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가짜 뉴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가짜 뉴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거짓은 이제 문장으로만 오지 않는다. 사진으로 오고, 영상으로 오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낸 음성으로 온다. 한 사람의 휴대전화에서 시작된 왜곡이 몇 시간 만에 가족 단톡방을 건너가고, 교실과 직장과 시장 바닥까지 흔든다. 예전의 가짜 뉴스가 사실을 비틀었다면, 오늘의 가짜 뉴스는 진실의 얼굴까지 훔쳐 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는 단순히 정보가 많다는 데 있지 않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멈추어 의심해야 하는지조차 흐려지고 있다는 데 있다. 나는 IT 분야에서 40여년을 보냈다. 컴퓨터가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부터, 알고리즘이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방식까지, 이 안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위험한지 직접 만들어 보고 가르쳐 왔다. 그런 나조차 요즘은 휴대전화 화면 앞에서 한 번 더 멈추게 된다. 지금의 합성 기술은 기술자의 눈에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러니 보통의 시민이라면, 자기 의심이 부족하다고 자책할 일이 아니라 시대 자체가 그만큼 위태로워졌다고 말해야 옳다. 2024년 5월, 부산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60대 어머니가 딸의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 친구 보증을 섰는데… 내가 잡혀 왔어.” 목소리도 말투도 영락없는 딸이었다. 어머니는 곧바로 집 근처 은행으로 달려가 2000만 원을 인출했다. 다행히 창구 직원이 어딘가 이상하다 싶어 112에 신고했고, 경찰 조사 끝에 그 목소리가 AI로 합성된 딥보이스였음이 밝혀졌다. 한 한국경제가 보도한 이 사건을 읽으며 나는 두 번 멈췄다. 한 번은 “엄마, 나…”라는 그 다섯 글자 앞에서 무너졌을 어머니의 마음이 떠올라서, 또 한 번은 그 어머니를 구한 것이 첨단 기술이 아니라 창구 직원의 한 번의 의심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이 사건은 예외가 아니다. 세계경제포럼은 2025년 보고서에서 허위정보와 조작정보를 2년 연속 가장 큰 단기 위험으로 꼽았다. 차가운 숫자처럼 보이지만, 부산의 그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 숫자가 가리키는 현실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무엇이 사실인가?”를 묻는 사회에서, “무엇을 믿어도 되는가?”를 두려워하는 사회로 옮겨가고 있다. 가짜 뉴스의 가장 무서운 힘은 사람을 속이는 데만 있지 않다. 더 무서운 힘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뉴스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AI로 만들어진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실을 보면서도 “저것도 가짜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사실을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존재 자체를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순간은 의견이 갈릴 때가 아니라, 같은 사실 위에 함께 설 수 없을 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다시 진실을 붙들 수 있을까. 나는 화려한 기술이나 빠른 검증 도구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답은 훨씬 오래된 자리에 있다. 출처를 묻는 한 번의 습관, 자극적인 주장 앞에서 잠시 멈춰 교차 확인을 해보는 작은 절차, 그리고 언론과 학교와 공공기관이 책임을 미루지 않고 나눠 지는 자세. 이 평범한 것들이 위기의 시대에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다.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거짓도, 출처를 묻는 한 번의 손가락 앞에서는 힘이 약해진다. 그래서 교육의 역할이 더 커진다. AI와 가짜 뉴스를 말하면, 기존 학교 교육이 낡았으니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이 계실까 봐 미리 말씀드린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읽기와 쓰기, 역사 이해, 논리 훈련 같은 기본 교육이 더 절실해졌다고 본다. 학생이 문장을 정확히 읽지 못하면 조작된 정보를 구별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 아이가 자극적인 영상 제목을 보고 ‘진짜예요?’ 묻는 그 한순간, 그 옆에 선 선생님의 응답이 그 아이의 30년 뒤 시민의식을 결정한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힘, 출처를 확인하는 습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윤리—이런 것들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교실이라는 자리에서 길러진다. 알고리즘이 길러주는 것이 아니다. 유네스코도 생성형 AI를 교육과 연구에 활용할 때 인간 중심의 접근과 연령에 맞는 윤리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을 들이기 전에, 사람이 그 기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부터 함께 보자는 뜻이다. 그 한마디가 무겁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말한다. 가짜 뉴스는 AI 시대 이전에도 늘 있었고, 결국은 사람의 판단력 문제 아니냐고. 일리가 있다. 거짓은 언제나 있었고, 군중심리도 늘 인간 사회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환경은 다르다. AI는 거짓의 생산 비용을 급격히 낮추고, 유포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이며, 외형적 그럴듯함까지 더한다. 한때는 조악해서 의심받던 조작물이, 이제는 너무 정교해서 먼저 믿고 싶어지는 단계로 들어섰다. 이전과 같은 수준의 경계로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AI를 공포의 대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같은 기술이 거짓 영상의 흔적을 추적하고, 사실 확인을 돕고, 방대한 자료를 교차 검토하는 데에도 쓰인다. 내가 현장에서 매일 만나는 AI는 위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검증 도구이기도 하다. 문제는 늘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방향이다. 진실보다 자극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도구를 위험하게 만든다. 거짓은 늘 사람의 불안을 먹고 자라고, 진실은 사람의 인내 위에서 겨우 자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다. 단톡방에 올라온 그럴듯한 영상을 받았을 때, 곧바로 옆 친구에게 전달하지 않고 한 호흡 멈추는 일. 그 멈춤이 가짜 뉴스의 가장 무서운 동력인 “속도”를 끊어낸다. 누군가가 “잠깐, 출처가 어디야?” 한마디만 던져도, 가짜 뉴스의 전파 사슬은 그 자리에서 끊어진다. 부산의 그 어머니를 구한 것도 결국 그런 한 호흡이었다. 