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 칼럼] 사랑은 왜 조건을 지우는가, 사랑은 가장 연약한 순간까지 품는 일이다

[손영미 칼럼] 사랑은 왜 조건을 지우는가, 사랑은 가장 연약한 순간까지 품는 일이다

– 한용운 「사랑하는 까닭」을 읽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사랑하는 까닭_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기쁨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슬픔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첫 문장은 역설처럼 시작된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용운은 사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 이유는 아름다움이나 성공, 젊음 같은 세속적 조건이 아니라는 데 이 시의 깊이가 있다.

시인은 세 번의 반복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드러낸다.
홍안과 백발 기쁨과 슬픔 건강과 죽음

이 대비는 인간의 삶 전체를 상징한다. 젊음에서 늙음으로, 환희에서 고통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여정을 압축한 것이다.

세상은 대부분 빛나는 순간을 사랑한다. 젊음을 사랑하고, 성공을 사랑하며, 웃는 얼굴을 사랑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백발이 되고, 슬픔이 찾아오고, 병과 죽음이 가까워질 때 많은 사랑은 흔들린다.

한용운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 한 줄은 사랑의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 준다. 사랑은 상대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순간까지 품는 일이다.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불교적 세계관을 지닌 만해의 시답게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을 둘로 나누지 않는다. 죽음조차 사랑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 연은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다.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사랑은 시간을 이기는 감정이다. 육체를 넘어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조건을 넘어 영혼을 품는 약속이다.

오늘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은 종종 조건의 다른 이름이 되곤 한다. 아름다울 때만, 성공했을 때만, 건강할 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래일 뿐이다.

한용운은 묻는다.
당신은 그 사람의 백발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의 슬픔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는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사랑의 깊이를 다시 배우게 된다.

이 시가 오랜 세월을 건너 오늘도 살아 있는 이유는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책임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 아니라, 가장 쓸쓸한 순간에도 곁을 떠나지 않는 마음이다.

▲사진=사랑하는 까닭 표제(출처 : Chat GPT) ⓒ강남 소비자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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