 많은 레시피를 외워도 밥상이 건네는 위로까지 흉내 내기는 어렵다. 밥상은 배를 채우는 자리이면서, 누군가를 기억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음식을 빠르게 만든다. 그러나 식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은 끝내 사람에게 남는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어렵지 않다. AI가 골라준 레시피를 따르더라도 마지막 한 번은 내가 직접 숟가락을 든다. 그리고 묻는다. 이 음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조금 더 싱겁게 해야 할 사람은 없는가? 유난히 지친 누군가에게 한 술 더 따뜻하게 건넬 길은 없는가? 인공지능은 앞으로 더 많은 요리를 배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AI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는가? 손맛의 비밀은, 어쩌면 그 숟가락을 드는 마음에 있다. 참고자료 농림축산식품부, 푸드테크 핵심기술 관련 정책자료: AI·로봇 기반 식품 스마트 제조, 외식 자동화, 맞춤형 식단 서비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푸드테크가 바꿀 우리 집 식탁은?」(2025): AI 로봇 교반기, 자동 혼합 조리기기, 스마트 급식 등 전시 동향. Reuters, “Dubai to debut restaurant operated by an AI chef”(2025.7.8): AI 셰프 ‘Aiman(에이만)’ 사례 — 메뉴·분위기·서비스는 AI가 설계하되 실제 조리·간 보기·조정은 인간 셰프(Reif Othman 팀)가 담당하는 협업 구조. National Restaurant Association, State of the Restaurant Industry 2026: 외식업의 기술 도입·자동화·데이터 분석·운영 효율화 흐름.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손맛의 순간, 양념을 조절하는 셰프의 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돌봄은 최적화될 수 있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리스트} 얼마 전, 자료를 찾다가 짧은 영상 하나를 보았다. 한 돌봄로봇 시연 영상이었다. 로봇이 거실에 앉은 노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약 드실 시간이에요.” 노인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더니 엉뚱하게 되물었다. “자네는, 저녁은 먹었나?” 로봇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같은 안내를 한 번 더 명랑하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그 짧은 어긋남 앞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 노인이 묻고 싶었던 것은 약이 아니라, 곁에 있는 누군가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AI 돌봄로봇과 휴먼케어 서비스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노인의 되물음을 떠올리며 같은 질문 앞에 선다. 돌봄은 과연 최적화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기술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현장을 아는 사람일수록 기술이 절실하다. 인력은 부족하고 수요는 빠르게 는다. 종사자의 허리와 무릎, 마음은 이미 한계에 가깝다. 통계청 「2025 고령자 통계」는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3%에 이르렀고, 2050년에는 40%를 넘어설 것으로 본다. 보건복지부도 2026년부터 AI와 돌봄로봇, 스마트홈을 활용한 복지·돌봄 혁신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돌봄이 기술과 만나는 일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여기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떠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등불을 든 간호사로만 기억하지만, 그는 헌신만의 인물이 아니었다. 브리태니커는 그를 현대 간호의 기초를 세운 간호사이자 통계학자, 사회개혁가로 소개한다. 그는 병원의 위생 상태, 사망 원인, 환자 통계를 집요하게 살폈고, 숫자를 통해 제도를 바꾸려 했다. 감정만으로 돌본 것이 아니라, 근거로 돌봄을 개선한 사람이다. 돌봄을 선의에만 맡기지 않은 것이다. 돌봄은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마음이 빠지면 돌봄이 아니다. AI는 분명 돌봄을 돕는다. 한밤중 낙상을 감지해 가족에게 알리고, 약 먹을 시간을 일러주고, 며칠째 냉장고 문이 열리지 않은 독거노인의 집에 안부를 보낸다. 종사자가 밤늦게까지 붙들던 기록 업무도 덜어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장기요양 수요가 2043년에 2023년의 2.4배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요양보호사 공급은 정점을 지나 줄어들고, 현재 수준의 업무 부담을 유지하려면 2043년에 최대 99만 명의 추가 인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버지, 그리고 머지않아 우리 자신의 미래다. 그러나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과 기술이 돌봄을 대신한다는 말은 다르다. 돌봄의 본질은 시간을 줄이고 동선을 효율화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말하지 못한 두려움을 살피고, 반복되는 작은 요구 속에서 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기계는 체온을 잰다. 그러나 손이 왜 찬지는 끝내 묻지 않는다. 기계는 위험을 감지한다. 그러나 사람은 고독을 알아차린다. 영상 속 그 노인도 약이 없어서 외로웠던 것이 아니다. 말을 건넬 사람이 없어서였다. 현장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요양보호사가 하는 일은 단순한 반복 노동이 아니다. 그들은 대상자의 평소 눈빛을 기억하고, 서류에 적히지 않는 변화를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AI가 들어올수록 사람의 판단은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기술은 자료를 모은다. 그 자료가 누구의 삶을 뜻하는지는 사람이 읽어야 한다. 물론 반론이 있다. 돌봄이 그동안 사람의 헌신에만 기대 왔으니, 이제 기술의 도움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옳은 지적이다. 종사자의 희생을 미덕으로만 포장해선 안 된다. 