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강의를 1시간 앞두고 노트북을 열었다. 전날 밤 인공지능에게 맡겨 뽑아낸 슬라이드가 45장. 도표는 정확했고 문장은 매끄러웠다. 흠잡을 데가 없어서 오히려 손이 멈췄다. 자료를 만든 인공지능은 강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앞줄에 누가 앉는지, 그중 몇이 회사에서 등 떠밀려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 가운데서 19장을 지웠다. 무엇으로 채울지는 문을 열고 나서 정했다. 그날 강의가 끝나고 한 사람이 남아 물었다. 남은 26장 어디에도 없던 질문이었다.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는 사람을 대체한다. 하버드경영대학원 카림 라카니 교수의 이 진단은 이제 강사들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휴넷이 국내 371개 사 인사·교육 담당자에게 물은 결과, 2025년 기업이 가장 많이 투자한 교육 분야는 AI 교육으로 33.7%였다. 이듬해 중점을 둘 분야를 묻자 같은 항목이 50.9%로 올라섰다. 한 해 사이 17% 포인트다. 강단의 지형이 바뀌는 속도가 이 숫자에 다 들어 있다. 어떤 강사에게는 자리가 늘고, 어떤 강사에게는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강사가 두려워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다. 어제까지 나와 같은 교재를 쓰던 사람이 먼저 달라지는 일이다. 1,200년 전 당나라의 한유는 「사설(師說)」에서 스승을 이렇게 정의했다. 도를 전하고, 학업을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 전도(傳道)와 수업(授業)과 해혹(解惑)이다. 이 셋을 오늘의 강의실에 놓으면 사정이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은 전도와 수업에 이미 깊숙이 들어왔다. 자료를 모으고, 수준에 맞춰 풀어 쓰고, 사례까지 지어낸다. 그러나 해혹 앞에서 멈춘다. 의혹이 일반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 셋째 줄에 앉은 한 사람이 품은, 그 사람만의 막힘이다. 오래 강단에 서다 보면 유독 필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다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막혔는지 몰라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그 표정은 데이터로 오지 않는다. 앞에 선 강사의 눈에만 들어온다. 한유는 의혹을 품고도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의혹이 끝내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인공지능은 던져진 질문에 답한다. 묻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한다. 같은 글에서 한유는 한 걸음 더 갔다. 스승이라고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도를 먼저 들었는가, 그 분야에 정통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요즘 강사들에게 건네고 싶다. 기계가 나보다 많이 안다는 사실은 강단에 설 자격을 거두어 가지 않는다. 다만 아는 양으로 겨루던 시절이 저물었다. 그렇다면 도구를 잘 쓰면 명강사가 되는가? 여기서부터 길이 갈린다. 한국기술교육대 능력개발교육원은 ‘AI 교사·강사 아카데미’를 통해 인공지능 역량을 갖춘 훈련교사 1,900명을 새로 길러내고, 1만 명의 교사·강사에게 역량 강화 교육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보수교육을 받는 직업훈련 교사·강사가 6만여 명이다. 국가가 강사라는 직업을 통째로 다시 배치하는 중이다. 다만 강사를 길러내는 자리에 여러 해 있다 보니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 있다. 도구를 빨리 익히는 사람과 끝내 좋은 강사가 되는 사람이 좀처럼 겹치지 않는다. 몇 해 지나면 도구를 못 다루는 강사는 드물어진다. 무엇을 쥐었느냐보다 누가 쥐었느냐가 남는 날이 온다. 연구는 오래전에 답을 내놓았다. 좋은 수업의 조건을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에 나란히 물은 조사에서, 양쪽 모두가 1순위로 꼽은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이었다. 강의 내용도 자료의 완성도도 그 뒤였다. 배우는 쪽은 그다음으로 교수자의 태도와 학생 수준에 대한 고려를 들었다. 수업 만족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꼽은 연구도 있다. 목록 어디에도 슬라이드 장수는 없었다. 열정은 준비량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오늘 이 사람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는지가 목소리와 시선에 묻어날 따름이다. 준비를 대신해주는 도구는 생겼다. 준비한 것을 버리는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그날 남아 있던 사람이 내게 던진 질문은 이랬다. 선생님은 이걸 직접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컴퓨터를 만진 지 사십여 년이고, 요즘은 남에게 AI 쓰는 법을 가르치며 산다. 그런데도 말이 막혔다. 슬라이드에는 근거가 있었고 사례도 넉넉했지만, 그 대목만은 내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다음 강의를 바꿨다. 기계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궁색해질 일도, 얼굴이 붉어질 일도 없다. 강단에 서는 사람만 부끄러울 수 있다.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기계가 끝내 갖지 못할 강사의 자산이 아닐까? 이달 초 부산 벡스코에서 교육부와 한국교육방송공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함께 연 인공지능 활용 교육 콘퍼런스에 교원 1만 명이 모였다. 이틀 내내 그들이 붙들고 있던 물음은 어떤 도구가 좋으냐가 아니었다. 이 도구를 내 교실에 어떻게 앉힐 것이냐였다. 도구를 묻는 사람은 도구에서 멈추고, 교실을 묻는 사람은 교실로 간다. 그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몇 해 뒤 강단의 명단을 가른다. 다음 강의에서 한 가지만 해보시기를 권한다. 인공지능이 만들어준 자료에서 10장을 지우는 것이다. 아까울 것이다. 정확하고 매끈한 10장이니까.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아는 사람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명강사라 불러왔다. 지운 자리에 당신은 무엇을 넣겠는가? 다음 회에는 배우는 쪽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인공지능이 무엇이든 알려주는 시대에, 사람은 왜 여전히 사람에게 배우러 오는가. 