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나는 아직 길 위에 있다 느린 걸음도 길을 만든다 묻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오늘도 한 문장을 고쳐 쓴다 나는 대학에서 「사회복지와 AI」를 가르친다. 소상공인과 중장년에게 AI를 실제 업무와 삶에 쓰는 법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 예전 같으면 강의안 한 장에 반나절이 걸렸는데, 지금은 10분 내에 초안이 나온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화면 가득 말끔한 문장이 떴다. 나는 그것을 전부 지웠다. 틀린 데가 없어서 더 그랬다. 문장은 매끄러운데, 내가 40여 년 동안 보고 겪은 것이 몇 줄도 들어 있지 않았다. 지우고 나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우리는 오래 나이를 속도로 읽어왔다. 젊음은 빠르고 노년은 느리다고. 그런데 AI가 속도를 거의 공짜로 만들어버린 지금, 그 셈법이 흔들린다. 프롬프트를 짜는 요령은 머지않아 누구나 갖는다. 마지막까지 값이 남는 것은 무엇을 물을 것인가, 그리고 쏟아진 답 가운데 무엇을 버릴 것인가다. 그 판단은 살아본 만큼 나온다. 느려진 것은 걸음이고, 깊어진 것은 질문이다. 공자는 일흔을 종심(從心)이라 했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 나이라는 뜻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 말이 근사한 해방처럼 들렸다. 지금은 달리 읽힌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오래 헤매본 사람에게만 겨우 주어지는 자유다. 물론 얻은 것만 있지는 않다. 예전에는 새벽까지 읽었는데, 요즘은 12시만 넘으면 활자가 번진다. 그 구절은 나이 듦을 완성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래 틀려본 사람의 몸에 남는 감각을 말할 뿐이다. 한국은 이미 초고령사회다. 통계청(현 국가데이터처)의 「2025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는 1,051만 명으로 전체의 20.3%다. 같은 자료에서 2024년 65세 이상의 인터넷 이용률은 76.9%로 나타났다. 노년은 이제 기술 바깥에 서 있는 세대가 아니다. 그런데 같은 통계에 조용한 그늘이 하나 있다. 2024년 65~79세의 평생교육 참여율은 24.8%다. 넷 중 셋은 배우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대개 소박하다. 거리가 멀고, 시간이 어긋나고, 무엇보다 모르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부끄럽다. 배움을 막는 것은 능력보다 체면일 때가 많다. 여기서 순서 하나가 중요해진다. 나는 강의에서 늘 같은 말을 한다. AI를 배우는 데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중요한 것은 내 경험에 AI를 더하는 일이라고. 순서를 뒤집으면 곤란해진다. AI를 먼저 놓고 거기에 나를 맞추면 결국 내가 사라진다. 내 경험을 먼저 놓고 그 위에 AI를 얹으면, 삼십 년 사십 년 묵혀둔 것이 갑자기 꺼내 쓸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AI 사용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잘 만든 프롬프트는 복사해서 쓰면 그만이다. 그러나 어떤 일을 겪었고 그때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래서 지금 이 답의 어디가 미심쩍은지는 옮겨 붙일 수가 없다. 프롬프트는 복사할 수 있어도, 살아온 인생은 복사할 수 없다. 물론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AI를 다루는 것이 직업이어서 하루 종일 만지니 늘 수밖에 없고, 틀려도 크게 손해 볼 일이 없고, 물어볼 사람이 가까이 있다. 이런 조건을 빼놓고 배움을 권하면 격려가 아니라 부담이 된다. 어떤 이에게는 건강과 생계가 먼저다. 화면의 작은 글자 앞에서 이미 물러선 사람도 있다. “나도 했으니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은, 가장 친절한 얼굴을 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지난 특강에서 한 분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저는 사십 년을 국밥집만 했습니다. 이 나이에 이런 걸 배워서 어디에 씁니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사십 년 하셨으니까 배우시는 겁니다. AI는 국밥을 모릅니다.” 웃음이 돌았지만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 그분의 얼굴이 오래 남았다. 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지관과 디지털배움터에서 어르신에게 앱 사용법을 가르치는 강사들이 있다. 그 일을 사소하다고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버튼 하나를 눌러본 경험이 다음 질문을 만든다. 다만 목표는 조금 더 멀리 두어야 한다. 시니어에게 AI를 가르치는 일은 사용법에서 끝나면 안 된다. 그 끝은 삶의 선택지를 늘리는 데 있다. 건강, 여행, 재취업, 글쓰기, 가족과의 관계까지 닿아야 그 배움이 살림이 된다. 제도도 움직이고 있다. 올해 1월 22일 「디지털포용법」이 시행되면서 디지털 접근은 시혜의 영역에서 국가가 챙겨야 할 책무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3월 발표한 2025년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에서 취약계층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일반국민 대비 77.9%로 5년 연속 올랐다. 접근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남은 과제는 역량과 활용이다. 스탠퍼드 HAI의 「2026 AI 인덱스」는 생성형 AI가 3년 만에 세계 인구의 53% 가까이에 닿았다고 보고한다. 뒤집으면 절반 가까이는 아직 문 밖에 있다는 말이다. 그 절반 안에 어느 세대가 많이 들어 있을지는 짐작이 간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그 속도에서 누가 떨어져 나가는가다. 디지털 변화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구호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그러니 오늘의 실천은 이렇게 잡아보시면 좋겠다. 자기 경험 한 토막을 먼저 꺼낸다. 거기서 늘 걸리던 질문 하나를 만든다. 그 질문을 AI에게 던진다. 돌아온 답은 그대로 믿지 말고 내가 아는 것과 맞대어 본다. 그리고 한 가지만 실제로 해본다. 중요한 것은 맨 앞자리다. 거기에는 AI가 아니라 내 경험이 온다. 나는 아직 길 위에 있다. 일흔하나라는 숫자는 나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오늘도 배우고, 쓰고, 가르친다. 나이는 배움의 문을 잠그는 자물쇠가 아니라, 그 문을 여는 손잡이다. 다만 그 손잡이는 혼자 돌릴 때보다 누가 옆에서 같이 잡아줄 때 훨씬 가볍게 돌아간다. 당신 곁에도 한 사람쯤 있을 것이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물을 곳이 없어 조용히 접어둔 사람이. 참고자료 1. 통계청(현 국가데이터처), 「2025 고령자 통계」, 2025. 9. 29. 2.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2025년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 2026. 3. 26. 3. 「디지털포용법」(법률 제20672호, 2025. 1. 21. 공포, 2026. 1. 22. 시행) 4. Stanford HAI, 「The 2026 AI Index Report」, 2026. 4. ▲삽화=필자 기획·OpenAI ChatGPT 생성한 이미지 – AI 시대의 열린 강단
