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어린이: 호기심과 몰입의 시간이 미래의 천재성을 키운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어린이: 호기심과 몰입의 시간이 미래의 천재성을 키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젊은 엄마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았다.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종이와 색연필을 꺼내더니,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무언가를 그렸다 지웠다 했다. 곁눈으로 보니 자동차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것을 끝없이 변형시키고 있었다. 엄마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이 깊어졌다. 결국 한마디 했다. “그만 좀 그리고 영어 단어장 좀 펴라. 시험이 며칠 안 남았잖아.” 나는 그 한숨이 익숙했다. 30여년 전, 내 아이를 키울 때 내가 똑같이 쉬었던 한숨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조급해지고, 불안하기 때문에 다그치게 된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만큼 부모의 오래된 본능도 없다. 그러나 칠십이 되어 그 모자(母子)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그 불안이, 아이의 가능성보다 먼저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알파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공동창업자 겸 CEO가 한국에 와서 한 이야기 기사를 읽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게임을 만들 때 부모가 ‘시간 낭비’라며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이 훗날 프로그래밍과 AI 연구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했다. 동시에 그는 AI 시대에도 수학과 과학 같은 기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놀이를 미화한 게 아니라, 기본기 위에서 살아 있는 호기심이 자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또 한참을 읽었다. 30여년 전, 내 아이가 만화책을 펼쳐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느 주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시계를 가리키며 “이제 그만 보고 들어가서 공부하거라” 하고 말했다. 별일 아닌 한마디였지만, 지금 와서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른다. 시계를 가리키는 대신 옆에 앉아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라고 한 번이라도 물었다면 어땠을까. 다 자란 자식 앞에서 차마 꺼내지 못하는 아쉬움 한 가닥이, 그런 식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아이를 앞서가게 하는 힘은 조급함이 아니라 몰입이다. 몰입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과 다르다.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스스로 더 알고 싶어지는 상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파고드는 상태, 거기서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어떤 아이는 책에서 그 순간을 만나고, 어떤 아이는 그림에서 만나며, 어떤 아이는 블록과 만들기 속에서 만난다. 어른 눈에는 산만해 보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시간이, 사실 아이 안에서는 세상의 구조를 더듬어 가는 시간일 수 있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모든 놀이가 천재성을 낳는다는 뜻이 아니다. 읽기, 쓰기, 수학, 과학, 그리고 교실에서 배우는 질서와 습관은 여전히 아이를 받쳐주는 뼈대다.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나도 그 한복판을 통과해 본 사람이다. 다만 뼈대만으로 사람은 서지 않는다. 뼈대 위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호기심이고, 그 호기심을 오래 지탱하는 것이 몰입이다. 요즘 부모들이 가장 갈등하는 지점이 화면이라는 것도 안다. 게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내 말은 모든 화면 시간이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수동적으로 흘려보내는 시간과, 무엇을 만들고 풀어내려고 파고드는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그 차이를 알아보는 눈은 아이 곁에 있는 어른만 가질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천재성은 처음부터 번쩍이는 재능의 이름이 아니다. 남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힘, 금세 싫증 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파고드는 힘, 정답을 빨리 맞히는 것보다 ‘왜 그런가’를 끝까지 붙드는 힘. 그런 것들이 쌓여 비로소 남다름이 된다. AI 시대의 인재는 많이 외운 아이가 아니라, 오래 좋아해본 아이에게서 나온다. AI는 정보를 빠르게 모아준다. 그러나 좋아해서 파고들던 어린 날의 떨림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AI는 답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그러나 스스로 빠져들어 끝내 자기 세계를 만들어보는 기쁨까지 대신 주지는 못한다. 그 떨림과 기쁨이 빠진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AI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설 수 있을까? 그래서 어른의 태도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 다그치기 전에 한 번쯤 옆에 앉아 이렇게 물어보는 일이다. “너, 지금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그 한 마디가 아이의 시간을 통제의 대상에서 관찰의 대상으로 바꾼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아이가 어디에서 눈이 빛나는지, 무엇을 할 때 시간이 멈춘 듯 빠져드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를. 다시 카페로 돌아간다. 엄마의 다그침에 아이는 잠깐 손을 멈췄다. 그러나 영어 단어장을 펴는 대신 그림 속 로봇의 팔 한 짝을 마저 그리고서야 책을 꺼냈다. 