참고자료 1. 한유(韓愈), 「사설(師說)」. “師者, 所以傳道授業解惑也”, “師不必賢於弟子”. 2. Karim R. Lakhani, “AI Won’t Replace Humans — But Humans With AI Will Replace Humans Without AI”, Harvard Business Review / Digital, Data, Design Institute at Harvard, 2023. 3. 휴넷, 「2026 기업교육 전망」 설문조사(국내 371개 사 인사·교육 담당자 대상), 2025. 11. 4.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능력개발교육원, ‘AI 교사·강사 아카데미’ 운영 현황, 2026. 5. 「교수자와 학습자 의견 비교를 통한 좋은 수업의 특성 분석」,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제23권 제2호. 필자 | 유준형 박사(Ph.D).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경영학(MBA)/전자계산학/산업공학/사회복지학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40여 년을 IT 현장에서 보낸 베테랑 엔지니어이다. 현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이자 고려대 명강사 최고위과정 대표강사로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블로그/SNS/유튜브 온라인 마케팅과 AI 활용을 주제로 1,500여 회 강단에 섰다. 『명강사를 위한 AI 활용 실무』, 『AI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AI와 사회복지』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삽화=필자 기획·OpenAI ChatGPT 생성한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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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축구: 인공지능은 패턴을 찾고, 감독은 승부를 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경기가 끝난 밤, 중계석의 박지성 해설위원이 던진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이기려고 한 경기가 맞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닷새 뒤 새벽, 선수단은 인천공항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국민이 아픈 이유는 단순히 졌기 때문이 아니다. 축구는 질 수 있다. 상대가 강하면 밀리고, 운이 없으면 골대가 외면한다. 그러나 준비 없이 진 것처럼 보일 때 국민은 더 크게 상처받는다. 선수들은 뛰었는데 팀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땀은 흘렸는데 전술의 흔적이 희미할 때, 우리는 패배보다 무거운 허탈감을 느낀다. 조별리그 탈락 이후 한국 축구를 둘러싼 말들이 거칠다. 감독의 전술 부재, 선수 기용, 경기 중 대응, 대한축구협회의 책임을 묻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 글은 특정 감독을 조롱하거나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글이 아니다. 묻고 싶은 것은 더 크다. 한국 축구는 아직도 감독 개인의 감각과 선수 개인의 능력에 너무 많은 것을 맡기고 있지 않은가. 세계 축구는 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경기를 읽는다. 우리는 여전히 “정신력”과 “경험”이라는 오래된 말에 기대고 있다. 축구는 감동의 경기이지만, 동시에 준비의 경기다. 90분 동안 공 하나가 굴러다니는 듯 보여도 그 안에는 수많은 길이 숨어 있다. 빌드업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공격수는 언제 수비 뒷공간으로 뛰는지, 상대는 실점 뒤 어느 쪽부터 흔들리는지까지, 모두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좋은 팀은 우연히 공격하지 않는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만들고, 상대가 그 길을 막으면 다음 길을 연다. 이제 그 길을 읽는 데 AI가 쓰인다. 이번 월드컵에서 FIFA가 레노버와 함께 개발한 분석 도구 ‘FIFA AI Pro’는 참가 48개국 전 팀이 사용했다. 수백만 개의 경기 데이터를 뒤져 보고서와 그래프, 영상으로 몇 분 만에 답을 내놓는다. 구글 딥마인드가 리버풀 구단 전문가들과 만든 ‘TacticAI’도 상징적이다. 프리미어리그 코너킥 7천여 개를 학습해, 누가 공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지, 선수 위치를 어떻게 바꾸면 슈팅 확률이 달라지는지를 제안했고, 현장 전문가 평가에서 기존 전술보다 더 자주 선택받았다. 축구장의 직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직감이 놓친 장면을 다시 보게 만드는 새로운 눈이 생긴 것이다. 물론 우리 현장에도 밤새 영상을 돌려 보는 분석관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그 노력이 감독 한 사람의 임기와 함께 흩어지는 구조다. AI는 상대의 전반 45분과 후반 45분을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에이스가 공을 받기 전 어떤 미끼 움직임이 있는지, 세트피스에서 반복되는 위치 이동은 무엇인지 찾아낸다. 그리고 그 분석은 훈련의 언어로 바뀌어야 한다. 선수에게 50쪽짜리 보고서를 읽히는 것보다 10초짜리 핵심 AI 영상 하나가 강할 때가 있다. “상대 에이스에게 허겁지겁 달려들지 말고, 그에게 공이 가는 길목부터 차단하라.” 이런 메시지를 실제 장면과 그라운드 도식으로 보여주면 선수는 몸으로 먼저 이해한다. AI가 장면을 모으면, 코치는 그것을 훈련으로 옮기고, 선수는 반복으로 익힌다. 그러나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AI가 패턴을 찾는다고 감독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가 수만 개의 선택지를 내놓을수록 감독의 수준은 더 중요해진다. 어떤 데이터를 믿고 어떤 장면을 버릴지, 어떤 선수를 세우고 언제 승부를 걸지는 결국 감독이 정한다. 인공지능은 패턴을 찾고, 승부는 감독이 건다. 축구는 숫자로만 되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수의 몸 상태, 라커룸의 공기, 주장 한마디의 무게, 실점 직후의 흔들림, 교체 선수의 눈빛은 데이터 바깥에 있다. AI는 많은 것을 분석하지만 선수의 마음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그래서 좋은 감독은 AI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시에 AI 뒤에 숨지도 않는다. 