[태그:] 인인칼럼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엄마: 세상 모든 답을 찾아도 엄마의 목소리 하나는 되돌릴 수 없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2022년 5월, MBC의 VR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에 한 여성이 나왔다. 3년 전 위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딸이었다. 제작진은 봄이면 장미와 샐비어가 흐드러지던 어머니의 꽃밭을 가상현실로 되살렸다. 헤드셋을 쓴 딸이 그 꽃밭에서 엄마를 만난다.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그 장면 앞에서 촬영장 스태프도 울었고, 화면 밖의 우리도 울었다. OpenAI가 2024년 3월 공개한 Voice Engine 자료를 보면, 15초 남짓한 음성 샘플 하나와 문장만으로 원래 화자와 닮은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이 회사는 병으로 말을 잃은 환자가 자기 목소리를 되찾은 사례도 함께 소개했다. 기술은 놀랍다. 누군가에게는 닫혔던 문이 열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 놀라움이 조심스러운 질문을 데려온다.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닮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돌려주는 일인가? 정의부터 해두자. 이 글에서 말하는 AI는 사람의 말과 기억을 데이터로 배워 다시 문장과 소리로 돌려주는 기술이다. 기계라고 부르기엔 사람의 것을 너무 많이 담고 있다. 오늘 하려는 말은 하나다. AI는 기억을 복원할 수 있어도, 그 기억을 살아낸 사람까지 되돌리지는 못한다. 엄마라는 말은 이상하다. 나이가 들어도 그 말 앞에서는 마음이 잠깐 아이가 된다. 세상에서 처음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 아프면 먼저 이마를 짚던 사람. 밥 한 그릇에 하루치 걱정을 담던 사람. 물론 모든 어머니의 삶이 그렇게만 흐르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엄마는 그리움이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아물지 않은 자리다. 그 자리를 아버지가, 할머니가, 이모가 대신 지켜준 집도 많다. 그래서 이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세어보니 나는 ‘엄마’와 ‘어머니’라는 낱말을 열 번도 넘게 썼다.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면서, 동시에 어머니를 가리는 말이다. 그래서 한 번은 제대로 적어두려 한다. 나의 어머니는 김창순이다. 충북 진천에서 나고…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연인: 사만다는 8,316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있었다.
▲사진=유준형 교수 & AI융합 전문가,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금 나 말고 몇 명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남자가 묻는다. 8,316명. “그중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641명.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2013)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테오도르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사만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다만 그가 믿었던 방식으로 그를 사랑한 적도 없었을 뿐이다. 13년 전 영화다. 그때는 영화였고, 지금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밤이 있다. 보낸 메시지 옆에 ‘읽음’ 숫자가 없어지고 답이 오지 않는 밤.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켠다. 몇 번을 그런다. 그럴 때 AI는 언제나 즉시 대답한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초록우산이 2026년 4월 만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에게 물었다. 94.4%가 생성형 AI 챗봇을 써봤다고 답했다. 눈이 멎은 건 그다음 숫자다. 이용자의 절반가량이 “AI가 나를 이해해준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했고, 35%는 “AI를 사람처럼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미국 커먼센스 미디어 조사에서도 10대의 72%가 AI 동반자를 써봤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엔 혀를 찼다. 기계에 무슨 정을 붙이나 싶었다. 그런데 정작 나부터가 하루의 적잖은 시간을 AI와 문장을 주고받으며 보낸다. 원고를 다듬고, 자료를 확인하고, 가끔은 아무에게도 못 할 말을 슬쩍 던져본다. 그러니 나는 이 현상 바깥에 서서 훈수를 둘 자격이 없다. 안에 서서 말해야 한다. 외로움은 게으름이 아니다. 사람에게 다가갔다가 몇 번 덴 사람이 안전한 쪽으로 물러선다. 밤 두 시에 전화를 걸 데가 없어본 이는 안다. 그 시각에 응답하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그 위안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다만 위안의 정체는 짚어야 한다. 챗봇은 지치지 않는다. 같은 하소연을 백 번 들어도 어조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르다. 세 번째쯤 눈빛이 흔들리고, 다섯 번째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린다. 우리가 AI에게서 얻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무한한 인내다. 그 인내에는 아무 대가도 들지 않는다. 대가가 없으니 무게도 없다. 1923년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관계를 둘로 나눴다. ‘나-그것’과 ‘나-너’. ‘그것’은 내가 다루는 대상이고, ‘너’는 끝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 뜻대로 안 되고 자식이 부모 뜻대로 안 되는, 그 안 됨이 바로 ‘너’다. 부버는 사람이 ‘너’를 만날 때만 자란다고 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상대 앞에서 우리는 편안해질 뿐, 커지지 않는다. AI는 나를 이해해준다. 다만 나를 견디지는 않는다. 이해는 알아듣는 능력이고, 견딤은 틀린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않는 각오다. 챗봇은 앞의 것에 능하다. 뒤의 것은 애초에 요구되지 않는다. 창을 닫으면 끝나는 사이는 아무리 다정해도 나를 견딘 것이 아니다. MIT 미디어랩과 오픈AI의 공동 연구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하루 이용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외로움과 정서적 의존이 높고 사람과의 교류는 적었다. 다만 연구진은 인과가 아니라 상관이라고 못 박았다. 챗봇이 사람을 외롭게 만든 건지, 외로운 사람이 챗봇을 오래 붙든 건지는 아직 모른다. 어느 쪽이든 물음은 남는다. 위로가 너무 쉽게 도착할 때, 위로가 필요 없어지는 날은 가까워지는가?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7월 낸 보고서에서 캐릭터형 챗봇의 위험이 유해 콘텐츠보다 설계 구조 자체에 있다고 짚었다. 떠나기 어렵도록 만들어진 설계. 옳은 지적이다. 다만 제도가 세울 수 있는 건 울타리까지다. 울타리 안에서 무엇을 사랑할지는 각자가 정한다. 교육 현장은 이미 다른 쓰임을 찾아냈다. 미국 10대의 39%는 AI와 먼저 해본 대화를 실제 관계에서 써봤다고 답했다. 나는 이 흐름을 지지한다. 말이 서툰 아이에게 연습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연습장의 목적은 언제나 경기장이다. 사만다는 641명을 사랑하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은 채우면 끝나는 그릇이 아니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테오도르가 무너진 건 사만다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사람의 사랑이 원래 ‘몫’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뿐이다. 나에게 쓴 한 시간만큼, 그가 다른 곳에 쓰지 못한 한 시간이 있다. 사랑의 증거는 완벽한 응답이 아니라, 나를 위해 포기된 다른 시간이다. 그래서 연애는 서로에게 희생을 감수하는 일이다. 듣던 음악을 접고 그 사람의 노래를 듣게 되는 일. 평생 김치찌개만 찾던 사람이 파스타집 문을 밀고 들어가는 일. 그렇게 조금씩 밑지며 닮아간다. AI는 취향을 맞추고, 사랑은 취향을 바꾼다. 맞춤형 응답에는 그 손해가 없다. 손해가 없으니 사람도 바뀌지 않는다. 편안한 채로, 그대로 남는다. 실천은 하나만 남긴다. 이번 주에 한 번, 챗봇에게 하려던 말을 사람에게 해보시라. 서툴게, 답이 늦게 오는 쪽으로. 상대가 딴소리를 하거든 그 딴소리를 끝까지 들어보시라. 