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인생이모작: 액티브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만나면 달라지는 놀라운 변화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인생이모작: 액티브 시니어가 인공지능을 만나면 달라지는 놀라운 변화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한 번 크게 넘어져본 사람은 안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나도 그 무게를 안다. 40년 이상 IT 업계에서 일했다. 유망 IT기업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랐고, 소프트뱅크로부터 투자도 받았고 기술 트렌드를 읽고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직업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런 내가 몸을 다치면서 한 번 크게 넘어졌다. 쌓아왔던 사업은 휘청거렸고,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집무실과 명함이 사라지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제 세상이 나 없이 돌아가는구나.’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마땅치 않던 그 시절, 나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려놓고 싶었다. 실패는 주머니 사정만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먼저 자신감을 무너뜨린다.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또 시작해도 될까?” 이런 질문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바깥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주저앉는다. 그래서 인생이모작은 돈을 다시 버는 문제이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시 말을 거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그 갈림길 한가운데 인공지능이 서 있다고 느낀다. 많은 사람은 AI를 젊은 세대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로운 기능을 겁 없이 배우는 사람들의 도구라고 여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AI를 진짜 잘 쓰는 사람은 손가락이 빠른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지 알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고, 나온 답을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골라낼 줄 아는 사람이다. 바로 그 점에서 액티브 시니어는 결코 늦은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세대일 수 있다. 내가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그걸 본다. 인공지능을 주제로 강의를 하다 보면, 디지털 기기에 서툰 중장년 수강생이 오히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기능은 몰라도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아는 것이다. 어떤 분은 AI에게 30년 경력을 살린 창업 아이디어를 물었고, 또 어떤 분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버튼을 누른 것이 아니라 삶을 꺼낸 것이다. 젊음이 빠름의 힘이라면, 시니어는 방향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작년에 만난 한 60대 여성이 기억난다.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다가 코로나 때 문을 닫았다. 재기를 꿈꿨지만, 세상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배달앱, SNS 마케팅, 키워드 광고. 이름만 들어도 숨이 막혔다고 했다. 그런데 AI 활용법을 배운 뒤 달라졌다. “내 경험을 살려 작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 한 마디로 대화를 시작했다. AI는 케이터링, 밑반찬 배달, 요리 클래스 같은 선택지를 내놓았고, 그중 하나를 골라 지금은 동네 주민센터에서 요리 강습을 한다. 완벽한 재기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다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게 제일 커요.” 강의나 교육 콘텐츠를 준비하는 액티브 시니어에게도 변화는 크다. 현장 경험은 많은데, 그것을 목차로 정리하고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평생의 경험이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던 것이다. AI는 흩어진 경험을 구조화해주고, 강의안의 흐름을 잡아주고,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내용을 풀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표현의 문턱 앞에서 멈췄던 시니어가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회고록, 자서전, 블로그 글, 강연 원고, 손주에게 남기는 편지까지. 마음속에만 있던 이야기를 AI와 함께 꺼내 적다 보면, 이름 붙이지 못했던 자기 삶의 의미가 문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 역시 새벽에 혼자 글을 쓰다 막히면 AI에게 묻는다. “이 문장을 더 따뜻하게 바꿔줘.” “논리가 허술한 데가 있으면 짚어줘.”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단지 글 한 편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다시 들여다보는 거울을 얻는다. 사람은 기능 하나를 더 배워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살아날 때 달라진다. 물론 반론은 있다.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잘못된 답도 내놓고, 지나치게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때도 있다. 디지털 기기 자체가 두려운 사람에게는 첫걸음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다시 시작하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쉬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 2막을 강요하는 것은 선의의 폭력이다. 그래서 AI를 권하는 일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묻는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가요?”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그 답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도 존중해야 한다. 기술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조력자다. 