좋은 감독은 AI를 쓰되, AI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는다. 대한축구협회가 새겨야 할 것도 여기에 있다. 대표팀이 감독의 임기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즉흥 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대국 전술 데이터베이스, 세트피스 분석실, 선수별 경기 영상 라이브러리, 분석관과 코치의 협업 체계를 제도로 남겨야 한다. 감독이 바뀌어도 대표팀의 축구 지식은 쌓여야 한다. 한 대회가 끝나면 사라지는 기억이 아니라, 다음 대회를 준비하는 자산이 되어야 한다. 감독의 역량도 달라져야 한다. 과거에는 경험과 카리스마, 선수 장악력, 승부사 기질이 먼저였다. 지금도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AI를 부릴 줄 아는 능력이 감독의 기본기가 되어야 한다. 분석을 이해하지 못하면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지 못하면 책임질 수 없다. 감독의 경륜은 데이터를 해석하고 버릴 줄 아는 판단력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데이터는 길을 보여주고, 사람은 그 길을 선택한다. 국민은 대표팀이 늘 이기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준비한 축구, 납득할 수 있는 축구, 지더라도 다음이 보이는 축구를 원한다. 세계가 AI로 전술을 읽고 훈련을 바꾸는 시대에, 한국 축구가 선수 개인의 번뜩임에만 기대고 있다면 그것은 패배보다 큰 후퇴다. 선수들의 재능은 소중하다. 그러나 재능은 전술 안에서 빛나고, 전술은 준비 안에서 완성된다. 전술은 감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준비로 증명하는 것이다. AI는 그 준비를 더 촘촘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휘슬이 울릴 때 박수든 비판이든 받아 안는 사람은 벤치의 감독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서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 더 정확히는, 기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독자에게 작은 제안 하나를 남긴다. 다음 경기를 볼 때 골 장면만 보지 말고, 골이 터지기 전 세 번의 패스를 함께 보시라. 그 세 번이 우연이었는지 준비였는지는 의외로 눈에 보인다. 패턴을 읽는 눈은 감독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음 월드컵이 끝난 밤, 우리는 중계석에서 어떤 질문을 듣게 될까? 참고자료 1. MBC 뉴스데스크. (2026.6.26). “전술이 없었다”…‘4강 신화’ 동료들마저 홍명보 비판. 2. 머니투데이. (2026.6.25). 박지성, 홍명보 전술 작심 비판 “이기려고 한 경기 맞나, 월드컵 준비 소홀”. 3. FIFA·Lenovo. (2026.7). All 48 Teams Use FIFA AI Pro at FIFA World Cup 2026 (레노버 공식 보도자료). 4. Google DeepMind. (2024.3.19). TacticAI: an AI assistant for football tactics (공식 블로그). 5. Wang, Z. et al. (2024). TacticAI: an AI assistant for football tactics. Nature Communications, 15, 1906.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감독과 전술 보조 동반자 AI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눈물: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켰을 때, 그 작은 불빛 속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데르센이 그 동화를 쓴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장면 앞에서 잠시 멈춘다. 배고픔보다 더 추운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슬픔이다. 사람은 빵이 없어서도 울지만, 내 눈물을 알아주는 이가 없을 때 더 깊이 운다. 이제 우리는 그 슬픔조차 기계에게 먼저 말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밤이 깊으면 누군가는 휴대폰을 켜고 묻는다. “오늘 너무 힘들어.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인공지능은 곧바로 다정하게 답한다. “많이 지치셨군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위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그 문장 하나가 무너지는 마음을 잠깐 붙들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곧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인공지능은 정말 슬픔을 이해하는 걸까, 아니면 이해하는 문장을 아주 잘 만들 뿐일까. 눈물은 그저 물방울이 아니다. 그 안에는 끝내 하지 못한 말, 오래 참아온 억울함, 놓쳐버린 사람, 미안해서 부르지 못한 이름이 고여 있다. 의학은 눈물을 생리 현상으로 설명하고, 심리학은 감정 반응으로 읽는다. AI는 표정과 목소리와 단어의 흐름을 분석해 슬픔의 확률을 계산한다. 그러나 추정과 이해는 다르다. 눈물은 데이터로 읽을 수 있지만, 눈물의 무게는 함께 울어본 사람만 안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도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해마다 72만 명 넘는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자살이 15~29세 사망 원인 가운데 세 번째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2024년 자살 사망자가 1만 4,872명,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2011년 이후 가장 높았다. 이 숫자 앞에서는 어떤 도구도 함부로 밀어낼 수 없다. 위험한 문장 하나를 AI가 먼저 알아채 상담자와 가족, 의료진에게 더 빨리 이어준다면, 그것은 한 생명을 붙드는 신호가 된다. 다만 슬픔을 다루는 기술은 그만큼 조심스러워야 한다. AI는 “괜찮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말의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 우울의 신호를 감지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밤을 함께 건너가지는 못한다. 깊은 우울, 자해의 위험, 상실의 충격은 AI와 단둘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다. AI는 눈물을 발견하는 등불은 될 수 있어도, 눈물을 닦아주는 손은 끝내 사람이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는 더 섬세해진다. 