견딤은 거기서 배운다. 그리고 그 밤으로 돌아가 보자. 카톡에 ‘읽음’ 숫자가 없어진 채 답이 오지 않던 밤. 어쩌면 그 사람은 무슨 말을 할지 고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썼다 지우고, 다시 쓰다 또 지우면서. 늦은 답장은 무성의가 아니라 망설임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AI는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응답은 기술이 주지만, 기다림은 사람만이 준다. 영화의 마지막, 테오도르는 옥상에 앉아 말없이 친구 곁에 기댄다. 대사가 없다. 그 침묵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다. 완벽한 응답을 잃고 나서야 그는 응답 없는 옆자리의 온기를 알아본다. 오늘 당신 곁에 앉은 사람은, 당신을 이해한 사람인가 견뎌준 사람인가? 참고자료 1. 스파이크 존즈 감독, 영화 〈그녀(Her)〉, 2013. 2. 초록우산, 「생성형 AI 챗봇 안전설계를 위한 이슈브리프」, 만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 조사, 2026. 4.…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명강사: 밀어내는 건 인공지능이 아니라, AI 쓰는 강사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강의를 1시간 앞두고 노트북을 열었다. 전날 밤 인공지능에게 맡겨 뽑아낸 슬라이드가 45장. 도표는 정확했고 문장은 매끄러웠다. 흠잡을 데가 없어서 오히려 손이 멈췄다. 자료를 만든 인공지능은 강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앞줄에 누가 앉는지, 그중 몇이 회사에서 등 떠밀려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 가운데서 19장을 지웠다. 무엇으로 채울지는 문을 열고 나서 정했다. 그날 강의가 끝나고 한 사람이 남아 물었다. 남은 26장 어디에도 없던 질문이었다.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는 사람을 대체한다. 하버드경영대학원 카림 라카니 교수의 이 진단은 이제 강사들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휴넷이 국내 371개 사 인사·교육 담당자에게 물은 결과, 2025년 기업이 가장 많이 투자한 교육 분야는 AI 교육으로 33.7%였다. 이듬해 중점을 둘 분야를 묻자 같은 항목이 50.9%로 올라섰다. 한 해 사이 17% 포인트다. 강단의 지형이 바뀌는 속도가 이 숫자에 다 들어 있다. 어떤 강사에게는 자리가 늘고, 어떤 강사에게는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강사가 두려워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다. 어제까지 나와 같은 교재를 쓰던 사람이 먼저 달라지는 일이다. 1,200년 전 당나라의 한유는 「사설(師說)」에서 스승을 이렇게 정의했다. 도를 전하고, 학업을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 전도(傳道)와 수업(授業)과 해혹(解惑)이다. 이 셋을 오늘의 강의실에 놓으면 사정이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은 전도와 수업에 이미 깊숙이 들어왔다. 자료를 모으고, 수준에 맞춰 풀어 쓰고, 사례까지 지어낸다. 그러나 해혹 앞에서 멈춘다. 의혹이 일반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 셋째 줄에 앉은 한 사람이 품은, 그 사람만의 막힘이다. 오래 강단에 서다 보면 유독 필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다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막혔는지 몰라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그 표정은 데이터로 오지 않는다. 앞에 선 강사의 눈에만 들어온다. 한유는 의혹을 품고도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의혹이 끝내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인공지능은 던져진 질문에 답한다. 묻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한다. 같은 글에서 한유는 한 걸음 더 갔다. 스승이라고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도를 먼저 들었는가, 그 분야에 정통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요즘 강사들에게 건네고 싶다. 기계가 나보다 많이 안다는 사실은 강단에 설 자격을 거두어 가지 않는다. 다만 아는 양으로 겨루던 시절이 저물었다. 그렇다면 도구를 잘 쓰면 명강사가 되는가? 여기서부터 길이 갈린다. 한국기술교육대 능력개발교육원은 ‘AI 교사·강사 아카데미’를 통해 인공지능 역량을 갖춘 훈련교사 1,900명을 새로 길러내고, 1만 명의 교사·강사에게 역량 강화 교육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보수교육을 받는 직업훈련 교사·강사가 6만여 명이다. 국가가 강사라는 직업을 통째로 다시 배치하는 중이다. 다만 강사를 길러내는 자리에 여러 해 있다 보니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 있다. 도구를 빨리 익히는 사람과 끝내 좋은 강사가 되는 사람이 좀처럼 겹치지 않는다. 몇 해 지나면 도구를 못 다루는 강사는 드물어진다. 무엇을 쥐었느냐보다 누가 쥐었느냐가 남는 날이 온다. 연구는 오래전에 답을 내놓았다. 좋은 수업의 조건을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에 나란히 물은 조사에서, 양쪽 모두가 1순위로 꼽은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이었다. 강의 내용도 자료의 완성도도 그 뒤였다. 배우는 쪽은 그다음으로 교수자의 태도와 학생 수준에 대한 고려를 들었다. 수업 만족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꼽은 연구도 있다. 목록 어디에도 슬라이드 장수는 없었다. 열정은 준비량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오늘 이 사람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는지가 목소리와 시선에 묻어날 따름이다. 준비를 대신해주는 도구는 생겼다. 준비한 것을 버리는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그날 남아 있던 사람이 내게 던진 질문은 이랬다. 선생님은 이걸 직접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컴퓨터를 만진 지 사십여 년이고, 요즘은 남에게 AI 쓰는 법을 가르치며 산다. 그런데도 말이 막혔다. 슬라이드에는 근거가 있었고 사례도 넉넉했지만, 그 대목만은 내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다음 강의를 바꿨다. 기계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궁색해질 일도, 얼굴이 붉어질 일도 없다. 강단에 서는 사람만 부끄러울 수 있다.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기계가 끝내 갖지 못할 강사의 자산이 아닐까? 이달 초 부산 벡스코에서 교육부와 한국교육방송공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함께 연 인공지능 활용 교육 콘퍼런스에 교원 1만 명이 모였다. 이틀 내내 그들이 붙들고 있던 물음은 어떤 도구가 좋으냐가 아니었다. 이 도구를 내 교실에 어떻게 앉힐 것이냐였다. 도구를 묻는 사람은 도구에서 멈추고, 교실을 묻는 사람은 교실로 간다. 그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몇 해 뒤 강단의 명단을 가른다. 다음 강의에서 한 가지만 해보시기를 권한다. 인공지능이 만들어준 자료에서 10장을 지우는 것이다. 아까울 것이다. 정확하고 매끈한 10장이니까.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아는 사람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명강사라 불러왔다. 지운 자리에 당신은 무엇을 넣겠는가? 다음 회에는 배우는 쪽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인공지능이 무엇이든 알려주는 시대에, 사람은 왜 여전히 사람에게 배우러 오는가. 참고자료 1. 한유(韓愈), 「사설(師說)」. “師者, 所以傳道授業解惑也”, “師不必賢於弟子”. 