조력자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가능성까지 접을 이유는 없다. AI는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살아볼 용기를 북돋울 수는 있다. 사업에 다시 도전하려는 사람에게는 생각을 정리해주는 조력자가 되고,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구조화해주는 비서가 되며,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첫 문장을 밀어주는 동반자가 된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칠 때, AI는 작은 디딤돌이 되어줄 수 있다. 복잡한 계약서 조항을 풀어 물어보고, 새로운 사업 구조를 함께 검토하고, 낯선 분야의 기초 지식을 밤늦게 조용히 배울 수 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래도 좋다. 다시 질문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게 전부가 될 수 있다. AI는 젊은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세월은 몸을 느리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가능성까지 늙게 만들지는 못한다. 실패는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어도, 다시 배우려는 마음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인생이모작은 나이가 허락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 시작된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어렵지 않다. AI에게 거창한 미래를 묻지 말고, 딱 하나만 물어보면 된다. “내가 지금 가진 경험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무엇인가?” 인생 2막은 시간이 남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다시 생길 때 시작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잊고 있던 재기의 언어를 다시 돌려주는 것일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액티브 시니어: 인공지능이 열어주는 인생 2막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액티브 시니어: 인공지능이 열어주는 인생 2막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병원 예약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한 어르신이 끝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세상이 나 없이 먼저 가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표정이 남았다. 화면을 포기하는 순간, 그분의 얼굴에 스친 것은 짜증이 아니었다. 체념이었다.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은 주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한 발짝 밀려났다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인공지능을 생각할 때마다 기술 이전에 먼저 그 어르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AI가 단지 새롭고 똑똑한 기계가 아니라, 누군가를 다시 세상과 연결해주는 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은 AI를 젊은 세대의 기술이라고 여긴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로운 기능을 겁 없이 배우는 쪽이 유리하다고 본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인공지능은 버튼을 빨리 누르는 사람이 잘 쓰는 기술이 아니다. 무엇이 자기 삶에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 더 깊이 쓰는 도구다.  같은 AI에게 물어도 어떤 사람은 검색엔진 수준의 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삶을 재정비할 실마리를 얻는다. 차이는 기기에서 갈리지 않는다. 질문에서 갈린다. 바로 그 점에서 액티브 시니어는 뒤에 설 이유가 없다. 젊은 세대는 기능에 익숙하다. 그러나 삶의 맥락까지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시니어에게는 시간이 쌓아준 것이 있다. 사람을 겪은 두께, 실패를 견딘 근력, 선택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감각. AI 앞에서 “나한테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앱 순위를 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내가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그걸 본다. 디지털 기기에 서툰 수강생이 AI에게 던지는 질문이 오히려 날카로운 경우가 적지 않다. 기능은 몰라도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AI에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동료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기능을 쓴 것이 아니라, 삶을 꺼낸 것이다. 생각해보면 시니어의 일상에 AI가 들어올 자리는 이미 곳곳에 있다. 한 어르신의 하루를 상상해보자. 아침에 오늘 먹는 약의 부작용이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보고,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받은 안내문의 어려운 문장을 쉽게 풀어달라고 하고, 저녁에는 손주 생일에 보낼 문자를 조금 더 따뜻하게 고쳐달라고 한다. 거창한 기술이 아니다. 하루를 조금 덜 막막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기능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나는 이제 늦었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것도 한번 해볼 수 있겠네”로 바뀌는 순간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늘어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살아날 때, 사람은 달라진다. 오래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작은 가게의 홍보문을 직접 만들어보고,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던 것들을 밤늦게 조용히 AI에게 묻는다. 그 순간 기술은 기능을 넘어서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 한 발짝 물러서야 할 지점도 있다. AI가 만능인 것처럼 말하는 건 위험하다. 잘못된 정보도 있고, 화면 자체가 두려운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다시 시작하라”는 말 자체가 또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다. 