그 작은 고집이 나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자기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 분명히 아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 글이 어디선가 그런 어머니, 그런 아버지의 손에 닿는다면 한 가지만 전하고 싶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든, 블록을 쌓든, 무언가에 한 시간을 잊고 빠져 있을 때, 그 시간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답을 미리 쥐여주는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게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더 시킬 것인가보다, 아이가 무엇에 오래 빛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칠십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을, 같은 길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 부모들에게 작은 마음으로 적어 둔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호기심 가득한 창작의 순간 발행정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학부모: 우리 아이를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할까, AI를 활용할 줄 알면 되나?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학부모: 우리 아이를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할까, AI를 활용할 줄 알면 되나?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한 기업 교육 현장에서 50대 초반의 여성 수강생 한 분이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왔다. AI 활용법 강의를 듣던 분이었는데, 표정이 좀 어두웠다. “교수님, AI를 알게 되어 넘넘 감사해요. 큰애가 내년에 대학 가는데, 인공지능학과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그 질문 안에 자기 자신의 불안과 자녀에 대한 불안이 함께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분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입시철이면 비슷한 말이 돈다. 의대 보내야지. 로스쿨 가면 그래도 먹고살겠지. 회계사가 안정적이라더라. 그리고 요즘은 여기에 한 줄이 더 붙는다. “앞으로는 AI라는데,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말 속에는 한국 학부모의 오래된 불안이 들어 있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 안정된 직업이 곧 안정된 인생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의사, 판검사, 변호사, 회계사처럼 이름만 들어도 미래가 보장될 것 같은 직업을 향해 자녀를 밀어 넣고 싶은 마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이다. 문제는 그 믿음이 너무 단단해질…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인생이모작: 액티브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만나면 달라지는 놀라운 변화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인생이모작: 액티브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만나면 달라지는 놀라운 변화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한 번 크게 넘어져본 사람은 안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도 그 무게를 안다. 40년 이상 IT 업계에서 일했다. 유망 IT기업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랐고, 소프트뱅크로부터 투자도 받았고 기술 트렌드를 읽고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직업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런 내가 몸을 다치면서 한 번 크게 넘어졌다. 쌓아왔던 사업은 휘청거렸고,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집무실과 명함이 사라지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제 세상이 나 없이 돌아가는구나.’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마땅치 않던 그 시절, 나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려놓고 싶었다. 실패는 주머니 사정만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먼저 자신감을 무너뜨린다.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또 시작해도 될까?” 이런 질문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바깥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주저앉는다. 그래서 인생이모작은 돈을 다시 버는 문제이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시 말을 거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그 갈림길 한가운데 인공지능이 서 있다고 느낀다. 많은 사람은 AI를 젊은 세대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로운 기능을 겁 없이 배우는 사람들의 도구라고 여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AI를 진짜 잘 쓰는 사람은 손가락이 빠른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지 알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고, 나온 답을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골라낼 줄 아는 사람이다. 바로 그 점에서 액티브 시니어는 결코 늦은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세대일 수 있다. 내가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그걸 본다. 인공지능을 주제로 강의를 하다 보면, 디지털 기기에 서툰 중장년 수강생이 오히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기능은 몰라도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아는 것이다. 어떤 분은 AI에게 30년 경력을 살린 창업 아이디어를 물었고, 또 어떤 분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버튼을 누른 것이 아니라 삶을 꺼낸 것이다. 젊음이 빠름의 힘이라면, 시니어는 방향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작년에 만난 한 60대 여성이 기억난다.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다가 코로나 때 문을 닫았다. 재기를 꿈꿨지만, 세상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배달앱, SNS 마케팅, 키워드 광고. 이름만 들어도 숨이 막혔다고 했다. 