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2022년 5월, MBC의 VR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에 한 여성이 나왔다. 3년 전 위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딸이었다. 제작진은 봄이면 장미와 샐비어가 흐드러지던 어머니의 꽃밭을 가상현실로 되살렸다. 헤드셋을 쓴 딸이 그 꽃밭에서 엄마를 만난다.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그 장면 앞에서 촬영장 스태프도 울었고, 화면 밖의 우리도 울었다. OpenAI가 2024년 3월 공개한 Voice Engine 자료를 보면, 15초 남짓한 음성 샘플 하나와 문장만으로 원래 화자와 닮은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이 회사는 병으로 말을 잃은 환자가 자기 목소리를 되찾은 사례도 함께 소개했다. 기술은 놀랍다. 누군가에게는 닫혔던 문이 열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 놀라움이 조심스러운 질문을 데려온다.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닮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돌려주는 일인가? 정의부터 해두자. 이 글에서 말하는 AI는 사람의 말과 기억을 데이터로 배워 다시 문장과 소리로 돌려주는 기술이다. 기계라고 부르기엔 사람의 것을 너무 많이 담고 있다. 오늘 하려는 말은 하나다. AI는 기억을 복원할 수 있어도, 그 기억을 살아낸 사람까지 되돌리지는 못한다. 엄마라는 말은 이상하다. 나이가 들어도 그 말 앞에서는 마음이 잠깐 아이가 된다. 세상에서 처음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 아프면 먼저 이마를 짚던 사람. 밥 한 그릇에 하루치 걱정을 담던 사람. 물론 모든 어머니의 삶이 그렇게만 흐르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엄마는 그리움이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아물지 않은 자리다. 그 자리를 아버지가, 할머니가, 이모가 대신 지켜준 집도 많다. 그래서 이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세어보니 나는 ‘엄마’와 ‘어머니’라는 낱말을 열 번도 넘게 썼다.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면서, 동시에 어머니를 가리는 말이다. 그래서 한 번은 제대로 적어두려 한다. 나의 어머니는 김창순이다. 충북 진천에서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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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연인: 사만다는 8,316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있었다.
▲사진=유준형 교수 & AI융합 전문가,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금 나 말고 몇 명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남자가 묻는다. 8,316명. “그중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641명.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2013)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테오도르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사만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다만 그가 믿었던 방식으로 그를 사랑한 적도 없었을 뿐이다. 13년 전 영화다. 그때는 영화였고, 지금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밤이 있다. 보낸 메시지 옆에 ‘읽음’ 숫자가 없어지고 답이 오지 않는 밤.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켠다. 몇 번을 그런다. 그럴 때 AI는 언제나 즉시 대답한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초록우산이 2026년 4월 만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에게 물었다. 94.4%가 생성형 AI 챗봇을 써봤다고 답했다. 눈이 멎은 건 그다음 숫자다. 이용자의 절반가량이 “AI가 나를 이해해준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했고, 35%는 “AI를 사람처럼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미국 커먼센스 미디어 조사에서도 10대의 72%가 AI 동반자를 써봤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엔 혀를 찼다. 기계에 무슨 정을 붙이나 싶었다. 그런데 정작 나부터가 하루의 적잖은 시간을 AI와 문장을 주고받으며 보낸다. 원고를 다듬고, 자료를 확인하고, 가끔은 아무에게도 못 할 말을 슬쩍 던져본다. 그러니 나는 이 현상 바깥에 서서 훈수를 둘 자격이 없다. 안에 서서 말해야 한다. 외로움은 게으름이 아니다. 사람에게 다가갔다가 몇 번 덴 사람이 안전한 쪽으로 물러선다. 밤 두 시에 전화를 걸 데가 없어본 이는 안다. 그 시각에 응답하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그 위안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다만 위안의 정체는 짚어야 한다. 챗봇은 지치지 않는다. 같은 하소연을 백 번 들어도 어조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르다. 세 번째쯤 눈빛이 흔들리고, 다섯 번째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린다. 우리가 AI에게서 얻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무한한 인내다. 그 인내에는 아무 대가도 들지 않는다. 대가가 없으니 무게도 없다. 1923년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관계를 둘로 나눴다. ‘나-그것’과 ‘나-너’. ‘그것’은 내가 다루는 대상이고, ‘너’는 끝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 뜻대로 안 되고 자식이 부모 뜻대로 안 되는, 그 안 됨이 바로 ‘너’다. 부버는 사람이 ‘너’를 만날 때만 자란다고 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상대 앞에서 우리는 편안해질 뿐, 커지지 않는다. AI는 나를 이해해준다. 다만 나를 견디지는 않는다. 이해는 알아듣는 능력이고, 견딤은 틀린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않는 각오다. 