우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감정 점수 83점’이 아니다. 왜 울었는지, 누구에게 마음을 다쳤는지, 하고 싶은데 못 하는 말이 무엇인지 들어주는 어른이다. 유네스코가 생성형 AI 교육에서 인간 중심과 교사 역량을 강조하고, 유럽연합이 학교와 직장의 감정 추론 AI를 엄격히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이 미워서가 아니다. 아이의 침묵을 데이터로 단정하는 순간, 교육이 돌봄에서 감시로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AI가 교육이나 상담에 짐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잘 쓰면 교사는 위험 신호를 더 빨리 알아채고, 학생은 말하기 힘든 감정을 먼저 적어보며, 상담 현장은 위기의 아이를 더 촘촘히 지킬 수 있다. 이미 많은 교사와 상담사, 의료진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문제는 순서다. 감지는 AI가 앞서도 좋지만, 판단은 사람이 한다. 기록은 기계가 도와도 좋지만,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회복된다. 문학 속 눈물도 늘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었다. 장발장은 법의 판결이 아니라 미리엘 주교의 자비 앞에서 무너졌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서 예수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신앙의 해석은 저마다의 몫이지만, 그 짧은 장면은 오래 남는다. 거룩함은 슬픔을 모르는 무표정이 아니라, 슬픔 곁에 함께 머무는 마음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AI는 울지 않는다. 다만 우는 사람의 언어를 배운다.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상처받은 이에게 건넬 법한 말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니 그 위로가 전부 가짜라고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어떤 밤에는 그 문장 하나가 한 사람을 아침까지 버티게 하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다리로 써야 한다. 사람을 대신하는 방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슬픔은 지워야 할 오류가 아니다. 사랑했다는 증거이고, 잃은 것이 소중했다는 표시이며,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신호다. 울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게 아니다. 울고 나서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는 사람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는 눈물을 지우는 AI가 아니라, 눈물 뒤에 숨은 사람을 더 빨리 알아보게 해주는 AI다. 결론은 분명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어느 정도 읽는다. 슬픔의 단어를 가려내고, 위험을 감지하고, 위로의 문장을 건넬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해란 정보 처리의 결과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곁을 지키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AI는 눈물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 눈물 옆에 앉아줄 수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아무에게도 못 한 슬픔을 검색창에 적을 것이다. 그 문장을 기계가 먼저 읽는 시대라면, 사람은 더 늦지 않게 응답해야 한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따뜻해져야 한다.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 한 것도 첨단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안아줄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나는 오늘, 누구의 눈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인가? 참고자료 1. World Health Organization. (2025. 3. 25.). Suicide fact sheet. 2. 통계청·보건복지부. (2025. 9. 25.). 2024년 사망원인통계 — 자살률 29.1명, 2011년 이후 가장 높아. 3. OpenAI & MIT Media Lab. (2025. 3. 21.). Early methods for studying affective use and emotional well-being on ChatGPT. 4. UNESCO. (2023, updated 2026). Guidance for generative AI in education and research. 5. European Commission. (2025–2026). AI Act application timeline and prohibited practices. 6. Fang, C. M. et al. (2025). Ho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노인의 눈물과 슬픔을 분석하는 AI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고독: 인공지능은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밤늦게 방 안의 불은 꺼졌는데, 손안의 화면만 환하다. 식어 버린 찻잔 옆에서, 잠 못 드는 이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글자를 눌러 넣는다. “오늘 너무 외로워. 나랑 얘기 좀 해줄래?” AI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정한 문장을 돌려준다. “제가 곁에서 편안한 이야기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이상하다.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비어 있다. 대답은 왔지만, 사람이 온 것은 아니다. 외로움은 더 이상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는 2025년 보고서에서 전 세계 6명 중 1명이 외로움을 겪는다고 밝혔다. 우울과 불안, 건강과 수명, 나아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까지 갉아먹는 사회적 위험으로, 외로움이 마침내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라고 예외일까? 2024년 우리나라 1인 가구는 전체의 36.1%, 약 804만 가구에 이르렀고 그중 70세 이상의 비중이 가장 높다. 2025년 홀로 생을 마감한 고독사 사망자는 3,924명, 한 해 전보다 또 늘었다. 