허리가 무너지고 감정노동에 지친 현장을 그대로 둔 채 “사람의 손길이 중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돌봄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복과 부담은 기술이 덜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돌봄은 최적화될 수 있다. 다만 전부는 아니다. 일정과 위험 감지, 기록과 안내는 기계에 맡겨도 된다. 그러나 눈을 맞추는 일, 기다려 주는 일, 슬픔을 함께 견디는 일은 효율로 잴 수 없는 관계의 몫이다. 돌봄의 미래는 사람을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이 더 사람답게 돌볼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나이팅게일이 오늘의 돌봄로봇을 본다면 무조건 거부하진 않았을 것이다. 관찰과 통계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다만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기술이 환자 곁의 빛을 더 밝히는가? 아니면 사람의 얼굴을 더 멀게 하는가? 등불의 의미는 어둠을 없애는 데 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혼자가 아님을 알리는 데 있었다. 스마트 사회서비스가 진짜 스마트해지려면, 먼저 사람의 아픔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AI 돌봄을 말할 때마다 두 가지를 함께 묻기로 했다. 이 기술은 돌보는 사람을 덜 지치게 하는가? 그리고 돌봄받는 사람을 덜 외롭게 하는가? 둘 중 하나에만 답할 수 있다면, 그 기술은 아직 돌봄의 언어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다시 그 영상의 노인을 생각한다. “자네는 저녁 먹었나”라는 물음에 누군가 “저도 아직요, 같이 드실래요?”라고 답했다면, 그 짧은 순간은 어떤 최적화로도 대신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좋은 돌봄은 시간을 아끼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잊지 않는 기술에서 시작된다. 돌봄을 최적화하려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만은 끝까지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가? 주요 참고자료 보건복지부. (2026). 「복지분야 AI 응용제품 신속 상용화 지원(AX-Sprint) 사업」 및 AI 스마트홈 돌봄·스마트 사회복지시설 실증 사업. 통계청. (2025). 「2025 고령자 통계」. 한국개발연구원(KDI). (2026). 「노인돌봄서비스 인력의 전망과 정책방향」. Encyclopaedia Britannica. Florence Nightingale biography and facts. Florence Nightingale. (1860). Notes on Nursing: What It Is, and What It Is Not.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등불을 든 나이팅게일과 디지털 융합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가짜 뉴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거짓은 이제 문장으로만 오지 않는다. 사진으로 오고, 영상으로 오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낸 음성으로 온다. 한 사람의 휴대전화에서 시작된 왜곡이 몇 시간 만에 가족 단톡방을 건너가고, 교실과 직장과 시장 바닥까지 흔든다. 예전의 가짜 뉴스가 사실을 비틀었다면, 오늘의 가짜 뉴스는 진실의 얼굴까지 훔쳐 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는 단순히 정보가 많다는 데 있지 않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멈추어 의심해야 하는지조차 흐려지고 있다는 데 있다. 나는 IT 분야에서 40여년을 보냈다. 컴퓨터가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부터, 알고리즘이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방식까지, 이 안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위험한지 직접 만들어 보고 가르쳐 왔다. 그런 나조차 요즘은 휴대전화 화면 앞에서 한 번 더 멈추게 된다. 지금의 합성 기술은 기술자의 눈에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러니 보통의 시민이라면, 자기 의심이 부족하다고 자책할 일이 아니라 시대 자체가 그만큼 위태로워졌다고 말해야 옳다. 2024년 5월, 부산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60대 어머니가 딸의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 친구 보증을 섰는데… 내가 잡혀 왔어.” 목소리도 말투도 영락없는 딸이었다. 어머니는 곧바로 집 근처 은행으로 달려가 2000만 원을 인출했다. 다행히 창구 직원이 어딘가 이상하다 싶어 112에 신고했고, 경찰 조사 끝에 그 목소리가 AI로 합성된 딥보이스였음이 밝혀졌다. 한 한국경제가 보도한 이 사건을 읽으며 나는 두 번 멈췄다. 한 번은 “엄마, 나…”라는 그 다섯 글자 앞에서 무너졌을 어머니의 마음이 떠올라서, 또 한 번은 그 어머니를 구한 것이 첨단 기술이 아니라 창구 직원의 한 번의 의심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이 사건은 예외가 아니다. 세계경제포럼은 2025년 보고서에서 허위정보와 조작정보를 2년 연속 가장 큰 단기 위험으로 꼽았다. 차가운 숫자처럼 보이지만, 부산의 그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 숫자가 가리키는 현실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무엇이 사실인가?”를 묻는 사회에서, “무엇을 믿어도 되는가?”를 두려워하는 사회로 옮겨가고 있다. 가짜 뉴스의 가장 무서운 힘은 사람을 속이는 데만 있지 않다. 더 무서운 힘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뉴스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AI로 만들어진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실을 보면서도 “저것도 가짜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사실을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존재 자체를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순간은 의견이 갈릴 때가 아니라, 같은 사실 위에 함께 설 수 없을 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다시 진실을 붙들 수 있을까. 나는 화려한 기술이나 빠른 검증 도구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답은 훨씬 오래된 자리에 있다. 출처를 묻는 한 번의 습관, 자극적인 주장 앞에서 잠시 멈춰 교차 확인을 해보는 작은 절차, 그리고 언론과 학교와 공공기관이 책임을 미루지 않고 나눠 지는 자세. 