첨단 기술이 아니라 한 창구 직원의 의심이, 한 가족의 통장과 한 어머니의 자존심을 지켰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우리가 가장 쉽게 속는 정보는, 모르는 사람이 보낸 정보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꼭 드는 정보다. 내 생각과 맞는 영상일수록,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약점을 드러내는 자료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해야 한다. 같은 편이 보낸 거짓을 가장 빠르게 퍼뜨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진실은 시끄럽지 않다. 그래서 더 천천히 읽어야 하고, 더 조심스럽게 믿어야 한다. 화려한 캠페인이나 새로운 검증 기술이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우리를 구하는 것은 손가락을 잠시 멈추는 평범한 시민들의 작은 절제, 출처를 한 번 더 따라가 보는 수고, 그리고 자기 편의 정보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정직함이다. 진실은 저절로 이기지 않는다. 누군가 손가락을 멈추는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진실은 가까스로 한 번 더 살아남는다. 우리가 지켜줄 때에만, 겨우 살아남는다. 주요 참고자료 한국경제, “영락없는 자녀 목소린데…AI 보이스피싱, AI로 방지”, 2025.4.8 세계경제포럼, Global Risks Report 2025 Reuters Institute, Digital News Report 2025 Ofcom, Understanding misinformation, 2024 UNESCO, Guidance for generative AI in education and research, 2023 (updated 2026)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진짜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세종대왕: 인공지능 시대, 다시 묻는 백성을 위한 기술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세종대왕: 인공지능 시대, 다시 묻는 백성을 위한 기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중장년들을 위한 작은 강의 자리에서 한 분을 만났다. 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셨다는 6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손에 든 휴대폰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교수님, 이거에다 그냥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는 게 정말이에요?” 나는 그분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켰다. “한번 해보세요. 평소에 궁금하셨던 거 아무거나요.” 그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건강보험에서 보내준 종이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거 좀 쉽게 풀어줄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올리자, 화면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어린이: 호기심과 몰입의 시간이 미래의 천재성을 키운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어린이: 호기심과 몰입의 시간이 미래의 천재성을 키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젊은 엄마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았다.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종이와 색연필을 꺼내더니,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무언가를 그렸다 지웠다 했다. 곁눈으로 보니 자동차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것을 끝없이 변형시키고 있었다. 엄마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이 깊어졌다. 결국 한마디 했다. “그만 좀 그리고 영어 단어장 좀 펴라. 시험이 며칠 안 남았잖아.” 나는 그 한숨이 익숙했다. 30여년 전, 내 아이를 키울 때 내가 똑같이 쉬었던 한숨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조급해지고, 불안하기 때문에 다그치게 된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만큼 부모의 오래된 본능도 없다. 그러나 칠십이 되어 그 모자(母子)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그 불안이, 아이의 가능성보다 먼저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알파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공동창업자 겸 CEO가 한국에 와서 한 이야기 기사를 읽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게임을 만들 때 부모가 ‘시간 낭비’라며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이 훗날 프로그래밍과 AI 연구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했다. 동시에 그는 AI 시대에도 수학과 과학 같은 기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놀이를 미화한 게 아니라, 기본기 위에서 살아 있는 호기심이 자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또 한참을 읽었다. 30여년 전, 내 아이가 만화책을 펼쳐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느 주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시계를 가리키며 “이제 그만 보고 들어가서 공부하거라” 하고 말했다. 별일 아닌 한마디였지만, 지금 와서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른다. 시계를 가리키는 대신 옆에 앉아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라고 한 번이라도 물었다면 어땠을까. 다 자란 자식 앞에서 차마 꺼내지 못하는 아쉬움 한 가닥이, 그런 식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아이를 앞서가게 하는 힘은 조급함이 아니라 몰입이다. 몰입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과 다르다.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스스로 더 알고 싶어지는 상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파고드는 상태, 거기서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어떤 아이는 책에서 그 순간을 만나고, 어떤 아이는 그림에서 만나며, 어떤 아이는 블록과 만들기 속에서 만난다. 어른 눈에는 산만해 보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시간이, 사실 아이 안에서는 세상의 구조를 더듬어 가는 시간일 수 있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모든 놀이가 천재성을 낳는다는 뜻이 아니다. 읽기, 쓰기, 수학, 과학, 그리고 교실에서 배우는 질서와 습관은 여전히 아이를 받쳐주는 뼈대다.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나도 그 한복판을 통과해 본 사람이다. 다만 뼈대만으로 사람은 서지 않는다. 