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 칼럼] 고결한 외면은 없다 정치적 무관심이 치르는 가장 비싼 대가

[손영미 칼럼] 고결한 외면은 없다 정치적 무관심이 치르는 가장 비싼 대가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언제부터인가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은 현대인의 세련된 태도처럼 소비되고 있다. “정치판은 답이 없다.” “그놈이 그놈이다.”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 마치 진흙탕 싸움에 발을 담그지 않는 고결한 선택인 양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이 관심을 거두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당신이 외면한 자리는 결국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2400년 전의 이 경고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를 혐오하면서도 정치가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시장을 외면하면서 좋은 물건만 팔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민이 감시를 멈추고 참여를 포기할 때 정치의 공간은 가장 무책임하고 가장 탐욕적인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다. 결국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온다. 내 삶을 바꾸는 법과 제도가 무능한 사람들의 손에 맡겨지고, 내가 낸 세금의 쓰임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며, 공동체의 미래가 소수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로 우리는 결국 나보다 못한 사람들의 결정에 의해 삶이 좌우되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 역시 같은 맥락에서 경고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나빠지는 이유는 악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 투표를 포기하는 것, 공공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 그 모든 무관심은 결국 현상을 유지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방관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때로 가장 강력한 동의가 된다. 정치가 추하게 보일 수는 있다. 반복되는 정쟁과 실망스러운 모습들 속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시민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때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돌보고 지켜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치 참여란 거창한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삶과 연결된 정책에 관심을 갖는 일, 선거 때 후보와 공약을 비교하는 일, 최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하여 더 큰 위험을 막는 일, 권력에 질문하고 감시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시민의 최소한의 책임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어느 날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희생, 그리고 책임 의식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 권리를 누리면서도 책임은 외면한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정치를 향한 냉소는 쉽다. 비판 역시 쉽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는 냉소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심과 참여, 그리고 책임 있는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권력은 언제나 시민의 수준을 비추는 거울이다.우리가 외면한 자리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진정한 고결함은 세상을 외면하는 데 있지 않다.불완전한 현실 속에서도 공동체를 위해 책임 있게 참여하는 데 있다.…

[정봉수 칼럼] 외국공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에 대한 노동법 적용과 한계

[정봉수 칼럼] 외국공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에 대한 노동법 적용과 한계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I. 문제의 소재 주한 외국공관은 대사관, 영사관, 문화원 등 96개에 이르며, 여기에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는 수천 명으로 추산된다. 외국대사관에 노무자문을 해주다 보면 자주 제기되는 질문중 하나가 한국인 근로자에 대한 ‘퇴직금 지급문제’이다. 사실 국내의 법정 퇴직금제도는 외국에는 없는 제도이고 근속연수가 길면 상당한 금액을 추가로 지출해야 하며, 이를 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노동법은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대한민국에서 근무하는 모든 근로자에게 적용된다. 노동법 위반 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강행법규이지만, 주한 외국공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의 경우, 노동법을 준수해야 하는 사용자가 외교관으로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1]에 따라 형사면책이 되어 법 집행에 어려움이 많다. 한국노동법의 적용은 해고 제한, 임금과 퇴직금의 지급보장, 산업재해보상, 노동3권의 보장 등 근로자의 기본권와 관련된다. 판례와 고용노동부 지침도 노동법의 보호와 한계를 규정하고 있어, 노동법 적용에 있어 외국대사관뿐만 아니라 그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에게도 혼란을 주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법령, 판례, 고용노동부 지침을 중심으로 검토해 본다.    II. 기본원칙  1. 관련 법령   한국근로자가 외국대사관과 체결하는 근로계약은 국내 근로기준법을 준수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더라도,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적용되는 속지주의 원칙 (근로기준법 제12조)에 따라 한국 내 모든 근로자에게 적용된다. 심지어 불법체류 외국인근로자도[2] 노동법의 보호대상이 된다. 국제사법[3] 제48조에 “근로계약의 당사자가 준거법을 선택하였거나 선택하지 않은 경우에도 준거법 소속 국가의 강행규정에 의하여 근로자에게 부여되는 보호를 박탈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근로기준법 제15조에 의하여 당사자 간 근로계약의 기준이 근로기준법에 미달하는 경우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효가 되고 무효가 된 부분은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한 근로기준법의 근로기준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사자 간 근로계약에 퇴직금 규정을 두지 않은 경우에도 근로기준법에 따른 퇴직금지급 의무가 있다.   2. 