충분히 살았고, 이제는 쉬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 2막”을 강요하는 것은 선의의 폭력이다.  그래서 AI를 권하는 일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묻는 것이다. “무엇이 불편하세요?”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그 답이 “아무것도”라면, 그것도 존중해야 한다. 기술은 삶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다. 도구는 필요할 때 쓰는 것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가능성까지 접을 이유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는 것이다.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 더 분명해지고, 시간을 어디에 쓸지 더 또렷해진다. 인생 2막은 청춘의 반복이 아니다. 더 많이 쥐는 시간이 아니라, 더 분명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AI는 그 분명함을 도울 수 있다. 남은 시간을 더 자기답게 쓰도록 곁에서 거드는 조용한 조력자로. 기계는 정보를 건네지만, 인생 2막의 방향은 끝내 사람이 정한다.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병원 예약 화면 앞에서 전화를 내려놓던 그 어르신. 만약 그분 옆에 누군가가 앉아서 “제가 같이 해볼까요?”라고 말했다면, 그분은 전화를 다시 들었을까. 나는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더 쉬운 기술이 아니라, 옆에 앉는 한 사람이었을 테니까. AI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먼저가 아니다. “이제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라고 묻는 한마디가 먼저다. 인생 2막은 시간이 남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다시 움직일 때 시작된다.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서울동부지부, 사전상담위원회 3월 월례회의 개최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서울동부지부, 사전상담위원회 3월 월례회의 개최

[강남 소비자저널=정현아 기자] 신규위원 OT 및 기관 라운딩… 법무보호대상자 자립 지원 방향 논의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서울동부지부(지부장 정순찬)는 3월 24일(화) 서울동부지부 3층 회의실에서 사전상담위원회 3월 월례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는 한종철 사전상담위원회 회장을 비롯한 위원 15명과 정순찬 지부장 및 직원 2명이 참석했다. 이번 월례회의는 신규위원 오리엔테이션(OT)과 기관 라운딩을 시작으로, 2026년도 1분기 위원회 추진 현황과 주요 활동 사항을 공유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또한 지부 동정 보고와 함께 위원회의 향후 발전 방향 및 활성화 방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한종철 사전상담위원회 회장은 “앞으로 사회적 약자와 동행하며 법무보호대상자의 자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정순찬 서울동부지부장은 “법무보호대상자의 안정적인 사회복귀를 위해 위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며 “항상 헌신해 주시는 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한편,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은 법무보호대상자의 원활한 사회복귀를 지원하기 위해 취업 지원, 주거 지원, 상담 및 교육 등 다양한 보호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노인: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쓸 수도 있는 이유.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노인: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잘 쓸 수도 있는 이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지하철 5호선, 오후 세 시쯤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화면을 넘기지 않았다. 한 화면을 오래 붙들고,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읽고 계셨다. 옆자리 청년은 릴스를 쉴 새 없이 넘기고 있었다. 누가 더 유능해 보였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청년 쪽을 가리킬 것이다. 손이 빠르고, 화면에 익숙하고, 새 기능을 겁 없이 다루니까. 나도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르게 본다. AI는 손가락이 빠른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 질문이 깊은 사람의 도구다. 소크라테스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 더 깊이 묻는 사람을 지혜에 가깝다고 보았다. 이천사백 년 전 말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있다. 인공지능이 정답을 외운 기계가 아니라, 질문에 반응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ChatGPT든 클로드든, 같은 AI에게 물어도 어떤 사람은 검색엔진 수준의 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삶을 바꿀 통찰을 받는다. 차이는 기기가 아니라 질문에서 갈린다. 바로 여기서 나는 노인의 가능성을 본다. 노인은 기술에 늦다. 이건 사실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줄이 밀리고, 무인주차장에서 당황하고, 앱 하나 깔자면 자녀에게 전화를 건다. 이 고충을 가볍게 넘길 생각은 없다. 디지털 소외는 실재하는 고통이고,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다. 그러나 기술에 늦는 것과 기술을 못 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노인에게는 젊은이가 아직 갖지 못한 것이 있다. 사람을 오래 겪은 시간, 실패를 견딘 근력, 선택의 무게를 몸으로 배운 감각.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구별하는 힘은 매뉴얼로 익히는 게 아니다. 살아내야 생긴다. AI 앞에서 “나한테 지금 뭐가 필요하지?”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앱 스토어 순위를 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나이는 손을 늦출 수 있어도, 질문을 늦추지는 못한다. 생각해보면 AI가 노인의 일상에 들어올 자리는 이미 넘친다. 병원 예약 전에 증상을 정리해주고, 공공문서의 난해한 문장을 풀어주고, 자녀에게 보낼 문자를 조금 더 따뜻하게 다듬어준다. 혼자 사는 밤에 말벗이 되고,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던 것들에 답해준다. 이것은 유행이 아니다. 삶의 반경을 다시 넓혀주는 일이다. 