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 칼럼] 신의 가장 다정한 선물, 내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울림, 노래가 우리에게 주는 열 가지 행복

[손영미 칼럼] 신의 가장 다정한 선물, 내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울림, 노래가 우리에게 주는 열 가지 행복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사람은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운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노래한다. 울음이 생존을 위한 첫 언어라면, 노래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다. 기쁨이 벅찰 때도, 슬픔이 깊어질 때도 사람은 결국 노래를 찾는다. 말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목소리는 가 닿고, 언어가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선율은 마음을 대신한다. 오랜만에 벨라비타 원우들과 한 무대에 선다. 개원 발기부터 함께 걸어온 시간이 어느덧 열한 기수를 이루었다. 운영이사로 무대에 선다는 것은 늘 설렘과 부담을 함께 안겨준다. 하지만 막이 오르기 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악보가 아니라 사람이다. 서로 다른 계절을 건너온 삶들이 한 곡의 노래 앞에서 같은 숨을 맞추는 순간, 무대는 공연을 넘어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노래는 잘 부르는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목소리를 빌려 세상과 악수하는 일이며, 서로 다른 삶이 하나의 울림으로 이어지는 기적이다. 그래서 무대는 경쟁의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응원하는 가장 따뜻한 광장이 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며, 피곤한 삶이자 유배당한 삶”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이고 싶다. “노래 없는 삶은, 자신의 영혼과 오래 대화하지 못한 삶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악기는 악기가 아니라 목소리다. 노래는 단순히 음정을 맞추고 가사를 따라 부르는 행위가 아니다. 몸과 마음, 기억과 감정을 하나로 이어주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며, 삶을 치유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들을 때 얻게 되는 열 가지 행복을 살펴본다. 1. 감정을 씻어내는 카타르시스 노래는 마음 깊은 곳에 쌓인 슬픔과 기쁨, 분노와 그리움을 가장 아름답게 흘려보내는 통로다.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말했다. “음악은 감정의 언어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 준다.” 노래는 울음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고, 웃음을 더욱 깊게 만든다. 2. 몸을 깨우는 가장 자연스러운 건강법 노래는 깊은 복식호흡을 통해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폐는 넓어지고 혈액순환은 활발해지며, 행복 호르몬인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노래하는 사람은 건강하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3. 영혼을 어루만지는 위로 어떤 날은 노래 한 소절이 백 마디 위로보다 더 깊게 마음을 안아 준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말했다. “음악은 삶의 비를 맞아도 젖지 않게 해주는 우산과 같다.” 노래는 상처를 지우지는 못하지만 견딜 수 있는 힘을 선물한다. 4. 나를 발견하는 시간 같은 악보라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노래가 된다. 메조소프라노 마릴린 호른은 말했다. “노래는 영혼의 지문이다.” 세상에 같은 목소리는 하나도 없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노래하는 일이다.…