고용노동부의 일반지침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에 따르면, 주한 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근로자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관계[4]에서 “속지주의 법리가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으므로 양국 간 별도의 체결된 협약이나 규정이 없는 한, 주한 외국대사관이라 하여 국내법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다만, 주한 외국대사관은 외교관으로서 면책특권을 가지므로 “그에 대한 국내법의 집행(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이나 해고무효확인청구소송)에 있어 재판 관할권이 국내에 없다(`89.11.14. 대법89누4765)”라는 법원 판결과 같이 추후 국내법의 집행에 있어서는 상당한 제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명시하고 노동법 집행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  3. 법원의 판단    하지만 판례는 미군부대에서 고용되어 근무하다가 해고된 근로자가 미합중국을 피고로 하여 우리 법원에 제기한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우리나라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였다. 관련 고등법원이 근로자가 미국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재판권이 없다는 이유로 사건을 각하하였으나, 대법원은 미국을 상대로 하는 재판권을 인정하였다. 대법원은 “국제관습법에 의하면 국가의 주권적 행위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원칙이라 할 것이나, 국가의 사법적(私法的) 행위까지 다른 국가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이 오늘날의 국제법이나 국제관계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영토 내에서 행하여진 외국의 사법적 행위가 주권적 활동에 속하는 것이거나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이에 대한 재판권의 행사가 외국의 주권적 활동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될 우려가 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외국의 사법적 행위에 대하여는 당해 국가를 피고로 하여 우리 나라의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고 판시하고 있다.[5] 즉, 대사관을 피고(상대편)로 하지 않고 대사관을 파견한 대상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에는 재판 관할권이 인정될 수 있다.    III. 노동법 적용 1. 근로기준법 적용  (1) 부당해고 사건[6] 1997년 5월 1일부터 계약기간 없이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안 모씨는 2010년 예산 삭감 등을 이유로 근로계약 종료를 통보받자 오스트리아공화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는 2014년 4월 6일 판결에서 안씨의 해고무효확인소송 건에 대해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오스트리아공화국은 밀린 임금 등 9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면서 아울러 “지난달 1일부터 안씨가 복직하는 날까지 월 250만원 상당의 월급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안씨는 피고의 주권 행사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것이 아니라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대사관 직원들에 대한 보조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며, 안씨에 대한 고용계약 및 해고는 피고의 주권적 활동과 관련된 것이기 보다는 피고가 사법적(私法的) 계약관계의 일방 당사자로서 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안씨의 해고에 대해 우리나라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피고의 주권적 활동에 부당한 간섭이 될 우려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판례는 1998년 주한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해고된 한국인이 미국을 상대로 낸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외국의 주권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될 우려가 있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외국의 사법적 행위에 대해 당해 국가를 피고로 우리나라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례에 따른 것이다.  (2) 퇴직금제도   일반적으로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에 대한 퇴직금은 사용자의 지급의무로 인식하여 지급하고 있기 때문에 다툼의 여지는 없다. 다만, 대사관에서 사용하는 개인사용인인 가사사용인이나 정원사들에 대한 퇴직금지급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3)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적용   대사관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사업장이지만 외교관의 지위에 대한 비엔나 협약에 따라서 법집행에 제약이 따른다. 산재법에 따른 보상의무가 있다고 하면 당연히 대사관이 산재가입의 의무사업자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산재보험료 납부의무를 강제하고 있지 않다. 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근로기준법 적용에 따라 산업재해 보상을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내법의 집행에 대한 재판 관할권이 국내에 없기 때문에 강제집행을 통한 보험료의 체납처분도 불가능하다.[7] 따라서 산업재해 발생시 국내법 집행에 있어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다.  2. 집단적 노사관계   대사관에서의 노동3권은 인정받기 어렵다고 본다. 1988년 6월 10일 프랑스대사관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대표자를 선출하자, 대사관은 노동조합 위원장을 해고하였다. 이에 노동조합은 주한 프랑스대사를 상대로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제기하는 한편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해고무효확인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이 사건은 대사가 외교관으로서 면책특권을 가지므로 동인에 대한 재판관할권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각하되었다. 또한 관련하여 대법원에서도 “대사관에서 노조 대표자를 해고한 것이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하더라도 이를 사유로 한 노동위원회의 구제명령에 의하여 동인이 다시 재직하게 되지 않는 이상 원고조합의 대표자로서의 지위는 상실되었다고 하겠다”라고 판시하였다.[8] 이 사건 이후 유사한 사례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대사관에는 노동조합 설립이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3. 4대사회보험료 납부의무 (1) 고용보험과 산업재해보상보험은 상시근로자 1인 이상을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은 의무가입대상이다. 다만, 농업, 임업, 어업, 수렵업 중 법인이 아닌 자가 4명 이하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제외된다. 