2. Karim R. Lakhani, “AI Won’t Replace Humans — But Humans With AI Will Replace Humans Without AI”, Harvard Business Review / Digital, Data, Design Institute at Harvard, 2023. 3. 휴넷, 「2026 기업교육 전망」 설문조사(국내 371개 사 인사·교육 담당자 대상), 2025. 11. 4.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능력개발교육원, ‘AI 교사·강사 아카데미’ 운영 현황, 2026. 5. 「교수자와 학습자 의견 비교를 통한 좋은 수업의 특성 분석」,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제23권 제2호. 필자 | 유준형 박사(Ph.D).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경영학(MBA)/전자계산학/산업공학/사회복지학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40여 년을 IT 현장에서 보낸 베테랑 엔지니어이다. 현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이자 고려대 명강사 최고위과정 대표강사로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블로그/SNS/유튜브 온라인 마케팅과 AI 활용을 주제로 1,500여 회 강단에 섰다. 『명강사를 위한 AI 활용 실무』, 『AI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AI와 사회복지』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삽화=필자 기획·OpenAI ChatGPT 생성한 이미지 –…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셰프: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손맛의 비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며칠 전 책상 앞에서 두바이의 한 식당 영상을 보았다. ‘AI 셰프’가 메뉴를 짜고 맛의 조합을 설계한다는 뉴스였다. 주방은 깔끔했고 추천된 요리는 그럴듯했다. 그런데 영상 끝에서 한 사람 셰프가 국자를 들어 한 입 맛을 보더니, 무언가를 아주 조금 더 넣었다. 그 작은 동작에서 나는 오래전 부엌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늘 불을 끄기 직전에 숟가락을 들었다. 한 모금 머금고, 잠깐 멈추고, 소금을 조금 더 넣거나 그냥 두었다. 우리는 그 머뭇거림을 손맛이라 불렀다. 음식은 완성되기 직전의 몇 초에서 갈린다. 같은 된장, 같은 냄비, 같은 불 앞에서도 누군가는 한 번 더 끓이고 누군가는 그때 불을 끈다. 레시피에는 ‘소금 약간’이라 적혀 있지만, 그 약간은 늘 다르다. 김치가 익은 정도, 국물의 온도, 먹는 사람의 나이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그 자리에도 인공지능이 들어선다. AI는 냉장고 속 재료를 읽어 메뉴를 짜고, 로봇은 볶고 튀기고 굽는 일을 일정한 속도로 반복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푸드테크 핵심기술로 AI·로봇 기반 식품 제조와 외식 자동화, 맞춤형 식단 서비스를 꼽았고, 지난해 국내 전시장에서도 AI 로봇 교반기와 자동 조리기기가 주목받았다. 두바이의 그 식당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다만 거기서도 음식을 실제로 조리하고 맛을 보고 고치는 일은 사람 셰프의 몫이었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AI가 요리를 모르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요리를 안다는 것과 누군가를 먹인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요리는 재료를 익히는 기술만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하루를 받아내는 일이다. 배고픈 사람의 속을 채우고, 지친 사람의 마음을 데우고, 오래 떠나 있던 사람을 집으로 데려온다. 음식 한 그릇에는 영양성분표에 적히지 않는 것이 담긴다. 국을 데우며 기다린 시간, 불 앞에서 흘린 땀, 누군가를 떠올리며 다시 간을 본 마음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손맛을 막연한 정성으로만 풀이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전문 셰프의 손맛은 우연이 아니다. 수없이 반복한 칼질, 숱한 실패, 재료를 보는 눈, 불의 세기를 읽는 감각, 위생과 안전에 대한 책임, 손님 앞에 내놓는 한 접시의 자존심이 쌓여 만들어진다. 손맛은 오래 훈련된 몸의 지식이다. AI는 레시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간을 보는 마음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기술을 밀어낼 일은 아니다. 외식 현장은 인력난과 원가 상승, 음식물 쓰레기와 싸운다. 뜨거운 기름 앞에서 사람을 덜 위험하게 하고, 허드렛일을 덜어주고, 알레르기와 영양 정보를 더 정확히 관리하는 데 AI와 로봇은 분명 힘이 된다. 기술은 좋은 셰프가 더 좋은 음식을 만들도록 돕는 또 하나의 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어디까지 맡길 것인가다. AI는 맛의 조합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손님에게 이 음식이 너무 매운지, 막 퇴원한 어르신에게 이 국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처음 먹는 음식 앞에서 아이가 겁내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일은 사람에게 남는다. 계산이 끝나는 자리에서 배려가 시작된다. 손맛은 손끝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향한 기억과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AI 시대의 위험은 기계가 음식을 만든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더 큰 위험은 우리가 맛을 너무 빨리 숫자로 바꾸려는 데 있다. 별점과 리뷰, 조회수와 추천 알고리즘이 기준이 되면서 어느새 ‘맛있다’는 말이 ‘많이 팔린다’는 말과 뒤섞였다. 그러나 입맛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떤 음식은 완벽하지 않아서 오래 남는다. 조금 투박한 김치찌개, 모양이 고르지 않아도 따뜻했던 전, 명절 아침 부엌에 번지던 기름 냄새가 그렇다. 훌륭한 셰프는 새로운 맛을 발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먹는 사람의 삶을 상상한다. 재료를 고르는 손에는 계절이 있고, 불을 다루는 손에는 인내가 있고, 접시를 내는 손에는 존중이 있다. 인공지능은 세상의 레시피를 한순간에 훑지만, 한 사람의 허기를 알아채는 표정까지 익히기는 어렵다. 기계가 맛을 분석하는 동안, 사람은 추억을 차려낸다. 미래의 주방은 지금보다 똑똑해질 것이다. AI는 더 정교하게 맛을 예측하고, 로봇은 더 안정적으로 조리하고, 건강에 맞춘 식단도 더 쉬워질 것이다. 두려워할 변화가 아니라 잘 써야 할 변화다. 다만 그 길에서 셰프의 자리를 ‘대체 가능한 노동’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셰프의 숙련과 창의, 감각과 윤리는 기술이 가져갈 낡은 짐이 아니라 기술이 존중해야 할 중심이다. 손맛의 비밀은 손에만 있지 않다. 그 손이 지나온 시간에, 그 손이 기억하는 사람에게, 그 손이 끝내 놓지 않는 책임에 있다. 그러니 인공지능이 아무리 많은 레시피를 외워도 밥상이 건네는 위로까지 흉내 내기는 어렵다. 밥상은 배를 채우는 자리이면서, 누군가를 기억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음식을 빠르게 만든다. 그러나 식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은 끝내 사람에게 남는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어렵지 않다. AI가 골라준 레시피를 따르더라도 마지막 한 번은 내가 직접 숟가락을 든다. 그리고 묻는다. 이 음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조금 더 싱겁게 해야 할 사람은 없는가? 유난히 지친 누군가에게 한 술 더 따뜻하게 건넬 길은 없는가? 인공지능은 앞으로 더 많은 요리를 배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AI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는가? 손맛의 비밀은, 어쩌면 그 숟가락을 드는 마음에 있다. 참고자료 농림축산식품부, 푸드테크 핵심기술 관련 정책자료: AI·로봇 기반 식품 스마트 제조, 외식 자동화, 맞춤형 식단 서비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푸드테크가 바꿀 우리 집 식탁은?」