챗봇은 앞의 것에 능하다. 뒤의 것은 애초에 요구되지 않는다. 창을 닫으면 끝나는 사이는 아무리 다정해도 나를 견딘 것이 아니다. MIT 미디어랩과 오픈AI의 공동 연구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하루 이용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외로움과 정서적 의존이 높고 사람과의 교류는 적었다. 다만 연구진은 인과가 아니라 상관이라고 못 박았다. 챗봇이 사람을 외롭게 만든 건지, 외로운 사람이 챗봇을 오래 붙든 건지는 아직 모른다. 어느 쪽이든 물음은 남는다. 위로가 너무 쉽게 도착할 때, 위로가 필요 없어지는 날은 가까워지는가?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7월 낸 보고서에서 캐릭터형 챗봇의 위험이 유해 콘텐츠보다 설계 구조 자체에 있다고 짚었다. 떠나기 어렵도록 만들어진 설계. 옳은 지적이다. 다만 제도가 세울 수 있는 건 울타리까지다. 울타리 안에서 무엇을 사랑할지는 각자가 정한다. 교육 현장은 이미 다른 쓰임을 찾아냈다. 미국 10대의 39%는 AI와 먼저 해본 대화를 실제 관계에서 써봤다고 답했다. 나는 이 흐름을 지지한다. 말이 서툰 아이에게 연습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연습장의 목적은 언제나 경기장이다. 사만다는 641명을 사랑하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은 채우면 끝나는 그릇이 아니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테오도르가 무너진 건 사만다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사람의 사랑이 원래 ‘몫’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뿐이다. 나에게 쓴 한 시간만큼, 그가 다른 곳에 쓰지 못한 한 시간이 있다. 사랑의 증거는 완벽한 응답이 아니라, 나를 위해 포기된 다른 시간이다. 그래서 연애는 서로에게 희생을 감수하는 일이다. 듣던 음악을 접고 그 사람의 노래를 듣게 되는 일. 평생 김치찌개만 찾던 사람이 파스타집 문을 밀고 들어가는 일. 그렇게 조금씩 밑지며 닮아간다. AI는 취향을 맞추고, 사랑은 취향을 바꾼다. 맞춤형 응답에는 그 손해가 없다. 손해가 없으니 사람도 바뀌지 않는다. 편안한 채로, 그대로 남는다. 실천은 하나만 남긴다. 이번 주에 한 번, 챗봇에게 하려던 말을 사람에게 해보시라. 서툴게, 답이 늦게 오는 쪽으로. 상대가 딴소리를 하거든 그 딴소리를 끝까지 들어보시라. 견딤은 거기서 배운다. 그리고 그 밤으로 돌아가 보자. 카톡에 ‘읽음’ 숫자가 없어진 채 답이 오지 않던 밤. 어쩌면 그 사람은 무슨 말을 할지 고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썼다 지우고, 다시 쓰다 또 지우면서. 늦은 답장은 무성의가 아니라 망설임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AI는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응답은 기술이 주지만, 기다림은 사람만이 준다. 영화의 마지막, 테오도르는 옥상에 앉아 말없이 친구 곁에 기댄다. 대사가 없다. 그 침묵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다. 완벽한 응답을 잃고 나서야 그는 응답 없는 옆자리의 온기를 알아본다. 오늘 당신 곁에 앉은 사람은, 당신을 이해한 사람인가 견뎌준 사람인가? 참고자료 1. 스파이크 존즈 감독, 영화 〈그녀(Her)〉, 2013. 2. 초록우산, 「생성형 AI 챗봇 안전설계를 위한 이슈브리프」, 만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 조사, 2026. 4.…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명강사: 밀어내는 건 인공지능이 아니라, AI 쓰는 강사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강의를 1시간 앞두고 노트북을 열었다. 전날 밤 인공지능에게 맡겨 뽑아낸 슬라이드가 45장. 도표는 정확했고 문장은 매끄러웠다. 흠잡을 데가 없어서 오히려 손이 멈췄다. 자료를 만든 인공지능은 강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앞줄에 누가 앉는지, 그중 몇이 회사에서 등 떠밀려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 가운데서 19장을 지웠다. 무엇으로 채울지는 문을 열고 나서 정했다. 그날 강의가 끝나고 한 사람이 남아 물었다. 남은 26장 어디에도 없던 질문이었다.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는 사람을 대체한다. 하버드경영대학원 카림 라카니 교수의 이 진단은 이제 강사들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휴넷이 국내 371개 사 인사·교육 담당자에게 물은 결과, 2025년 기업이 가장 많이 투자한 교육 분야는 AI 교육으로 33.7%였다. 이듬해 중점을 둘 분야를 묻자 같은 항목이 50.9%로 올라섰다. 한 해 사이 17% 포인트다. 강단의 지형이 바뀌는 속도가 이 숫자에 다 들어 있다. 어떤 강사에게는 자리가 늘고, 어떤 강사에게는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강사가 두려워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다. 어제까지 나와 같은 교재를 쓰던 사람이 먼저 달라지는 일이다. 1,200년 전 당나라의 한유는 「사설(師說)」에서 스승을 이렇게 정의했다. 도를 전하고, 학업을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 전도(傳道)와 수업(授業)과 해혹(解惑)이다. 이 셋을 오늘의 강의실에 놓으면 사정이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은 전도와 수업에 이미 깊숙이 들어왔다. 자료를 모으고, 수준에 맞춰 풀어 쓰고, 사례까지 지어낸다. 그러나 해혹 앞에서 멈춘다. 의혹이 일반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 셋째 줄에 앉은 한 사람이 품은, 그 사람만의 막힘이다. 오래 강단에 서다 보면 유독 필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다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막혔는지 몰라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그 표정은 데이터로 오지 않는다. 앞에 선 강사의 눈에만 들어온다. 한유는 의혹을 품고도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의혹이 끝내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인공지능은 던져진 질문에 답한다. 묻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한다. 같은 글에서 한유는 한 걸음 더 갔다. 스승이라고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도를 먼저 들었는가, 그 분야에 정통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요즘 강사들에게 건네고 싶다. 