이에 대사관은 당연히 가입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외교공관의 특수성으로 인해 고용보험[9]과 산재보험 가입을 실질적으로 강제하지 않아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들이 실업급여와 산재보상의 혜택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로자가 실제 산업재해 발생시 근로기준법에 의한 산재보상을 대사관의 본국을 상대로 보상을 청구하여야 할 것이다.  (2)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관련 법령상 1인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장은 의무가입대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일부 대사관에서만 가입하고 있다[10].   IV. 대사관 직원의 노동법 적용방안 1. 대표 사례 (언론보도) 2009년 1월 31일 YTN 보도자료에 따르면, 2002년부터 인도대사관에서 운전사로 일했던 민정배씨는 2008년 말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인도법에 따라 예순이 넘으면 근무할 수 없고 퇴직금도 지불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고 하루 전에야 받았다고 한다. 이 사안에 대해 바람직한 구제방법을 검토해보면, 우선 해고된 민 씨는 인도대사관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인도정부를 상대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하여야 하고, 또한 서울지방노동청에 퇴직금미지급 진정사건을 제기 하여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1998년 12월 대법원 합의체 판결에 의하면 대사관과 관련된 주권적 문제가 아닌 “외국의 사법적 행위에 대하여는 당해 국가를 피고로 하여 우리 나라의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시한 부분에 따라 인도정부를 상대로 하여 부당해고 및 퇴직금 미지급분을 청구할 수 있을 것이다.[11]   2. 노동법의 보호 방향…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돌봄은 최적화될 수 있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돌봄은 최적화될 수 있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리스트} 얼마 전, 자료를 찾다가 짧은 영상 하나를 보았다. 한 돌봄로봇 시연 영상이었다. 로봇이 거실에 앉은 노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약 드실 시간이에요.” 노인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더니 엉뚱하게 되물었다. “자네는, 저녁은 먹었나?” 로봇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같은 안내를 한 번 더 명랑하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그 짧은 어긋남 앞에서 한참 멈춰 있었다. 노인이 묻고 싶었던 것은 약이 아니라, 곁에 있는 누군가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AI 돌봄로봇과 휴먼케어 서비스를 볼 때마다, 나는 그 노인의 되물음을 떠올리며 같은 질문 앞에 선다. 돌봄은 과연 최적화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기술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현장을 아는 사람일수록 기술이 절실하다. 인력은 부족하고 수요는 빠르게 는다. 종사자의 허리와 무릎, 마음은 이미 한계에 가깝다. 통계청 「2025 고령자 통계」는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3%에 이르렀고, 2050년에는 40%를 넘어설 것으로 본다. 보건복지부도 2026년부터 AI와 돌봄로봇, 스마트홈을 활용한 복지·돌봄 혁신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돌봄이 기술과 만나는 일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여기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떠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등불을 든 간호사로만 기억하지만, 그는 헌신만의 인물이 아니었다. 브리태니커는 그를 현대 간호의 기초를 세운 간호사이자 통계학자, 사회개혁가로 소개한다. 그는 병원의 위생 상태, 사망 원인, 환자 통계를 집요하게 살폈고, 숫자를 통해 제도를 바꾸려 했다. 감정만으로 돌본 것이 아니라, 근거로 돌봄을 개선한 사람이다. 돌봄을 선의에만 맡기지 않은 것이다. 돌봄은 마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마음이 빠지면 돌봄이 아니다. AI는 분명 돌봄을 돕는다. 한밤중 낙상을 감지해 가족에게 알리고, 약 먹을 시간을 일러주고, 며칠째 냉장고 문이 열리지 않은 독거노인의 집에 안부를 보낸다. 종사자가 밤늦게까지 붙들던 기록 업무도 덜어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장기요양 수요가 2043년에 2023년의 2.4배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요양보호사 공급은 정점을 지나 줄어들고, 현재 수준의 업무 부담을 유지하려면 2043년에 최대 99만 명의 추가 인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버지, 그리고 머지않아 우리 자신의 미래다. 그러나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과 기술이 돌봄을 대신한다는 말은 다르다. 돌봄의 본질은 시간을 줄이고 동선을 효율화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말하지 못한 두려움을 살피고, 반복되는 작은 요구 속에서 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기계는 체온을 잰다. 그러나 손이 왜 찬지는 끝내 묻지 않는다. 기계는 위험을 감지한다. 그러나 사람은 고독을 알아차린다. 영상 속 그 노인도 약이 없어서 외로웠던 것이 아니다. 말을 건넬 사람이 없어서였다. 현장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요양보호사가 하는 일은 단순한 반복 노동이 아니다. 그들은 대상자의 평소 눈빛을 기억하고, 서류에 적히지 않는 변화를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AI가 들어올수록 사람의 판단은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기술은 자료를 모은다. 그 자료가 누구의 삶을 뜻하는지는 사람이 읽어야 한다. 물론 반론이 있다. 돌봄이 그동안 사람의 헌신에만 기대 왔으니, 이제 기술의 도움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옳은 지적이다. 종사자의 희생을 미덕으로만 포장해선 안 된다. 허리가 무너지고 감정노동에 지친 현장을 그대로 둔 채 “사람의 손길이 중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돌봄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복과 부담은 기술이 덜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돌봄은 최적화될 수 있다. 다만 전부는 아니다. 일정과 위험 감지, 기록과 안내는 기계에 맡겨도 된다. 그러나 눈을 맞추는 일, 기다려 주는 일, 슬픔을 함께 견디는 일은 효율로 잴 수 없는 관계의 몫이다. 돌봄의 미래는 사람을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이 더 사람답게 돌볼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나이팅게일이 오늘의 돌봄로봇을 본다면 무조건 거부하진 않았을 것이다. 관찰과 통계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다만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기술이 환자 곁의 빛을 더 밝히는가? 아니면 사람의 얼굴을 더 멀게 하는가? 등불의 의미는 어둠을 없애는 데 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혼자가 아님을 알리는 데 있었다. 스마트 사회서비스가 진짜 스마트해지려면, 먼저 사람의 아픔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AI 돌봄을 말할 때마다 두 가지를 함께 묻기로 했다. 