이 평범한 것들이 위기의 시대에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다.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거짓도, 출처를 묻는 한 번의 손가락 앞에서는 힘이 약해진다. 그래서 교육의 역할이 더 커진다. AI와 가짜 뉴스를 말하면, 기존 학교 교육이 낡았으니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이 계실까 봐 미리 말씀드린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읽기와 쓰기, 역사 이해, 논리 훈련 같은 기본 교육이 더 절실해졌다고 본다. 학생이 문장을 정확히 읽지 못하면 조작된 정보를 구별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 아이가 자극적인 영상 제목을 보고 ‘진짜예요?’ 묻는 그 한순간, 그 옆에 선 선생님의 응답이 그 아이의 30년 뒤 시민의식을 결정한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힘, 출처를 확인하는 습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윤리—이런 것들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교실이라는 자리에서 길러진다. 알고리즘이 길러주는 것이 아니다. 유네스코도 생성형 AI를 교육과 연구에 활용할 때 인간 중심의 접근과 연령에 맞는 윤리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을 들이기 전에, 사람이 그 기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부터 함께 보자는 뜻이다. 그 한마디가 무겁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말한다. 가짜 뉴스는 AI 시대 이전에도 늘 있었고, 결국은 사람의 판단력 문제 아니냐고. 일리가 있다. 거짓은 언제나 있었고, 군중심리도 늘 인간 사회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환경은 다르다. AI는 거짓의 생산 비용을 급격히 낮추고, 유포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이며, 외형적 그럴듯함까지 더한다. 한때는 조악해서 의심받던 조작물이, 이제는 너무 정교해서 먼저 믿고 싶어지는 단계로 들어섰다. 이전과 같은 수준의 경계로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AI를 공포의 대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같은 기술이 거짓 영상의 흔적을 추적하고, 사실 확인을 돕고, 방대한 자료를 교차 검토하는 데에도 쓰인다. 내가 현장에서 매일 만나는 AI는 위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검증 도구이기도 하다. 문제는 늘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방향이다. 진실보다 자극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도구를 위험하게 만든다. 거짓은 늘 사람의 불안을 먹고 자라고, 진실은 사람의 인내 위에서 겨우 자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다. 단톡방에 올라온 그럴듯한 영상을 받았을 때, 곧바로 옆 친구에게 전달하지 않고 한 호흡 멈추는 일. 그 멈춤이 가짜 뉴스의 가장 무서운 동력인 “속도”를 끊어낸다. 누군가가 “잠깐, 출처가 어디야?” 한마디만 던져도, 가짜 뉴스의 전파 사슬은 그 자리에서 끊어진다. 부산의 그 어머니를 구한 것도 결국 그런 한 호흡이었다. 첨단 기술이 아니라 한 창구 직원의 의심이, 한 가족의 통장과 한 어머니의 자존심을 지켰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우리가 가장 쉽게 속는 정보는, 모르는 사람이 보낸 정보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꼭 드는 정보다. 내 생각과 맞는 영상일수록,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약점을 드러내는 자료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해야 한다. 같은 편이 보낸 거짓을 가장 빠르게 퍼뜨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진실은 시끄럽지 않다. 그래서 더 천천히 읽어야 하고, 더 조심스럽게 믿어야 한다. 화려한 캠페인이나 새로운 검증 기술이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우리를 구하는 것은 손가락을 잠시 멈추는 평범한 시민들의 작은 절제, 출처를 한 번 더 따라가 보는 수고, 그리고 자기 편의 정보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정직함이다. 진실은 저절로 이기지 않는다. 누군가 손가락을 멈추는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진실은 가까스로 한 번 더 살아남는다. 우리가 지켜줄 때에만, 겨우 살아남는다. 주요 참고자료 한국경제, “영락없는 자녀 목소린데…AI 보이스피싱, AI로 방지”, 2025.4.8 세계경제포럼, Global Risks Report 2025 Reuters Institute, Digital News Report 2025 Ofcom, Understanding misinformation, 2024 UNESCO, Guidance for generative AI in education and research, 2023 (updated 2026)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진짜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세종대왕: 인공지능 시대, 다시 묻는 백성을 위한 기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중장년들을 위한 작은 강의 자리에서 한 분을 만났다. 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셨다는 6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손에 든 휴대폰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교수님, 이거에다 그냥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는 게 정말이에요?” 나는 그분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켰다. “한번 해보세요. 평소에 궁금하셨던 거 아무거나요.” 그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건강보험에서 보내준 종이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거 좀 쉽게 풀어줄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올리자, 화면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어린이: 호기심과 몰입의 시간이 미래의 천재성을 키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젊은 엄마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았다.