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은 이미 예견 된 일

“당신은 누구와 소통이 가장 어렵습니까?”
대한민국 30~50대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하는 질문이다. 그 대답은 지역에 관계없이 대개 첫째는 부부 사이, 둘째는 자녀 사이, 셋째는 부모 사이, 넷째는 직장 구성원 사이, 다섯째는 정치지도자 사이를 꼽는다.

가장 가까이에서 속마음을 가장 많이 나누어야 하는 대상일수록 소통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이야기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이 불통(不通)의 순서는 현대인들의 행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로써 의미하는 바가 크다. 위의 질문은 “당신은 누구와 가장 행복한 관계를 맺고 싶습니까?”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통은 기(氣)를 막히게 한다. 그 기가 막히면 분노는 활동을 시작한다.

얼마 전 ‘분노조절’ 주제 강연을 마치고 강의실을 막 나오는데 50대 중반의 한 여성이 고민을 호소했다. 남편과의 불통이 고통을 넘어 막장의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사연인 즉, 본인은 서울 태생으로 풍족한 가정에서 개방적으로 자랐고 현재는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남편은 대구 출생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규율이 엄한 부모 밑에서 자라 현재는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다. 그런데 결혼 이후 지금까지 부부가 함께 공유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불만의 핵심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의 가치관부터 부부 사이의 종교, 성격, 취미, 기호물품 등 어느 것 하나도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같이 사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주위의 시선이 지금껏 견디게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분노를 견딜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녀의 고통은 세월의 무게만큼 커다랗게 다가왔지만 그 자리에서 딱히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다음 기회에 시간을 가지고 차근히 이야기하자는 말만 남기고 헤어졌다.

소통(疏通)은 누구나 원하는 바다. 그러나 누구나 소통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는 소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소통은 나와 대상, 즉 이 둘의 사이가 기분 좋은 상태를 말한다. 기분이 좋다는 것은 서로의 기운이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는 정서의 느낌이다. 사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힘, 그것이 소통 능력이다. 과거에는 이 ‘사이’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늘 ‘사이좋게 놀아라’라며 그 능력을 길러 주려고 애를 썼다. 사이좋게 놀면서 배우는 것은 ‘나’와 ‘대상’ 사이의 다른 점은 줄여 나가고 같은 점은 늘려 나가는 것이다. 서로의 ‘같은 영역을 늘려가는 것’, 이것이 소통의 핵심이다.

유추해 보건데 위 사례 부부의 경우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공부는 많이 하였을지 모르겠지만 사이좋게 노는 공부는 등한했던 것이 아마 지금의 막장까지 다다르게 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이가 나빠지면 그 틈을 비집고 분노[火]가 들어선다.
사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소통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 자신과의 사이가 좋아야 다른 사람들과도 좋은 사이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나와 나 사이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나와 관계 맺는 주위 사람들과도 벽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평소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나와 나 사이를 좋게 만드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이좋게 노는 공부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공부를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 바빴다. 어느 정도 달리다 보면 그 끝이 보일 줄 알고 성찰의 공부는 미루고 또 미루기 일쑤였다. 자기성찰의 숙제가 눈덩이처럼 커지면 커질수록 자포자기하거나 무감각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관심 이것이 불통(不通)의 가장 큰 적이다. 사이좋은 영역은 자기성찰에 대한 성실의 크기이다. 자기성찰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꾸준히 했느냐에 따라서 소통의 영역이 좌우되는 것이다. 물론 소통은 쌍방향의 문제다. 내가 아무리 소통을 잘하려고 발버둥쳐도 그 대상이 응해 주지 않으면 공염불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그 입장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불통의 원인을 대상에게 돌리기 시작하면 불통의 벽은 두 배로 커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통의 관점을 나로 돌려 보면 분노는 나와 나 사이의 벽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소통(疏通)은 문화적 성격이 강하다. 인간의 정서는 개인 사이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사이에도 소통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사실 문화적 소통은 그 변인의 요소가 너무 복잡하여 설명이 쉽지 않다. 그러나 소통의 주체와 객체, 이 둘 사이의 ‘같은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이치는 동일하다. 가령 결혼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소통뿐만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을 동시에 요구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래서 예로부터 결혼은 소통의 종합적인 역량을 가늠하는 중차대한 일이기에 인륜지 대사라 칭했다. 서로 낯선 신랑과 신부는 연애라는 기간을 통하여 서로 다른 점은 점차 줄여 나가며 같은 점은 늘려 나간다. 상견례는 서로 다른 가정과 가정이 만나서 이들 사이에서 상호 문화를 교류하면서 신랑 측과 신부 측이 동질의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자리다. 신랑과 신부, 양가 식구들 사이가 모두 좋으면 순항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전한 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고통(苦痛)은 소통의 어머니다.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소통의 길은 열린다. ‘같은 영역’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오랜 여정을 거쳐 산고를 치룬 이후에 부부를 닮은 제3의 한 생명이 잉태되는 것과 같다. 소통으로서의 ‘같은 영역’은 획일적인 통일도, 일방적인 희생도 아닌 다른 두 대상이 만나 새로운 하나를 창조하는 생명의 신비로운 창고이다. 따라서 ‘같은 영역’에서는 분노[火]의 역할이 없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소통은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창조하는 마음이다. 좋은 사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마음과 마음의 교류에서 자란다. 마음은 인위적인 기술이 가해지면 금세 변질되고 만다. 따라서 소통 공부는 자연본성의 마음근력을 키우는 데 있다. 우선 자기 자신의 마음과 소통하라. 나와 나 사이에 가려진 벽은 없는지, 마음과 생각과 몸은 서로 잘 통하는지, 나는 나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성찰해 본다.

배우자의 마음과 소통하라. 지혜로운 부부는 서로 다른 점을 보려는 에너지를 서로 같은 마음의 영역을 가꾸는 에너지로 터닝한다. 다른 점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같은 영역은 함께 창조하는 행복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녀의 마음과 소통하라.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같은 영역’은 무엇일까? 자녀는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부모는 자녀를 자랑스럽게 기르고 싶어 한다. 따라서 ‘같은 영역’은 자기실현이다. 직장동료나 상사, 정치지도자들과의 소통도 마찬가지다. 서로 같은 마음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해 나갈 수 있도록 다각도로 노력해야 한다. 소통이 원활하면 분노는 머물지 않는다.

소통의 도구인 교통과 통신기기는 날로 발달하는데 소통지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아이러니컬하다. 길거리 사람들의 얼굴은 굳어 있다. 눈빛은 외롭고 차갑게 느껴진다. 사용하는 언어도 거칠고 딱딱하다. 미디어에 흐르는 정보는 인위적이고 자극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고 길들여져 가고 있다. 이것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에너지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힐링보다 터닝이 필요한 시대다. 불통의 대상이 소수일 경우는 힐링이 통한다. 그러나 구성원 대다수가 소통의 문제를 안고 있을 때는 터닝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 미래의 지도자는 소통의 분위기를 바꾸는 터닝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리더는 구성원들에게 소통의 목마름을 느끼도록 도와야 한다.
기가 막히면 분노가 일어난다. 이러한 분노는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일시적인 고통이 따르더라도 자극을 주어야 한다. 긍정의 기운이 대한민국 방방 곳곳에 선순환하도록 ‘같은 마음’, 즉 동심(同心)의 근력을 키우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국제자연치유대학 인문학부 교수 송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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