이 기술은 돌보는 사람을 덜 지치게 하는가? 그리고 돌봄받는 사람을 덜 외롭게 하는가?  둘 중 하나에만 답할 수 있다면, 그 기술은 아직 돌봄의 언어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다시 그 영상의 노인을 생각한다. “자네는 저녁 먹었나”라는 물음에 누군가 “저도 아직요, 같이 드실래요?”라고 답했다면, 그 짧은 순간은 어떤 최적화로도 대신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좋은 돌봄은 시간을 아끼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잊지 않는 기술에서 시작된다. 돌봄을 최적화하려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만은 끝까지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가? 주요 참고자료 보건복지부. (2026). 「복지분야 AI 응용제품 신속 상용화 지원(AX-Sprint) 사업」 및 AI 스마트홈 돌봄·스마트 사회복지시설 실증 사업. 통계청. (2025). 「2025 고령자 통계」. 한국개발연구원(KDI). (2026). 「노인돌봄서비스 인력의 전망과 정책방향」. Encyclopaedia Britannica. Florence Nightingale biography and facts. Florence Nightingale. (1860). Notes on Nursing: What It Is, and What It Is Not.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등불을 든 나이팅게일과 디지털 융합  

[정봉수 칼럼] 최저임금제도의 적용과 사업주의 법적 책임

[정봉수 칼럼] 최저임금제도의 적용과 사업주의 법적 책임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I. 문제의 소재 2026년 7월, 최저임금심의위원회는 2027년 적용되는 최저임금 시간급을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이 최저임금 결정을 위한 가장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시점이다. 최저임금의 인상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수준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지만, 최저임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정봉수 칼럼] 외국인 가사근로자 제도의 도입 필요성과 성공 조건

[정봉수 칼럼] 외국인 가사근로자 제도의 도입 필요성과 성공 조건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I. 문제의 소재 현재 외국인 가사 근로자는 중국 교포에만 허용되고 있고,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있지 않다. 지난 2024년 9월부터 2025년 2월 까지 서울시에서 시범사업으로 필리핀 가사 도우미를 도입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서 더 이상 추진되고 있지 않다. 이 외국인 가사 근로자 제도를 도입하면서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 첫째, 외국인 가사 근로자를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로 도입했고, 최저 임금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둘째, 가사 근로자를 입주 도우미가 아닌 근로자파견 방식으로 운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싱가포르 가사 근로자에 대한 운영에 대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의 외국인 가사 근로자가 실패로 끝난 이유를 알아야 하고, 싱가포르의 대부분 가정이 사용하고 있는 가사 근로자 제도를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델을 통해서 우리나라도 외국 가사 근로자 도입을 다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은 저렴한 외국인 가사근로자를 고용하여 아이나 노인들의 돌봄업무와 가사업무를 전담시킴으로써 여성의 고용참가율을 높이고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부족한 일손을 해결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외국인 가사근로자 활용제도 도입시 국내 노동법의 보호환경, 싱가포르의 외국인가사근로자 활용제도와 제도 도입 시 고려해야 할 사항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표>  각 국별 가사근로자 현황비교 (각국의 통계청 자료, 2016년 기준) 구분 한국 싱가포르 홍콩 총 국민 수 50,503,933명 5,696,506명 7,317,227명 1인당 국민소득(GDP) $27,195 $52,755 $42,097 여성 고용참가율 52.1% 60.4% 54.8% 가사근로자수 201,973명 237,100명 340,000명 (인구 대비 비율) 0.4% 4.2% 4.7%…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가짜 뉴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가짜 뉴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거짓은 이제 문장으로만 오지 않는다. 사진으로 오고, 영상으로 오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낸 음성으로 온다. 한 사람의 휴대전화에서 시작된 왜곡이 몇 시간 만에 가족 단톡방을 건너가고, 교실과 직장과 시장 바닥까지 흔든다. 예전의 가짜 뉴스가 사실을 비틀었다면, 오늘의 가짜 뉴스는 진실의 얼굴까지 훔쳐 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는 단순히 정보가 많다는 데 있지 않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멈추어 의심해야 하는지조차 흐려지고 있다는 데 있다. 나는 IT 분야에서 40여년을 보냈다. 컴퓨터가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부터, 알고리즘이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방식까지, 이 안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위험한지 직접 만들어 보고 가르쳐 왔다. 그런 나조차 요즘은 휴대전화 화면 앞에서 한 번 더 멈추게 된다. 지금의 합성 기술은 기술자의 눈에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러니 보통의 시민이라면, 자기 의심이 부족하다고 자책할 일이 아니라 시대 자체가 그만큼 위태로워졌다고 말해야 옳다. 2024년 5월, 부산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60대 어머니가 딸의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 친구 보증을 섰는데… 내가 잡혀 왔어.” 목소리도 말투도 영락없는 딸이었다. 어머니는 곧바로 집 근처 은행으로 달려가 2000만 원을 인출했다. 다행히 창구 직원이 어딘가 이상하다 싶어 112에 신고했고, 경찰 조사 끝에 그 목소리가 AI로 합성된 딥보이스였음이 밝혀졌다. 한 한국경제가 보도한 이 사건을 읽으며 나는 두 번 멈췄다. 한 번은 “엄마, 나…”라는 그 다섯 글자 앞에서 무너졌을 어머니의 마음이 떠올라서, 또 한 번은 그 어머니를 구한 것이 첨단 기술이 아니라 창구 직원의 한 번의 의심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이 사건은 예외가 아니다. 세계경제포럼은 2025년 보고서에서 허위정보와 조작정보를 2년 연속 가장 큰 단기 위험으로 꼽았다. 차가운 숫자처럼 보이지만, 부산의 그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 숫자가 가리키는 현실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무엇이 사실인가?”를 묻는 사회에서, “무엇을 믿어도 되는가?”를 두려워하는 사회로 옮겨가고 있다. 가짜 뉴스의 가장 무서운 힘은 사람을 속이는 데만 있지 않다. 