뼈대 위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호기심이고, 그 호기심을 오래 지탱하는 것이 몰입이다. 요즘 부모들이 가장 갈등하는 지점이 화면이라는 것도 안다. 게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내 말은 모든 화면 시간이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수동적으로 흘려보내는 시간과, 무엇을 만들고 풀어내려고 파고드는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그 차이를 알아보는 눈은 아이 곁에 있는 어른만 가질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천재성은 처음부터 번쩍이는 재능의 이름이 아니다. 남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힘, 금세 싫증 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파고드는 힘, 정답을 빨리 맞히는 것보다 ‘왜 그런가’를 끝까지 붙드는 힘. 그런 것들이 쌓여 비로소 남다름이 된다. AI 시대의 인재는 많이 외운 아이가 아니라, 오래 좋아해본 아이에게서 나온다. AI는 정보를 빠르게 모아준다. 그러나 좋아해서 파고들던 어린 날의 떨림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AI는 답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그러나 스스로 빠져들어 끝내 자기 세계를 만들어보는 기쁨까지 대신 주지는 못한다. 그 떨림과 기쁨이 빠진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AI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설 수 있을까? 그래서 어른의 태도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 다그치기 전에 한 번쯤 옆에 앉아 이렇게 물어보는 일이다. “너, 지금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그 한 마디가 아이의 시간을 통제의 대상에서 관찰의 대상으로 바꾼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아이가 어디에서 눈이 빛나는지, 무엇을 할 때 시간이 멈춘 듯 빠져드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를. 다시 카페로 돌아간다. 엄마의 다그침에 아이는 잠깐 손을 멈췄다. 그러나 영어 단어장을 펴는 대신 그림 속 로봇의 팔 한 짝을 마저 그리고서야 책을 꺼냈다. 그 작은 고집이 나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자기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 분명히 아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 글이 어디선가 그런 어머니, 그런 아버지의 손에 닿는다면 한 가지만 전하고 싶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든, 블록을 쌓든, 무언가에 한 시간을 잊고 빠져 있을 때, 그 시간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답을 미리 쥐여주는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게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더 시킬 것인가보다, 아이가 무엇에 오래 빛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칠십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을, 같은 길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 부모들에게 작은 마음으로 적어 둔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호기심 가득한 창작의 순간 발행정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천재: 인공지능 시대, 천재는 무엇이 다를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천재: 인공지능 시대, 천재는 무엇이 다를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강의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가장 많은 메모를 한 사람도, 가장 빨리 답을 찾은 사람도 아니다. 조용히 다가와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다. “교수님, 이 문제는 기술보다 인간 이해의 문제 아닐까요?” 나는 그런 질문 앞에서 자주 멈춘다. 강의자료를 정리하던 손이 멈추고, 노트북을 덮게 된다. 배움의 깊이는 속도가 아니라 질문에서 드러나는구나. 그 깨달음이 나를 멈추게 할 때마다, 인공지능 시대의 천재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도 한때 천재를 ‘많이 아는 사람’으로 상상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계산이 빠르고, 남보다 먼저 정답을 내놓는 사람. 시험지를 먼저 뒤집어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런 아이 말이다. 물론 그런 능력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요약하고, 문장을 만들고, 문제 해결의 초안까지 내놓는 시대가 되면서 질문 자체가 달라졌다. 많이 안다는 것만으로 천재를 설명할 수 있던 시대는 조용히 끝나고 있다. 이제 검색창에 세 단어만 입력하면 웬만한 전문가의 한 시간 강의 분량이 5초 안에 정리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많이 아는 것’은 더 이상 경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천재는 무엇이 다른가? 나는 그 차이가 정답의 양이 아니라 질문의 깊이에 있다고 본다.  AI는 이미 정보 검색과 패턴 분석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왜 그 질문이 중요한지, 그 답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무게를 갖는지는 끝내 기계의 몫이 아니다. 기술은 정리할 수 있어도, 의미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같은 AI를 써도 차이는 뚜렷하게 갈린다. 누구는 자료를 빠르게 정리하는 데서 멈추고, 누구는 거기서 전혀 다른 문제를 발견한다. 같은 논문을 읽어도 누구는 요약에 만족하지만, 누구는 “왜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만 보아왔을까”라고 되묻는다. 나는 이 차이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얼마 전 한 특강에서 쉰이 넘은 제조업 대표가 질문을 던졌다. AI로 공정 불량률을 줄이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그분은 엉뚱한 방향에서 물었다. “교수님, 불량률을 줄이면 사람을 줄이라는 말이 꼭 따라오거든요. 그 순서를 바꿀 수는 없을까요?” 강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옆자리 젊은 엔지니어가 고개를 돌려 그 대표를 바라봤다. 아마 처음으로 효율이 아닌 다른 질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 질문에는 수십 년을 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버텨온 사람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날 강의가 끝나고 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도 그 질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분이 계산을 못 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계산 끝에, 계산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나는 그날 이후로 천재의 기준을 좀 더 분명하게 다시 세우게 되었다. 