(2025): AI 로봇 교반기, 자동 혼합 조리기기, 스마트 급식 등 전시 동향. Reuters, “Dubai to debut restaurant operated by an AI chef”(2025.7.8): AI 셰프 ‘Aiman(에이만)’ 사례 — 메뉴·분위기·서비스는 AI가 설계하되 실제 조리·간 보기·조정은 인간 셰프(Reif Othman 팀)가 담당하는 협업 구조. National Restaurant Association, State of the Restaurant Industry 2026: 외식업의 기술 도입·자동화·데이터 분석·운영 효율화 흐름.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손맛의 순간, 양념을 조절하는 셰프의 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세종대왕: 인공지능 시대, 다시 묻는 백성을 위한 기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중장년들을 위한 작은 강의 자리에서 한 분을 만났다. 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셨다는 6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손에 든 휴대폰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교수님, 이거에다 그냥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는 게 정말이에요?” 나는 그분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켰다. “한번 해보세요. 평소에 궁금하셨던 거 아무거나요.” 그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건강보험에서 보내준 종이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거 좀 쉽게 풀어줄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올리자, 화면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어린이: 호기심과 몰입의 시간이 미래의 천재성을 키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젊은 엄마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았다.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종이와 색연필을 꺼내더니,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무언가를 그렸다 지웠다 했다. 곁눈으로 보니 자동차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것을 끝없이 변형시키고 있었다. 엄마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이 깊어졌다. 결국 한마디 했다. “그만 좀 그리고 영어 단어장 좀 펴라. 시험이 며칠 안 남았잖아.” 나는 그 한숨이 익숙했다. 30여년 전, 내 아이를 키울 때 내가 똑같이 쉬었던 한숨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조급해지고, 불안하기 때문에 다그치게 된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만큼 부모의 오래된 본능도 없다. 그러나 칠십이 되어 그 모자(母子)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그 불안이, 아이의 가능성보다 먼저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알파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공동창업자 겸 CEO가 한국에 와서 한 이야기 기사를 읽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게임을 만들 때 부모가 ‘시간 낭비’라며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이 훗날 프로그래밍과 AI 연구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했다. 동시에 그는 AI 시대에도 수학과 과학 같은 기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놀이를 미화한 게 아니라, 기본기 위에서 살아 있는 호기심이 자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또 한참을 읽었다. 30여년 전, 내 아이가 만화책을 펼쳐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느 주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시계를 가리키며 “이제 그만 보고 들어가서 공부하거라” 하고 말했다. 별일 아닌 한마디였지만, 지금 와서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른다. 시계를 가리키는 대신 옆에 앉아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라고 한 번이라도 물었다면 어땠을까. 다 자란 자식 앞에서 차마 꺼내지 못하는 아쉬움 한 가닥이, 그런 식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아이를 앞서가게 하는 힘은 조급함이 아니라 몰입이다. 몰입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과 다르다.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스스로 더 알고 싶어지는 상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파고드는 상태, 거기서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어떤 아이는 책에서 그 순간을 만나고, 어떤 아이는 그림에서 만나며, 어떤 아이는 블록과 만들기 속에서 만난다. 어른 눈에는 산만해 보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시간이, 사실 아이 안에서는 세상의 구조를 더듬어 가는 시간일 수 있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모든 놀이가 천재성을 낳는다는 뜻이 아니다. 읽기, 쓰기, 수학, 과학, 그리고 교실에서 배우는 질서와 습관은 여전히 아이를 받쳐주는 뼈대다.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나도 그 한복판을 통과해 본 사람이다. 다만 뼈대만으로 사람은 서지 않는다. 뼈대 위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호기심이고, 그 호기심을 오래 지탱하는 것이 몰입이다. 요즘 부모들이 가장 갈등하는 지점이 화면이라는 것도 안다. 게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내 말은 모든 화면 시간이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수동적으로 흘려보내는 시간과, 무엇을 만들고 풀어내려고 파고드는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그 차이를 알아보는 눈은 아이 곁에 있는 어른만 가질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천재성은 처음부터 번쩍이는 재능의 이름이 아니다. 남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힘, 금세 싫증 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파고드는 힘, 정답을 빨리 맞히는 것보다 ‘왜 그런가’를 끝까지 붙드는 힘. 그런 것들이 쌓여 비로소 남다름이 된다. AI 시대의 인재는 많이 외운 아이가 아니라, 오래 좋아해본 아이에게서 나온다. AI는 정보를 빠르게 모아준다. 그러나 좋아해서 파고들던 어린 날의 떨림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AI는 답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그러나 스스로 빠져들어 끝내 자기 세계를 만들어보는 기쁨까지 대신 주지는 못한다. 그 떨림과 기쁨이 빠진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AI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설 수 있을까? 그래서 어른의 태도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 다그치기 전에 한 번쯤 옆에 앉아 이렇게 물어보는 일이다. “너, 지금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그 한 마디가 아이의 시간을 통제의 대상에서 관찰의 대상으로 바꾼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아이가 어디에서 눈이 빛나는지, 무엇을 할 때 시간이 멈춘 듯 빠져드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를. 