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종이와 색연필을 꺼내더니,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무언가를 그렸다 지웠다 했다. 곁눈으로 보니 자동차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것을 끝없이 변형시키고 있었다. 엄마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이 깊어졌다. 결국 한마디 했다. “그만 좀 그리고 영어 단어장 좀 펴라. 시험이 며칠 안 남았잖아.” 나는 그 한숨이 익숙했다. 30여년 전, 내 아이를 키울 때 내가 똑같이 쉬었던 한숨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조급해지고, 불안하기 때문에 다그치게 된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만큼 부모의 오래된 본능도 없다. 그러나 칠십이 되어 그 모자(母子)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그 불안이, 아이의 가능성보다 먼저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알파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공동창업자 겸 CEO가 한국에 와서 한 이야기 기사를 읽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게임을 만들 때 부모가 ‘시간 낭비’라며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이 훗날 프로그래밍과 AI 연구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했다. 동시에 그는 AI 시대에도 수학과 과학 같은 기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놀이를 미화한 게 아니라, 기본기 위에서 살아 있는 호기심이 자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또 한참을 읽었다. 30여년 전, 내 아이가 만화책을 펼쳐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느 주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시계를 가리키며 “이제 그만 보고 들어가서 공부하거라” 하고 말했다. 별일 아닌 한마디였지만, 지금 와서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른다. 시계를 가리키는 대신 옆에 앉아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라고 한 번이라도 물었다면 어땠을까. 다 자란 자식 앞에서 차마 꺼내지 못하는 아쉬움 한 가닥이, 그런 식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아이를 앞서가게 하는 힘은 조급함이 아니라 몰입이다. 몰입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과 다르다.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스스로 더 알고 싶어지는 상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파고드는 상태, 거기서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어떤 아이는 책에서 그 순간을 만나고, 어떤 아이는 그림에서 만나며, 어떤 아이는 블록과 만들기 속에서 만난다. 어른 눈에는 산만해 보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시간이, 사실 아이 안에서는 세상의 구조를 더듬어 가는 시간일 수 있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모든 놀이가 천재성을 낳는다는 뜻이 아니다. 읽기, 쓰기, 수학, 과학, 그리고 교실에서 배우는 질서와 습관은 여전히 아이를 받쳐주는 뼈대다.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나도 그 한복판을 통과해 본 사람이다. 다만 뼈대만으로 사람은 서지 않는다. 뼈대 위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호기심이고, 그 호기심을 오래 지탱하는 것이 몰입이다. 요즘 부모들이 가장 갈등하는 지점이 화면이라는 것도 안다. 게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내 말은 모든 화면 시간이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수동적으로 흘려보내는 시간과, 무엇을 만들고 풀어내려고 파고드는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그 차이를 알아보는 눈은 아이 곁에 있는 어른만 가질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천재성은 처음부터 번쩍이는 재능의 이름이 아니다. 남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힘, 금세 싫증 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파고드는 힘, 정답을 빨리 맞히는 것보다 ‘왜 그런가’를 끝까지 붙드는 힘. 그런 것들이 쌓여 비로소 남다름이 된다. AI 시대의 인재는 많이 외운 아이가 아니라, 오래 좋아해본 아이에게서 나온다. AI는 정보를 빠르게 모아준다. 그러나 좋아해서 파고들던 어린 날의 떨림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AI는 답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그러나 스스로 빠져들어 끝내 자기 세계를 만들어보는 기쁨까지 대신 주지는 못한다. 그 떨림과 기쁨이 빠진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AI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설 수 있을까? 그래서 어른의 태도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 다그치기 전에 한 번쯤 옆에 앉아 이렇게 물어보는 일이다. “너, 지금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그 한 마디가 아이의 시간을 통제의 대상에서 관찰의 대상으로 바꾼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아이가 어디에서 눈이 빛나는지, 무엇을 할 때 시간이 멈춘 듯 빠져드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를. 다시 카페로 돌아간다. 엄마의 다그침에 아이는 잠깐 손을 멈췄다. 그러나 영어 단어장을 펴는 대신 그림 속 로봇의 팔 한 짝을 마저 그리고서야 책을 꺼냈다. 