그래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노인이 AI를 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왜 노인일수록 AI를 더 가까이해야 하느냐”로.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빨라지고, 제도는 복잡해지고, 설명서는 불친절해진다. “이제 나는 시대에서 멀어졌다”는 체념이 조용히 스며든다. AI는 그 체념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도구다. 정보에 다시 닿게 하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늘려주고, 세상과의 연결을 되살린다. 인공지능은 젊은이의 장난감이 아니라, 노년의 삶을 다시 넓혀주는 지팡이가 될 수 있다. 물론 불편한 진실도 있다. AI를 권하는 일 자체가 노인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다. 화면은 낯설고, 용어는 어렵고, 배우는 과정은 생각보다 두렵다. 그런데 기술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건, “그것도 모르세요?”라는 한마디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짜증이 나서. 돌이켜보면 기술을 가르친 게 아니라 자존심을 깎은 것이었다. 기계와 기술은 시험지가 아니라 지팡이여야 한다.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기대어 걸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노인에게 AI를 강요하는 일이 아니다. 노인이 자기 속도로, 자기 필요에서 출발해 익히도록 돕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AI 교육의 첫 질문은 “이 버튼을 누르세요”가 아니라 “무엇이 가장 불편하세요?”여야 한다. 미국의 투자자이자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이었던 찰리 먼거는 “지혜는 단순한 정보 축적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의 축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AI 시대의 경쟁력도 다르지 않다. 정보는 기계가 준다. 그러나 그 정보로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를 정하는 것은 끝내 사람의 몫이다. 젊은 세대가 AI의 기능을 먼저 익힌다면, 노년 세대는 AI의 의미를 더 깊이 물을 수 있다. 기계는 정보를 준다. 그러나 삶의 방향은 끝내 사람이 정한다. 그렇다면 노인을 ‘디지털 약자’로만 부르는 말은 이제 고쳐야 한다. 노인은 배워야 하는 사람인 동시에, 더 좋은 질문으로 기술이 가야 할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세대다. 어쩌면 미래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빠른 손가락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어렵지 않다. 주변 어르신에게 “이거 어려우시죠?”라고 말하는 대신, “무엇이 가장 필요하세요?”라고 먼저 묻는 것이다. 미래는 젊은 손끝에서만 열리지 않는다. 삶을 오래 살아낸 사람의 질문 속에서도 열린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아날로그 지혜와 디지털 도구의 아름다운 공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개그맨: 기계는 타이밍을 모른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개그맨: 기계는 타이밍을 모른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몇 해 전 친한 선배의 장례식장에서 밤을 샜다. 새벽녘, 빈소 밖 흡연실에서 고인의 대학 동기 한 분이 담배를 물며 말했다. “그 녀석, 노래방 가면 꼭 그리운 금강산부터 불렀어. 음치인 건 죽어도 모르고.” 아무도 웃을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거기…

홍천시니어클럽, ‘2026년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발대식 개최

홍천시니어클럽, ‘2026년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발대식 개최

3월 10일부터 6개 읍·면 순회… ‘당당한 100세 시대’ 위한 직무·안전교육 병행 [강남소비자저널=정현아 기자] 홍천시니어클럽(관장 허문순)이 어르신들의 활기찬 노후 생활과 사회 참여 기회 확대를 위한 ‘2026년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렸다. 홍천시니어클럽은 지난 3월 10일 홍천읍을 시작으로 오는 4월 24일까지 약 한 달간 지역별 순회 발대식 및 직무·안전교육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6개 지역 순회 발대식… 현장 중심 운영 돋보여 이번 발대식은 참여 어르신들의 이동 편의를 고려해 총 6회에 걸쳐 홍천군종합사회복지관 대회의실 및 각 면사무소 회의실에서 분산 개최된다. 일정은 ▲3월 10일 홍천읍을 필두로 ▲북방면(13일) ▲남면(16일) ▲두촌면(19일)…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시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가, 빼앗기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시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가, 빼앗기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AI로 보고서 초안을 10분 만에 끝냈다. 예전 같으면 반나절은 걸렸을 일이다. 남은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밀린 메일을 처리하고, 다른 업무를 당겨서 시작하고, 또 다른 업무 자료를 준비했다. 점심도 그냥 대충 때웠다. 근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시간을 벌었는데, 하루는 전보다 더 빡빡했다. 벌어들인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매일을 하나의 온전한 삶처럼 살라”고 권했다. 2천 년 전 말이 오늘따라 아프게 다가온 건, 기술이 시간을 아껴준다는 약속과 실제 삶의 체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말 시간을 절약하고 있는가, 아니면 더 정교한 방식으로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건 아닌가? AI는 분명 놀라운 도구다. 몇 시간 걸리던 문서 정리가 몇 분으로 줄고, 긴 보고서는 순식간에 요약되며, 번역과 검색의 속도는 인간의 손을 가볍게 만든다. 반복 노동은 줄고 생산성은 높아진다. 기술의 약속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더 많은 시간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AI가 인류에게 ‘시간의 선물’을 안겨줄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술은 빨라졌는데 삶은 왜 더 분주해졌을까? 답장은 더 빨라져야 하고, 판단은 더 즉각적이어야 하며, 성과는 더 자주 증명되어야 한다. 절약된 시간은 휴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개 더 많은 업무와 더 촘촘한 요구로 다시 채워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미 그런 풍경이 일상이 되어 있다. 