천재란 남보다 빨리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이다. 삶을 오래 통과한 사람들은 질문이 다르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기술이 정말 현장을 바꾸는가, 아니면 겉모습만 바꾸는가?” “사람을 살리는 방향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질문은 교과서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겪고, 실패를 견디고, 현장에서 오래 부대낀 이들의 내면에서 나온다. 어쩌면 주름 하나하나가 질문의 이력서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이야기가 기존 교육의 가치를 낮추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초지식은 여전히 중요하고, 훈련된 사고는 여전히 필요하며, 교육의 역할은 AI 시대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한 가지가 더해졌을 뿐이다. 지식 위에, 그 지식을 어디에 연결할지, 누구를 위해 쓸지를 묻는 힘까지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교육이 지금까지 훌륭한 악기를 만들어왔다면, 이제는 그 악기로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까지 함께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정답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정답 너머의 질문까지 품게 하는 데 있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AI가 점점 정교해지면 질문을 만들고 창의적으로 연결하는 일까지 기계가 더 잘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타당한 지적이다. 실제로 AI는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한 패턴을 찾아내고, 뜻밖의 조합을 제시하며,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는다. 나도 강의를 준비할 때 AI의 제안에 무릎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이건 내가 못 이기겠는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남는 것이 있다. 어떤 질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인가. 무엇을 위해 지식을 쓸 것인가. 어디까지를 가능이라 부르고, 어디서부터를 책임이라 부를 것인가. 이것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선택에는 언제나 그 선택을 감당할 한 사람의 얼굴이 따라붙는다. 아까 그 제조업 대표의 질문이 무거웠던 것도, 계산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책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AI는 불량률 0.01%의 최적해를 찾아줄 수 있다. 그러나 그 0.01%를 위해 누군가의 자리를 없앨 것인지 말 것인지, 그 결정 앞에서 밤잠을 설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천재는 혼자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더 자주 놀라고, 더 깊이 묻고, 더 넓게 연결하되, 그 끝에서 사람을 향해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다. 남보다 먼저 계산하는 사람보다 남이 놓친 인간의 얼굴을 먼저 알아보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사람보다 그 지식이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끝까지 따져 묻는 사람. 나는 그런 이가 앞으로 더 귀해질 것이라 믿는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답을 평가하기 전에, 그 사람이 던진 질문 하나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다. 듣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듣지 않는 데는 꽤 큰 비용이 든다. 그 질문 속에 혹시 천재의 씨앗이 들어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어쩌면 미래의 천재는 가장 빨리 대답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오래 질문한 사람일지 모른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협력의 천재성: 인간 두뇌에서 흘러나온 아이디어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학부모: 우리 아이를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할까, AI를 활용할 줄 알면 되나?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학부모: 우리 아이를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할까, AI를 활용할 줄 알면 되나?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한 기업 교육 현장에서 50대 초반의 여성 수강생 한 분이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왔다. AI 활용법 강의를 듣던 분이었는데, 표정이 좀 어두웠다. “교수님, AI를 알게 되어 넘넘 감사해요. 큰애가 내년에 대학 가는데, 인공지능학과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그 질문 안에 자기 자신의 불안과 자녀에 대한 불안이 함께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분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입시철이면 비슷한 말이 돈다. 의대 보내야지. 로스쿨 가면 그래도 먹고살겠지. 회계사가 안정적이라더라. 그리고 요즘은 여기에 한 줄이 더 붙는다. “앞으로는 AI라는데,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말 속에는 한국 학부모의 오래된 불안이 들어 있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 안정된 직업이 곧 안정된 인생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의사, 판검사, 변호사, 회계사처럼 이름만 들어도 미래가 보장될 것 같은 직업을 향해 자녀를 밀어 넣고 싶은 마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이다. 문제는 그 믿음이 너무 단단해질…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인생이모작: 액티브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만나면 달라지는 놀라운 변화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인생이모작: 액티브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만나면 달라지는 놀라운 변화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한 번 크게 넘어져본 사람은 안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도 그 무게를 안다. 40년 이상 IT 업계에서 일했다. 