그 작은 고집이 나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자기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 분명히 아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 글이 어디선가 그런 어머니, 그런 아버지의 손에 닿는다면 한 가지만 전하고 싶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든, 블록을 쌓든, 무언가에 한 시간을 잊고 빠져 있을 때, 그 시간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답을 미리 쥐여주는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게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더 시킬 것인가보다, 아이가 무엇에 오래 빛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칠십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을, 같은 길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 부모들에게 작은 마음으로 적어 둔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호기심 가득한 창작의 순간 발행정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천재: 인공지능 시대, 천재는 무엇이 다를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강의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가장 많은 메모를 한 사람도, 가장 빨리 답을 찾은 사람도 아니다. 조용히 다가와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다. “교수님, 이 문제는 기술보다 인간 이해의 문제 아닐까요?” 나는 그런 질문 앞에서 자주 멈춘다. 강의자료를 정리하던 손이 멈추고, 노트북을 덮게 된다. 배움의 깊이는 속도가 아니라 질문에서 드러나는구나. 그 깨달음이 나를 멈추게 할 때마다, 인공지능 시대의 천재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도 한때 천재를 ‘많이 아는 사람’으로 상상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계산이 빠르고, 남보다 먼저 정답을 내놓는 사람. 시험지를 먼저 뒤집어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런 아이 말이다. 물론 그런 능력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요약하고, 문장을 만들고, 문제 해결의 초안까지 내놓는 시대가 되면서 질문 자체가 달라졌다. 많이 안다는 것만으로 천재를 설명할 수 있던 시대는 조용히 끝나고 있다. 이제 검색창에 세 단어만 입력하면 웬만한 전문가의 한 시간 강의 분량이 5초 안에 정리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많이 아는 것’은 더 이상 경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천재는 무엇이 다른가? 나는 그 차이가 정답의 양이 아니라 질문의 깊이에 있다고 본다. AI는 이미 정보 검색과 패턴 분석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왜 그 질문이 중요한지, 그 답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무게를 갖는지는 끝내 기계의 몫이 아니다. 기술은 정리할 수 있어도, 의미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같은 AI를 써도 차이는 뚜렷하게 갈린다. 누구는 자료를 빠르게 정리하는 데서 멈추고, 누구는 거기서 전혀 다른 문제를 발견한다. 같은 논문을 읽어도 누구는 요약에 만족하지만, 누구는 “왜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만 보아왔을까”라고 되묻는다. 나는 이 차이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얼마 전 한 특강에서 쉰이 넘은 제조업 대표가 질문을 던졌다. AI로 공정 불량률을 줄이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그분은 엉뚱한 방향에서 물었다. “교수님, 불량률을 줄이면 사람을 줄이라는 말이 꼭 따라오거든요. 그 순서를 바꿀 수는 없을까요?” 강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옆자리 젊은 엔지니어가 고개를 돌려 그 대표를 바라봤다. 아마 처음으로 효율이 아닌 다른 질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 질문에는 수십 년을 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버텨온 사람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날 강의가 끝나고 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도 그 질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분이 계산을 못 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계산 끝에, 계산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나는 그날 이후로 천재의 기준을 좀 더 분명하게 다시 세우게 되었다. 천재란 남보다 빨리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이다. 삶을 오래 통과한 사람들은 질문이 다르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기술이 정말 현장을 바꾸는가, 아니면 겉모습만 바꾸는가?” “사람을 살리는 방향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질문은 교과서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겪고, 실패를 견디고, 현장에서 오래 부대낀 이들의 내면에서 나온다. 어쩌면 주름 하나하나가 질문의 이력서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이야기가 기존 교육의 가치를 낮추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초지식은 여전히 중요하고, 훈련된 사고는 여전히 필요하며, 교육의 역할은 AI 시대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한 가지가 더해졌을 뿐이다. 지식 위에, 그 지식을 어디에 연결할지, 누구를 위해 쓸지를 묻는 힘까지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교육이 지금까지 훌륭한 악기를 만들어왔다면, 이제는 그 악기로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까지 함께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정답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정답 너머의 질문까지 품게 하는 데 있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AI가 점점 정교해지면 질문을 만들고 창의적으로 연결하는 일까지 기계가 더 잘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타당한 지적이다. 