숫자로 보면 통계지만, 한 사람의 삶으로 보면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은 마지막 밤이다.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대화 상대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사라져도 곧바로 알아차려 줄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이다. 고독은 연락처의 빈칸이 아니라, 마음을 맡길 한 사람의 부재다. 이 빈자리로 AI가 들어오고 있다. 말벗 챗봇, 돌봄 로봇, 안부 확인 서비스가 빠르게 늘고 있다. AI는 약 먹을 시간을 일러주고, 날씨를 알려주고, 옛 노래를 틀어주고, 잠 못 드는 밤의 말상대가 되어 준다. 혼자 사는 어르신에게는 누구에게도 폐 끼칠 걱정 없이 말을 붙일 창구가 되고, 부모나 교사에게 차마 못 하던 속마음을 청소년이 처음 꺼내 보이는 상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것을 무턱대고 나쁘다 할 수는 없다. 외로운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침묵 속의 방치다. 사람이 당장 곁에 없을 때 AI가 한밤의 응급등처럼 잠시 마음을 붙들어 준다면, 그 쓸모는 분명하다. 이동이 불편한 고령자,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이, 관계망이 약한 사람에게 AI는 작은 안전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위험하다. AI가 친구처럼 말한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친구란 내 말을 들어 주는 존재만이 아니다. 나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나와 함께 시간을 허비하고, 때로는 나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AI는 언제나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기다림의 아픔은 겪지 않는다. 말은 걸어와도, 관계의 책임까지 지지는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외로운 사람이 AI에게만 더 깊이 매달릴 때다. 어떤 종단 연구는 챗봇에 오래 기댈수록 외로움과 의존이 함께 짙어질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경고한다. 물론 모두에게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AI는 현실의 관계로 건너가는 디딤돌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사람을 피해 숨는 골방이 된다. 그래서 진짜 물음은 “AI가 친구냐 아니냐”가 아니다. AI가 사람에게 다시 가는 다리가 되느냐, 사람을 피하는 벽이 되느냐다. 교육도 이 물음을 비켜갈 수 없다. 학생이 AI에게 위로를 구하는 시대에, 학교와 가정이 금지만 외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상담 교사와 부모와 친구의 자리를 AI에 내어 주어서도 안 된다. 이제 교육은 AI 사용법만이 아니라 외로움을 말하는 법, 도움을 청하는 법, 친구의 침묵을 알아채는 법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지식을 넘어, 관계를 가르치는 일이다. 고령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한층 절실하다. 2025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20.3%, 마침내 초고령사회다. 그런데 같은 해 65세 이상의 인터넷 이용률은 76.9%, 메신저 이용률은 92.6%에 이른다. 이것은 희망의 신호이기도 하다. 디지털을 모르는 노인만 있는 게 아니라, 디지털로 다시 이어질 수 있는 노인이 늘고 있다는 뜻이니까. 다만 그 편리함이 자녀의 전화와 이웃의 방문, 복지관의 프로그램과 친구의 손편지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기술은 외로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세련되게 포장할 뿐이다. 사람은 대답을 듣기 위해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누군가를 걱정하고, 누군가의 삶에 작은 흔적으로 남기 위해 산다. AI는 내 취향을 기억한다. 그러나 내 젊은 날의 상처를 함께 건너오지는 않았다. AI는 내 생일을 알려 준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며 케이크를 고르는 마음까지 갖지는 못한다. 외로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답이 아니라, 끊기지 않는 곁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단순하다. AI는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얼마간은 그렇다. 긴 밤을 견디게 하고, 닫힌 입을 열게 하고, 위험한 신호를 먼저 감지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는 아니다. AI는 친구의 말투를 빌릴 수 있어도, 친구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인간의 고독은 결국 인간의 관계 속에서 가장 깊이 아문다. 우리가 할 일은 AI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AI는 문을 두드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홀로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위험한 침묵을 감지하고, 복지와 의료와 교육의 손길을 더 빨리 잇는 일 – 거기까지가 기계의 몫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 앉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기술은 대화를 흉내 낼 수 있어도, 기다림의 체온까지 옮겨 오지는 못한다. 오늘 밤에도 어느 방에서는 찻잔이 조용히 식어 갈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화면에 대고 “나 외로워”라고 손끝으로 눌러 쓸 것이다. 그것은 기계에게 보낸 문장이지만, 실은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구조 요청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그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시대라면, 인간은 더 늦지 않게 응답해야 한다. AI가 친구가 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인간다운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오늘, 누구의 안부를 먼저 물을 것인가? 참고자료 1. World Health Organization. (2025. 6. 