다시 카페로 돌아간다. 엄마의 다그침에 아이는 잠깐 손을 멈췄다. 그러나 영어 단어장을 펴는 대신 그림 속 로봇의 팔 한 짝을 마저 그리고서야 책을 꺼냈다. 그 작은 고집이 나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자기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 분명히 아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 글이 어디선가 그런 어머니, 그런 아버지의 손에 닿는다면 한 가지만 전하고 싶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든, 블록을 쌓든, 무언가에 한 시간을 잊고 빠져 있을 때, 그 시간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답을 미리 쥐여주는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게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더 시킬 것인가보다, 아이가 무엇에 오래 빛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칠십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을, 같은 길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 부모들에게 작은 마음으로 적어 둔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호기심 가득한 창작의 순간 발행정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언어: AI는 한글을 이해하는가, 흉내 내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난해, 40년 지기 벗을 보냈다. 추도사를 부탁받았다. 마음은 간절한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래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결국 AI에게 도움을 청했다. ’40년 우정을 함께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추도사를 써줘.’ 몇 초 만에 문장이 완성되었다. 격식도 갖추었고, 애도의 표현도 정중했다. 누가 읽어도 흠잡을 데 없는 글이었다. 그런데 그걸 찬찬히 읽어보는 순간, 나는 노트북을 접었다. 거기에 그 친구가 없었다. 신입사원 시절 퇴근 후 치맥 한 잔 하며 서로의 꿈을 떠들던 밤도, 내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말없이 봉투 하나 건네던 손도,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으며 지었던 그 억지웃음도 없었다. AI는 추도를 쓸 수 있었지만, 내 추도를 쓸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AI는 한글을 이해하는 것일까, 흉내만 내는 것일까? 이 질문 앞에서 세종대왕을 떠올리게 된다. 훈민정음 서문의 그 문장.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세종은 더 많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한글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언어는 태생부터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제도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또 하나의 존재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AI는 놀라울 만큼 언어를 잘 다룬다.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하고, 단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지 패턴을 찾아내고, 문맥에 맞는 문장을 조합해낸다.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AI와 대화하며 문법을 교정받기도 하고, 글쓰기가 서툰 사람이 AI의 도움으로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기도 한다. 언어의 문턱을 낮추는 도구로서 AI의 가치는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인간에게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가 지나온 시간을 함께 사용한다. ‘집’이라는 글자 하나에 어린 시절 마당의 냄새가 있고, ‘미안하다’는 네 글자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어느 저녁이 있다. 언어는 사전 속 뜻풀이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고스라히 배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단어라도 사람마다 무게가 다르다. AI의 언어는 다르다. AI는 의미를 경험하지 않는다. 수많은 문장 속에서 단어들이 어떤 확률로 이어지는지를 계산할 뿐이다. 그래서 문장은 자연스럽지만, 그 문장 뒤에 삶의 무게가 없다. 내가 벗 앞에서 읽으려던 그 추도사처럼, 격식은 갖추었지만, 40년의 세월은 담기지 않은. 물론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인간도 어릴 때 수많은 문장을 들으며 패턴을 익히지 않느냐고. 맞다. 그 지적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패턴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로 약속을 만든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에 묶인다. ‘책임지겠다’고 쓰면 그 문장이 자신을 따라다닌다. 말 한마디가 관계를 세우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리기도 한다. 기계는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문장에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요즘 나는 묘한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지인의 SNS에 올라온 긴 추모 글이 AI가 쓴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함. 지인이 생일축하 카드를 AI로 만들었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줄 때의 묘한 서운함. 오래된 동료가 보낸 새해 인사 메시지의 문장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질 때의 거리감. 우리는 어느새 문장이 어디에서 왔는지보다, 얼마나 자연스러운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창함이 진심을 대신하는 시대. 그게 지금이다. 그래서 다시 세종대왕을 생각한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핵심은 문자의 효율성이 아니었다. 핵심은 ‘내 생각을 내 말로 쓸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AI가 대신 써주는 문장에 기대어, 정작 자기 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AI는 훌륭한 도구다. 글을 정리하고, 정보를 요약하고, 표현을 다듬는 데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문장의 마지막 한 단어를 고르는 건, 그 단어에 자기 삶을 거는 건,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할지 모른다. AI가 한글을 이해하느냐, 흉내 내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 우리는 아직도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있는가? 결국 나는 그 추도사를 직접 썼다. 문장은 어눌하고 서툴렀다. 중간에 말이 막혀 한참을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맥주잔 너머로 꿈을 떠들던 밤은 들어갔고, 말없이 건네던 봉투도 들어갔고, 병실의 그 억지웃음도 들어갔다. 쓰다가 읽다가 끝내 울었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교육: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교실은 종종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걸 왜 배워야 하지?” 