실제로 AI는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한 패턴을 찾아내고, 뜻밖의 조합을 제시하며,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는다. 나도 강의를 준비할 때 AI의 제안에 무릎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이건 내가 못 이기겠는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남는 것이 있다. 어떤 질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인가. 무엇을 위해 지식을 쓸 것인가. 어디까지를 가능이라 부르고, 어디서부터를 책임이라 부를 것인가. 이것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선택에는 언제나 그 선택을 감당할 한 사람의 얼굴이 따라붙는다. 아까 그 제조업 대표의 질문이 무거웠던 것도, 계산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책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AI는 불량률 0.01%의 최적해를 찾아줄 수 있다. 그러나 그 0.01%를 위해 누군가의 자리를 없앨 것인지 말 것인지, 그 결정 앞에서 밤잠을 설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천재는 혼자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더 자주 놀라고, 더 깊이 묻고, 더 넓게 연결하되, 그 끝에서 사람을 향해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다. 남보다 먼저 계산하는 사람보다 남이 놓친 인간의 얼굴을 먼저 알아보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사람보다 그 지식이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끝까지 따져 묻는 사람. 나는 그런 이가 앞으로 더 귀해질 것이라 믿는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답을 평가하기 전에, 그 사람이 던진 질문 하나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다. 듣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듣지 않는 데는 꽤 큰 비용이 든다. 그 질문 속에 혹시 천재의 씨앗이 들어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어쩌면 미래의 천재는 가장 빨리 대답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오래 질문한 사람일지 모른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협력의 천재성: 인간 두뇌에서 흘러나온 아이디어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학부모: 우리 아이를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할까, AI를 활용할 줄 알면 되나?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한 기업 교육 현장에서 50대 초반의 여성 수강생 한 분이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왔다. AI 활용법 강의를 듣던 분이었는데, 표정이 좀 어두웠다. “교수님, AI를 알게 되어 넘넘 감사해요. 큰애가 내년에 대학 가는데, 인공지능학과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그 질문 안에 자기 자신의 불안과 자녀에 대한 불안이 함께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분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입시철이면 비슷한 말이 돈다. 의대 보내야지. 로스쿨 가면 그래도 먹고살겠지. 회계사가 안정적이라더라. 그리고 요즘은 여기에 한 줄이 더 붙는다. “앞으로는 AI라는데,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말 속에는 한국 학부모의 오래된 불안이 들어 있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 안정된 직업이 곧 안정된 인생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의사, 판검사, 변호사, 회계사처럼 이름만 들어도 미래가 보장될 것 같은 직업을 향해 자녀를 밀어 넣고 싶은 마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이다. 문제는 그 믿음이 너무 단단해질…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인생이모작: 액티브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만나면 달라지는 놀라운 변화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한 번 크게 넘어져본 사람은 안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도 그 무게를 안다. 40년 이상 IT 업계에서 일했다. 유망 IT기업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랐고, 소프트뱅크로부터 투자도 받았고 기술 트렌드를 읽고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직업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런 내가 몸을 다치면서 한 번 크게 넘어졌다. 쌓아왔던 사업은 휘청거렸고,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집무실과 명함이 사라지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제 세상이 나 없이 돌아가는구나.’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마땅치 않던 그 시절, 나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려놓고 싶었다. 실패는 주머니 사정만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먼저 자신감을 무너뜨린다.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또 시작해도 될까?” 이런 질문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바깥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주저앉는다. 그래서 인생이모작은 돈을 다시 버는 문제이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시 말을 거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그 갈림길 한가운데 인공지능이 서 있다고 느낀다. 