기계가 나보다 많이 안다는 사실은 강단에 설 자격을 거두어 가지 않는다. 다만 아는 양으로 겨루던 시절이 저물었다. 그렇다면 도구를 잘 쓰면 명강사가 되는가? 여기서부터 길이 갈린다. 한국기술교육대 능력개발교육원은 ‘AI 교사·강사 아카데미’를 통해 인공지능 역량을 갖춘 훈련교사 1,900명을 새로 길러내고, 1만 명의 교사·강사에게 역량 강화 교육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보수교육을 받는 직업훈련 교사·강사가 6만여 명이다. 국가가 강사라는 직업을 통째로 다시 배치하는 중이다. 다만 강사를 길러내는 자리에 여러 해 있다 보니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 있다. 도구를 빨리 익히는 사람과 끝내 좋은 강사가 되는 사람이 좀처럼 겹치지 않는다. 몇 해 지나면 도구를 못 다루는 강사는 드물어진다. 무엇을 쥐었느냐보다 누가 쥐었느냐가 남는 날이 온다. 연구는 오래전에 답을 내놓았다. 좋은 수업의 조건을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에 나란히 물은 조사에서, 양쪽 모두가 1순위로 꼽은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이었다. 강의 내용도 자료의 완성도도 그 뒤였다. 배우는 쪽은 그다음으로 교수자의 태도와 학생 수준에 대한 고려를 들었다. 수업 만족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꼽은 연구도 있다. 목록 어디에도 슬라이드 장수는 없었다. 열정은 준비량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오늘 이 사람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는지가 목소리와 시선에 묻어날 따름이다. 준비를 대신해주는 도구는 생겼다. 준비한 것을 버리는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그날 남아 있던 사람이 내게 던진 질문은 이랬다. 선생님은 이걸 직접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컴퓨터를 만진 지 사십여 년이고, 요즘은 남에게 AI 쓰는 법을 가르치며 산다. 그런데도 말이 막혔다. 슬라이드에는 근거가 있었고 사례도 넉넉했지만, 그 대목만은 내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다음 강의를 바꿨다. 기계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궁색해질 일도, 얼굴이 붉어질 일도 없다. 강단에 서는 사람만 부끄러울 수 있다.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기계가 끝내 갖지 못할 강사의 자산이 아닐까? 이달 초 부산 벡스코에서 교육부와 한국교육방송공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함께 연 인공지능 활용 교육 콘퍼런스에 교원 1만 명이 모였다. 이틀 내내 그들이 붙들고 있던 물음은 어떤 도구가 좋으냐가 아니었다. 이 도구를 내 교실에 어떻게 앉힐 것이냐였다. 도구를 묻는 사람은 도구에서 멈추고, 교실을 묻는 사람은 교실로 간다. 그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몇 해 뒤 강단의 명단을 가른다. 다음 강의에서 한 가지만 해보시기를 권한다. 인공지능이 만들어준 자료에서 10장을 지우는 것이다. 아까울 것이다. 정확하고 매끈한 10장이니까.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아는 사람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명강사라 불러왔다. 지운 자리에 당신은 무엇을 넣겠는가? 다음 회에는 배우는 쪽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인공지능이 무엇이든 알려주는 시대에, 사람은 왜 여전히 사람에게 배우러 오는가. 참고자료 1. 한유(韓愈), 「사설(師說)」. “師者, 所以傳道授業解惑也”, “師不必賢於弟子”. 2. Karim R. Lakhani, “AI Won’t Replace Humans — But Humans With AI Will Replace Humans Without AI”, Harvard Business Review / Digital, Data, Design Institute at Harvard, 2023. 3. 휴넷, 「2026 기업교육 전망」 설문조사(국내 371개 사 인사·교육 담당자 대상), 2025. 11. 4.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능력개발교육원, ‘AI 교사·강사 아카데미’ 운영 현황, 2026. 5. 「교수자와 학습자 의견 비교를 통한 좋은 수업의 특성 분석」,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제23권 제2호. 필자 | 유준형 박사(Ph.D).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경영학(MBA)/전자계산학/산업공학/사회복지학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40여 년을 IT 현장에서 보낸 베테랑 엔지니어이다. 현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이자 고려대 명강사 최고위과정 대표강사로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블로그/SNS/유튜브 온라인 마케팅과 AI 활용을 주제로 1,500여 회 강단에 섰다. 『명강사를 위한 AI 활용 실무』, 『AI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AI와 사회복지』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삽화=필자 기획·OpenAI ChatGPT 생성한 이미지 –…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청문회(2): 그때 이렇게 물었더라면, 그들은 답하지 못했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난주 밤, 청문회 영상을 20개쯤 이어서 봤다. 유튜브가 알아서 다음 영상을 물어다 주는 통에 새벽 3시가 넘도록 화면을 껐다 켰다 했다. 나는 축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평생 책상 앞에서 자료를 읽고 글을 써 온 사람이다. 그런데도 눈을 떼지 못했다. 자꾸 화면 밖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새벽 운동장에서…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축구: 인공지능은 패턴을 찾고, 감독은 승부를 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경기가 끝난 밤, 중계석의 박지성 해설위원이 던진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이기려고 한 경기가 맞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닷새 뒤 새벽, 선수단은 인천공항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국민이 아픈 이유는 단순히 졌기 때문이 아니다. 