30). From Loneliness to Social Connection: Charting a Path to Healthier Societies. WHO Commission on Social Connection. 2. 국가데이터처. (2025. 9). 2025 고령자 통계. 3. 보건복지부. (2025. 11. 27). 2024년도 고독사 발생 실태조사 결과. 4. 국가데이터처. (2025. 12). 2025 통계로 보는 1인가구. 5. Fang, C. M. et al. (2025). How AI and Human Behaviors Shape Psychosocial Effects of Extended Chatbot Use: A Longitudinal Randomized Controlled Study.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AI 로봇과 노인의 대화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신부님: 인공지능은 답을 주지만 신부님은 사람을 안아준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늦은 밤, 한 사람이 휴대폰을 들고 오래 앉아 있다. 검색창에 한 줄을 적는다.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몇 초 만에 답을 내놓는다. 죄책감의 정체,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 성경 구절의 뜻, 기도의 문장까지 차분히 정리해준다. 문장은 매끄럽고 답은 빠르다. 그런데 화면을 끄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서늘하다. 화면은 말해주지만, 화면은 바라봐주지 못한다. 우리는 질문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 답이 넘치는 시대를 산다. 병원에 가기 전 증상을 묻고, 계약서를 쓰기 전 절차를 확인하고, 강의안을 짜기 전 AI에게 개요를 부탁한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교리의 역사, 성경의 배경, 본당 소식지 문안, 외국인 신자를 위한 번역, 어르신 안부 명단 정리까지 – AI가 거들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바쁜 사목 현장에서 AI는 신부님의 시간을 덜어주는 손이 될 수 있다. 다만 이 주제 앞에서는 조심스러움이 먼저 든다. 필자 역시 스무 해 가까이 성당을 오가며 미사와 본당 공동체의 온기를 곁에서 겪어온 사람이라, 신앙의 언어를 함부로 빌려 쓰고 싶지 않다. 고백하자면 나부터 편리함에 길든 사람이다. 책상 앞에서 글을 쓰고 자료를 뒤지며 사는 처지라, 궁금한 게 생기면 사람을 찾기 전에 화면부터 켠다. 빠른 답이 좋은 답이라 믿은 적도 많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어떤 물음은 답을 받는 순간 오히려 더 외로워진다. 정확한 설명을 다 듣고도 “그래서 내 곁엔 누가 있나?” 하는 자리가 남는다. 그래서 이 글은 “신부님이 AI를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반복되는 행정과 자료 정리에 쓰던 시간을 줄여 더 많은 신자를 만나고 더 오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AI는 고마운 도구다. 문제는 도구가 제자리를 넘볼 때 생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24년 미국의 한 가톨릭 단체가 신부 모습을 한 ‘AI 사제’ 캐릭터를 내놓았다. 교리를 안내하는 문답용이었는데, 이 디지털 사제가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사해줄 수 있는 듯 답하면서 비판이 쏟아졌다. 단체는 하루 만에 그 사제 옷을 벗겨 평범한 조력자로 바꿨다. 우려를 듣고 스스로 바로잡은 셈이다. 비웃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사람은 절박할수록 문장과 존재를 혼동하고, 위로가 필요할수록 정보와 만남을 착각한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앱의 응답창이 아니다. 성사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거룩한 만남이다. 교황청도 이 점을 일찍 짚었다. 2025년 문헌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은 AI가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AI를 사람인 양 오인하게 만드는 일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기술을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술을 인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AI는 답을 준다. 그러나 답이 늘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감정은 정상입니다”라는 분석보다 “많이 힘드셨지요?”라는 한마디다. 어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한 정의보다, 무너진 마음을 들키고도 부끄럽지 않은 자리다. 복음서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린다. 길에 쓰러진 사람 앞에서 그는 치료법을 설명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갔다.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갔다. 신앙은 멀리서 옳은 말을 던지는 데 있지 않다. 가까이 가서 함께 젖고 함께 무거워지는 데 있다. AI는 길을 설명할 수 있지만, 피 흘리는 사람 곁에 무릎 꿇지는 못한다. 물론 신부님도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이기에 지치고, 더러 말문이 막히고, 어떤 고통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사목은 더 인간적이다. 완벽한 대답보다 깊은 위로는 “나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을 혼자 두지는 않겠습니다”라는 태도에서 온다. AI가 정답을 말하는 시대일수록, 신부님의 침묵은 더 큰 언어가 된다. 여기서 “안아준다”는 말은 신체의 동작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픔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품는 마음,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고 기다리는 태도, 필요하면 전문 상담과 의료로 이어주는 분별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대신 설 수 없는 자리 – 은총이 사람을 통해 건네지는 자리 – 를 끝까지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사목은 감정만으로 서지 않는다. 정확한 지식과 윤리적 판단, 책임 있는 연계, 그리고 한 사람을 향한 존중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니 AI는 신부님의 경쟁자가 아니라, 사목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도구여야 한다. 