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눈물: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눈물: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켰을 때, 그 작은 불빛 속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데르센이 그 동화를 쓴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장면 앞에서 잠시 멈춘다. 배고픔보다 더 추운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슬픔이다. 사람은 빵이 없어서도 울지만, 내 눈물을 알아주는 이가 없을 때 더 깊이 운다. 이제 우리는 그 슬픔조차 기계에게 먼저 말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밤이 깊으면 누군가는 휴대폰을 켜고 묻는다. “오늘 너무 힘들어.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인공지능은 곧바로 다정하게 답한다. “많이 지치셨군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위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그 문장 하나가 무너지는 마음을 잠깐 붙들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곧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인공지능은 정말 슬픔을 이해하는 걸까, 아니면 이해하는 문장을 아주 잘 만들 뿐일까. 눈물은 그저 물방울이 아니다. 그 안에는 끝내 하지 못한 말, 오래 참아온 억울함, 놓쳐버린 사람, 미안해서 부르지 못한 이름이 고여 있다. 의학은 눈물을 생리 현상으로 설명하고, 심리학은 감정 반응으로 읽는다. AI는 표정과 목소리와 단어의 흐름을 분석해 슬픔의 확률을 계산한다. 그러나 추정과 이해는 다르다. 눈물은 데이터로 읽을 수 있지만, 눈물의 무게는 함께 울어본 사람만 안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도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해마다 72만 명 넘는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자살이 15~29세 사망 원인 가운데 세 번째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2024년 자살 사망자가 1만 4,872명,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2011년 이후 가장 높았다. 이 숫자 앞에서는 어떤 도구도 함부로 밀어낼 수 없다. 위험한 문장 하나를 AI가 먼저 알아채 상담자와 가족, 의료진에게 더 빨리 이어준다면, 그것은 한 생명을 붙드는 신호가 된다. 다만 슬픔을 다루는 기술은 그만큼 조심스러워야 한다. AI는 “괜찮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말의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 우울의 신호를 감지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밤을 함께 건너가지는 못한다. 깊은 우울, 자해의 위험, 상실의 충격은 AI와 단둘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다. AI는 눈물을 발견하는 등불은 될 수 있어도, 눈물을 닦아주는 손은 끝내 사람이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는 더 섬세해진다. 우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감정 점수 83점’이 아니다. 왜 울었는지, 누구에게 마음을 다쳤는지, 하고 싶은데 못 하는 말이 무엇인지 들어주는 어른이다. 유네스코가 생성형 AI 교육에서 인간 중심과 교사 역량을 강조하고, 유럽연합이 학교와 직장의 감정 추론 AI를 엄격히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이 미워서가 아니다. 아이의 침묵을 데이터로 단정하는 순간, 교육이 돌봄에서 감시로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AI가 교육이나 상담에 짐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잘 쓰면 교사는 위험 신호를 더 빨리 알아채고, 학생은 말하기 힘든 감정을 먼저 적어보며, 상담 현장은 위기의 아이를 더 촘촘히 지킬 수 있다. 이미 많은 교사와 상담사, 의료진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문제는 순서다. 감지는 AI가 앞서도 좋지만, 판단은 사람이 한다. 기록은 기계가 도와도 좋지만,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회복된다. 문학 속 눈물도 늘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었다. 장발장은 법의 판결이 아니라 미리엘 주교의 자비 앞에서 무너졌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서 예수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신앙의 해석은 저마다의 몫이지만, 그 짧은 장면은 오래 남는다. 거룩함은 슬픔을 모르는 무표정이 아니라, 슬픔 곁에 함께 머무는 마음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AI는 울지 않는다. 다만 우는 사람의 언어를 배운다.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상처받은 이에게 건넬 법한 말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니 그 위로가 전부 가짜라고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어떤 밤에는 그 문장 하나가 한 사람을 아침까지 버티게 하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다리로 써야 한다. 사람을 대신하는 방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슬픔은 지워야 할 오류가 아니다. 사랑했다는 증거이고, 잃은 것이 소중했다는 표시이며,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신호다. 울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게 아니다. 울고 나서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는 사람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는 눈물을 지우는 AI가 아니라, 눈물 뒤에 숨은 사람을 더 빨리 알아보게 해주는 AI다. 결론은 분명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어느 정도 읽는다. 슬픔의 단어를 가려내고, 위험을 감지하고, 위로의 문장을 건넬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해란 정보 처리의 결과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곁을 지키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AI는 눈물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 눈물 옆에 앉아줄 수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아무에게도 못 한 슬픔을 검색창에 적을 것이다. 그 문장을 기계가 먼저 읽는 시대라면, 사람은 더 늦지 않게 응답해야 한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따뜻해져야 한다.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 한 것도 첨단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안아줄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나는 오늘, 누구의 눈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인가? 참고자료 1.   World Health Organization. (2025. 