더 무서운 힘은,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뉴스조차 믿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AI로 만들어진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실을 보면서도 “저것도 가짜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사실을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존재 자체를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순간은 의견이 갈릴 때가 아니라, 같은 사실 위에 함께 설 수 없을 때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다시 진실을 붙들 수 있을까. 나는 화려한 기술이나 빠른 검증 도구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답은 훨씬 오래된 자리에 있다. 출처를 묻는 한 번의 습관, 자극적인 주장 앞에서 잠시 멈춰 교차 확인을 해보는 작은 절차, 그리고 언론과 학교와 공공기관이 책임을 미루지 않고 나눠 지는 자세. 이 평범한 것들이 위기의 시대에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다.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거짓도, 출처를 묻는 한 번의 손가락 앞에서는 힘이 약해진다. 그래서 교육의 역할이 더 커진다. AI와 가짜 뉴스를 말하면, 기존 학교 교육이 낡았으니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이 계실까 봐 미리 말씀드린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읽기와 쓰기, 역사 이해, 논리 훈련 같은 기본 교육이 더 절실해졌다고 본다. 학생이 문장을 정확히 읽지 못하면 조작된 정보를 구별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 아이가 자극적인 영상 제목을 보고 ‘진짜예요?’ 묻는 그 한순간, 그 옆에 선 선생님의 응답이 그 아이의 30년 뒤 시민의식을 결정한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힘, 출처를 확인하는 습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윤리—이런 것들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교실이라는 자리에서 길러진다. 알고리즘이 길러주는 것이 아니다. 유네스코도 생성형 AI를 교육과 연구에 활용할 때 인간 중심의 접근과 연령에 맞는 윤리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을 들이기 전에, 사람이 그 기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부터 함께 보자는 뜻이다. 그 한마디가 무겁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말한다. 가짜 뉴스는 AI 시대 이전에도 늘 있었고, 결국은 사람의 판단력 문제 아니냐고. 일리가 있다. 거짓은 언제나 있었고, 군중심리도 늘 인간 사회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환경은 다르다. AI는 거짓의 생산 비용을 급격히 낮추고, 유포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이며, 외형적 그럴듯함까지 더한다. 한때는 조악해서 의심받던 조작물이, 이제는 너무 정교해서 먼저 믿고 싶어지는 단계로 들어섰다. 이전과 같은 수준의 경계로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AI를 공포의 대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같은 기술이 거짓 영상의 흔적을 추적하고, 사실 확인을 돕고, 방대한 자료를 교차 검토하는 데에도 쓰인다. 내가 현장에서 매일 만나는 AI는 위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검증 도구이기도 하다. 문제는 늘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방향이다. 진실보다 자극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도구를 위험하게 만든다. 거짓은 늘 사람의 불안을 먹고 자라고, 진실은 사람의 인내 위에서 겨우 자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다. 단톡방에 올라온 그럴듯한 영상을 받았을 때, 곧바로 옆 친구에게 전달하지 않고 한 호흡 멈추는 일. 그 멈춤이 가짜 뉴스의 가장 무서운 동력인 “속도”를 끊어낸다. 누군가가 “잠깐, 출처가 어디야?” 한마디만 던져도, 가짜 뉴스의 전파 사슬은 그 자리에서 끊어진다. 부산의 그 어머니를 구한 것도 결국 그런 한 호흡이었다. 첨단 기술이 아니라 한 창구 직원의 의심이, 한 가족의 통장과 한 어머니의 자존심을 지켰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우리가 가장 쉽게 속는 정보는, 모르는 사람이 보낸 정보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꼭 드는 정보다. 내 생각과 맞는 영상일수록,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약점을 드러내는 자료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해야 한다. 같은 편이 보낸 거짓을 가장 빠르게 퍼뜨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진실은 시끄럽지 않다. 그래서 더 천천히 읽어야 하고, 더 조심스럽게 믿어야 한다. 화려한 캠페인이나 새로운 검증 기술이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우리를 구하는 것은 손가락을 잠시 멈추는 평범한 시민들의 작은 절제, 출처를 한 번 더 따라가 보는 수고, 그리고 자기 편의 정보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정직함이다. 진실은 저절로 이기지 않는다. 누군가 손가락을 멈추는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진실은 가까스로 한 번 더 살아남는다. 우리가 지켜줄 때에만, 겨우 살아남는다. 주요 참고자료 한국경제, “영락없는 자녀 목소린데…AI 보이스피싱, AI로 방지”, 2025.4.8 세계경제포럼, Global Risks Report 2025 Reuters Institute, Digital News Report 2025 Ofcom, Understanding misinformation, 2024 UNESCO, Guidance for generative AI in education and research, 2023 (updated 2026)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진짜와…

[정봉수 칼럼] 개정 노조법상 하청노조의 단체교섭 참가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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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I. 의의  개정 노동조합법 제2조에서 “사용자라 함은 사업주, 사업의 경영담당자 또는 그 사업의 근로자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사업주를 위하여 행동하는 자를 말한다. 이 경우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ㆍ결정할 수…

[정봉수 칼럼] 노란봉투법을 통한 하청근로자의 근로조건 개선