유망 IT기업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랐고, 소프트뱅크로부터 투자도 받았고 기술 트렌드를 읽고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직업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런 내가 몸을 다치면서 한 번 크게 넘어졌다. 쌓아왔던 사업은 휘청거렸고,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집무실과 명함이 사라지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제 세상이 나 없이 돌아가는구나.’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마땅치 않던 그 시절, 나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려놓고 싶었다. 실패는 주머니 사정만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먼저 자신감을 무너뜨린다.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또 시작해도 될까?” 이런 질문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바깥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주저앉는다. 그래서 인생이모작은 돈을 다시 버는 문제이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시 말을 거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그 갈림길 한가운데 인공지능이 서 있다고 느낀다. 많은 사람은 AI를 젊은 세대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로운 기능을 겁 없이 배우는 사람들의 도구라고 여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AI를 진짜 잘 쓰는 사람은 손가락이 빠른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지 알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고, 나온 답을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골라낼 줄 아는 사람이다. 바로 그 점에서 액티브 시니어는 결코 늦은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세대일 수 있다. 내가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그걸 본다. 인공지능을 주제로 강의를 하다 보면, 디지털 기기에 서툰 중장년 수강생이 오히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기능은 몰라도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아는 것이다. 어떤 분은 AI에게 30년 경력을 살린 창업 아이디어를 물었고, 또 어떤 분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버튼을 누른 것이 아니라 삶을 꺼낸 것이다. 젊음이 빠름의 힘이라면, 시니어는 방향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작년에 만난 한 60대 여성이 기억난다.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다가 코로나 때 문을 닫았다. 재기를 꿈꿨지만, 세상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배달앱, SNS 마케팅, 키워드 광고. 이름만 들어도 숨이 막혔다고 했다. 그런데 AI 활용법을 배운 뒤 달라졌다. “내 경험을 살려 작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 한 마디로 대화를 시작했다. AI는 케이터링, 밑반찬 배달, 요리 클래스 같은 선택지를 내놓았고, 그중 하나를 골라 지금은 동네 주민센터에서 요리 강습을 한다. 완벽한 재기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다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게 제일 커요.” 강의나 교육 콘텐츠를 준비하는 액티브 시니어에게도 변화는 크다. 현장 경험은 많은데, 그것을 목차로 정리하고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평생의 경험이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던 것이다. AI는 흩어진 경험을 구조화해주고, 강의안의 흐름을 잡아주고,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내용을 풀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표현의 문턱 앞에서 멈췄던 시니어가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회고록, 자서전, 블로그 글, 강연 원고, 손주에게 남기는 편지까지. 마음속에만 있던 이야기를 AI와 함께 꺼내 적다 보면, 이름 붙이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가 문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 역시 새벽에 혼자 글을 쓰다 막히면 AI에게 묻는다. “이 문장을 더 따뜻하게 바꿔줘.” “논리가 허술한 데가 있으면 짚어줘.”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단지 글 한 편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다시 들여다보는 거울을 얻는다. 사람은 기능 하나를 더 배워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살아날 때 달라진다. 물론 반론은 있다.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잘못된 답도 내놓고, 지나치게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도 있다. 디지털 기기 자체가 두려운 사람에게는 첫걸음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다시 시작하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쉬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 2막을 강요하는 것은 선의의 폭력이다. 그래서 AI를 권하는 일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묻는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가요?”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그 답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도 존중해야 한다. 기술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조력자다. 조력자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가능성까지 접을 이유는 없다. AI는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살아볼 용기를 북돋울 수는 있다. 사업에 다시 도전하려는 사람에게는 생각을 정리해주는 조력자가 되고,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구조화해주는 비서가 되며,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첫 문장을 밀어주는 동반자가 된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칠 때, AI는 작은 디딤돌이 되어줄 수 있다. 복잡한 계약서 조항을 풀어 물어보고, 새로운 사업 구조를 함께 검토하고, 낯선 분야의 기초 지식을 밤늦게 조용히 배울 수 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래도 좋다. 