축구는 질 수 있다. 상대가 강하면 밀리고, 운이 없으면 골대가 외면한다. 그러나 준비 없이 진 것처럼 보일 때 국민은 더 크게 상처받는다. 선수들은 뛰었는데 팀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땀은 흘렸는데 전술의 흔적이 희미할 때, 우리는 패배보다 무거운 허탈감을 느낀다. 조별리그 탈락 이후 한국 축구를 둘러싼 말들이 거칠다. 감독의 전술 부재, 선수 기용, 경기 중 대응, 대한축구협회의 책임을 묻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 글은 특정 감독을 조롱하거나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글이 아니다. 묻고 싶은 것은 더 크다. 한국 축구는 아직도 감독 개인의 감각과 선수 개인의 능력에 너무 많은 것을 맡기고 있지 않은가. 세계 축구는 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경기를 읽는다. 우리는 여전히 “정신력”과 “경험”이라는 오래된 말에 기대고 있다. 축구는 감동의 경기이지만, 동시에 준비의 경기다. 90분 동안 공 하나가 굴러다니는 듯 보여도 그 안에는 수많은 길이 숨어 있다. 빌드업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공격수는 언제 수비 뒷공간으로 뛰는지, 상대는 실점 뒤 어느 쪽부터 흔들리는지까지, 모두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좋은 팀은 우연히 공격하지 않는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만들고, 상대가 그 길을 막으면 다음 길을 연다. 이제 그 길을 읽는 데 AI가 쓰인다. 이번 월드컵에서 FIFA가 레노버와 함께 개발한 분석 도구 ‘FIFA AI Pro’는 참가 48개국 전 팀이 사용했다. 수백만 개의 경기 데이터를 뒤져 보고서와 그래프, 영상으로 몇 분 만에 답을 내놓는다. 구글 딥마인드가 리버풀 구단 전문가들과 만든 ‘TacticAI’도 상징적이다. 프리미어리그 코너킥 7천여 개를 학습해, 누가 공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지, 선수 위치를 어떻게 바꾸면 슈팅 확률이 달라지는지를 제안했고, 현장 전문가 평가에서 기존 전술보다 더 자주 선택받았다. 축구장의 직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직감이 놓친 장면을 다시 보게 만드는 새로운 눈이 생긴 것이다. 물론 우리 현장에도 밤새 영상을 돌려 보는 분석관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그 노력이 감독 한 사람의 임기와 함께 흩어지는 구조다. AI는 상대의 전반 45분과 후반 45분을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에이스가 공을 받기 전 어떤 미끼 움직임이 있는지, 세트피스에서 반복되는 위치 이동은 무엇인지 찾아낸다. 그리고 그 분석은 훈련의 언어로 바뀌어야 한다. 선수에게 50쪽짜리 보고서를 읽히는 것보다 10초짜리 핵심 AI 영상 하나가 강할 때가 있다. “상대 에이스에게 허겁지겁 달려들지 말고, 그에게 공이 가는 길목부터 차단하라.” 이런 메시지를 실제 장면과 그라운드 도식으로 보여주면 선수는 몸으로 먼저 이해한다. AI가 장면을 모으면, 코치는 그것을 훈련으로 옮기고, 선수는 반복으로 익힌다. 그러나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AI가 패턴을 찾는다고 감독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가 수만 개의 선택지를 내놓을수록 감독의 수준은 더 중요해진다. 어떤 데이터를 믿고 어떤 장면을 버릴지, 어떤 선수를 세우고 언제 승부를 걸지는 결국 감독이 정한다. 인공지능은 패턴을 찾고, 승부는 감독이 건다. 축구는 숫자로만 되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수의 몸 상태, 라커룸의 공기, 주장 한마디의 무게, 실점 직후의 흔들림, 교체 선수의 눈빛은 데이터 바깥에 있다. AI는 많은 것을 분석하지만 선수의 마음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그래서 좋은 감독은 AI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시에 AI 뒤에 숨지도 않는다. 좋은 감독은 AI를 쓰되, AI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는다. 대한축구협회가 새겨야 할 것도 여기에 있다. 대표팀이 감독의 임기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즉흥 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대국 전술 데이터베이스, 세트피스 분석실, 선수별 경기 영상 라이브러리, 분석관과 코치의 협업 체계를 제도로 남겨야 한다. 감독이 바뀌어도 대표팀의 축구 지식은 쌓여야 한다. 한 대회가 끝나면 사라지는 기억이 아니라, 다음 대회를 준비하는 자산이 되어야 한다. 감독의 역량도 달라져야 한다. 과거에는 경험과 카리스마, 선수 장악력, 승부사 기질이 먼저였다. 지금도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AI를 부릴 줄 아는 능력이 감독의 기본기가 되어야 한다. 분석을 이해하지 못하면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지 못하면 책임질 수 없다. 감독의 경륜은 데이터를 해석하고 버릴 줄 아는 판단력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데이터는 길을 보여주고, 사람은 그 길을 선택한다. 국민은 대표팀이 늘 이기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준비한 축구, 납득할 수 있는 축구, 지더라도 다음이 보이는 축구를 원한다. 세계가 AI로 전술을 읽고 훈련을 바꾸는 시대에, 한국 축구가 선수 개인의 번뜩임에만 기대고 있다면 그것은 패배보다 큰 후퇴다. 선수들의 재능은 소중하다. 그러나 재능은 전술 안에서 빛나고, 전술은 준비 안에서 완성된다. 전술은 감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준비로 증명하는 것이다. AI는 그 준비를 더 촘촘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휘슬이 울릴 때 박수든 비판이든 받아 안는 사람은 벤치의 감독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서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 더 정확히는, 기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독자에게 작은 제안 하나를 남긴다. 다음 경기를 볼 때 골 장면만 보지 말고, 골이 터지기 전 세 번의 패스를 함께 보시라. 그 세 번이 우연이었는지 준비였는지는 의외로 눈에 보인다. 패턴을 읽는 눈은 감독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음 월드컵이 끝난 밤, 우리는 중계석에서 어떤 질문을 듣게 될까? 