[정봉수 칼럼] 노란봉투법을 통한 하청근로자의 근로조건 개선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현행 노동법은 헌법에 기초한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라 명시하고 있다. 또한 헌법 제32조 제3항은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이 존엄성을 보장되도록 법률로 정한다.” 즉 이는 근로기준법의 제정 목적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리고 헌법 제33조 제1항 역시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라 규정하면서 노동3권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노동조합법이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하고 있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형사 처벌을 한다. 노동조합법은 사용종속관계에 종속된 개별 노동자들에게 노동3권을 보장하여 노동자 집단을 만들고 사용자(자본가)에 대항하여 대등하게 협상하고 필요시 파업을 통해 노사간에 공정한 규율을 정하도록 지원한다. 그런데, 왜 헌법에서 노동3권을 기술하게 되었는가? 헌법에서 노동3권을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노동조합이 없으면 사용자는 근로조건을 근로기준법에 맞추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근로조건의 향상을 이루지 못한다. 서양의 근대 시민법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하는 소유권절대의 원칙, 계약자유의 원칙, 과실 책임의 원칙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법의 원칙을 적용하게 되면, 노동자는 사용자에 종속노동을 하기에 더 나은 근로조건을 요구할 경우에 해고될 수 있기 때문에 근로조건의 향상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업재해의 위협에 노출됨에 따라 단결하지 않으면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단결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에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이 등장하여 자본가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집단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국가는 노동자의 인권과 복지를 보장하지 아니하고는 자본주의적 근대 시민법 질서 자체도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사회정의의 실현과 근로자의 실질적인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헌법상 기본권으로서 노동3권을 보장하게 되었다. 독일은 1919년의 바이마르헌법에서 노동자의 단결 자유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1935년 와그너법 (Wagner)에서 근로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명문화 하였다. 그러면 헌법에서 보장된 노동3권은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보장해주고 있는가? 노동3권은 근로자가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스스로 단결하여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하여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유리한 교섭을 이끌어내기 위한 파업이나 태업 등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러한 노동3권은 헌법에서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이므로 이를 행사하는 노동자의 집단인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직접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 이에 사용자가 교섭에 대응하지 않으면 이는 부당노동행위로 형사처벌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구제의 대상이 된다. 또한 노동조합은 더 나은 근로조건을 갖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쟁의행위(파업)를 할 수 있으며, 이는 사용자의 정상적인 업무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형사 책임을 부담할 수 있으나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조법의 보호를 받는다. 결국 사용자는 노동자의 집단적 파업에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에서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노사간의 갈등을 해결해주는 최종적인 합의가 단체협약이고, 노사관계에 있어 가장 상위의 규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이 노동조합의 역할은 노사간의 갈등 해결의 방향을 제시한다. 지난 2026년 4월 포스코에 대한 눈에 띄는 2건의 노동뉴스가 있었다. 4월 8일 포스코는 조업 지원 협력사 노동자 7천명을 직고용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8일 뒤 4월 16일 대법원은 포스코 사내 협력사 노동자 223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근로자로 인정하였다. 즉, 포스코는 포스코 내 사업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내 하청 노동자 7천명의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을 차단하기 위하여 정규직으로 채용하였다. 이 사건은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2011년부터 제기한 소송으로,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약 6년의 기간 동안 상당한 어려움과 불이익을 겪었다. 만약, 현 노란봉투법이 좀더 일찍 시행이 되어 하청 노조가 원청인 포스코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통해서 근로조건 개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면, 해당 노동자들의 수고와 고통을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조합을 통한 노사가 대등하게 근로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노사자치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II). 그리고 하청 노동자들이 노란봉투법을 통한 노동3권의 적용 확대(III)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다. II. 노사자치의 법적 구조와 제도 1. 헌법상 노동조합의 권리 헌법에서 노동3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헌법적 의미는 근로자단체라는 사회적 반대세력의 창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노사관계의 형성에서 사회적 균형을 이루어 근로조건에 관한 노사간의 실질적인 자치를 보장하는 데 있다.  즉,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노동자를 사용하여 이윤을 얻게 되기 때문에 개별 노동자들은 사실상 교섭력을 가질 수 없다. 이에 합법적인 단체로서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근로조건을 흥정할 수 있는 노동자의 집단이 노동조합이 된다. 이에 대해 국가는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공정한 교섭을 통해 근로조건을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있다. 이것이 헌법에 명시된 노동3권의 의미이다. 2. 사용자성 확장을 인정한 판례와 노동부 지침 우리나라 노동법은 근로조건의 결정에 있어서 노사자치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산업평화를 위한 역사적 산물이다. 근로기준법 제4조 근로조건의 결정에서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라 하면서 노사대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는 거의 모든 근로규정에 있어서 근로자의 과반수 노동조합과의 합의 또는 협의를 요구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24조(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제한) 제3항에서 “사용자는 제2항에 따른 해고를 피하기 위한 방법과 해고의 기준 등에 관하여 그 사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를 말한다. 이하 “근로자대표”라 한다)에 해고를 하려는 날의 50일 전까지 통보하고 성실하게 협의하여야 한다.” 