그런데 AI 활용법을 배운 뒤 달라졌다. “내 경험을 살려 작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 한 마디로 대화를 시작했다. AI는 케이터링, 밑반찬 배달, 요리 클래스 같은 선택지를 내놓았고, 그중 하나를 골라 지금은 동네 주민센터에서 요리 강습을 한다. 완벽한 재기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다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게 제일 커요.” 강의나 교육 콘텐츠를 준비하는 액티브 시니어에게도 변화는 크다. 현장 경험은 많은데, 그것을 목차로 정리하고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평생의 경험이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던 것이다. AI는 흩어진 경험을 구조화해주고, 강의안의 흐름을 잡아주고,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내용을 풀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표현의 문턱 앞에서 멈췄던 시니어가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회고록, 자서전, 블로그 글, 강연 원고, 손주에게 남기는 편지까지. 마음속에만 있던 이야기를 AI와 함께 꺼내 적다 보면, 이름 붙이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가 문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 역시 새벽에 혼자 글을 쓰다 막히면 AI에게 묻는다. “이 문장을 더 따뜻하게 바꿔줘.” “논리가 허술한 데가 있으면 짚어줘.”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단지 글 한 편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다시 들여다보는 거울을 얻는다. 사람은 기능 하나를 더 배워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살아날 때 달라진다. 물론 반론은 있다.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잘못된 답도 내놓고, 지나치게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도 있다. 디지털 기기 자체가 두려운 사람에게는 첫걸음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다시 시작하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쉬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 2막을 강요하는 것은 선의의 폭력이다. 그래서 AI를 권하는 일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묻는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가요?”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그 답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도 존중해야 한다. 기술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조력자다. 조력자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가능성까지 접을 이유는 없다. AI는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살아볼 용기를 북돋울 수는 있다. 사업에 다시 도전하려는 사람에게는 생각을 정리해주는 조력자가 되고,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구조화해주는 비서가 되며,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첫 문장을 밀어주는 동반자가 된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칠 때, AI는 작은 디딤돌이 되어줄 수 있다. 복잡한 계약서 조항을 풀어 물어보고, 새로운 사업 구조를 함께 검토하고, 낯선 분야의 기초 지식을 밤늦게 조용히 배울 수 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래도 좋다. 다시 질문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게 전부가 될 수 있다. AI는 젊은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세월은 몸을 느리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가능성까지 늙게 만들지는 못한다. 실패는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어도, 다시 배우려는 마음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인생이모작은 나이가 허락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 시작된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어렵지 않다. AI에게 거창한 미래를 묻지 말고, 딱 하나만 물어보면 된다. “내가 지금 가진 경험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인가?” 인생 2막은 시간이 남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다시 생길 때 시작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잊고 있던 재기의 언어를 다시 돌려주는 것일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액티브 시니어: 인공지능이 열어주는 인생 2막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액티브 시니어: 인공지능이 열어주는 인생 2막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병원 예약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한 어르신이 끝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세상이 나 없이 먼저 가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표정이 남았다. 화면을 포기하는 순간, 그분의 얼굴에 스친 것은 짜증이 아니었다. 체념이었다.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주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한 발짝 밀려났다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인공지능을 생각할 때마다 기술 이전에 먼저 그 어르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AI가 단지 새롭고 똑똑한 기계가 아니라, 누군가를 다시 세상과 연결해주는 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은 AI를 젊은 세대의 기술이라고 여긴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로운 기능을 겁 없이 배우는 쪽이 유리하다고 본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인공지능은 버튼을 빨리 누르는 사람이 잘 쓰는 기술이 아니다. 무엇이 자기 삶에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 더 깊이 쓰는 도구다.  같은 AI에게 물어도 어떤 사람은 검색엔진 수준의 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삶을 재정비할 실마리를 얻는다. 