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직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미국인 강사는 뜻밖에도 자신이 회사를 떠나는 데 동의했다는 주장을 듣게 되었다. 회사는 임금과 숙소 문제까지 정리했으니 합의퇴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강사의 생각은 달랐다. 과연 임금정산서에 서명한 것이 사직에 동의했다는 뜻일까?
I. 한국에서 시작한 새로운 일자리
2009년 여름, 서울에 본사를 두고 부산에 지점을 운영하던 TESOL 전문학원은 갑자기 퇴사한 부산 강사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학원은 미국인 원어민 강사를 초청했고, 정식 취업비자(E-2) 발급 전까지 임시로 일하도록 했다. 8월 5일 양측은 임시직 근로계약과 함께 2009년 9월 5일부터 2010년 9월 4일까지의 1년 근로계약도 체결했다. 강사에게는 한국에서의 1년이 이미 약속된 듯 보였다.
8월 6일부터 6일간 서울 본사에서 TESOL 강사 교육을 받은 뒤 부산 지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임시근무가 끝나갈 무렵인 8월 18일부터 28일 사이, 학원은 비자 발급 절차를 진행하는 대신 서울로 출근하라고 통보했다.
II. “다른 강사 자리를 알아보세요”
9월 2일 면담에서 학원은 강사에게 TESOL 수업보다는 일반 영어회화 강사가 더 적합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채용 알선업체(리크루터)에 연락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강사에게는 사실상 더 이상 이 학원에서 일할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때 강사는 임시근무에 대한 임금도 받지 못했고 당장 머물 곳도 걱정해야 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변호사는 학원 측에 연락해 숙소를 한 달 더 사용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했다. 이후 강사와 학원은 미지급 임금, 호텔 숙박비 등 정산금액과 서울의 회사 아파트에서 한 달간 무료로 거주할 수 있다는 내용의 확인서에 서명했다.
문제는 바로 이 확인서였다. 강사는 생활을 정리할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했다고 생각했지만, 학원은 그 서명을 근로관계를 합의로 종료했다는 근거로 해석했다.
III. 첫 번째 판단: 합의퇴직
강사는 2009년 11월 24일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2010년 1월 18일 신청을 기각했다. 확인서에 양측이 서명했고, 정산금이 지급됐으며, 강사가 한 달 동안 회사 아파트에 거주한 점을 고려했다. 그 기간에 출근하거나 즉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다른 직장에도 취업했다는 사정도 함께 보았다.
초심은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 근로계약이 합의로 해지됐다고 판단했다. 해고가 아니라면 부당해고 구제신청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강사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결과였다.
IV. 재심에서 달라진 질문
강사는 2010년 2월 10일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의 주장은 간단했다. “임금과 숙소 문제를 해결하려고 서명했을 뿐, 사직에 동의한 적은 없다.”
강사는 확인서에 사직이나 근로계약 종료에 관한 문구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변호사도 공식 대리인으로 사직을 협상한 것이 아니라 임시 숙소를 부탁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즉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은 한국의 구제절차를 알지 못했고 대리인 비용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서울글로벌센터를 통해 절차를 알게 됐다고 했다.
다른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정도 사직 의사의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강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2009년 11월 9일부터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심에서는 복직 대신 금전보상을 구하는 취지도 추가했다.
V. 중앙노동위원회의 결론 (중앙2010부해122)
2010년 4월 22일 중앙노동위원회는 초심을 뒤집었다(중앙2010부해122). 핵심은 문서에 실제로 무엇이 적혀 있는가였다. 임금과 숙소에 관한 확인서는 금전관계 등을 정리한 문서일 뿐, 강사가 사직에 동의했다는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학원 측의 조치는 해고로 인정됐다. 그런데 학원은 해고사유와 해고시기를 서면으로 통지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이를 부당해고로 판단했고, 강사가 요청한 복직에 갈음하는 금전보상도 인정했다.
VI. 이 사건이 남긴 교훈
이 사건은 서명 한 번의 의미가 문서의 제목보다 그 내용과 작성 경위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임금정산이나 숙소 제공에 동의한 사실만으로 근로자가 자유로운 의사로 사직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용자가 합의퇴직을 주장하려면 근로자의 명확한 퇴직 의사가 드러나야 한다.
또한 해고라면 근로기준법상 해고사유와 해고시기의 서면통지 등 필요한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 근로자가 해고 이후 생계를 위해 재취업했다는 이유만으로 앞선 해고의 정당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 사건의 결정적인 질문은 “서명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에 동의했는가?”였다. 회사가 원만한 퇴직을 원한다면 합의의 내용과 의사를 분명히 기록해야 하고, 근로자는 정산서나 확인서에 서명하기 전 그 문구가 근로관계 종료까지 뜻하는지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진=수습근로자 해고사건 사례와 시사점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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