[손영미의 감성 가곡 미별(美別)] 이별을 아름다움으로 번역한 노래 김효근 「미별(美別)」이 들려주는 기억의 미학

[손영미의 감성 가곡 미별(美別)] 이별을 아름다움으로 번역한 노래 김효근 「미별(美別)」이 들려주는 기억의 미학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만남을 배우지만, 정작 이별을 배우는 법은 누구에게도 익히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순간, 시간은 멈추고 언어는 제 기능을 잃는다. 그래서 이별은 언제나 슬픔보다 먼저 침묵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예술은 그 침묵을 끝내 언어로, 그리고 음악으로 바꾸어낸다. 김효근의 가곡 ‘미별(美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곡은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가 아니라, 상실을 아름다움으로 번역하는 노래다. 눈물을 지우려 하지 않고, 그 눈물 속에 오래 머물러 마침내 한 줄기 빛을 길어 올리는 음악이다. ’미별(美別)’이라는 제목부터 역설적이다. 이별은 본래 상실이고 단절이며, 인간이 감당하기 가장 어려운 운명이다. 그런데 작곡가는 그 앞에 ’아름다울 미(美)’를 붙인다. 이는 슬픔을 미화하려는 감상주의가 아니다. 사랑했던 시간을 끝내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인간의 가장 숭고한 의지다. 특히 이 작품은 사계절을 따라 한 사람의 생애와 사랑을 노래한다. 봄에는 수줍던 사람이 있었고, 여름에는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 가을에는 그 사람의 빈자리가 마음을 채우고, 겨울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그를 떠나보낸다. 계절은 반복되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이 역설 속에서 「미별」은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유한성을 교차시키며 존재의 본질을 성찰하게 한다. 계절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듯, 사랑 또한 육신은 떠나도 기억 속에서는 다른 형태의 생명으로 살아남는다. 특히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픔을 과장하지 않는 절제에 있다. “그대와 나눈 웃음, 끝없는 이야기 시간이 멈춘 그날 함께 사라져.” 이 짧은 문장에는 절규도, 원망도 없다. 오히려 지나치게 담담하기에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큰 슬픔은 소리보다 침묵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그대 없는 나, 나 없는 그대.” 라는 구절은 존재론적 고독을 압축한 시어에 가깝다. 서로를 통해 존재하던 두 사람이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곡은 끝내 절망에 머물지 않는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기억만 남아.” 이 한 줄에서 「미별」의 미학은 완성된다. 상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그것을 기억으로 숙성시킬 뿐이다. 그리고 기억은 슬픔을 조금씩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미별」은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생명을 말하고, 이별을 노래하면서도 사랑을 완성한다. 김효근이 구축해 온 아트팝의 세계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허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문학과 철학, 삶과 예술을 하나의 서정으로 엮어낸다. 선율은 귀를 지나 마음으로 스며들고, 노랫말은 시가 되어 오래 남는다. 그래서 그의 가곡은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살아내는 노래가 된다. 마지막에 반복되는 “아름답게 떠났네.” 라는 한 문장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도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사랑이 기억으로 형태를 바꾸는 순간이며, 죽음은 관계의 소멸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 배우게 된다. 오늘도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또 누군가는 오래된 시간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간다.그들에게 「미별」은 위로를 건네려 하지 않는다.대신 조용히 곁에 앉아 함께 침묵한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가장 깊은 사랑은 끝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기억으로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라고.…