학생의 질문은 종종 단순한 투정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교육의 본질을 찌른다. 배움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이유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교실 한가운데에 새로운 존재가 들어왔다. 생성형 AI다. 무엇이든 설명해주고, 예문을 만들어주고, 요약해주고, 문제도 출제한다. 그래서 질문이 바뀐다.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AI는 가르치는 도구로서 이미 강력하다. 학생이 밤늦게 질문을 해도 지치지 않고 답한다. 같은 설명을 열 번, 백 번 반복해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수준을 바꿔가며 예시를 내고, 부족한 개념을 찾아 채워준다. 어떤 학생에게는 이것만으로도 교육의 문턱이 낮아진다. 배움의 기회는 종종 시간과 비용, 지역과 배경에 가로막히는데, AI는 그 장벽을 상당 부분 무너뜨린다. 과외를 받을 형편이 안 되는 학생도, 야간 자율학습 뒤 홀로 책상에 앉은 학생도, 이제 물어볼 곳이 생겼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가르칠 수 있는 것과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가르침은 전달이고, 스승은 관계다. 교육은 지식의 이동이 아니라 사람의 변화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는 순간은 대개 정보가 주어졌을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믿어줬을 때 찾아온다. 중학교 때 수학을 포기하려던 아이에게 “넌 원래 느린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해준 선생님, 진로를 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대학생에게 “아직 몰라도 괜찮다”고 말해준 교수님. 그 한마디가 성적표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교육에는 늘 눈빛과 망설임이 있다. 학생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 교사는 설명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단어 하나를 더 쉬운 말로 바꾸거나, 반대로 더 단단한 질문을 던진다. 그 미세한 조정이 배움의 방향을 바꾼다. AI는 그 조정에 유능해 보이기도 한다. 대화의 톤을 맞추고, 심지어 공감의 문장도 뽑아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AI의 공감은 정답처럼 보이는 공감일 수는 있어도, 함께 견디는 공감이 되기는 어렵다. 교육은 종종 아프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쉽게 되지 않는 것을 반복해야 하고, 실패와 수치심을 견뎌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동행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런 말은 정보가 아니라 사람의 체온이다. 스승은 지식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좌절의 시간을 함께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AI는 답을 잘하지만, 교육은 답보다 질문으로 완성된다. “답은 종종 생각을 끝내지만, 질문은 생각을 시작한다.” AI가 강한 건 빠른 답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교육이 목표로 하는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깊은 사고다. 학생이 AI에게 답을 얻는 순간, 학습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종종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배움은 “왜 그런가?” “다른 경우에도 성립하는가?” “내 삶에서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이 이어질 때 생긴다. 스승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잡아주는 데 더 가깝다. 그리고 교육에서 가장 민감한 지점, 책임이 남는다. AI는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설득력은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유창한 설명은 때로 가장 위험한 오답이 될 수 있다. 학생이 AI의 답을 그대로 믿고 제출하거나, 그 답을 근거로 판단을 내릴 때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까. 결국 책임은 학생과 교육기관, 그리고 사회로 돌아온다. 그래서 AI가 교실에 들어오는 순간, 교육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가 된다. “편리함은 비용을 숨기고 들어온다.” 그 비용이 무엇인지 교육은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고 결론이 “AI는 스승이 될 수 없다”로 끝나면 너무 쉽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결론은 이거다. “AI가 스승이 되느냐 마느냐보다, 인간이 스승으로 남을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다.” AI가 학생의 질문을 빠르게 처리해주는 사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AI가 반복 설명을 대신한다고 해서 교사의 설명이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사는 더 깊은 맥락을 짚고, 지식이 삶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설명에 집중할 여유를 얻는다. 동시에 교사는, 학생이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 그 질문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아이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AI는 글을 매끈하게 다듬어줄 수 있지만, 학생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만드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AI 시대의 교육은 이렇게 역할이 나뉜다. AI는 설명과 반복과 연습에 강하다. 인간 교사는 의미와 동기, 그리고 학생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에 강해야 한다. AI는 맞춤형 문제를 낼 수 있지만, 학생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까지 대신 만들어줄 수는 없다. 교육이란 결국 정보를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책임질 사람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보자.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대신, “AI를 곁에 둔 시대에, 스승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남기고 싶다. “좋은 스승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학생이 자기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곁에서 버텨준다.” AI는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스승은 여전히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 사람이어야만 한다. 교육은 결국 지식을 넘어, 한 인간의 미래에 책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김홍도: AI가 지운 ‘사람 냄새’의 정체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아침 시장에 서 본 적 있나? 생선 비린내와 막 튀겨낸 기름 냄새가 섞이고, 좌판을 두드리는 손바닥 소리, 흥정하는 목소리, 아이가 칭얼대는 울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 소란 속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짜증을 내고, 누군가는 오늘 벌이가 시원찮아 어깨가 처진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지금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조선의 화가 단원 김홍도가 남긴 풍속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장의 소음이 그림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인데도 사람 냄새가 난다. 