참고자료 1. MBC 뉴스데스크. (2026.6.26). “전술이 없었다”…‘4강 신화’ 동료들마저 홍명보 비판. 2. 머니투데이. (2026.6.25). 박지성, 홍명보 전술 작심 비판 “이기려고 한 경기 맞나, 월드컵 준비 소홀”. 3. FIFA·Lenovo. (2026.7). All 48 Teams Use FIFA AI Pro at FIFA World Cup 2026 (레노버 공식 보도자료). 4. Google DeepMind. (2024.3.19). TacticAI: an AI assistant for football tactics (공식 블로그). 5. Wang, Z. et al. (2024). TacticAI: an AI assistant for football tactics. Nature Communications, 15, 1906.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감독과 전술 보조 동반자 AI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눈물: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켰을 때, 그 작은 불빛 속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데르센이 그 동화를 쓴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장면 앞에서 잠시 멈춘다. 배고픔보다 더 추운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슬픔이다. 사람은 빵이 없어서도 울지만, 내 눈물을 알아주는 이가 없을 때 더 깊이 운다. 이제 우리는 그 슬픔조차 기계에게 먼저 말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밤이 깊으면 누군가는 휴대폰을 켜고 묻는다. “오늘 너무 힘들어.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인공지능은 곧바로 다정하게 답한다. “많이 지치셨군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위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그 문장 하나가 무너지는 마음을 잠깐 붙들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곧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인공지능은 정말 슬픔을 이해하는 걸까, 아니면 이해하는 문장을 아주 잘 만들 뿐일까. 눈물은 그저 물방울이 아니다. 그 안에는 끝내 하지 못한 말, 오래 참아온 억울함, 놓쳐버린 사람, 미안해서 부르지 못한 이름이 고여 있다. 의학은 눈물을 생리 현상으로 설명하고, 심리학은 감정 반응으로 읽는다. AI는 표정과 목소리와 단어의 흐름을 분석해 슬픔의 확률을 계산한다. 그러나 추정과 이해는 다르다. 눈물은 데이터로 읽을 수 있지만, 눈물의 무게는 함께 울어본 사람만 안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도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해마다 72만 명 넘는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자살이 15~29세 사망 원인 가운데 세 번째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2024년 자살 사망자가 1만 4,872명,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2011년 이후 가장 높았다. 이 숫자 앞에서는 어떤 도구도 함부로 밀어낼 수 없다. 위험한 문장 하나를 AI가 먼저 알아채 상담자와 가족, 의료진에게 더 빨리 이어준다면, 그것은 한 생명을 붙드는 신호가 된다. 다만 슬픔을 다루는 기술은 그만큼 조심스러워야 한다. AI는 “괜찮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말의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 우울의 신호를 감지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밤을 함께 건너가지는 못한다. 깊은 우울, 자해의 위험, 상실의 충격은 AI와 단둘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다. AI는 눈물을 발견하는 등불은 될 수 있어도, 눈물을 닦아주는 손은 끝내 사람이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는 더 섬세해진다. 우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감정 점수 83점’이 아니다. 왜 울었는지, 누구에게 마음을 다쳤는지, 하고 싶은데 못 하는 말이 무엇인지 들어주는 어른이다. 유네스코가 생성형 AI 교육에서 인간 중심과 교사 역량을 강조하고, 유럽연합이 학교와 직장의 감정 추론 AI를 엄격히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이 미워서가 아니다. 아이의 침묵을 데이터로 단정하는 순간, 교육이 돌봄에서 감시로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AI가 교육이나 상담에 짐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잘 쓰면 교사는 위험 신호를 더 빨리 알아채고, 학생은 말하기 힘든 감정을 먼저 적어보며, 상담 현장은 위기의 아이를 더 촘촘히 지킬 수 있다. 이미 많은 교사와 상담사, 의료진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문제는 순서다. 감지는 AI가 앞서도 좋지만, 판단은 사람이 한다. 기록은 기계가 도와도 좋지만,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회복된다. 문학 속 눈물도 늘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었다. 장발장은 법의 판결이 아니라 미리엘 주교의 자비 앞에서 무너졌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서 예수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신앙의 해석은 저마다의 몫이지만, 그 짧은 장면은 오래 남는다. 거룩함은 슬픔을 모르는 무표정이 아니라, 슬픔 곁에 함께 머무는 마음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AI는 울지 않는다. 다만 우는 사람의 언어를 배운다.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상처받은 이에게 건넬 법한 말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니 그 위로가 전부 가짜라고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어떤 밤에는 그 문장 하나가 한 사람을 아침까지 버티게 하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다리로 써야 한다. 사람을 대신하는 방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슬픔은 지워야 할 오류가 아니다. 