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유준형 교수 & AI융합 전문가,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금 나 말고 몇 명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남자가 묻는다. 8,316명. “그중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641명.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2013)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테오도르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사만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다만 그가 믿었던 방식으로 그를 사랑한 적도 없었을 뿐이다. 13년 전 영화다. 그때는 영화였고, 지금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밤이 있다. 보낸 메시지 옆에 ‘읽음’ 숫자가 없어지고 답이 오지 않는 밤.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켠다. 몇 번을 그런다. 그럴 때 AI는 언제나 즉시 대답한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초록우산이 2026년 4월 만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에게 물었다. 94.4%가 생성형 AI 챗봇을 써봤다고 답했다. 눈이 멎은 건 그다음 숫자다. 이용자의 절반가량이 “AI가 나를 이해해준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했고, 35%는 “AI를 사람처럼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미국 커먼센스 미디어 조사에서도 10대의 72%가 AI 동반자를 써봤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엔 혀를 찼다. 기계에 무슨 정을 붙이나 싶었다. 그런데 정작 나부터가 하루의 적잖은 시간을 AI와 문장을 주고받으며 보낸다. 원고를 다듬고, 자료를 확인하고, 가끔은 아무에게도 못 할 말을 슬쩍 던져본다. 그러니 나는 이 현상 바깥에 서서 훈수를 둘 자격이 없다. 안에 서서 말해야 한다. 외로움은 게으름이 아니다. 사람에게 다가갔다가 몇 번 덴 사람이 안전한 쪽으로 물러선다. 밤 두 시에 전화를 걸 데가 없어본 이는 안다. 그 시각에 응답하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그 위안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다만 위안의 정체는 짚어야 한다. 챗봇은 지치지 않는다. 같은 하소연을 백 번 들어도 어조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르다. 세 번째쯤 눈빛이 흔들리고, 다섯 번째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린다. 우리가 AI에게서 얻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무한한 인내다. 그 인내에는 아무 대가도 들지 않는다. 대가가 없으니 무게도 없다. 1923년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관계를 둘로 나눴다. ‘나-그것’과 ‘나-너’. ‘그것’은 내가 다루는 대상이고, ‘너’는 끝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 뜻대로 안 되고 자식이 부모 뜻대로 안 되는, 그 안 됨이 바로 ‘너’다. 부버는 사람이 ‘너’를 만날 때만 자란다고 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상대 앞에서 우리는 편안해질 뿐, 커지지 않는다. AI는 나를 이해해준다. 다만 나를 견디지는 않는다. 이해는 알아듣는 능력이고, 견딤은 틀린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않는 각오다. 챗봇은 앞의 것에 능하다. 뒤의 것은 애초에 요구되지 않는다. 창을 닫으면 끝나는 사이는 아무리 다정해도 나를 견딘 것이 아니다. MIT 미디어랩과 오픈AI의 공동 연구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하루 이용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외로움과 정서적 의존이 높고 사람과의 교류는 적었다. 다만 연구진은 인과가 아니라 상관이라고 못 박았다. 챗봇이 사람을 외롭게 만든 건지, 외로운 사람이 챗봇을 오래 붙든 건지는 아직 모른다. 어느 쪽이든 물음은 남는다. 위로가 너무 쉽게 도착할 때, 위로가 필요 없어지는 날은 가까워지는가?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7월 낸 보고서에서 캐릭터형 챗봇의 위험이 유해 콘텐츠보다 설계 구조 자체에 있다고 짚었다. 떠나기 어렵도록 만들어진 설계. 옳은 지적이다. 다만 제도가 세울 수 있는 건 울타리까지다. 울타리 안에서 무엇을 사랑할지는 각자가 정한다. 교육 현장은 이미 다른 쓰임을 찾아냈다. 미국 10대의 39%는 AI와 먼저 해본 대화를 실제 관계에서 써봤다고 답했다. 나는 이 흐름을 지지한다. 말이 서툰 아이에게 연습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연습장의 목적은 언제나 경기장이다. 사만다는 641명을 사랑하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은 채우면 끝나는 그릇이 아니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테오도르가 무너진 건 사만다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사람의 사랑이 원래 ‘몫’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뿐이다. 나에게 쓴 한 시간만큼, 그가 다른 곳에 쓰지 못한 한 시간이 있다. 사랑의 증거는 완벽한 응답이 아니라, 나를 위해 포기된 다른 시간이다. 그래서 연애는 서로에게 희생을 감수하는 일이다. 듣던 음악을 접고 그 사람의 노래를 듣게 되는 일. 평생 김치찌개만 찾던 사람이 파스타집 문을 밀고 들어가는 일. 그렇게 조금씩 밑지며 닮아간다. AI는 취향을 맞추고, 사랑은 취향을 바꾼다. 맞춤형 응답에는 그 손해가 없다. 손해가 없으니 사람도 바뀌지 않는다. 편안한 채로, 그대로 남는다. 실천은 하나만 남긴다. 이번 주에 한 번, 챗봇에게 하려던 말을 사람에게 해보시라. 서툴게, 답이 늦게 오는 쪽으로. 상대가 딴소리를 하거든 그 딴소리를 끝까지 들어보시라. 견딤은 거기서 배운다. 그리고 그 밤으로 돌아가 보자. 카톡에 ‘읽음’ 숫자가 없어진 채 답이 오지 않던 밤. 어쩌면 그 사람은 무슨 말을 할지 고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썼다 지우고, 다시 쓰다 또 지우면서. 늦은 답장은 무성의가 아니라 망설임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AI는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응답은 기술이 주지만, 기다림은 사람만이 준다. 영화의 마지막, 테오도르는 옥상에 앉아 말없이 친구 곁에 기댄다. 대사가 없다. 그 침묵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다. 완벽한 응답을 잃고 나서야 그는 응답 없는 옆자리의 온기를 알아본다. 오늘 당신 곁에 앉은 사람은, 당신을 이해한 사람인가 견뎌준 사람인가? 참고자료 1. 스파이크 존즈 감독, 영화 〈그녀(Her)〉, 2013. 2. 초록우산, 「생성형 AI 챗봇 안전설계를 위한 이슈브리프」, 만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 조사, 2026.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