많은 사람은 AI를 젊은 세대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로운 기능을 겁 없이 배우는 사람들의 도구라고 여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AI를 진짜 잘 쓰는 사람은 손가락이 빠른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지 알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고, 나온 답을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골라낼 줄 아는 사람이다. 바로 그 점에서 액티브 시니어는 결코 늦은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세대일 수 있다. 내가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그걸 본다. 인공지능을 주제로 강의를 하다 보면, 디지털 기기에 서툰 중장년 수강생이 오히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기능은 몰라도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아는 것이다. 어떤 분은 AI에게 30년 경력을 살린 창업 아이디어를 물었고, 또 어떤 분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버튼을 누른 것이 아니라 삶을 꺼낸 것이다. 젊음이 빠름의 힘이라면, 시니어는 방향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작년에 만난 한 60대 여성이 기억난다.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다가 코로나 때 문을 닫았다. 재기를 꿈꿨지만, 세상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배달앱, SNS 마케팅, 키워드 광고. 이름만 들어도 숨이 막혔다고 했다. 그런데 AI 활용법을 배운 뒤 달라졌다. “내 경험을 살려 작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 한 마디로 대화를 시작했다. AI는 케이터링, 밑반찬 배달, 요리 클래스 같은 선택지를 내놓았고, 그중 하나를 골라 지금은 동네 주민센터에서 요리 강습을 한다. 완벽한 재기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다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게 제일 커요.” 강의나 교육 콘텐츠를 준비하는 액티브 시니어에게도 변화는 크다. 현장 경험은 많은데, 그것을 목차로 정리하고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평생의 경험이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던 것이다. AI는 흩어진 경험을 구조화해주고, 강의안의 흐름을 잡아주고,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내용을 풀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표현의 문턱 앞에서 멈췄던 시니어가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회고록, 자서전, 블로그 글, 강연 원고, 손주에게 남기는 편지까지. 마음속에만 있던 이야기를 AI와 함께 꺼내 적다 보면, 이름 붙이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가 문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 역시 새벽에 혼자 글을 쓰다 막히면 AI에게 묻는다. “이 문장을 더 따뜻하게 바꿔줘.” “논리가 허술한 데가 있으면 짚어줘.”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단지 글 한 편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다시 들여다보는 거울을 얻는다. 사람은 기능 하나를 더 배워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살아날 때 달라진다. 물론 반론은 있다.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잘못된 답도 내놓고, 지나치게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도 있다. 디지털 기기 자체가 두려운 사람에게는 첫걸음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다시 시작하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쉬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 2막을 강요하는 것은 선의의 폭력이다. 그래서 AI를 권하는 일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묻는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가요?”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그 답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도 존중해야 한다. 기술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조력자다. 조력자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가능성까지 접을 이유는 없다. AI는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살아볼 용기를 북돋울 수는 있다. 사업에 다시 도전하려는 사람에게는 생각을 정리해주는 조력자가 되고,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구조화해주는 비서가 되며,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첫 문장을 밀어주는 동반자가 된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칠 때, AI는 작은 디딤돌이 되어줄 수 있다. 복잡한 계약서 조항을 풀어 물어보고, 새로운 사업 구조를 함께 검토하고, 낯선 분야의 기초 지식을 밤늦게 조용히 배울 수 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래도 좋다. 다시 질문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게 전부가 될 수 있다. AI는 젊은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세월은 몸을 느리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가능성까지 늙게 만들지는 못한다. 실패는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어도, 다시 배우려는 마음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인생이모작은 나이가 허락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 시작된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어렵지 않다. AI에게 거창한 미래를 묻지 말고, 딱 하나만 물어보면 된다. “내가 지금 가진 경험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인가?” 