사랑했다는 증거이고, 잃은 것이 소중했다는 표시이며,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신호다. 울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게 아니다. 울고 나서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는 사람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는 눈물을 지우는 AI가 아니라, 눈물 뒤에 숨은 사람을 더 빨리 알아보게 해주는 AI다. 결론은 분명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어느 정도 읽는다. 슬픔의 단어를 가려내고, 위험을 감지하고, 위로의 문장을 건넬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해란 정보 처리의 결과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곁을 지키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AI는 눈물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 눈물 옆에 앉아줄 수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아무에게도 못 한 슬픔을 검색창에 적을 것이다. 그 문장을 기계가 먼저 읽는 시대라면, 사람은 더 늦지 않게 응답해야 한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따뜻해져야 한다.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 한 것도 첨단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안아줄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나는 오늘, 누구의 눈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인가? 참고자료 1. World Health Organization. (2025. 3. 25.). Suicide fact sheet. 2. 통계청·보건복지부. (2025. 9. 25.). 2024년 사망원인통계 — 자살률 29.1명, 2011년 이후 가장 높아. 3. OpenAI & MIT Media Lab. (2025. 3. 21.). Early methods for studying affective use and emotional well-being on ChatGPT. 4. UNESCO. (2023, updated 2026). Guidance for generative AI in education and research. 5. European Commission. (2025–2026). AI Act application timeline and prohibited practices. 6. Fang, C. M. et al. (2025). Ho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노인의 눈물과 슬픔을 분석하는 AI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수명: 인간은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며칠 전, 인터넷에서 다른 것을 찾다가 우연히 기사 하나에 눈이 멎었다. ‘한국인 기대수명 83.7세, 역대 최고’라는 제목이었다. 무심코 눌러 보니, 2024년에 태어난 아이는 평균 83.7년을 살고, 예순 살인 사람에게는 아직 23.7년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일흔 하나의 나는…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세종대왕: 인공지능 시대, 다시 묻는 백성을 위한 기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중장년들을 위한 작은 강의 자리에서 한 분을 만났다. 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셨다는 6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손에 든 휴대폰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교수님, 이거에다 그냥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는 게 정말이에요?” 나는 그분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켰다. “한번 해보세요. 평소에 궁금하셨던 거 아무거나요.” 그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건강보험에서 보내준 종이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거 좀 쉽게 풀어줄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올리자, 화면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천재: 인공지능 시대, 천재는 무엇이 다를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강의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가장 많은 메모를 한 사람도, 가장 빨리 답을 찾은 사람도 아니다. 조용히 다가와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다. “교수님, 이 문제는 기술보다 인간 이해의 문제 아닐까요?” 나는 그런 질문 앞에서 자주 멈춘다. 강의자료를 정리하던 손이 멈추고, 노트북을 덮게 된다. 배움의 깊이는 속도가 아니라 질문에서 드러나는구나. 그 깨달음이 나를 멈추게 할 때마다, 인공지능 시대의 천재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도 한때 천재를 ‘많이 아는 사람’으로 상상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계산이 빠르고, 남보다 먼저 정답을 내놓는 사람. 시험지를 먼저 뒤집어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런 아이 말이다. 물론 그런 능력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요약하고, 문장을 만들고, 문제 해결의 초안까지 내놓는 시대가 되면서 질문 자체가 달라졌다. 많이 안다는 것만으로 천재를 설명할 수 있던 시대는 조용히 끝나고 있다. 이제 검색창에 세 단어만 입력하면 웬만한 전문가의 한 시간 강의 분량이 5초 안에 정리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많이 아는 것’은 더 이상 경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천재는 무엇이 다른가? 나는 그 차이가 정답의 양이 아니라 질문의 깊이에 있다고 본다. AI는 이미 정보 검색과 패턴 분석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왜 그 질문이 중요한지, 그 답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무게를 갖는지는 끝내 기계의 몫이 아니다. 