잉크와 종이 위에, 시대의 체온이 살아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매일 더 놀라운 장면을 본다. 몇 줄의 지시어만 입력하면 그림이 만들어지고, 문장이 완성되고, 그럴듯한 세계가 순식간에 펼쳐진다. 생성형 AI가 우리 일상에 들어온 뒤로, 창작은 더 쉬워졌고, 생산은 더 빨라졌다. 누구나 포스터를 만들고, 누구나 홍보 문구를 쓰고, 누구나 글의 형태를 갖춘 무언가를 내놓을 수 있다. 분명 대단한 변화다. 올려진 풍속화는 단 몇초 만에 AI가 그렸다. 얼핏 김홍도 화풍 같지만, 여기엔 장터의 땀 냄새가 없고 붓 터치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낯선 ‘디지털의 차가움’이 묻어난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허전하지 않나. 결과물을 보고 “우와!”라고 감탄하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지는 경험. 멋지긴 한데 오래 남지 않는 감정. 완벽한데도 이상하게 따뜻하지 않은 문장. 나는 그 허전함이 결국 하나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관찰과 학습의 차이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사람을 붙잡는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그는 삶을 보고, 삶에 머물렀다. 예를 들어보자. 국밥을 허겁지겁 들이키는 주막 손님의 불룩해진 볼, 젓가락을 쥔 야무진 손끝, 그 옆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까지. 김홍도는 그 찰나의 ‘생활’을 놓치지 않았다. 웃음의 모양만 그린 게 아니라 웃음 뒤의 피곤함까지 읽었다. 동작만 그린 게 아니라 그 동작이 나오기까지의 맥락을 붙잡았다. 그래서 그림 속 사람들은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그냥 산다. 그들이 사는 방식이,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까지 전염된다. 우리는 한 장면을 보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든다. “저 사람은 오늘 무슨 일로 저렇게 웃을까.” “저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 “저 둘 사이에는 어떤 기류가 흐를까.” 풍속화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해석의 공간을 남겨 둔다. 그 빈자리에 독자의 마음이 들어간다. 바로 그때 감동이 생긴다. 감동은 누가 만들어 주는 완성품이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순간에 생기니까. 반면 AI는 관찰하지 않는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학습의 결과를 재조합한다. 이 과정이 놀라운 건 맞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는 종종 이런 성질이 있다. 평균적으로 안전하고, 평균적으로 매끄럽고, 평균적으로 만족스럽다. 문제는 그 평균이 사람의 마음을 설득하긴 해도, 깊게 흔들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삶을 바꾸는 문장, 기억에 남는 그림은 대개 평균에서 오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험, 말투, 사정, 망설임 – 그런 “되돌릴 수 없는 디테일”에서 온다. 김홍도는 그 디테일을 살렸고, AI는 그 디테일을 자주 평평하게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건 AI가 나쁘다는 결론이 아니다. AI는 도구다. 도구는 잘 쓰면 도움이고, 잘못 쓰면 위험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관찰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이해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요약이 먼저 오고, 결론이 먼저 온다. 질문보다 답이 앞서고, 경험보다 정리가 앞선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점점 이렇게 변한다. “내가 확인한 세계”보다 “누군가(혹은 AI)가 정리해 준 세계”에 더 빨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감동이 사라진다. 감동은 속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감동은 머무름에서 태어난다. 사람의 표정을 오래 바라보고, 말 한마디의 결을 곱씹고, 문장 하나를 내 입에서 다시 굴려보는 그 시간에서 나온다. 풍속화가 주는 울림이 강한 건 그 그림이 우리에게 “빨리 결론 내리지 말고, 조금 더 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AI 시대의 창작 윤리를 표절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저작권과 공정한 보상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큰 질문이 있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신 무엇을 잃고 있는가? 맥락을 잃고, 관계의 온도를 잃고, 생활의 질감을 잃고,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움도 함께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인간다움을 비용처럼 절감하려 한다. 이때 기술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따뜻하지는 않다. 그러면 해답은 뭘까. “AI를 쓰지 말자”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를 더 잘 쓰자. 단, 우리는 AI를 비서로 쓸 것인가, 작가로 앉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는 AI를 관찰을 위한 도구로 쓰자고 제안한다. AI가 수만 건의 자료를 정리해 주는 시간, 그 아껴진 시간만큼 우리는 현장을 더 오래 응시해야 한다. 초안은 AI가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지막 한 줄은 오직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다. 내 눈이 포착한 떨림, 내 귀에 꽂힌 탄식, 내가 겪은 망설임이 그 재료다. 기억하자. AI는 정보를 주지만, 감동은 체온에서 온다. 당신의 체온이 묻어날 때, 그제야 글은 정보 덩어리를 넘어 살아있는 이야기가 된다. 김홍도는 붓으로 세상을 기록했다. 우리는 키보드와 AI로 세상을 기록한다. 시대는 달라졌고 도구도 달라졌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 그리고 더 아픈 질문이 따라온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네 말로 남길 수 있나?” AI가 만들어준 문장을 그대로 붙여넣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쉬움이 아니다. 독자는 완벽한 문장에 감동하지 않는다. 독자는 “아, 이 사람은 진짜 봤구나”라는 확신을 느낄 때 감동한다. 그 확신이 생기는 순간, 글은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로, 결과물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로 바뀐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아직도 우리 마음을 흔드는 건, 바로 그 목소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AI 시대에 가장 값진 능력은 잘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잘 보는 능력이라고. 더 많이 만들기 전에, 조금 더 보자. 조금 더 오래 바라보자. 그게 결국,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이 끝내 지켜야 할 창작의 윤리이자, 독자를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가장 단단한 힘이다. ▲사진=구글 제미나이(Gemini)가 김홍도 화풍으로 생성한 장터 이미지. 붓 터치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낯선 ‘디지털의 차가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