3. 25.). Suicide fact sheet. 2.   통계청·보건복지부. (2025. 9. 25.). 2024년 사망원인통계 — 자살률 29.1명, 2011년 이후 가장 높아. 3.   OpenAI & MIT Media Lab. (2025. 3. 21.). Early methods for studying affective use and emotional well-being on ChatGPT. 4.   UNESCO. (2023, updated 2026). Guidance for generative AI in education and research. 5.   European Commission. (2025–2026). AI Act application timeline and prohibited practices. 6.   Fang, C. M. et al. (2025). Ho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노인의 눈물과 슬픔을 분석하는 AI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노인: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쓸 수도 있는 이유.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노인: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쓸 수도 있는 이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지하철 5호선, 오후 세 시쯤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화면을 넘기지 않았다. 한 화면을 오래 붙들고,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읽고 계셨다. 옆자리 청년은 릴스를 쉴 새 없이 넘기고 있었다. 누가 더 유능해 보였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청년 쪽을 가리킬 것이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 기능을 겁 없이 다루니까. 나도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르게 본다. AI는 손가락이 빠른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 질문이 깊은 사람의 도구다. 소크라테스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 더 깊이 묻는 사람을 지혜에 가깝다고 보았다. 이천사백 년 전 말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있다. 인공지능이 정답을 외운 기계가 아니라, 질문에 반응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ChatGPT든 클로드든, 같은 AI에게 물어도 어떤 사람은 검색엔진 수준의 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삶을 바꿀 통찰을 받는다. 차이는 기기가 아니라 질문에서 갈린다. 바로 여기서 나는 노인의 가능성을 본다. 노인은 기술에 늦다. 이건 사실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줄이 밀리고, 무인주차장에서 당황하고, 앱 하나 깔자면 자녀에게 전화를 건다. 이 고충을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다. 디지털 소외는 실재하는 고통이고,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다. 그러나 기술에 늦는 것과 기술을 못 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노인에게는 젊은이가 아직 갖지 못한 것이 있다. 사람을 오래 겪은 시간, 실패를 견딘 근력, 선택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감각.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구별하는 힘은 매뉴얼로 익히는 게 아니다. 살아내야 생긴다. AI 앞에서 “나한테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앱 스토어 순위를 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나이는 손을 늦출 수 있어도, 질문을 늦추지는 못한다. 생각해보면 AI가 노인의 일상에 들어올 자리는 이미 넘친다. 병원 예약 전에 증상을 정리해주고, 공공문서의 난해한 문장을 풀어주고, 자녀에게 보낼 문자를 조금 더 따뜻하게 다듬어준다. 혼자 사는 밤에 말벗이 되고,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던 것들에 답해준다. 이것은 유행이 아니다. 삶의 반경을 다시 넓혀주는 일이다. 그래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노인이 AI를 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왜 노인일수록 AI를 더 가까이해야 하느냐”로.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빨라지고, 제도는 복잡해지고, 설명서는 불친절해진다. “이제 나는 시대에서 멀어졌다”는 체념이 조용히 스며든다. AI는 그 체념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도구다. 정보에 다시 닿게 하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늘려주고, 세상과의 연결을 되살린다. 인공지능은 젊은이의 장난감이 아니라, 노년의 삶을 다시 넓혀주는 지팡이가 될 수 있다. 물론 불편한 진실도 있다. AI를 권하는 일 자체가 노인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 화면은 낯설고, 용어는 어렵고, 배우는 과정은 생각보다 두렵다. 그런데 기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건, “그것도 모르세요?”라는 한마디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짜증이 나서. 돌이켜보면 기술을 가르친 게 아니라 자존심을 깎은 것이었다. 기계와 기술은 시험지가 아니라 지팡이여야 한다.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기대어 걸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노인에게 AI를 강요하는 일이 아니다. 노인이 자기 속도로, 자기 필요에서 출발해 익히도록 돕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AI 교육의 첫 질문은 “이 버튼을 누르세요”가 아니라 “무엇이 가장 불편하세요?”여야 한다. 미국의 투자자이자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이었던 찰리 먼거는 “지혜는 단순한 정보 축적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의 축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AI 시대의 경쟁력도 다르지 않다. 정보는 기계가 준다. 그러나 그 정보로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를 정하는 것은 끝내 사람의 몫이다. 젊은 세대가 AI의 기능을 먼저 익힌다면, 노년 세대는 AI의 의미를 더 깊이 물을 수 있다. 기계는 정보를 준다. 그러나 삶의 방향은 끝내 사람이 정한다. 그렇다면 노인을 ‘디지털 약자’로만 부르는 말은 이제 고쳐야 한다. 노인은 배워야 하는 사람인 동시에, 더 좋은 질문으로 기술이 가야 할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세대다. 어쩌면 미래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빠른 손가락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어렵지 않다. 주변 어르신에게 “이거 어려우시죠?”라고 말하는 대신, “무엇이 가장 필요하세요?”라고 먼저 묻는 것이다. 미래는 젊은 손끝에서만 열리지 않는다. 삶을 오래 살아낸 사람의 질문 속에서도 열린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아날로그 지혜와 디지털 도구의 아름다운 공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