다시 질문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게 전부가 될 수 있다. AI는 젊은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세월은 몸을 느리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가능성까지 늙게 만들지는 못한다. 실패는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어도, 다시 배우려는 마음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인생이모작은 나이가 허락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 시작된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어렵지 않다. AI에게 거창한 미래를 묻지 말고, 딱 하나만 물어보면 된다. “내가 지금 가진 경험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인가?” 인생 2막은 시간이 남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다시 생길 때 시작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잊고 있던 재기의 언어를 다시 돌려주는 것일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액티브 시니어: 인공지능이 열어주는 인생 2막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액티브 시니어: 인공지능이 열어주는 인생 2막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병원 예약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한 어르신이 끝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세상이 나 없이 먼저 가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표정이 남았다. 화면을 포기하는 순간, 그분의 얼굴에 스친 것은 짜증이 아니었다. 체념이었다.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주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한 발짝 밀려났다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인공지능을 생각할 때마다 기술 이전에 먼저 그 어르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AI가 단지 새롭고 똑똑한 기계가 아니라, 누군가를 다시 세상과 연결해주는 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은 AI를 젊은 세대의 기술이라고 여긴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로운 기능을 겁 없이 배우는 쪽이 유리하다고 본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인공지능은 버튼을 빨리 누르는 사람이 잘 쓰는 기술이 아니다. 무엇이 자기 삶에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 더 깊이 쓰는 도구다.  같은 AI에게 물어도 어떤 사람은 검색엔진 수준의 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삶을 재정비할 실마리를 얻는다. 차이는 기기에서 갈리지 않는다. 질문에서 갈린다. 바로 그 점에서 액티브 시니어는 뒤에 설 이유가 없다. 젊은 세대는 기능에 익숙하다. 그러나 삶의 맥락까지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시니어에게는 시간이 쌓아준 것이 있다. 사람을 겪은 두께, 실패를 견딘 근력, 선택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감각. AI 앞에서 “나한테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앱 순위를 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내가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그걸 본다. 디지털 기기에 서툰 수강생이 AI에게 던지는 질문이 오히려 날카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기능은 몰라도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AI에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기능을 쓴 것이 아니라, 삶을 꺼낸 것이다. 생각해보면 시니어의 일상에 AI가 들어올 자리는 이미 곳곳에 있다. 한 어르신의 하루를 상상해보자. 아침에 오늘 먹는 약의 부작용이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보고,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받은 안내문의 어려운 문장을 쉽게 풀어달라고 하고, 저녁에는 손주 생일에 보낼 문자를 조금 더 따뜻하게 고쳐달라고 한다. 거창한 기술이 아니다. 하루를 조금 덜 막막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기능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나는 이제 늦었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것도 한번 해볼 수 있겠네”로 바뀌는 순간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늘어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살아날 때, 사람은 달라진다. 오래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작은 가게의 홍보문을 직접 만들어보고,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던 것들을 밤늦게 조용히 AI에게 묻는다. 그 순간 기술은 기능을 넘어서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한 발짝 물러서야 할 지점도 있다. AI가 만능인 것처럼 말하는 건 위험하다. 잘못된 정보도 있고, 화면 자체가 두려운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다시 시작하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쉬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 2막”을 강요하는 것은 선의의 폭력이다.  그래서 AI를 권하는 일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묻는 것이다. “무엇이 불편하세요?”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그 답이 “아무것도”라면, 그것도 존중해야 한다. 기술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다. 도구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가능성까지 접을 이유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는 것이다.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 더 분명해지고, 시간을 어디에 쓸지 더 또렷해진다. 인생 2막은 청춘의 반복이 아니다. 더 많이 쥐는 시간이 아니라, 더 분명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AI는 그 분명함을 도울 수 있다. 남은 시간을 더 자기답게 쓰도록 곁에서 거드는 조용한 조력자로. 기계는 정보를 건네지만, 인생 2막의 방향은 끝내 사람이 정한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병원 예약 화면 앞에서 전화를 내려놓던 그 어르신. 만약 그분 옆에 누군가가 앉아서 “제가 같이 해볼까요?”라고 말했다면, 그분은 전화를 다시 들었을까. 