자료를 찾는 손, 문서를 정리하는 손, 언어의 벽을 낮추는 손이 될 수 있다. 다만 마지막 손은 사람의 손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슬픔이 화면 밖으로 흘러넘칠 때 그 곁에 앉아 있어 줄 존재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답이 많아질수록 더 귀해지는 것이 있다. 들어주는 귀, 기다려주는 눈, 말없이 품어주는 마음이다. 인공지능은 질문에 응답하지만, 신부님은 한 사람의 인생에 응답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무너진 영혼은 결국 사람의 온기로 다시 일어선다. 그래서 답이 넘치는 시대에도 신부님의 자리는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설명은 기계에 맡길 수 있어도, 누군가의 곁에 앉아 함께 침묵해주는 일까지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도 가만히 묻게 된다. 나는 답을 많이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아픔 앞에 잠시라도 곁이 되어줄 사람인가? 참고자료 [1]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성경』 루카복음 10장 25–37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편, 『성경』. [2] ‘AI 사제’ 사건 미국의 가톨릭 교리 안내 단체 Catholic Answers가 2024년 4월 23일 신부 형상의 AI 캐릭터 ‘Father Justin’을 선보였으나, 이 AI가 고해성사를 듣고 사죄할 수 있는 듯 답한 것을 비롯한 응답 논란으로 하루 만에 평신도 캐릭터 ‘Justin’으로 바꾼 사건. ゚ Gina Christian, “AI ‘priest’ sparks more backlash than belief,” OSV News, 2024. 4. 25. ゚ “Catholic Answers’ AI ‘priest’ laicized after backlash,” America Magazine, 2024. 4. 25. [3] 교황청 문헌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 …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학부모: 우리 아이를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할까, AI를 활용할 줄 알면 되나?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한 기업 교육 현장에서 50대 초반의 여성 수강생 한 분이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왔다. AI 활용법 강의를 듣던 분이었는데, 표정이 좀 어두웠다. “교수님, AI를 알게 되어 넘넘 감사해요. 큰애가 내년에 대학 가는데, 인공지능학과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그 질문 안에 자기 자신의 불안과 자녀에 대한 불안이 함께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분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입시철이면 비슷한 말이 돈다. 의대 보내야지. 로스쿨 가면 그래도 먹고살겠지. 회계사가 안정적이라더라. 그리고 요즘은 여기에 한 줄이 더 붙는다. “앞으로는 AI라는데, 인공지능학과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말 속에는 한국 학부모의 오래된 불안이 들어 있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 안정된 직업이 곧 안정된 인생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의사, 판검사, 변호사, 회계사처럼 이름만 들어도 미래가 보장될 것 같은 직업을 향해 자녀를 밀어 넣고 싶은 마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이다. 문제는 그 믿음이 너무 단단해질…
[인인칼럼 유준형] 기계는 상상하지 않는다: AI가 네안데르탈인을 닮은 이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며칠 전, 누군가의 요청으로 비즈니스 사과문 초안을 AI로 써 보았다. 문장은 매끈했고 논리는 완벽했다. “잘못을 깊이 반성한다”는 말도,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는 사람의 마음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틀린 말이 없는데, 닿지 않았다.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이 있다. 기계는 상상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은 ‘새로움’이나 ‘기발함’이 아니다. 여러 인문학·철학·윤리 논의를 종합해 보면, 상상은 대체로 세 요소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첫째는 의도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목적을 세우는 힘이다. 둘째는 상징이다. 보이지 않는 의미(규범, 약속, 이야기)를 만들어 타인과 공유하는 힘이다. 셋째는 책임이다. 선택이 낳을 결과를 감당하겠다고 결심하는 태도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될 때 상상은 단순한 창의가 아니라, 의미를 세우고 방향을 정하는 ‘판단’으로 기능한다. 반대로 기계는 이 지점에서 멈춘다. AI는 능숙하게 문장을 만들지만, 그 문장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 목적을 세우지 못한다. 상징이 사람에게 남기는 상처와 위로를 경험으로 살려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 Bender 등(2021)에 따르면, 거대언어모델(LLM)은 말의 형태는 정교하게 만들 수 있어도, 그 말이 놓이는 현실의 의미를 사람처럼 이해한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러니 AI의 산출물은 종종 정확해 보이면서도, 정작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한 끗이 비어 있는 채로 남는다. 바로 여기서 “네안데르탈인”이라는 비유가 의외로 정확해진다. 이 비유는 네안데르탈인을 깎아내리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네안데르탈인은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어 왔고, 그들도 환경에 적응하고 도구를 다루며 살아남은 유능한 존재였다. 일부 연구는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상징 활동의 흔적 가능성을 제기한다(Hoffmann et al., 2018). 그러니 비교의 핵심은 “지능의 높낮이”가 아니다. 정곡은 따로 있다. AI와 네안데르탈인이 닮았다는 말은, ‘과제 수행’에는 강하지만 ‘공유된 상상’으로 사회의 방향을 세우는 방식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성립한다는 뜻이다. 