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장년들을 위한 작은 강의 자리에서 한 분을 만났다. 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셨다는 6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손에 든 휴대폰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교수님, 이거에다 그냥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는 게 정말이에요?”
나는 그분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켰다. “한번 해보세요. 평소에 궁금하셨던 거 아무거나요.” 그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건강보험에서 보내준 종이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거 좀 쉽게 풀어줄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올리자, 화면에 한 문단이 떴다. 검진 일정과 준비물, 비용까지 어머니 말투에 가깝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분이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한마디 하셨다. “평생 이런 종이만 보면 막막했는데….” 그 한마디 끝에 나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막막했는데”라는 다섯 글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따라왔다. 글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한국어를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종이 한 장 앞에서 평생을 막막했다는 그 말.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막막함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떠올랐다.
600년 전, 한문이라는 글자 앞에서 자기 뜻을 펴지 못한 채 살았다던 그 백성들의 막막함이었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세종대왕은 이렇게 적었다.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홇 배 이셔도 마침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못할 노미 하니라.”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글자가 없어 끝내 자기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글자를 만들었다. 한문이라는 높은 벽 앞에 세워둔 사람들에게, 자기 말을 자기 글자로 적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니 한글은 처음부터 똑똑한 사람을 위한 문자가 아니었다. 글을 몰라 삶의 문턱에서 밀려나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였다. 세종이 만든 것은 글자가 아니라 길이었다.
백성을 잊은 기술은 권력이 되고, 사람을 살피는 기술만이 문명이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인공지능은 글을 쓰고, 자료를 요약하고, 그림을 만들고, 어려운 행정문서를 쉬운 말로 풀어준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그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닿지 못한다면 결국 일부의 도구로 그칠 뿐이다. 시장에서 평생을 보낸 그분에게 AI가 먼저 닿지 못한다면, 한문이라는 벽 앞에 백성을 세워두던 그 시절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요즘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 후의 인생이모작 등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한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 작업을 하면서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마주쳤다. 처음에는 스마트폰도 버겁다고 하시던 분들이, 한두 번 AI에게 말을 걸어보면 표정이 달라진다. 누군가는 손주에게 보낼 편지를 다듬었고, 누군가는 오래 묻어두었던 자기 일생의 경험을 글로 꺼내기 시작했다. 또 누군가는 기획서 작성을 혼자 해냈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분들에게 AI는 최신 기술을 넘어. 다시 사회에 닿는 사다리다.
물론 AI를 너무 낭만적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우려도 안다. 실제로 AI는 자주 틀리고, 그럴듯한 거짓말을 만들어내며, 디지털 격차를 줄이기는커녕 더 벌릴 수 있다. 그 우려는 마땅하다. 그러나 그 시장 아주머니가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행정문서를 이해하던 그 표정을 떠올리면, 가능성까지 닫을 일은 아니다.
근데 그 시장 아주머니는 그 다음 강의에 나오지 않으셨다. 다른 분께 전해 듣기로는, 손주가 와서 휴대폰을 새 걸로 바꿔드렸는데 AI 앱이 깔리지 않은 채라 다시 막막해지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기술이 한 사람에게 한 번 닿는 일은 어쩌면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 사람 곁에 그 기술이 계속 머물게 하는 일이다.
학교가 AI를 가르치는 일도, 공공기관이 새로운 서비스를 들이는 일도, 기업이 더 정교한 알고리즘을 자랑하는 일도, 결국은 그 머무름의 문제다. 빨리 닿는 것보다, 오래 곁에 있는 것이 어렵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뒤에도 백성에게 그 글자가 정착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강의가 끝나던 그날, 시장 아주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휴대폰 화면을 손바닥으로 한 번 가만히 쓰다듬으시고, 마치 새 식구를 챙기듯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으셨다. 그러면서 작게 웃으셨다. “우리 손주한테 자랑해야겠어요. 할머니도 이거 할 줄 안다고.” 그 한마디가 한참 마음에 남았다. 칠십이 가까워지도록 누구도 그분에게 “당신도 이 시대의 주인공이다”라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작은 화면 하나가 그 말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며칠 후면 5월 15일이다.
세종 탄신일. 600년 전, 한 임금이 백성의 막막함 앞에서 글자를 만들었던 그분의 생일을 우리는 매년 기념한다.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세종이 진정 우리에게 남기려 한 것은 글자가 아니라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닿지 못하고 있는가? 누가 막막한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가?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장 아주머니의 휴대폰 화면 속에서, 그 질문은 지금도 깜박이고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우리는 지금, 정말 백성을 위한 기술을 만들고 있는가?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백성들의 소통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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