메일 회신 속도가 빨라진 만큼 상대방의 기대치도 올라갔고, 보고서를 빨리 쓸 수 있게 된 만큼 보고서의 양도 늘어났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밀어 넣는 기술을 익힌 것인지 모른다. 여기서 시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같은 한 시간이라도 병실의 한 시간과 여행지의 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기다리는 한 시간은 길고, 사랑하는 사람 곁의 한 시간은 짧다. 누군가의 임종을 지키는 한 시간은 시계가 멈춘 것처럼 무겁고, 오랜 친구와 나누는 한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가볍다. 시간은 시계 위에서 균일하게 흘러가지만, 인간은 그것을 의미로 살아낸다. 바로 그 지점에서 AI와 인간의 길이 갈라진다. AI는 문장을 줄일 수 있지만 상처의 무게를 줄이지는 못한다. 정보를 정리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실패를 통과하며 얻는 성찰까지 대신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나 역시 AI에게 글의 초안을 맡길 수 있지만, 몇 문장에 한참을 붙들려 있었던 밤의 고투까지 위임할 수는 없었다. 슬픔을 견디는 시간, 관계가 익어가는 시간,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은 AI가 건너뛸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대개 느리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고, 사랑은 효율로 설명되지 않으며, 지혜는 검색창에 도착하지 않는다. 오랜 대화, 오래된 침묵, 한 사람을 끝까지 기다려주는 마음. 그런 비효율적인 시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깊어진다. 문명은 시간을 압축했지만, 영혼은 압축된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AI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은 “얼마나 빨리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절약한 시간을 나는 어디에 쓸 것인가.”이다. 만약 AI가 비워준 시간이 더 많은 경쟁, 더 많은 피로, 더 많은 불안으로만 채워진다면 기술은 우리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더 정교하게 길들인 셈이다. 반대로 그 시간이 돌봄과 관계, 성찰로 이어진다면, 비로소 기술은 인간 편에 선 것이 된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중요한 장면들은 대부분 비효율적이다. 아이의 첫걸음을 기다리는 시간, 아픈 사람 곁을 밤새 지키는 시간, 책을 덮고 한참 생각에 잠기는 시간,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망설이는 긴 침묵. 이런 시간은 성과표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품위는 대개 그런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대개 빠른 답이 아니라, 함께 견뎌주는 시간이다. 오늘 우리의 피로는 일이 많아서만이 아닐지 모른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표를 채우는 법은 익혔으나 영혼을 채우는 법에는 여전히 서툴다. 더 빨리 연결되었지만 더 깊이 만나지는 못한다. 현대인의 허기는 단순한 과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시간에서 오는 허기일 수 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무엇에 바쁜지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이 늘어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AI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더 잘 활용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자. 기술은 인간의 시간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기계는 시간을 계산할 수 있지만, 그 시간을 의미로 바꾸는 일은 오직 인간만의 몫이다. 사랑도, 돌봄도, 책임도, 기다림도, 모두 그 의미의 시간 안에서만 자란다. 세네카의 말처럼 하루를 한 생애처럼 살아야 한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AI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줄 수 있느냐가 아니다. 그 시간을 우리가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느냐다. 문명의 미래는 속도에 달려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미래는 그 속도 안에서 무엇을 지켜냈는가에 달려 있다 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언어: AI는 한글을 이해하는가, 흉내 내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언어: AI는 한글을 이해하는가, 흉내 내는가?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난해, 40년 지기 벗을 보냈다. 추도사를 부탁받았다. 마음은 간절한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래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결국 AI에게 도움을 청했다. ’40년 우정을 함께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추도사를 써줘.’ 몇 초 만에 문장이 완성되었다. 격식도 갖추었고, 애도의 표현도 정중했다. 누가 읽어도 흠잡을 데 없는 글이었다. 그런데 그걸 찬찬히 읽어보는 순간, 나는 노트북을 접었다. 거기에 그 친구가 없었다. 신입사원 시절 퇴근 후 치맥 한 잔 하며 서로의 꿈을 떠들던 밤도, 내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말없이 봉투 하나 건네던 손도,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으며 지었던 그 억지웃음도 없었다. AI는 추도를 쓸 수 있었지만, 내 추도를 쓸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AI는 한글을 이해하는 것일까, 흉내만 내는 것일까? 이 질문 앞에서 세종대왕을 떠올리게 된다. 훈민정음 서문의 그 문장.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세종은 더 많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한글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언어는 태생부터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제도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또 하나의 존재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AI는 놀라울 만큼 언어를 잘 다룬다.