나는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더 쉬운 기술이 아니라, 옆에 앉는 한 사람이었을 테니까. AI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먼저가 아니다. “이제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라고 묻는 한마디가 먼저다. 인생 2막은 시간이 남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 시작된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노인: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쓸 수도 있는 이유.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노인: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쓸 수도 있는 이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지하철 5호선, 오후 세 시쯤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화면을 넘기지 않았다. 한 화면을 오래 붙들고,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읽고 계셨다. 옆자리 청년은 릴스를 쉴 새 없이 넘기고 있었다. 누가 더 유능해 보였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청년 쪽을 가리킬 것이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 기능을 겁 없이 다루니까. 나도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르게 본다. AI는 손가락이 빠른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 질문이 깊은 사람의 도구다. 소크라테스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 더 깊이 묻는 사람을 지혜에 가깝다고 보았다. 이천사백 년 전 말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있다. 인공지능이 정답을 외운 기계가 아니라, 질문에 반응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ChatGPT든 클로드든, 같은 AI에게 물어도 어떤 사람은 검색엔진 수준의 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삶을 바꿀 통찰을 받는다. 차이는 기기가 아니라 질문에서 갈린다. 바로 여기서 나는 노인의 가능성을 본다. 노인은 기술에 늦다. 이건 사실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줄이 밀리고, 무인주차장에서 당황하고, 앱 하나 깔자면 자녀에게 전화를 건다. 이 고충을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다. 디지털 소외는 실재하는 고통이고,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다. 그러나 기술에 늦는 것과 기술을 못 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노인에게는 젊은이가 아직 갖지 못한 것이 있다. 사람을 오래 겪은 시간, 실패를 견딘 근력, 선택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감각.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구별하는 힘은 매뉴얼로 익히는 게 아니다. 살아내야 생긴다. AI 앞에서 “나한테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앱 스토어 순위를 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나이는 손을 늦출 수 있어도, 질문을 늦추지는 못한다. 생각해보면 AI가 노인의 일상에 들어올 자리는 이미 넘친다. 병원 예약 전에 증상을 정리해주고, 공공문서의 난해한 문장을 풀어주고, 자녀에게 보낼 문자를 조금 더 따뜻하게 다듬어준다. 혼자 사는 밤에 말벗이 되고,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던 것들에 답해준다. 이것은 유행이 아니다. 삶의 반경을 다시 넓혀주는 일이다. 그래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노인이 AI를 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왜 노인일수록 AI를 더 가까이해야 하느냐”로.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빨라지고, 제도는 복잡해지고, 설명서는 불친절해진다. “이제 나는 시대에서 멀어졌다”는 체념이 조용히 스며든다. AI는 그 체념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도구다. 정보에 다시 닿게 하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늘려주고, 세상과의 연결을 되살린다. 인공지능은 젊은이의 장난감이 아니라, 노년의 삶을 다시 넓혀주는 지팡이가 될 수 있다. 물론 불편한 진실도 있다. AI를 권하는 일 자체가 노인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 화면은 낯설고, 용어는 어렵고, 배우는 과정은 생각보다 두렵다. 그런데 기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건, “그것도 모르세요?”라는 한마디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짜증이 나서. 돌이켜보면 기술을 가르친 게 아니라 자존심을 깎은 것이었다. 기계와 기술은 시험지가 아니라 지팡이여야 한다.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기대어 걸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노인에게 AI를 강요하는 일이 아니다. 노인이 자기 속도로, 자기 필요에서 출발해 익히도록 돕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AI 교육의 첫 질문은 “이 버튼을 누르세요”가 아니라 “무엇이 가장 불편하세요?”여야 한다. 미국의 투자자이자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이었던 찰리 먼거는 “지혜는 단순한 정보 축적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의 축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AI 시대의 경쟁력도 다르지 않다. 정보는 기계가 준다. 그러나 그 정보로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를 정하는 것은 끝내 사람의 몫이다. 젊은 세대가 AI의 기능을 먼저 익힌다면, 노년 세대는 AI의 의미를 더 깊이 물을 수 있다. 기계는 정보를 준다. 그러나 삶의 방향은 끝내 사람이 정한다. 그렇다면 노인을 ‘디지털 약자’로만 부르는 말은 이제 고쳐야 한다. 노인은 배워야 하는 사람인 동시에, 더 좋은 질문으로 기술이 가야 할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세대다. 어쩌면 미래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빠른 손가락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어렵지 않다. 주변 어르신에게 “이거 어려우시죠?”라고 말하는 대신, “무엇이 가장 필요하세요?”라고 먼저 묻는 것이다. 미래는 젊은 손끝에서만 열리지 않는다. 삶을 오래 살아낸 사람의 질문 속에서도 열린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아날로그 지혜와 디지털 도구의 아름다운 공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개그맨: 기계는 타이밍을 모른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개그맨: 기계는 타이밍을 모른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몇 해 전 친한 선배의 장례식장에서 밤을 샜다. 