차이는 기기에서 갈리지 않는다. 질문에서 갈린다. 바로 그 점에서 액티브 시니어는 뒤에 설 이유가 없다. 젊은 세대는 기능에 익숙하다. 그러나 삶의 맥락까지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시니어에게는 시간이 쌓아준 것이 있다. 사람을 겪은 두께, 실패를 견딘 근력, 선택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감각. AI 앞에서 “나한테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앱 순위를 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내가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그걸 본다. 디지털 기기에 서툰 수강생이 AI에게 던지는 질문이 오히려 날카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기능은 몰라도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AI에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기능을 쓴 것이 아니라, 삶을 꺼낸 것이다. 생각해보면 시니어의 일상에 AI가 들어올 자리는 이미 곳곳에 있다. 한 어르신의 하루를 상상해보자. 아침에 오늘 먹는 약의 부작용이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보고,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받은 안내문의 어려운 문장을 쉽게 풀어달라고 하고, 저녁에는 손주 생일에 보낼 문자를 조금 더 따뜻하게 고쳐달라고 한다. 거창한 기술이 아니다. 하루를 조금 덜 막막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기능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나는 이제 늦었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것도 한번 해볼 수 있겠네”로 바뀌는 순간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늘어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살아날 때, 사람은 달라진다. 오래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작은 가게의 홍보문을 직접 만들어보고,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던 것들을 밤늦게 조용히 AI에게 묻는다. 그 순간 기술은 기능을 넘어서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한 발짝 물러서야 할 지점도 있다. AI가 만능인 것처럼 말하는 건 위험하다. 잘못된 정보도 있고, 화면 자체가 두려운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다시 시작하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쉬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 2막”을 강요하는 것은 선의의 폭력이다.  그래서 AI를 권하는 일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묻는 것이다. “무엇이 불편하세요?”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그 답이 “아무것도”라면, 그것도 존중해야 한다. 기술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다. 도구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가능성까지 접을 이유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는 것이다.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 더 분명해지고, 시간을 어디에 쓸지 더 또렷해진다. 인생 2막은 청춘의 반복이 아니다. 더 많이 쥐는 시간이 아니라, 더 분명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AI는 그 분명함을 도울 수 있다. 남은 시간을 더 자기답게 쓰도록 곁에서 거드는 조용한 조력자로. 기계는 정보를 건네지만, 인생 2막의 방향은 끝내 사람이 정한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병원 예약 화면 앞에서 전화를 내려놓던 그 어르신. 만약 그분 옆에 누군가가 앉아서 “제가 같이 해볼까요?”라고 말했다면, 그분은 전화를 다시 들었을까. 나는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더 쉬운 기술이 아니라, 옆에 앉는 한 사람이었을 테니까. AI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먼저가 아니다. “이제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라고 묻는 한마디가 먼저다. 인생 2막은 시간이 남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 시작된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노인: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쓸 수도 있는 이유.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노인: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쓸 수도 있는 이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지하철 5호선, 오후 세 시쯤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화면을 넘기지 않았다. 한 화면을 오래 붙들고,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읽고 계셨다. 옆자리 청년은 릴스를 쉴 새 없이 넘기고 있었다. 누가 더 유능해 보였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청년 쪽을 가리킬 것이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 기능을 겁 없이 다루니까. 나도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르게 본다. AI는 손가락이 빠른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 질문이 깊은 사람의 도구다. 소크라테스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 더 깊이 묻는 사람을 지혜에 가깝다고 보았다. 이천사백 년 전 말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있다. 인공지능이 정답을 외운 기계가 아니라, 질문에 반응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ChatGPT든 클로드든, 같은 AI에게 물어도 어떤 사람은 검색엔진 수준의 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삶을 바꿀 통찰을 받는다. 차이는 기기가 아니라 질문에서 갈린다. 바로 여기서 나는 노인의 가능성을 본다. 노인은 기술에 늦다. 이건 사실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줄이 밀리고, 무인주차장에서 당황하고, 앱 하나 깔자면 자녀에게 전화를 건다. 이 고충을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다. 