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하고, 단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지 패턴을 찾아내고, 문맥에 맞는 문장을 조합해낸다.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AI와 대화하며 문법을 교정받기도 하고, 글쓰기가 서툰 사람이 AI의 도움으로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기도 한다. 언어의 문턱을 낮추는 도구로서 AI의 가치는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인간에게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가 지나온 시간을 함께 사용한다. ‘집’이라는 글자 하나에 어린 시절 마당의 냄새가 있고, ‘미안하다’는 네 글자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어느 저녁이 있다. 언어는 사전 속 뜻풀이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고스라히 배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단어라도 사람마다 무게가 다르다. AI의 언어는 다르다. AI는 의미를 경험하지 않는다. 수많은 문장 속에서 단어들이 어떤 확률로 이어지는지를 계산할 뿐이다. 그래서 문장은 자연스럽지만, 그 문장 뒤에 삶의 무게가 없다. 내가 벗 앞에서 읽으려던 그 추도사처럼, 격식은 갖추었지만, 40년의 세월은 담기지 않은. 물론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인간도 어릴 때 수많은 문장을 들으며 패턴을 익히지 않느냐고. 맞다. 그 지적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패턴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로 약속을 만든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에 묶인다. ‘책임지겠다’고 쓰면 그 문장이 자신을 따라다닌다. 말 한마디가 관계를 세우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리기도 한다. 기계는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문장에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요즘 나는 묘한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지인의 SNS에 올라온 긴 추모 글이 AI가 쓴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함. 지인이 생일축하 카드를 AI로 만들었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줄 때의 묘한 서운함. 오래된 동료가 보낸 새해 인사 메시지의 문장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질 때의 거리감. 우리는 어느새 문장이 어디에서 왔는지보다, 얼마나 자연스러운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창함이 진심을 대신하는 시대. 그게 지금이다. 그래서 다시 세종대왕을 생각한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핵심은 문자의 효율성이 아니었다. 핵심은 ‘내 생각을 내 말로 쓸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AI가 대신 써주는 문장에 기대어, 정작 자기 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AI는 훌륭한 도구다. 글을 정리하고, 정보를 요약하고, 표현을 다듬는 데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문장의 마지막 한 단어를 고르는 건, 그 단어에 자기 삶을 거는 건,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할지 모른다. AI가 한글을 이해하느냐, 흉내 내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 우리는 아직도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있는가? 결국 나는 그 추도사를 직접 썼다. 문장은 어눌하고 서툴렀다. 중간에 말이 막혀 한참을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맥주잔 너머로 꿈을 떠들던 밤은 들어갔고, 말없이 건네던 봉투도 들어갔고, 병실의 그 억지웃음도 들어갔다. 쓰다가 읽다가 끝내 울었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교육: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교육: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교실은 종종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걸 왜 배워야 하지?” 학생의 질문은 종종 단순한 투정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교육의 본질을 찌른다. 배움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이유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교실 한가운데에 새로운 존재가 들어왔다. 생성형 AI다. 무엇이든 설명해주고, 예문을 만들어주고, 요약해주고, 문제도 출제한다. 그래서 질문이 바뀐다.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AI는 가르치는 도구로서 이미 강력하다. 학생이 밤늦게 질문을 해도 지치지 않고 답한다. 같은 설명을 열 번, 백 번 반복해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수준을 바꿔가며 예시를 내고, 부족한 개념을 찾아 채워준다. 어떤 학생에게는 이것만으로도 교육의 문턱이 낮아진다. 배움의 기회는 종종 시간과 비용, 지역과 배경에 가로막히는데, AI는 그 장벽을 상당 부분 무너뜨린다. 과외를 받을 형편이 안 되는 학생도, 야간 자율학습 뒤 홀로 책상에 앉은 학생도, 이제 물어볼 곳이 생겼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가르칠 수 있는 것과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가르침은 전달이고, 스승은 관계다. 교육은 지식의 이동이 아니라 사람의 변화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는 순간은 대개 정보가 주어졌을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믿어줬을 때 찾아온다. 중학교 때 수학을 포기하려던 아이에게 “넌 원래 느린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해준 선생님, 진로를 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대학생에게 “아직 몰라도 괜찮다”고 말해준 교수님. 그 한마디가 성적표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교육에는 늘 눈빛과 망설임이 있다. 학생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 교사는 설명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단어 하나를 더 쉬운 말로 바꾸거나, 반대로 더 단단한 질문을 던진다. 그 미세한 조정이 배움의 방향을 바꾼다. AI는 그 조정에 유능해 보이기도 한다. 