[손영미 칼럼] 위기와 속도의 시대, 젠슨 황의 5가지 경영 철학이 던지는 시사점

[손영미 칼럼] 위기와 속도의 시대, 젠슨 황의 5가지 경영 철학이 던지는 시사점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오늘날 글로벌 기술 시장은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모두가 외형적 성장과 단기 성과를 좇는 시대, AI 인프라 시장을 선도하는 엔비디아(NVIDIA)의 CEO 젠슨 황(Jensen Huang)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가 강조해 온 다섯 가지 핵심 가치—회복탄력성, 전략적 선택, 수평적 협력, 본질에 대한 집중, 그리고 민첩성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언어가 아니다. 이는 엔비디아가 수차례의 위기를 넘어 세계 최고의 AI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검증된 생존 전략이자 미래 경영의 원칙이다. 1. 회복탄력성(Resilience) : 실패를 견디는 힘이 경쟁력이 된다 젠슨 황은 모교 스탠퍼드대학교 강연에서 학생들에게 “고통과 실패를 경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높은 기대보다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내면의 힘, 즉 ‘맷집’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엔비디아 역시 창업 초기 첫 그래픽 칩 ‘NV1’의 실패로 존폐 위기를 겪었으나, 실패를 분석하고 기술을 재정비한 끝에 ‘RIVA 128’을 성공시키며 재도약했다. 이러한 회복탄력성은 위대한 리더들의 공통된 분모다. 아마존(Amazon)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 역시 스마트폰 시장에 도전했다가 수천억 원의 손실을 낸 ‘파이어폰(Fire Phone)’의 역사적 실패를 겪었다. 하지만 그는 주주들에게 “아마존이 더 큰 실패를 다루지 못한다면 더 큰 혁신도 없을 것”이라며 실패를 상수로 받아들였고, 이 복원력을 바탕으로 클라우드 서비스(AWS)를 세계 1위로 키워냈다. 실패를 피하는 조직보다 실패를 성장의 자산으로 삼는 조직이 결국 오래 살아남는다. 2. 전략적 선택(Strategic Retreat) :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가 미래를 결정한다 “어떤 길을 포기할지 결정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다.” 젠슨 황의 이 말은 무조건적인 버티기가 능사가 아님을 뜻한다. 엔비디아는 스마트폰 AP 시장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자 과감히 철수했다. 대신 축적한 GPU 기술을 자율주행과 고성능 컴퓨팅(HPC), AI 컴퓨팅에 집중해 오늘날의 절대 강자가 되었다. 이는 애플(Apple)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1997년 경영 복귀 직후 단행했던 ‘제품 라인업 70% 퇴출’ 전략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잡스는 회사가 방대하게 벌려놓았던 수십 개의 컴퓨터 모델을 단 4가지(데스크톱 2종, 노트북 2종)로 압축하는 과감한 포기를 단행했다. 자원을 분산시키던 비효율을 쳐내고 본질에 집중하는 현명한 후퇴가 있었기에, 애플은 파산 위기를 극복하고 아이맥과 아이폰이라는 세기의 혁신을 이뤄낼 수 있었다. 3. 지식의 공유와 수평적 협력(Flat Organization) : 정보는 권력이 아니라 성장의 자산이다 젠슨 황은 임원들만 참여하는 폐쇄적인 회의를 지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입사원부터 최고경영진까지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정보를 독점하는 조직은 느려지고, 정보를 공유하는 조직은 빠르게 진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플랫(Flat) 조직의 파괴력은 픽사(Pixar)의 창업자 에드 캣멀(Ed Catmull)이 고안한 ‘브레인트러스트(Braintrust)’ 제도에서도 증명된다. 픽사에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감독, 작가, 애니메이터가 한자리에 모여 제작 중인 작품의 문제점을 가감 없이, 날 것 그대로 비판하고 토론한다. 권위주의를 배제하고 정보와 아이디어를 투명하게 공유하는 수평적 협력은, 단순한 조직문화를 넘어 혁신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경쟁력이다. 4. 본질에 집중(Core Purpose) : 시장보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먼저 본다 “시장의 크기를 좇지 말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에 투자하라.” 이 철학은 CUDA 개발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에는 시장의 외면과 투자자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젠슨 황은 장기적인 기술 생태계를 믿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딥러닝 시대가 열리면서 CUDA는 오늘날 AI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 플랫폼이 되었다. 당장의 이익 대신 인류가 해결해야 할 ‘본질적 과제’에 투신한 사례로 테슬라(Tesla)의 일론 머스크(Elon Musk)를 빼놓을 수 없다. 머스크가 전기차와 우주 산업에 뛰어들 때 월가와 전문가들은 파산을 점치며 조롱했다. 그러나 그는 내연기관의 종말과 우주 개척이라는 본질적 명제에 집중했고, 수차례의 부도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기술 개발에 매진해 패러다임을 바꿨다. 단기 트렌드가 아닌 인류의 본질적인 문제를 향한 긴 호흡만이 시대를 흔드는 위대한 유산을 남긴다. 5. 민첩성과 적응력(Agility) : 과거의 성공을 스스로 허물 수 있는 용기 엔비디아는 그래픽 카드 제조사를 넘어 AI 플랫폼 기업, 데이터센터 중심 기업으로 끊임없이 변신해 왔다. 젠슨 황은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하는 순간 쇠퇴가 시작된다고 믿으며, 변화 앞에서 스스로를 리부트(Reboot)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강조한다. 과거의 영광을 스스로 깨부수고 성공한 대표적 명사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3대 CEO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다. 그는 2014년 취임 당시, MS의 절대적 상징이었던 윈도우(Windows) 중심의 폐쇄적 성공 방정식을 과감히 버렸다. 경쟁사였던 리눅스와 오픈소스를 포용하고 클라우드(Azure) 중심으로 회사의 체질을 완벽히 리부트한 그의 민첩성과 유연성이 있었기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올드한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탈피해 글로벌 AI 및 클라우드 리더로 부활할 수 있었다. 오래 살아남는 기업의 조건 젠슨 황을 비롯한 글로벌 리더들의 경영 철학은 “더 독해지고 더 많이 일하라”는 맹목적인 채찍질이 아니다. 실패를 견디는 ‘맷집‘ 때로는 과감히 포기하는 ‘용기‘,지식을 나누는 ‘연대‘,본질을 향한 ‘끈기,‘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드는 ‘유연성‘에 관한 이야기다. 기업도 사람도 결국 같은 원리로 성장한다. 속도가 미덕이 된 세상이지만,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래 살아남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 미래를 준비하는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잔기술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변화 앞에서 자신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다. 위대한 기업과 인생은 미래를 완벽히 예측해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지키며, 미래가 올 때까지 단단하게 버텨낸 존재만이 결국 시대를 바꾼다.

