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언 칼럼] 1912년, 어진화사의 탄생

[하정언 칼럼] 1912년, 어진화사의 탄생

한 청년 화가에게 맡겨진 조선의 얼굴

 

[강남 소비자저널=하정언 칼럼니스트]

 

1912년.

조선이라는 국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붕괴되었고, 왕실은 권력을 잃은 채 덕수궁에 머물고 있었다.

정치적 주권은 물론 재정과 행정의 실질적 권한까지 조선총독부로 이관된 시대였다.

그 격변의 한복판에서

스물한 살의 한 청년이 붓을 들었다.

이당 김은호.

그는 조선 최초의 근대 서화 전문 교육기관에 입학하여 전통 궁중회화와 인물화 수업을 체계적으로 이수한 신예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새겨진 이유는 단순한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례적으로 이른 나이에

왕실 어진 제작에 참여한 화사로 기록된다.

어진(御眞).

그것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었다.

왕의 권위이자 국가의 상징, 그리고 시대의 정신을 담는 공적 이미지였다.

수많은 의례와 규범, 엄격한 형식과 전통 기법을 요구하는 영역.

누구나 접근할 수 없는 자리였다.

더욱이 그 시점의 왕실은

존재 자체가 정치적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왕의 초상을 그린다는 일은 곧

권력과 역사, 그리고 위험을 함께 감당하는 행위였다.

당시 어진 제작과 관련된 예산 편성 및 기획은

이왕직 내부 절차를 거쳐 조선총독부에 요청되는 구조였다.

국가의 외형은 유지되었으나 실질 권한은 식민 통치 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 모순된 상황 속에서

젊은 화가 김은호는 조선 왕실의 얼굴을 그리는 붓으로 선택된다.

왜 하필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을까.

전통 어진화 계보에는 이미

경험 많은 선배 화사들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대의 화가가 발탁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필력과 기량이 당대에 얼마나 강렬하게 인식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 선택은

영광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국권을 상실한 시대,

왕실의 초상을 그린다는 일은 과거의 전통을 잇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식민 통치 현실과 맞닿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당 김은호의 20대는

예술적 전성기이자 역사적 긴장의 시기였다.

그의 붓은 개인의 성공을 향한 도구이기 이전에

사라져 가는 왕조의 기억을 붙드는 기록 장치에 가까웠다.

1912년의 어진화사는

단순한 직업적 출발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청년 화가에게 맡겨진

조선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사진=1912년부터 시작된 어진 봉사 당시 기록 사진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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