각종 변형근로시간제나 휴가사용대체, 연차휴가 대체 사용 등에서 근로자 대표와의 서면합의를 요구하고 있다.  취업규칙의 변경 절차에 있어서도 과반수 노동조합의 동의 또는 의견 청취를 하여야 취업규칙으로서 효력을 가진다. 3. 노사자치제도를 통한 노사관계의 평화적 관계 노사자치제도는 헌법상의 노동3권을 보장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개별적인 노사관계에서도 과반수 노동조합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사업주가 취업규칙에 정해진 근로조건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경우에는 과반수의 노동조합이 있는 반드시 과반수의 노동조합과 교섭을 통해서 동의 또는 협의하여 결정해야 한다. 이를 위반한 경우에는 회사의 규정으로 효력이 없다. 또한 30인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은 근로자의 대표를 선정하여 노사 동수로 구성된 노사협의회를 운영할 법적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근로조건을 결정하게 되면, 사용자의 이익추구라는 본능적 활동 때문에 노동자의 근로조건의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III. 노란봉투법과 노동3권의 적용 확대 1. 노란봉투법의 도입 배경 우리나라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에 고용의 유연화가 법제화되면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가 확대되었다. 2007년 비정규직보호법이 도입되었으나, 산업의 이중구조는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더 확대되었다. 특히,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으나, 원청소속 직원과 하청직원의 급여 수준에 큰 차이가 있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법 제2조(정의-사용자범위의 확대, 노동쟁의 개념의 확대)와 제3조(손해배상의 제한)를 개정한 내용에 대한 별칭이다. 그 유래는 2009년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과 관련이 있다. 쌍용자동차 법정관리인은 2009년 4월 경영정상화를 위해 7,135명 중 37%인, 2,646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2009년 5월에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들어가 8월까지 76일간 공장 점거 총파업을 진행하였다. 법원은 2014년 쌍용자동차 파업참여 노동자들에게 47억 원의 손해배상을 판결했다. 한 시민이 “4만 7천 원이라도 보태고 싶다”며 노란 월급봉투에 담아 한겨레 신문사에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공장점거 파업에 참가한 모든 조합원에게 재산상 가압류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안타깝게도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근로자 중 30여명이 목숨을 끊었다. 만약 노란봉투법이 그 때에 있었다면 2009년 쌍용자동차의 노동조합이 사용자의 정리해고에 대항한 공장점거는 정당한 파업이고, 그 파업에 따른 참가조합원들에 대한 재산 가압류도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2022년 대우조선해양의 하청회사 노동조합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하였다. 당시 조선업의 불황으로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이 30% 삭감된 지 8년 이상 되었다. 조선업이 다시 호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청의 임금은 저임금으로 계속되었고, 이에 대해 하청 노동조합은 도크를 점거하는 농성을 하였다. 특히, 파업중 조합간부가 철제 구조물을 만들어 거기에 들어가 파업을 장기화하면서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이 파업이 후 원청은 하청노조에 대해 47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이 사건은 원청사용자가 하청근로자의 실질적 임금인상을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하청 노동조합의 단체교섭 확장된 사용자 개념에 따라 근로계약 관계는 없지만, 실제로 원청이 하청회사의 근로자에 대한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경우에는 사용자로 본다. 즉, 하청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원청에 대해 단체교섭을 요구하여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하청노동조합의 단체교섭 요구를 원청의 사용자가 거부하게 되면, 단체교섭 거부로 인한 부당노동행위가 된다. 원청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구제신청뿐만 아니라 형사처벌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원청 사용자는 변경된 사용자의 개념에 따라 사용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여기서 노동조합법 제29조의2는 하나의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조직형태에 관계없이 근로자가 설립하거나 가입한 노동조합이 2개 이상인 경우 노동조합은 교섭대표노동조합을 정하여 교섭을 요구하여야 한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하청노동조합이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있지만, 하나의 교섭창구를 만들어 교섭을 요구해야 할 의무가 발생한다. 이 규정에도 불구하고 하청 노동조합이 사업장에서 현격한 근로조건의 차이, 고용형태 등으로 분리교섭이 필요한 경우에는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분리교섭을 할 수 있다. 특히 하청노동조합은 다양한 하청회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교섭창구의 분리 신청이 많이 발생할 것이라 예상된다. 3. 하청근로자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하청근로자가 원청을 상대로 한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을 하더라도 보통 5년이상이 되어야 확정이 되고, 그 상당한 기간 동안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직업을 변경하기 때문에 실익이 없다. 현대미포조선 위장도급 사례는 하청노조가 노동조합을 설립하자 하청회사가 2003년 1월 31일 폐업하였다. 이에 대해 근로자 30명이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을 한 결과 대법원은 2008년 7월 10일 원청회사와 하청근로자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가 인정된다는 판결을 하였다. 무려 5년이 걸려 해결이 되었다. 현대자동차 위장도급 사례에서도 하청회사에서 노동조합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2005년 2월 2일 근로자 15명이 해고 되었다. 대법원은 2012년 2월 23일 현대자동차의 위장도급을 인정하였다. 이 사건도 무려 7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앞서의 포스코의 사내하청의 경우에도 6년이 걸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왔다. 사내 하청 근로자들이 근로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은 노동조합을 통해서 설립하고, 원청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것이다. 