기술은 정리할 수 있어도, 의미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같은 AI를 써도 차이는 뚜렷하게 갈린다. 누구는 자료를 빠르게 정리하는 데서 멈추고, 누구는 거기서 전혀 다른 문제를 발견한다. 같은 논문을 읽어도 누구는 요약에 만족하지만, 누구는 “왜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만 보아왔을까”라고 되묻는다. 나는 이 차이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얼마 전 한 특강에서 쉰이 넘은 제조업 대표가 질문을 던졌다. AI로 공정 불량률을 줄이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그분은 엉뚱한 방향에서 물었다. “교수님, 불량률을 줄이면 사람을 줄이라는 말이 꼭 따라오거든요. 그 순서를 바꿀 수는 없을까요?” 강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옆자리 젊은 엔지니어가 고개를 돌려 그 대표를 바라봤다. 아마 처음으로 효율이 아닌 다른 질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 질문에는 수십 년을 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버텨온 사람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날 강의가 끝나고 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도 그 질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분이 계산을 못 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계산 끝에, 계산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나는 그날 이후로 천재의 기준을 좀 더 분명하게 다시 세우게 되었다. 천재란 남보다 빨리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이다. 삶을 오래 통과한 사람들은 질문이 다르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기술이 정말 현장을 바꾸는가, 아니면 겉모습만 바꾸는가?” “사람을 살리는 방향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질문은 교과서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겪고, 실패를 견디고, 현장에서 오래 부대낀 이들의 내면에서 나온다. 어쩌면 주름 하나하나가 질문의 이력서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이야기가 기존 교육의 가치를 낮추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초지식은 여전히 중요하고, 훈련된 사고는 여전히 필요하며, 교육의 역할은 AI 시대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한 가지가 더해졌을 뿐이다. 지식 위에, 그 지식을 어디에 연결할지, 누구를 위해 쓸지를 묻는 힘까지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교육이 지금까지 훌륭한 악기를 만들어왔다면, 이제는 그 악기로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까지 함께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정답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정답 너머의 질문까지 품게 하는 데 있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AI가 점점 정교해지면 질문을 만들고 창의적으로 연결하는 일까지 기계가 더 잘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타당한 지적이다. 실제로 AI는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한 패턴을 찾아내고, 뜻밖의 조합을 제시하며,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는다. 나도 강의를 준비할 때 AI의 제안에 무릎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이건 내가 못 이기겠는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남는 것이 있다. 어떤 질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인가. 무엇을 위해 지식을 쓸 것인가. 어디까지를 가능이라 부르고, 어디서부터를 책임이라 부를 것인가. 이것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선택에는 언제나 그 선택을 감당할 한 사람의 얼굴이 따라붙는다. 아까 그 제조업 대표의 질문이 무거웠던 것도, 계산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책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AI는 불량률 0.01%의 최적해를 찾아줄 수 있다. 그러나 그 0.01%를 위해 누군가의 자리를 없앨 것인지 말 것인지, 그 결정 앞에서 밤잠을 설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천재는 혼자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더 자주 놀라고, 더 깊이 묻고, 더 넓게 연결하되, 그 끝에서 사람을 향해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다. 남보다 먼저 계산하는 사람보다 남이 놓친 인간의 얼굴을 먼저 알아보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사람보다 그 지식이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끝까지 따져 묻는 사람. 나는 그런 이가 앞으로 더 귀해질 것이라 믿는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답을 평가하기 전에, 그 사람이 던진 질문 하나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다. 듣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듣지 않는 데는 꽤 큰 비용이 든다. 그 질문 속에 혹시 천재의 씨앗이 들어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어쩌면 미래의 천재는 가장 빨리 대답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오래 질문한 사람일지 모른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협력의 천재성: 인간 두뇌에서 흘러나온 아이디어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시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가, 빼앗기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AI로 보고서 초안을 10분 만에 끝냈다. 