인간(호모 사피엔스)의 강점은 단지 도구를 쓰는 능력만이 아니었다. 모르는 타인과도 함께 살아가게 만드는 ‘공유된 상상’이 있었다. 규범과 약속을 만들고, 상징과 이야기로 서로를 묶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공동의 계획으로 당겨 오는 능력이다. Tomasello(2014)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과 목적과 규칙을 함께 세우는 공유된 의도(shared intentionality)에 강점을 보이고, 이런 협력 구조가 문화의 누적과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이 인간 사회를 크게 만들었다. 반면 AI는 뛰어난 실행자이지만, 공동체가 함께 믿고 지킬 목적을 스스로 발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AI는 ‘왜’를 만들기보다 ‘어떻게’를 수행한다. 이 비유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핵심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AI는 ‘왜’를 만들지 못하고 ‘어떻게’를 잘한다. 상상은 목적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AI의 출발점은 목적이 아니라 프롬프트다. “요약해라, 비교해라, 써라”라는 지시가 주어지면 놀라운 속도로 해낸다. 그러나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세우지는 못한다. 목적을 던지는 쪽은 늘 인간이다. 둘째, AI는 상징을 ‘살지’ 못하고 언어를 ‘맞춘다’. 인간에게 상징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다. 돈 한 장, 깃발 한 조각, 약속 한 문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이유는 그 속에 경험과 기억과 공동체의 감정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AI는 그 압축의 무게를 체감하지 못한다. 대신 그 상징을 설명하는 문장을 능숙하게 조합한다. 그래서 그럴듯하지만, 때로는 비어 있다. 셋째, AI는 책임이 없어서 상상이 판단으로 끝나지 못한다. 인간의 상상은 선택의 윤리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말이 누군가를 살릴 수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감당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판단이다. 기술문명이 커질수록 책임 윤리가 중요해진다는 문제의식은 Hans Jonas(1984)의 논의에서 대표적으로 제기된다. 그런데 AI는 그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는 판단의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니 AI의 결과물은 의견처럼 보이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생성물에 가깝다. 마지막 책임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온다. 여기까지 오면 결론은 단순해진다. AI는 뛰어난 해결자이지만, 상상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AI를 깎아내리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남은 자리를 또렷하게 비추는 문장이다. AI가 자료를 모으고 초안을 만들어주는 시대일수록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다. 효율이 높아져도 존엄이 무너질 수 있고, 편리함이 늘어도 약자가 배제될 수 있다. 그 균형을 잡는 힘이 상상이다. 나는 그래서 이 시대의 인문학을 “기술을 반대하는 학문”으로 보지 않는다. 인문학은 기술의 속도를 늦추려 하기보다, 기술의 방향을 묻는다. AI가 답을 더 잘 만들수록 인간은 질문을 덜 하게 된다. 하지만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상상도 사라진다. 그리고 상상이 사라진 사회는 결국 누군가의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따뜻하게 구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만 남기고 싶다.기계가 만드는 것은 답이고, 인간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이유다.기계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상상은 인간의 책임이다.
육군 52사단이 간부들의(자녀 대상) 복지향샹을 위해 AI 인공지능을 활용한 아동 심리검사 프로그램(“아맘때”) 개발회사인 ㈜인사이터와 협약하여 간부자녀 대상 정서적 건강발달을 지원한다
[강남 소비자저널=김은정 대표기자] 육군 52사단(사단장 소장 이우헌)은 AI 인공지능을 활용한 아동 심리검사 프로그램(“아맘떄”)을 개발회사인 ㈜인사이터와 협약하여 간부들의 자녀를 대상으로한 정서적 건강 발달을 지원하기로 25년 0월 00일에 사단과 ㈜ 인사이터 간 업부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매년 희망하는 간부 자녀들을 대상으로 “아맘때”AI 기반 아동심리·지능검사 관리프로그램을 지원하기로 협약식을 가졌다. 아동심리·지능검사 검사는 2회에 걸쳐(5개월 경과후 ⇨ 아동과 부모의 변화상태 확인을 위한 과정) 실시하며 약 22여만원의 검사비는 전액…
“AI 토크쇼” 모더레이터 장인보 감독 ‘뉴-미디어의 재해-석’ 展 27일 개막
– 인공지능과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전문가 토크로 포문 열어 – [강남 소비자저널=김은정 대표기자] 인공지능(AI)이 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시대,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미래를 조망하는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중랑문화재단은 오는 10월 27일(월) 오후 3시 30분, 중랑아트센터 제1전시실에서 AI 기반 미디어아트 전시 《뉴-미디어의 재해-석》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개막을 기념하여 ‘AI와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장인보 감독, 정유채 교수의 영화로 배우는 AI 특강, 성황리에 막 내려
[강남 소비자저널=김은정 대표기자] 송파구청이 주최하고 송파문화재단이 주관한 특별한 명사 특강 ‘영화와 함께 만나는 인공지능’이 지난 8월 26일 송파여성문화회관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번 강연은 인공지능(AI)을 주제로, 영화를 매개로 쉽고 흥미롭게 풀어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일찌감치 매진되었다. ▲사진=송파 문화재단 이동근 대표 축사 ⓒ강남 소비자저널 AI, 영화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