디지털 소외는 실재하는 고통이고,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다. 그러나 기술에 늦는 것과 기술을 못 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노인에게는 젊은이가 아직 갖지 못한 것이 있다. 사람을 오래 겪은 시간, 실패를 견딘 근력, 선택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감각.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구별하는 힘은 매뉴얼로 익히는 게 아니다. 살아내야 생긴다. AI 앞에서 “나한테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앱 스토어 순위를 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나이는 손을 늦출 수 있어도, 질문을 늦추지는 못한다. 생각해보면 AI가 노인의 일상에 들어올 자리는 이미 넘친다. 병원 예약 전에 증상을 정리해주고, 공공문서의 난해한 문장을 풀어주고, 자녀에게 보낼 문자를 조금 더 따뜻하게 다듬어준다. 혼자 사는 밤에 말벗이 되고,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던 것들에 답해준다. 이것은 유행이 아니다. 삶의 반경을 다시 넓혀주는 일이다. 그래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노인이 AI를 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왜 노인일수록 AI를 더 가까이해야 하느냐”로.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빨라지고, 제도는 복잡해지고, 설명서는 불친절해진다. “이제 나는 시대에서 멀어졌다”는 체념이 조용히 스며든다. AI는 그 체념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도구다. 정보에 다시 닿게 하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늘려주고, 세상과의 연결을 되살린다. 인공지능은 젊은이의 장난감이 아니라, 노년의 삶을 다시 넓혀주는 지팡이가 될 수 있다. 물론 불편한 진실도 있다. AI를 권하는 일 자체가 노인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 화면은 낯설고, 용어는 어렵고, 배우는 과정은 생각보다 두렵다. 그런데 기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건, “그것도 모르세요?”라는 한마디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짜증이 나서. 돌이켜보면 기술을 가르친 게 아니라 자존심을 깎은 것이었다. 기계와 기술은 시험지가 아니라 지팡이여야 한다.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기대어 걸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노인에게 AI를 강요하는 일이 아니다. 노인이 자기 속도로, 자기 필요에서 출발해 익히도록 돕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AI 교육의 첫 질문은 “이 버튼을 누르세요”가 아니라 “무엇이 가장 불편하세요?”여야 한다. 미국의 투자자이자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이었던 찰리 먼거는 “지혜는 단순한 정보 축적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의 축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AI 시대의 경쟁력도 다르지 않다. 정보는 기계가 준다. 그러나 그 정보로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를 정하는 것은 끝내 사람의 몫이다. 젊은 세대가 AI의 기능을 먼저 익힌다면, 노년 세대는 AI의 의미를 더 깊이 물을 수 있다. 기계는 정보를 준다. 그러나 삶의 방향은 끝내 사람이 정한다. 그렇다면 노인을 ‘디지털 약자’로만 부르는 말은 이제 고쳐야 한다. 노인은 배워야 하는 사람인 동시에, 더 좋은 질문으로 기술이 가야 할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세대다. 어쩌면 미래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빠른 손가락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어렵지 않다. 주변 어르신에게 “이거 어려우시죠?”라고 말하는 대신, “무엇이 가장 필요하세요?”라고 먼저 묻는 것이다. 미래는 젊은 손끝에서만 열리지 않는다. 삶을 오래 살아낸 사람의 질문 속에서도 열린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아날로그 지혜와 디지털 도구의 아름다운 공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개그맨: 기계는 타이밍을 모른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개그맨: 기계는 타이밍을 모른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몇 해 전 친한 선배의 장례식장에서 밤을 샜다. 새벽녘, 빈소 밖 흡연실에서 고인의 대학 동기 한 분이 담배를 물며 말했다. “그 녀석, 노래방 가면 꼭 그리운 금강산부터 불렀어. 음치인 건 죽어도 모르고.” 아무도 웃을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거기…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김홍도: AI가 지운 ‘사람 냄새’의 정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김홍도: AI가 지운 ‘사람 냄새’의 정체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아침 시장에 서 본 적 있나? 생선 비린내와 막 튀겨낸 기름 냄새가 섞이고, 좌판을 두드리는 손바닥 소리, 흥정하는 목소리, 아이가 칭얼대는 울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 소란 속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짜증을 내고, 누군가는 오늘 벌이가 시원찮아 어깨가 처진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지금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조선의 화가 단원 김홍도가 남긴 풍속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장의 소음이 그림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인데도 사람 냄새가 난다. 잉크와 종이 위에, 시대의 체온이 살아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매일 더 놀라운 장면을 본다. 몇 줄의 지시어만 입력하면 그림이 만들어지고, 문장이 완성되고, 그럴듯한 세계가 순식간에 펼쳐진다. 생성형 AI가 우리 일상에 들어온 뒤로, 창작은 더 쉬워졌고, 생산은 더 빨라졌다. 누구나 포스터를 만들고, 누구나 홍보 문구를 쓰고, 누구나 글의 형태를 갖춘 무언가를 내놓을 수 있다. 분명 대단한 변화다. 올려진 풍속화는 단 몇초 만에 AI가 그렸다. 얼핏 김홍도 화풍 같지만, 여기엔 장터의 땀 냄새가 없고 붓 터치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낯선 ‘디지털의 차가움’이 묻어난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허전하지 않나. 결과물을 보고 “우와!”