대화의 톤을 맞추고, 심지어 공감의 문장도 뽑아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AI의 공감은 정답처럼 보이는 공감일 수는 있어도, 함께 견디는 공감이 되기는 어렵다. 교육은 종종 아프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쉽게 되지 않는 것을 반복해야 하고, 실패와 수치심을 견뎌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동행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런 말은 정보가 아니라 사람의 체온이다. 스승은 지식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좌절의 시간을 함께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AI는 답을 잘하지만, 교육은 답보다 질문으로 완성된다. “답은 종종 생각을 끝내지만, 질문은 생각을 시작한다.” AI가 강한 건 빠른 답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교육이 목표로 하는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깊은 사고다. 학생이 AI에게 답을 얻는 순간, 학습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종종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배움은 “왜 그런가?” “다른 경우에도 성립하는가?” “내 삶에서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이 이어질 때 생긴다. 스승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잡아주는 데 더 가깝다. 그리고 교육에서 가장 민감한 지점, 책임이 남는다. AI는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설득력은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유창한 설명은 때로 가장 위험한 오답이 될 수 있다. 학생이 AI의 답을 그대로 믿고 제출하거나, 그 답을 근거로 판단을 내릴 때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까. 결국 책임은 학생과 교육기관, 그리고 사회로 돌아온다. 그래서 AI가 교실에 들어오는 순간, 교육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가 된다. “편리함은 비용을 숨기고 들어온다.” 그 비용이 무엇인지 교육은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고 결론이 “AI는 스승이 될 수 없다”로 끝나면 너무 쉽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결론은 이거다. “AI가 스승이 되느냐 마느냐보다, 인간이 스승으로 남을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다.” AI가 학생의 질문을 빠르게 처리해주는 사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AI가 반복 설명을 대신한다고 해서 교사의 설명이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사는 더 깊은 맥락을 짚고, 지식이 삶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설명에 집중할 여유를 얻는다. 동시에 교사는, 학생이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 그 질문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아이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AI는 글을 매끈하게 다듬어줄 수 있지만, 학생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만드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AI 시대의 교육은 이렇게 역할이 나뉜다. AI는 설명과 반복과 연습에 강하다. 인간 교사는 의미와 동기, 그리고 학생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에 강해야 한다. AI는 맞춤형 문제를 낼 수 있지만, 학생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까지 대신 만들어줄 수는 없다. 교육이란 결국 정보를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책임질 사람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보자.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대신, “AI를 곁에 둔 시대에, 스승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남기고 싶다. “좋은 스승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학생이 자기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곁에서 버텨준다.” AI는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스승은 여전히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 사람이어야만 한다. 교육은 결국 지식을 넘어, 한 인간의 미래에 책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김홍도: AI가 지운 ‘사람 냄새’의 정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김홍도: AI가 지운 ‘사람 냄새’의 정체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아침 시장에 서 본 적 있나? 생선 비린내와 막 튀겨낸 기름 냄새가 섞이고, 좌판을 두드리는 손바닥 소리, 흥정하는 목소리, 아이가 칭얼대는 울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 소란 속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짜증을 내고, 누군가는 오늘 벌이가 시원찮아 어깨가 처진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지금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조선의 화가 단원 김홍도가 남긴 풍속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장의 소음이 그림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인데도 사람 냄새가 난다. 잉크와 종이 위에, 시대의 체온이 살아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매일 더 놀라운 장면을 본다. 몇 줄의 지시어만 입력하면 그림이 만들어지고, 문장이 완성되고, 그럴듯한 세계가 순식간에 펼쳐진다. 생성형 AI가 우리 일상에 들어온 뒤로, 창작은 더 쉬워졌고, 생산은 더 빨라졌다. 누구나 포스터를 만들고, 누구나 홍보 문구를 쓰고, 누구나 글의 형태를 갖춘 무언가를 내놓을 수 있다. 분명 대단한 변화다. 올려진 풍속화는 단 몇초 만에 AI가 그렸다. 얼핏 김홍도 화풍 같지만, 여기엔 장터의 땀 냄새가 없고 붓 터치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낯선 ‘디지털의 차가움’이 묻어난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허전하지 않나. 결과물을 보고 “우와!”라고 감탄하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지는 경험. 