[손영미 칼럼] 가곡의 효시 ‘홍난파’의 《봉선화〉 이래 106주년 기념 106인 초청음악회, 한국 가곡 106년의 역사, 6개월 간의 대장정으로 물들인다

[손영미 칼럼] 가곡의 효시 ‘홍난파’의 《봉선화〉 이래 106주년 기념 106인 초청음악회, 한국 가곡 106년의 역사, 6개월 간의 대장정으로 물들인다

– (사)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제47회 서울예술가곡제 개최 – 성악가 106인이 함께 그려내는 한국 가곡의 과거·현재·미래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사)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이사장 정원이경숙)가 한국 가곡 탄생 106주년을 기념해 올해 6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제47회 서울예술가곡제’를 개최한다. 이번 가곡제는 ‘한국가곡 106년! 시대를 건너다! 노래를 잇는 우리의 숨결’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920년 홍난파의 「봉선화」로 시작된 한국 가곡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고, 세계를 향해 나아갈 미래를 하나의 음악 서사로 엮어내는 특별한 프로젝트다. 공연에는 원로·중견·신진 성악가 106인이 대거 참여한다. 매월 다른 주제 아래 한국 가곡의 정서와 예술성을 다채롭게 펼쳐 보이며, 회차별 전문 팀장이 무대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다. 지난 6월 30일 개최된 제1회 공연(팀장 손영미)은 가곡 애호가와 문화예술계 귀빈들의 찬사 속에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특히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의 손자 홍익표 교수가 참석해 뜻깊은 의미를 더했다. 축제는 오는 11월까지 매월 1회씩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기억을 담은 2회(7월), 광복과 민족의 숨결을 노래하는 3회(8월)에 이어 9월부터 11월까지 아름다운 서정과 미래의 희망을 담은 무대가 차례로 펼쳐질 예정이다. 정원이경숙 이사장은 “106년의 시간은 살아 숨 쉬는 현재의 기억”이라며 “이번 가곡제가 한국 가곡을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이어가고, 세계와 호흡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정희준 명예이사장 역시 “106인의 성악가가 들려주는 깊은 울림이 세대를 넘어 관객의 마음에 닿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공연 일정 및 개요] •행사명: 제47회 서울예술가곡제 •기간: 2026년 6월 ~ 11월 (월 1회, 총 6회 / 오후 6시) •주최·주관: (사)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회차 일시 주제 장소 / 팀장…

[손영미 칼럼] 2026 Vienna Philharmonic Summer Night Concert 쇤브룬의 여름 밤,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선율의 성찬