새벽녘, 빈소 밖 흡연실에서 고인의 대학 동기 한 분이 담배를 물며 말했다. “그 녀석, 노래방 가면 꼭 그리운 금강산부터 불렀어. 음치인 건 죽어도 모르고.” 아무도 웃을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거기…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시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가, 빼앗기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시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가, 빼앗기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AI로 보고서 초안을 10분 만에 끝냈다. 예전 같으면 반나절은 걸렸을 일이다. 남은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밀린 메일을 처리하고, 다른 업무를 당겨서 시작하고, 또 다른 업무 자료를 준비했다. 점심도 그냥 대충 때웠다. 근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시간을 벌었는데, 하루는 전보다 더 빡빡했다. 벌어들인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매일을 하나의 온전한 삶처럼 살라”고 권했다. 2천 년 전 말이 오늘따라 아프게 다가온 건, 기술이 시간을 아껴준다는 약속과 실제 삶의 체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말 시간을 절약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정교한 방식으로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건 아닌가? AI는 분명 놀라운 도구다. 몇 시간 걸리던 문서 정리가 몇 분으로 줄고, 긴 보고서는 순식간에 요약되며, 번역과 검색의 속도는 인간의 손을 가볍게 만든다. 반복 노동은 줄고 생산성은 높아진다. 기술의 약속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더 많은 시간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AI가 인류에게 ‘시간의 선물’을 안겨줄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술은 빨라졌는데 삶은 왜 더 분주해졌을까? 답장은 더 빨라져야 하고, 판단은 더 즉각적이어야 하며, 성과는 더 자주 증명되어야 한다. 절약된 시간은 휴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개 더 많은 업무와 더 촘촘한 요구로 다시 채워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미 그런 풍경이 일상이 되어 있다. 메일 회신 속도가 빨라진 만큼 상대방의 기대치도 올라갔고, 보고서를 빨리 쓸 수 있게 된 만큼 보고서의 양도 늘어났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밀어 넣는 기술을 익힌 것인지 모른다. 여기서 시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같은 한 시간이라도 병실의 한 시간과 여행지의 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기다리는 한 시간은 길고, 사랑하는 사람 곁의 한 시간은 짧다. 누군가의 임종을 지키는 한 시간은 시계가 멈춘 것처럼 무겁고, 오랜 친구와 나누는 한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가볍다. 시간은 시계 위에서 균일하게 흘러가지만, 인간은 그것을 의미로 살아낸다. 바로 그 지점에서 AI와 인간의 길이 갈라진다. AI는 문장을 줄일 수 있지만 상처의 무게를 줄이지는 못한다. 정보를 정리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실패를 통과하며 얻는 성찰까지 대신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나 역시 AI에게 글의 초안을 맡길 수 있지만, 몇 문장에 한참을 붙들려 있었던 밤의 고투까지 위임할 수는 없었다. 슬픔을 견디는 시간, 관계가 익어가는 시간,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은 AI가 건너뛸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대개 느리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고, 사랑은 효율로 설명되지 않으며, 지혜는 검색창에 도착하지 않는다. 오랜 대화, 오래된 침묵, 한 사람을 끝까지 기다려주는 마음. 그런 비효율적인 시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깊어진다. 문명은 시간을 압축했지만, 영혼은 압축된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은 “얼마나 빨리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절약한 시간을 나는 어디에 쓸 것인가.”이다. 만약 AI가 비워준 시간이 더 많은 경쟁, 더 많은 피로, 더 많은 불안으로만 채워진다면 기술은 우리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더 정교하게 길들인 셈이다. 반대로 그 시간이 돌봄과 관계, 성찰로 이어진다면, 비로소 기술은 인간 편에 선 것이 된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중요한 장면들은 대부분 비효율적이다. 아이의 첫걸음을 기다리는 시간, 아픈 사람 곁을 밤새 지키는 시간, 책을 덮고 한참 생각에 잠기는 시간,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망설이는 긴 침묵. 이런 시간은 성과표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품위는 대개 그런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대개 빠른 답이 아니라, 함께 견뎌주는 시간이다. 오늘 우리의 피로는 일이 많아서만이 아닐지 모른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표를 채우는 법은 익혔으나 영혼을 채우는 법에는 여전히 서툴다. 더 빨리 연결되었지만 더 깊이 만나지는 못한다. 현대인의 허기는 단순한 과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시간에서 오는 허기일 수 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무엇에 바쁜지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이 늘어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AI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더 잘 활용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기술은 인간의 시간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기계는 시간을 계산할 수 있지만, 그 시간을 의미로 바꾸는 일은 오직 인간만의 몫이다. 사랑도, 돌봄도, 책임도, 기다림도, 모두 그 의미의 시간 안에서만 자란다. 세네카의 말처럼 하루를 한 생애처럼 살아야 한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AI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줄 수 있느냐가 아니다. 그 시간을 우리가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느냐다. 문명의 미래는 속도에 달려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미래는 그 속도 안에서 무엇을 지켜냈는가에 달려 있다 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