인생 2막은 시간이 남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다시 생길 때 시작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잊고 있던 재기의 언어를 다시 돌려주는 것일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액티브 시니어: 인공지능이 열어주는 인생 2막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병원 예약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한 어르신이 끝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세상이 나 없이 먼저 가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표정이 남았다. 화면을 포기하는 순간, 그분의 얼굴에 스친 것은 짜증이 아니었다. 체념이었다.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주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한 발짝 밀려났다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인공지능을 생각할 때마다 기술 이전에 먼저 그 어르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AI가 단지 새롭고 똑똑한 기계가 아니라, 누군가를 다시 세상과 연결해주는 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은 AI를 젊은 세대의 기술이라고 여긴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로운 기능을 겁 없이 배우는 쪽이 유리하다고 본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인공지능은 버튼을 빨리 누르는 사람이 잘 쓰는 기술이 아니다. 무엇이 자기 삶에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 더 깊이 쓰는 도구다. 같은 AI에게 물어도 어떤 사람은 검색엔진 수준의 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삶을 재정비할 실마리를 얻는다. 차이는 기기에서 갈리지 않는다. 질문에서 갈린다. 바로 그 점에서 액티브 시니어는 뒤에 설 이유가 없다. 젊은 세대는 기능에 익숙하다. 그러나 삶의 맥락까지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시니어에게는 시간이 쌓아준 것이 있다. 사람을 겪은 두께, 실패를 견딘 근력, 선택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감각. AI 앞에서 “나한테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앱 순위를 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내가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그걸 본다. 디지털 기기에 서툰 수강생이 AI에게 던지는 질문이 오히려 날카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기능은 몰라도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AI에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기능을 쓴 것이 아니라, 삶을 꺼낸 것이다. 생각해보면 시니어의 일상에 AI가 들어올 자리는 이미 곳곳에 있다. 한 어르신의 하루를 상상해보자. 아침에 오늘 먹는 약의 부작용이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보고,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받은 안내문의 어려운 문장을 쉽게 풀어달라고 하고, 저녁에는 손주 생일에 보낼 문자를 조금 더 따뜻하게 고쳐달라고 한다. 거창한 기술이 아니다. 하루를 조금 덜 막막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기능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나는 이제 늦었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것도 한번 해볼 수 있겠네”로 바뀌는 순간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늘어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살아날 때, 사람은 달라진다. 오래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작은 가게의 홍보문을 직접 만들어보고,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던 것들을 밤늦게 조용히 AI에게 묻는다. 그 순간 기술은 기능을 넘어서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한 발짝 물러서야 할 지점도 있다. AI가 만능인 것처럼 말하는 건 위험하다. 잘못된 정보도 있고, 화면 자체가 두려운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다시 시작하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쉬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 2막”을 강요하는 것은 선의의 폭력이다. 그래서 AI를 권하는 일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묻는 것이다. “무엇이 불편하세요?”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그 답이 “아무것도”라면, 그것도 존중해야 한다. 기술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다. 도구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가능성까지 접을 이유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는 것이다.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 더 분명해지고, 시간을 어디에 쓸지 더 또렷해진다. 인생 2막은 청춘의 반복이 아니다. 더 많이 쥐는 시간이 아니라, 더 분명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AI는 그 분명함을 도울 수 있다. 남은 시간을 더 자기답게 쓰도록 곁에서 거드는 조용한 조력자로. 기계는 정보를 건네지만, 인생 2막의 방향은 끝내 사람이 정한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병원 예약 화면 앞에서 전화를 내려놓던 그 어르신. 만약 그분 옆에 누군가가 앉아서 “제가 같이 해볼까요?”라고 말했다면, 그분은 전화를 다시 들었을까. 나는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더 쉬운 기술이 아니라, 옆에 앉는 한 사람이었을 테니까. AI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먼저가 아니다. “이제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라고 묻는 한마디가 먼저다. 인생 2막은 시간이 남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