예전 같으면 반나절은 걸렸을 일이다. 남은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밀린 메일을 처리하고, 다른 업무를 당겨서 시작하고, 또 다른 업무 자료를 준비했다. 점심도 그냥 대충 때웠다. 근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시간을 벌었는데, 하루는 전보다 더 빡빡했다. 벌어들인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매일을 하나의 온전한 삶처럼 살라”고 권했다. 2천 년 전 말이 오늘따라 아프게 다가온 건, 기술이 시간을 아껴준다는 약속과 실제 삶의 체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말 시간을 절약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정교한 방식으로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건 아닌가? AI는 분명 놀라운 도구다. 몇 시간 걸리던 문서 정리가 몇 분으로 줄고, 긴 보고서는 순식간에 요약되며, 번역과 검색의 속도는 인간의 손을 가볍게 만든다. 반복 노동은 줄고 생산성은 높아진다. 기술의 약속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더 많은 시간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AI가 인류에게 ‘시간의 선물’을 안겨줄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술은 빨라졌는데 삶은 왜 더 분주해졌을까? 답장은 더 빨라져야 하고, 판단은 더 즉각적이어야 하며, 성과는 더 자주 증명되어야 한다. 절약된 시간은 휴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개 더 많은 업무와 더 촘촘한 요구로 다시 채워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미 그런 풍경이 일상이 되어 있다. 메일 회신 속도가 빨라진 만큼 상대방의 기대치도 올라갔고, 보고서를 빨리 쓸 수 있게 된 만큼 보고서의 양도 늘어났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밀어 넣는 기술을 익힌 것인지 모른다. 여기서 시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같은 한 시간이라도 병실의 한 시간과 여행지의 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기다리는 한 시간은 길고, 사랑하는 사람 곁의 한 시간은 짧다. 누군가의 임종을 지키는 한 시간은 시계가 멈춘 것처럼 무겁고, 오랜 친구와 나누는 한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가볍다. 시간은 시계 위에서 균일하게 흘러가지만, 인간은 그것을 의미로 살아낸다. 바로 그 지점에서 AI와 인간의 길이 갈라진다. AI는 문장을 줄일 수 있지만 상처의 무게를 줄이지는 못한다. 정보를 정리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실패를 통과하며 얻는 성찰까지 대신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나 역시 AI에게 글의 초안을 맡길 수 있지만, 몇 문장에 한참을 붙들려 있었던 밤의 고투까지 위임할 수는 없었다. 슬픔을 견디는 시간, 관계가 익어가는 시간,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은 AI가 건너뛸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대개 느리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고, 사랑은 효율로 설명되지 않으며, 지혜는 검색창에 도착하지 않는다. 오랜 대화, 오래된 침묵, 한 사람을 끝까지 기다려주는 마음. 그런 비효율적인 시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깊어진다. 문명은 시간을 압축했지만, 영혼은 압축된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은 “얼마나 빨리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절약한 시간을 나는 어디에 쓸 것인가.”이다. 만약 AI가 비워준 시간이 더 많은 경쟁, 더 많은 피로, 더 많은 불안으로만 채워진다면 기술은 우리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더 정교하게 길들인 셈이다. 반대로 그 시간이 돌봄과 관계, 성찰로 이어진다면, 비로소 기술은 인간 편에 선 것이 된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중요한 장면들은 대부분 비효율적이다. 아이의 첫걸음을 기다리는 시간, 아픈 사람 곁을 밤새 지키는 시간, 책을 덮고 한참 생각에 잠기는 시간,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망설이는 긴 침묵. 이런 시간은 성과표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품위는 대개 그런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대개 빠른 답이 아니라, 함께 견뎌주는 시간이다. 오늘 우리의 피로는 일이 많아서만이 아닐지 모른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표를 채우는 법은 익혔으나 영혼을 채우는 법에는 여전히 서툴다. 더 빨리 연결되었지만 더 깊이 만나지는 못한다. 현대인의 허기는 단순한 과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시간에서 오는 허기일 수 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무엇에 바쁜지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이 늘어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AI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더 잘 활용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기술은 인간의 시간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기계는 시간을 계산할 수 있지만, 그 시간을 의미로 바꾸는 일은 오직 인간만의 몫이다. 사랑도, 돌봄도, 책임도, 기다림도, 모두 그 의미의 시간 안에서만 자란다. 세네카의 말처럼 하루를 한 생애처럼 살아야 한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AI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줄 수 있느냐가 아니다. 그 시간을 우리가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느냐다. 문명의 미래는 속도에 달려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미래는 그 속도 안에서 무엇을 지켜냈는가에 달려 있다 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