[손영미 칼럼] 2026 Vienna Philharmonic Summer Night Concert 쇤브룬의 여름 밤,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선율의 성찬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매년 초여름,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 정원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콘서트홀로 변모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바로크 양식의 궁전과 싱그러운 기하학적 정원이 어우러진 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빈 필하모닉 여름밤 콘서트(Sommernachtskonzert)는 클래식 음악이 지닌 고유의 우아함이 대중의 열기와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축제의 장이다. 올해의 프로그램은 오페라와 발레, 정통 관현악과 뮤지컬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음악이 지닌 순수 예술성과 대중적 흡입력을 동시에 품어 안았다. 그리고 이 야심 찬 무대의 중심에는 젊은 거장 로렌조 비오티(Lorenzo Viotti)의 감각적인 지휘와, 세계적인 바리톤 브린 터펠(Sir Bryn Terfel)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젊은 지휘자의 다이내믹과 거장의 드라마틱한 만남 로렌조 비오티는 오늘날 클래식계에서 가장 뜨겁게 주목받는 차세대 지휘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빈 필하모닉 특유의 깊고 우아한 전통적 음색(Wiener Klangstil) 위에, 젊고 세련된 리듬감과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며 오케스트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유연하면서도 정교한 그의 손끝은 넓은 야외 무대를 빈틈없는 음향으로 채워나갔다. 이에 화답한 브린 터펠은 단순한 성악가를 넘어, 목소리 하나로 무대 위에 거대한 서사를 세우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신과 악마, 그리고 고뇌하는 평범한 인간의 내면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그의 깊고 웅장한 바리톤 음색은 이번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단단한 드라마적 뼈대가 되었다. 신과 인간, 고전과 현대가 교차하는 다채로운 음영(陰影) 주페의 「경기병 서곡」이 뿜어내는 활기찬 금관악기의 팡파르로 화려하게 포문을 연 공연은 이내 묵직하고 심오한 음악적 여정으로 관객을 이끌었다.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와 베르디의 「팔스타프」를 거쳐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에 이르는 대작들의 향연은 브린 터펠의 밀도 높은 가창을 통해 야외 광장을 순식간에 엄숙한 오페라 극장으로 탈바꿈시켰다. 화려하고 입체적인 대작들 사이에서 플로렌스 프라이스의 「기도」와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은 극적인 완급조절을 이루며 깊은 위로와 사색의 순간을 선사했다. 특히 현악 파트의 섬세한 피아니시모(pp)는 밤하늘의 정적과 맞닿으며 관객들의 숨소리마저 멎게 만들었다. 이날 프로그램의 정점은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조곡 2번이었다. 비오티의 정교한 리드 아래 펼쳐진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화려한 색채감과 폭발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은 쇤브룬 궁전의 야경과 완벽하게 짜 맞춘 듯 어우러지며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마비시키는 황홀경을 선사했다. 뒤이어 연주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 중 ‘내가 부자라면(If I Were a Rich Man)’은 정통 클래식의 엄숙주의를 유쾌하게 깨뜨리며, 축제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인간미와 위트 넘치는 공감을 전했다. 전통과 일상, 별빛이 빚어낸 영원의 하모니 빈 필하모닉이 매년 여름밤 콘서트를 통해 세상에 전하는 것은 단순한 음악회의 감동 그 이상이다. 그것은 세기의 벽을 넘어온 전통과 오늘의 현대, 고전의 엄격함과 대중의 일상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문화적 연대이다. 쇤브룬의 밤공기에는 6월의 라임나무 꽃향기와 풀잎의 싱그러움이 부드럽게 스며 있었고, 수만 명의 관객들은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하나의 거대한 선율이 되어 초여름의 밤을 향유했다. 결국 축제란 거창한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을 채우는 위대한 음악을,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온전히 나누는 일. 2026년 빈 필하모닉의 여름밤은 그 소박하면서도 위대한 진실을, 쇤브룬을 가득 채운 찬란한 잔향(殘響)을 통해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다. ▲사진=공연실황 쇤브룬 광장 ⓒ강남 소비자저널 ▲사진=공연실황 쇤브룬 광장 ⓒ강남 소비자저널 ▲사진=공연실황 쇤브룬 광장 ⓒ강남 소비자저널…

