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로 마음을 기록하고, 음악은 그 언어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떨림을 들려준다. 언어가 멈춘 자리에서 음악이 시작되고,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시가 남는다.
지난 10월 20일 저녁, 세종체임버홀에서 열린 제29회 한국성악예술학회 정기연주회 《리스트가 사랑한 시인들》은 바로 그 만남을 확인하는 무대이자, 오랜만에 프란츠 리스트의 깊은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클래식의 정수라 할 만한 선율에 샤워하듯 흠뻑 젖고 나니, 오래 잊고 지낸 감각이 고요히 깨어나는 듯했다.
올해는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세상을 떠난 지 140년이 되는 해다. 흔히 그는 ‘피아노의 황제’로 기억되지만, 그의 영토는 건반 위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날 만난 리스트는 화려한 기교의 연주자가 아니라 시집을 곁에 두고 인간의 마음을 탐독한 사유의 음악가였다.
페트라르카, 사랑의 모순
1부는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세 편으로 문을 열었다. 테너 김선용의 〈Pace non trovo〉(평화를 찾지 못하네)는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얻지 못하고, 불타면서 동시에 얼어붙는 사랑의 역설을 극적인 화성으로 풀어냈다.
이어 소프라노 하수진의 〈Benedetto sia ‘l giorno〉(그날을 찬미하네)와 양란의 〈I’ vidi in terra angelici costumi〉(나는 땅에서 천사의 풍모를 보았네)가 고통마저 축복으로 승화시키며 인간의 사랑을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렸다. 세 곡은 갈등에서 찬미로, 다시 초월로 나아가는 하나의 구도(求道)적 여정처럼 다가왔다.
위고, 낭만이 선율이 되다
2부의 문을 연 위고의 시 세계는 낭만주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소프라노 정혜원은 꿈속에 찾아와 입맞춤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Oh! quand je dors〉(오, 내가 잠들 때)에 담아냈다.
이어 현정아는 〈Enfant, si j’étais roi〉(아이여, 내가 왕이라면)를 통해 왕관마저 사랑 앞에 내려놓겠다는 뜨거운 고백을 전했고, 〈S’il est un charmant gazon〉(매혹적인 잔디밭이 있다면)에서는 소박한 선물이 주는 설렘을 들려주었다. 리스트에게 피아노는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시의 또 다른 화자였고, 성악은 그 화자와 끊임없이 속삭이듯 대화했다.
괴테와 하이네, 낭만의 이면
3부에서는 독일 시인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괴테의 시 〈Freudvoll und Leidvoll〉(기쁨과 슬픔)은 동일한 시에 붙여진 두 개의 음악을 소프라노 이소정과 바리톤 김승현이 각각 노래하여, 하나의 시가 얼마나 다양한 감정의 풍경을 빚어낼 수 있는지 흥미롭게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었다.
하이네의 시에서는 정민희가 부른 〈Die Loreley〉(로렐라이)가 아름다움이 지닌 치명적인 파멸의 힘을 전율처럼 전파했고, 노성인의 〈Du bist wie eine Blume〉(당신은 한 송이 꽃처럼)은 그 순수함이 영원히 지켜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들려주었다. 또한 레나우의 시에 곡을 붙인 〈Die drei Zigeuner〉(세 명의 집시)는 성여린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통해 사랑을 넘어 삶의 자유로 시선을 한껏 넓혀주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
연주회의 대미는 소프라노 우지연이 부른 프라일리그라트의 시 〈O lieb, so lang du lieben kannst〉(사랑할 수 있는 동안 사랑하라)가 장식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피아노곡 〈사랑의 꿈〉 제3번의 원형이 되는 가곡이다.
원시는 사랑의 황홀함보다는 오히려 그 유한함을 직시한다.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을 때 온 마음을 다해 전하라는 것, 떠나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서늘한 경고다. 그 묵직한 사실을 알고 다시 마주한 선율에는 시간의 무상함과 상실의 예감이 짙게 배어났다. 생각해보면 사랑은 영원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남김없이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와 음악, 두 개의 언어
열두 명의 성악가와 네 명의 피아니스트가 함께 꾸민 이 무대에서 가장 빛난 것은 연주자들의 진지한 몰입이었다. 초절기교의 대가 리스트의 까다로운 악보를 마주한 네 명의 피아니스트(임수정·김정경·김현정·조현준)는 리스트의 부활을 꿈꾸기라도 하듯 한 음 한 음에 온 영혼을 실었고, 그 묵직한 진심은 고스란히 객석까지 전달되었다.
간혹 반주 선율과 성악의 화음이 아슬아슬하게 엇나가는 대목이 옥에 티처럼 귀에 스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곡에 너무 깊이 몰입한 나머지 스스로를 태우듯 연주하는 리스트 선율 특유의 마력 탓이려니 싶었다. 그 작은 흔들림마저 곡의 깊이를 더하는 잔상으로 여겨 너그러이 품게 된다.
시인의 입장에서 이토록 훌륭한 가곡들을 듣는 일은 언제나 각별하다. 종이 위에 갇혀 있던 침묵의 언어가 목소리를 얻고, 문장 사이의 공백이 아름다운 선율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 한편에서 작은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를 더욱 단단히 다져, 언젠가 나도 저런 무대 위에서 시와 음악을 호흡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빠르게 소비되고 허무하게 잊히는 언어의 시대에, 한 편의 시를 오래 낭독하고 하나의 선율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일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1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리스트의 음악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이 묵직한 질문을 건넨다.
공연장을 나서며, 마지막 곡의 한 구절이 깊은 여운이 되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사랑할 수 있는 동안 사랑하라.”
그날 밤 리스트가 우리에게 건넨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음악만이 아니었다. 사랑을 미루지 말라는, 삶을 향한 가장 뜨겁고도 절실한 당부였다.
▲사진=연주를 마친 후 기념촬영하고 있는 필자(좌)와 소프라노 정혜원 ⓒ강남 소비자저널
▲사진=연주를 마친 후 한 컷(좌로부터 바리톤 지인, 소프라노 우지연, 필자)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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