멋지긴 한데 오래 남지 않는 감정. 완벽한데도 이상하게 따뜻하지 않은 문장. 나는 그 허전함이 결국 하나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관찰과 학습의 차이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사람을 붙잡는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그는 삶을 보고, 삶에 머물렀다. 예를 들어보자. 국밥을 허겁지겁 들이키는 주막 손님의 불룩해진 볼, 젓가락을 쥔 야무진 손끝, 그 옆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까지. 김홍도는 그 찰나의 ‘생활’을 놓치지 않았다. 웃음의 모양만 그린 게 아니라 웃음 뒤의 피곤함까지 읽었다. 동작만 그린 게 아니라 그 동작이 나오기까지의 맥락을 붙잡았다. 그래서 그림 속 사람들은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그냥 산다. 그들이 사는 방식이,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까지 전염된다. 우리는 한 장면을 보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든다. “저 사람은 오늘 무슨 일로 저렇게 웃을까.” “저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 “저 둘 사이에는 어떤 기류가 흐를까.” 풍속화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해석의 공간을 남겨 둔다. 그 빈자리에 독자의 마음이 들어간다. 바로 그때 감동이 생긴다. 감동은 누가 만들어 주는 완성품이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순간에 생기니까. 반면 AI는 관찰하지 않는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학습의 결과를 재조합한다. 이 과정이 놀라운 건 맞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는 종종 이런 성질이 있다. 평균적으로 안전하고, 평균적으로 매끄럽고, 평균적으로 만족스럽다. 문제는 그 평균이 사람의 마음을 설득하긴 해도, 깊게 흔들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삶을 바꾸는 문장, 기억에 남는 그림은 대개 평균에서 오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험, 말투, 사정, 망설임 – 그런 “되돌릴 수 없는 디테일”에서 온다. 김홍도는 그 디테일을 살렸고, AI는 그 디테일을 자주 평평하게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건 AI가 나쁘다는 결론이 아니다. AI는 도구다. 도구는 잘 쓰면 도움이고, 잘못 쓰면 위험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관찰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이해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요약이 먼저 오고, 결론이 먼저 온다. 질문보다 답이 앞서고, 경험보다 정리가 앞선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점점 이렇게 변한다. “내가 확인한 세계”보다 “누군가(혹은 AI)가 정리해 준 세계”에 더 빨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감동이 사라진다. 감동은 속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감동은 머무름에서 태어난다.  사람의 표정을 오래 바라보고, 말 한마디의 결을 곱씹고, 문장 하나를 내 입에서 다시 굴려보는 그 시간에서 나온다. 풍속화가 주는 울림이 강한 건 그 그림이 우리에게 “빨리 결론 내리지 말고, 조금 더 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AI 시대의 창작 윤리를 표절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저작권과 공정한 보상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큰 질문이 있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신 무엇을 잃고 있는가? 맥락을 잃고, 관계의 온도를 잃고, 생활의 질감을 잃고,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움도 함께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인간다움을 비용처럼 절감하려 한다. 이때 기술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따뜻하지는 않다. 그러면 해답은 뭘까. “AI를 쓰지 말자”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를 더 잘 쓰자. 단, 우리는 AI를 비서로 쓸 것인가, 작가로 앉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는 AI를 관찰을 위한 도구로 쓰자고 제안한다. AI가 수만 건의 자료를 정리해 주는 시간, 그 아껴진 시간만큼 우리는 현장을 더 오래 응시해야 한다. 초안은 AI가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지막 한 줄은 오직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다. 내 눈이 포착한 떨림, 내 귀에 꽂힌 탄식, 내가 겪은 망설임이 그 재료다. 기억하자. AI는 정보를 주지만, 감동은 체온에서 온다. 당신의 체온이 묻어날 때, 그제야 글은 정보 덩어리를 넘어 살아있는 이야기가 된다. 김홍도는 붓으로 세상을 기록했다. 우리는 키보드와 AI로 세상을 기록한다. 시대는 달라졌고 도구도 달라졌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 그리고 더 아픈 질문이 따라온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네 말로 남길 수 있나?” AI가 만들어준 문장을 그대로 붙여넣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쉬움이 아니다. 독자는 완벽한 문장에 감동하지 않는다. 독자는 “아, 이 사람은 진짜 봤구나”라는 확신을 느낄 때 감동한다. 그 확신이 생기는 순간, 글은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로, 결과물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로 바뀐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아직도 우리 마음을 흔드는 건, 바로 그 목소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AI 시대에 가장 값진 능력은 잘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잘 보는 능력이라고. 더 많이 만들기 전에, 조금 더 보자. 조금 더 오래 바라보자. 그게 결국,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이 끝내 지켜야 할 창작의 윤리이자, 독자를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가장 단단한 힘이다. ▲사진=구글 제미나이(Gemini)가 김홍도 화풍으로 생성한 장터 이미지. 붓 터치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낯선 ‘디지털의 차가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