라고 감탄하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지는 경험. 멋지긴 한데 오래 남지 않는 감정. 완벽한데도 이상하게 따뜻하지 않은 문장. 나는 그 허전함이 결국 하나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관찰과 학습의 차이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사람을 붙잡는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그는 삶을 보고, 삶에 머물렀다. 예를 들어보자. 국밥을 허겁지겁 들이키는 주막 손님의 불룩해진 볼, 젓가락을 쥔 야무진 손끝, 그 옆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까지. 김홍도는 그 찰나의 ‘생활’을 놓치지 않았다. 웃음의 모양만 그린 게 아니라 웃음 뒤의 피곤함까지 읽었다. 동작만 그린 게 아니라 그 동작이 나오기까지의 맥락을 붙잡았다. 그래서 그림 속 사람들은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그냥 산다. 그들이 사는 방식이,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까지 전염된다. 우리는 한 장면을 보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든다. “저 사람은 오늘 무슨 일로 저렇게 웃을까.” “저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 “저 둘 사이에는 어떤 기류가 흐를까.” 풍속화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해석의 공간을 남겨 둔다. 그 빈자리에 독자의 마음이 들어간다. 바로 그때 감동이 생긴다. 감동은 누가 만들어 주는 완성품이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순간에 생기니까. 반면 AI는 관찰하지 않는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학습의 결과를 재조합한다. 이 과정이 놀라운 건 맞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는 종종 이런 성질이 있다. 평균적으로 안전하고, 평균적으로 매끄럽고, 평균적으로 만족스럽다. 문제는 그 평균이 사람의 마음을 설득하긴 해도, 깊게 흔들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삶을 바꾸는 문장, 기억에 남는 그림은 대개 평균에서 오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험, 말투, 사정, 망설임 – 그런 “되돌릴 수 없는 디테일”에서 온다. 김홍도는 그 디테일을 살렸고, AI는 그 디테일을 자주 평평하게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건 AI가 나쁘다는 결론이 아니다. AI는 도구다. 도구는 잘 쓰면 도움이고, 잘못 쓰면 위험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관찰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이해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요약이 먼저 오고, 결론이 먼저 온다. 질문보다 답이 앞서고, 경험보다 정리가 앞선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점점 이렇게 변한다. “내가 확인한 세계”보다 “누군가(혹은 AI)가 정리해 준 세계”에 더 빨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감동이 사라진다. 감동은 속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감동은 머무름에서 태어난다.  사람의 표정을 오래 바라보고, 말 한마디의 결을 곱씹고, 문장 하나를 내 입에서 다시 굴려보는 그 시간에서 나온다. 풍속화가 주는 울림이 강한 건 그 그림이 우리에게 “빨리 결론 내리지 말고, 조금 더 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AI 시대의 창작 윤리를 표절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저작권과 공정한 보상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큰 질문이 있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신 무엇을 잃고 있는가? 맥락을 잃고, 관계의 온도를 잃고, 생활의 질감을 잃고,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움도 함께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인간다움을 비용처럼 절감하려 한다. 이때 기술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따뜻하지는 않다. 그러면 해답은 뭘까. “AI를 쓰지 말자”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를 더 잘 쓰자. 단, 우리는 AI를 비서로 쓸 것인가, 작가로 앉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는 AI를 관찰을 위한 도구로 쓰자고 제안한다. AI가 수만 건의 자료를 정리해 주는 시간, 그 아껴진 시간만큼 우리는 현장을 더 오래 응시해야 한다. 초안은 AI가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지막 한 줄은 오직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다. 내 눈이 포착한 떨림, 내 귀에 꽂힌 탄식, 내가 겪은 망설임이 그 재료다. 기억하자. AI는 정보를 주지만, 감동은 체온에서 온다. 당신의 체온이 묻어날 때, 그제야 글은 정보 덩어리를 넘어 살아있는 이야기가 된다. 김홍도는 붓으로 세상을 기록했다. 우리는 키보드와 AI로 세상을 기록한다. 시대는 달라졌고 도구도 달라졌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 그리고 더 아픈 질문이 따라온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네 말로 남길 수 있나?” AI가 만들어준 문장을 그대로 붙여넣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쉬움이 아니다. 독자는 완벽한 문장에 감동하지 않는다. 독자는 “아, 이 사람은 진짜 봤구나”라는 확신을 느낄 때 감동한다. 그 확신이 생기는 순간, 글은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로, 결과물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로 바뀐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아직도 우리 마음을 흔드는 건, 바로 그 목소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AI 시대에 가장 값진 능력은 잘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잘 보는 능력이라고. 더 많이 만들기 전에, 조금 더 보자. 조금 더 오래 바라보자. 그게 결국,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이 끝내 지켜야 할 창작의 윤리이자, 독자를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가장 단단한 힘이다. ▲사진=구글 제미나이(Gemini)가 김홍도 화풍으로 생성한 장터 이미지. 붓 터치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낯선 ‘디지털의 차가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