원청 사업주와 하청 노동조합의 단체교섭은 대등한 당사자간의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자리이므로, 원청 사용자가 단체교섭 사항에 대해 수용하지 않을 경우, 하청 노조는 파업을 하여 교섭의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원청의 정규직에 해당하는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청 노동조합 소속의 근로자들이 원청 사용자를 상대로 임금인상을 이끌어 낸다고 하면, 굳이 원청의 근로자라는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노란봉투법을 통해서 하청 노동조합 소속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이 대폭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IV. 맺음말 헌법에서 노동3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호하고 있다. 이는 근대시민법의 원칙만 인정된다고 하면, 종속노동으로 생존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은 근로기준법상의 최저기준에 머무르게 되어 사회의 양극화로 인한 갈등이 사회적 불안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노사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헌법은 종속노동에 속하는 노동자들의 집단을 인정해주고 이를 통해서 노사 평화를 이루도록 헌법에서 노동조합을 보호해주고 있다. 한국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에 수많은 정규직 근로자들이 정리해고 되었고, 그 정리해고된 자리에 기간제나 계약직, 또는 사내하도급으로 채워졌다. 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의 급여 50% 정도의 급여를 받는 하청 근로자들에게는 이번 개정된 노란봉투법이 원청의 노동자와의 근로조건을 줄일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비정규보호법이 2007년 도입되었지만, 많은 원청 사용자들이 기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내하청으로 변형하거나 다양한 비정규직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이번 노란봉투법을 통해서 진짜 사용자를 찾고 그 사용자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해야만,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란봉투법은 헌법에서 보장된 노동조합을 통해서 하청노동자의 노동조합이 원청 사용자에게 교섭을 요구하는 것이다. 앞으로 노사 대등의 근로조건 결정원칙을 가지고 원청 사용자와 하청 노동조합간에 단체교섭을 통해서 서로 상생하는 노사관계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사진=노란봉투법(그림:정하은)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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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중장년들을 위한 작은 강의 자리에서 한 분을 만났다. 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셨다는 6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손에 든 휴대폰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교수님, 이거에다 그냥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는 게 정말이에요?” 나는 그분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켰다. “한번 해보세요. 평소에 궁금하셨던 거 아무거나요.” 그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건강보험에서 보내준 종이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거 좀 쉽게 풀어줄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올리자, 화면에…

[손영미 칼럼] 소년은 왜 춤추기 시작했는가

[손영미 칼럼] 소년은 왜 춤추기 시작했는가

–  Billy Elliot에 대한 공연 리뷰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인간은 때때로 자신에게 가장 금지된 곳에서 운명을 발견한다. 소년 빌리에게 그곳은 거친 복싱장이 아니라, 부드러운 발레 교실이었다. 탄광의 먼지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던 영국 북부의 음울한 회색 도시. 파업과 실업, 가난과 분노가 뒤엉킨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거친 풍경 한가운데서 한 소년은 묻는다. “나는 왜 춤을 추고 싶은가.” 그 질문은 단순한 취미의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자기 영혼의 진동수를 처음으로 감지한 순간에 가깝다. 빌리는 세상이 규정한 ‘남성성’의 틀에서 벗어난다. 강해야 하고, 싸워야 하며, 울지 말아야 한다는 완고한 질서 속에서 그는 몸이라는 도구로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언어가 ‘말’이 아닌 ‘춤’이라는 사실이다. 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다. 언어가 탄생하기 전, 인간은 몸으로 슬픔을 새겼고, 기쁨을 하늘로 던졌으며, 절망을 발로 구르며 견뎌냈다. 빌리의 도약은 단순히 미학적인 발레 동작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된 존재가 자기 영혼의 감옥을 박차고 나오는 철학적 몸짓이다. 특히 작품 속에서 인상적인 지점은 ‘침묵하는 남성들’의 변화다. 광부인 아버지와 형은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시대의 피로와 투쟁 속에서 감정을 거세당한 이들이다. 그러나 빌리가 춤추는 찰나, 그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예술은 생존 이후에 누리는 사치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절망적인 순간, 인간을 인간답게 남게 하는 최후의 불꽃이다. 뮤지컬 무대에서 이러한 감정은 더욱 강렬하게 증폭된다. Elton John 의 음악은 거친 노동의 리듬과 소년의 섬세한 내면을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특히 〈Electricity〉가 울려 퍼지는 순간, 관객은 더 이상 타인의 춤을 관람하는 제삼자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삶 속에서 한 번쯤 접어두었던 꿈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춤출 때 어떤 기분이 드니?” 그 질문에 빌리는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전기(Electricity)가 흐르는 것 같아요.” 이 대사는 현대 예술철학의 핵심을 관통한다. 진정한 예술은 논리보다 먼저 도착한다. 인간은 어떤 아름다움 앞에서 먼저 전율하고, 이해는 그다음에 찾아온다. 예술은 해석되기 이전에 이미 몸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무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인이 된 빌리가 공중으로 비상하는 장면은 흔한 성공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삶의 중력을 극복해내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가난은 여전하고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결정적인 변화가 있다. 소년이 더 이상 자신의 재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인간의 자유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단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Billy Elliot 는 단순한 성장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은 무엇 앞에서 가장 자유로워지는가.” 마지막 조명이 꺼진 뒤에도 마음속에 길게 잔상이 남는 것은 화려한 테크닉이 아니다. 한 소년이 세상의 편견보다 자기 심장의 떨림을 더 신뢰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