[손영미 칼럼] 사랑은 왜 조건을 지우는가, 사랑은 가장 연약한 순간까지 품는 일이다

[손영미 칼럼] 사랑은 왜 조건을 지우는가, 사랑은 가장 연약한 순간까지 품는 일이다

– 한용운 「사랑하는 까닭」을 읽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사랑하는 까닭_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기쁨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슬픔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첫 문장은 역설처럼 시작된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용운은 사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 이유는 아름다움이나 성공, 젊음 같은 세속적 조건이 아니라는 데 이 시의 깊이가 있다. 시인은 세 번의 반복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드러낸다. 홍안과 백발 기쁨과 슬픔 건강과 죽음 이 대비는 인간의 삶 전체를 상징한다. 젊음에서 늙음으로, 환희에서 고통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여정을 압축한 것이다. 세상은 대부분 빛나는 순간을 사랑한다. 젊음을 사랑하고, 성공을 사랑하며, 웃는 얼굴을 사랑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백발이 되고, 슬픔이 찾아오고, 병과 죽음이 가까워질 때 많은 사랑은 흔들린다. 한용운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 한 줄은 사랑의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 준다. 사랑은 상대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순간까지 품는 일이다.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불교적 세계관을 지닌 만해의 시답게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죽음조차 사랑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 연은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다.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사랑은 시간을 이기는 감정이다. 육체를 넘어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조건을 넘어 영혼을 품는 약속이다. 오늘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은 종종 조건의 다른 이름이 되곤 한다. 아름다울 때만, 성공했을 때만, 건강할 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래일 뿐이다. 한용운은 묻는다. 당신은 그 사람의 백발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손영미 칼럼] AI와 관종의 시대, 문학은 무엇으로 살아 남는가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시란 무엇인가?

[손영미 칼럼] AI와 관종의 시대, 문학은 무엇으로 살아 남는가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시란 무엇인가?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2026년은 한국 문학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1926년생 문학인들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이번에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는 지난 6월 18일 오후 3시 30분,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대산홀에서 소설가 박경리, 극작가 김자림과 박현숙, 시인 김종길과 박인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다섯 문학인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랑을 통과하며 지켜낸 시대의 상처와 인간의 존엄을, 문학을 통해 다시금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지난 100년을 돌아보며 또 다른 시대적 전환점 앞에 서 있다. AI가 문장을 쓰고, 알고리즘이 취향을 결정하며, SNS가 감정을 소비하는 시대. 과거의 문학이 전쟁과 가난, 분단의 상처를 견디게 했다면, 앞으로의 문학은 소음과 속도, 과잉된 자기 노출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내야 한다. 한없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쉼 없이 배설되는 현대인의 과잉된 언어들과 달리, 시는 침묵의 뼈를 발라내어 가장 정직한 진액만을 남기는 작업이다. 뱉어낸 단어보다 차마 뱉지 못해 행간에 숨겨둔 여백이 독자의 마음에 닿을 때, 시는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그 여백은 ‘관종의 시대’가 잃어버린 성찰의 공간이며, 타인의 슬픔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의자다. 오늘의 문학이 마주한 풍경은 한 세기 전과 사뭇 다르다. 과거의 인간이 침묵을 견디며 살아냈다면, 오늘의 인간은 지나친 소음 속에서 길을 잃는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의 감정을 전시한다. SNS는 삶을 기록하는 공간을 넘어 감정을 증명하는 무대가 되었고, 사람들은 존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기 위해 살아간다. 슬픔은 공유되기 전에 콘텐츠가 되고, 분노는 성찰되기 전에 확산되며, 고독은 견디기 전에 소비된다.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듣지 못하는 시대. 어쩌면 오늘날 시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침묵을 복원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은 이제 시를 쓴다. 운율도 맞추고, 은유도 만들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그럴듯한 문장을 생산한다. 그러나 AI가 끝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살아낸 시간’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병실에서 흘린 눈물의 온도, 사랑이 끝난 뒤 빈 의자 하나를 바라보던 저녁의 공기, 누군가를 용서하기까지 걸린 십 년의 침묵. 시는 언어의 기술이 아니라 시간이 남긴 상처의 결이다. 그래서 좋은 시는 잘 쓴 문장이 아니라, 한 인간이 온몸으로 살아낸 흔적이다. 문학은 더 이상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로만 살아남기 어렵다. 정보는 이미 AI가 더 빠르게 제공한다. 그러나 문학은 정보를 넘어 의미를 묻는다. AI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면, 문학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AI가 답을 만든다면, 문학은 질문을 지켜낸다. 따라서 미래의 문학은 지식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시대에 문학이 삶 속에 녹아든다는 것은 거창한 서가를 채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분별한 자극에 마비된 감각을 깨워 일상의 미세한 결을 다시 느끼는 일이며,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포장된 감정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진짜 나를 마주하는 용기다. 100년 전 박인환이 전후 도시의 황량함 속에서 한 방울의 서정을 건져 올렸고, 김종길이 절제된 언어로 영혼의 품격을 지켜냈듯, 오늘날 우리가 문학 안에서 살아남는 방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이 아무리 화려한 기술과 과잉된 소음으로 가득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누군가의 진심 어린 떨림을 갈망한다. 문학은 자극적인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가장 고요한 방파제이며, 시는 그 방파제 위에 피어난 여백의 꽃이다. 화려한 데이터가 증명할 수 없는 인간만의 쓸쓸함과 존엄. 앞으로의 100년 동안 문학은 인간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예술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을 끝까지 사랑하는 예술이 될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는 시대, 시인은 가장 깊은 곳의 침묵을 듣는 사람이다. 문학은 인간이라는 숲을 지키는 일이고, 시는 그 숲에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바람의 떨림을 기록하는 일이다. AI가 문장을 만드는 시대에도 인간만이 시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이 시대 문학의 화두는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손영미 칼럼] 지식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단한 품성’ 위대함은 지식이 아니라 고난에서 탄생한다

[손영미 칼럼] 지식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단한 품성’ 위대함은 지식이 아니라 고난에서 탄생한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최근 세계 AI 반도체 시장을 리드하는 엔비디아(NVIDIA)의 CEO 젠슨 황이 한 방송에 출연해 성공과 위대함의 본질에 대한 묵직한 통찰을 던졌다. “우리가 겪은 고난으로부터 위대함이 탄생합니다.” 짧지만 강렬한 이 한마디는 화려한 성공 신화 뒤에 숨은 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한 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몇 번에 방대한 정보가 쏟아지고, 인터넷은 모든 지식을 손쉽게 대령한다. 이제 지식을 얻는 일은 더 이상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이토록 똑똑한 세상에서, 한 분야의 정점에 이르는 ‘위대함(Greatness)’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젠슨 황은 그 답을 ‘고난’에서 찾는다. 물론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고통이 필수 조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준의 성취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장인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 수십 년의 시행착오를 견디고, 예술가가 자신만의 언어를 찾기 위해 끝없는 고독을 통과하듯, 위대함은 반드시 ‘시련’이라는 통행증을 요구한다. 고난은…

[손영미 칼럼] 고결한 외면은 없다 정치적 무관심이 치르는 가장 비싼 대가

[손영미 칼럼] 고결한 외면은 없다 정치적 무관심이 치르는 가장 비싼 대가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언제부터인가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은 현대인의 세련된 태도처럼 소비되고 있다. “정치판은 답이 없다.” “그놈이 그놈이다.”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 마치 진흙탕 싸움에 발을 담그지 않는 고결한 선택인 양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이 관심을 거두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당신이 외면한 자리는 결국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2400년 전의 이 경고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를 혐오하면서도 정치가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시장을 외면하면서 좋은 물건만 팔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민이 감시를 멈추고 참여를 포기할 때 정치의 공간은 가장 무책임하고 가장 탐욕적인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다. 결국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온다. 내 삶을 바꾸는 법과 제도가 무능한 사람들의 손에 맡겨지고, 내가 낸 세금의 쓰임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며, 공동체의 미래가 소수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로 우리는 결국 나보다 못한 사람들의 결정에 의해 삶이 좌우되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 역시 같은 맥락에서 경고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나빠지는 이유는 악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 투표를 포기하는 것, 공공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 그 모든 무관심은 결국 현상을 유지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방관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때로 가장 강력한 동의가 된다. 정치가 추하게 보일 수는 있다. 반복되는 정쟁과 실망스러운 모습들 속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시민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때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돌보고 지켜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치 참여란 거창한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삶과 연결된 정책에 관심을 갖는 일, 선거 때 후보와 공약을 비교하는 일, 최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하여 더 큰 위험을 막는 일, 권력에 질문하고 감시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시민의 최소한의 책임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어느 날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희생, 그리고 책임 의식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 권리를 누리면서도 책임은 외면한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정치를 향한 냉소는 쉽다. 비판 역시 쉽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는 냉소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심과 참여, 그리고 책임 있는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권력은 언제나 시민의 수준을 비추는 거울이다.우리가 외면한 자리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진정한 고결함은 세상을 외면하는 데 있지 않다.불완전한 현실 속에서도 공동체를 위해 책임 있게 참여하는 데 있다.…

[손영미 칼럼] 소년은 왜 춤추기 시작했는가

[손영미 칼럼] 소년은 왜 춤추기 시작했는가

–  Billy Elliot에 대한 공연 리뷰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인간은 때때로 자신에게 가장 금지된 곳에서 운명을 발견한다. 소년 빌리에게 그곳은 거친 복싱장이 아니라, 부드러운 발레 교실이었다. 탄광의 먼지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던 영국 북부의 음울한 회색 도시. 파업과 실업, 가난과 분노가 뒤엉킨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거친 풍경 한가운데서 한 소년은 묻는다. “나는 왜 춤을 추고 싶은가.” 그 질문은 단순한 취미의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자기 영혼의 진동수를 처음으로 감지한 순간에 가깝다. 빌리는 세상이 규정한 ‘남성성’의 틀에서 벗어난다. 강해야 하고, 싸워야 하며, 울지 말아야 한다는 완고한 질서 속에서 그는 몸이라는 도구로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언어가 ‘말’이 아닌 ‘춤’이라는 사실이다. 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다. 언어가 탄생하기 전, 인간은 몸으로 슬픔을 새겼고, 기쁨을 하늘로 던졌으며, 절망을 발로 구르며 견뎌냈다. 빌리의 도약은 단순히 미학적인 발레 동작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된 존재가 자기 영혼의 감옥을 박차고 나오는 철학적 몸짓이다. 특히 작품 속에서 인상적인 지점은 ‘침묵하는 남성들’의 변화다. 광부인 아버지와 형은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시대의 피로와 투쟁 속에서 감정을 거세당한 이들이다. 그러나 빌리가 춤추는 찰나, 그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예술은 생존 이후에 누리는 사치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절망적인 순간, 인간을 인간답게 남게 하는 최후의 불꽃이다. 뮤지컬 무대에서 이러한 감정은 더욱 강렬하게 증폭된다. Elton John 의 음악은 거친 노동의 리듬과 소년의 섬세한 내면을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특히 〈Electricity〉가 울려 퍼지는 순간, 관객은 더 이상 타인의 춤을 관람하는 제삼자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삶 속에서 한 번쯤 접어두었던 꿈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춤출 때 어떤 기분이 드니?” 그 질문에 빌리는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전기(Electricity)가 흐르는 것 같아요.” 이 대사는 현대 예술철학의 핵심을 관통한다. 진정한 예술은 논리보다 먼저 도착한다. 인간은 어떤 아름다움 앞에서 먼저 전율하고, 이해는 그다음에 찾아온다. 예술은 해석되기 이전에 이미 몸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무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인이 된 빌리가 공중으로 비상하는 장면은 흔한 성공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삶의 중력을 극복해내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가난은 여전하고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결정적인 변화가 있다. 소년이 더 이상 자신의 재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인간의 자유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단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Billy Elliot 는 단순한 성장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은 무엇 앞에서 가장 자유로워지는가.” 마지막 조명이 꺼진 뒤에도 마음속에 길게 잔상이 남는 것은 화려한 테크닉이 아니다. 한 소년이 세상의 편견보다 자기 심장의 떨림을 더 신뢰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