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의 공연 리뷰] 감정은 소리의 깊이에서 완성된다

[손영미의 공연 리뷰] 감정은 소리의 깊이에서 완성된다

– 제140회 한국성악(학)회 정기연주회
-《THE VOICE OF EMOTION: 감정을 노래하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2026년 11월 3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영산아트홀에서 한국성악(학)회가 주최하고 영음예술기획이 주관한 제140회 정기연주회 《THE VOICE OF EMOTION: 감정을 노래하다》가 열렸다.

인간의 목소리는 가장 오래된 악기이자 가장 정직한 감정의 언어다. 때로는 현악기의 떨림보다 깊고 관현악의 웅장함보다 강렬하다. 그러나 성악의 아름다움은 화려한 기교에만 있지 않다. 내면에서 길어 올린 감정이 호흡을 타고 선율이 되는 순간, 노래는 비로소 예술의 본질에 닿는다.

이번 연주회는 슈베르트의 독일 예술가곡을 시작으로 한국 가곡과 도니제티, 푸치니, 베르디, 구노의 오페라 아리아를 아우르며 고독과 사랑, 그리움과 희생에 이르는 인간 감정의 다채로운 풍경을 펼쳐 보였다.

Ⅰ. 겨울의 고독에서 사랑의 설렘까지
첫 무대는 바리톤 최준재의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중 제4곡 〈동결(Erstarrung)〉과 제18곡 〈폭풍의 아침(Der stürmische Morgen)〉으로 열렸다.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겨울 나그네》는 실연한 방랑자가 겨울 풍경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작품이다. 〈동결〉이 잃어버린 사랑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절박함이라면, 〈폭풍의 아침〉은 거친 자연에 투영된 혼란스러운 심경이다. 성악과 피아노가 빚어내는 긴장과 이완은 고독의 심리적 깊이를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다.

이어 소프라노 우지연은 김동현 시·이원주 곡 〈연〉과 도니제티의 《돈 파스콸레(Don Pasquale)》 중 〈그 기사의 눈길(Quel guardo il cavaliere)〉을 선보였다. 한국 가곡의 섬세한 서정에서 사랑의 설렘과 재치를 담은 벨칸토 아리아로 이어지는 변화가 돋보였다. 유연한 레가토와 정교한 장식음은 인물의 생동감을 살리는 핵심적인 음악 언어다.

소프라노 이은정은 이수인 시·곡 〈내 맘의 강물〉과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ème)》 중 무제타의 왈츠 〈내가 길을 걸을 때면(Quando m’en vo)〉을 노래했다. 지나온 세월의 그리움을 강물에 비유한 한국 가곡과 자신의 매력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무제타의 아리아는 서정과 관능의 대비를 이루었다.

Ⅱ. 사랑과 절망, 오페라가 품은 인간의 얼굴
테너 김홍제는 강명성 시·정애련 곡 〈단향〉과 푸치니의 《토스카(Tosca)》 중 〈오묘한 조화(Recondita armonia)〉를 선보였다. 한국어의 시적 울림에 이어 화가 카바라도시의 예술적 감수성과 연인을 향한 열정을 표현했다. 이 아리아는 힘찬 발성뿐 아니라 유려한 선율과 자연스러운 감정의 고조가 중요한 작품이다.

소프라노 김현진은 설도 시·김성태 곡 〈동심초〉와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았노라(Vissi d’arte, vissi d’amore)〉를 노래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그리움에서 신앙과 사랑을 지켜온 여인의 절박한 기도로 이어지는 구성이다. 토스카의 비극은 격렬한 절규보다 내면에 응축된 고통과 절제된 호흡에서 더욱 깊어진다.

이처럼 전반부는 슈베르트의 고독에서 한국 가곡의 서정을 거쳐 푸치니의 비극적 세계로 나아가며 사랑과 상실의 정서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냈다.

휴식 후에는 소프라노 사공빈이 허림 시·윤학준 곡 〈마중〉과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 중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O mio babbino caro)〉를 선보였다. 기다림의 애틋함을 담은 한국 가곡과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을 허락받으려는 라우레타의 간절한 호소가 서로 다른 사랑의 표정을 보여주었다.

소프라노 한은주는 한상억 시·최영섭 곡 〈그리운 금강산〉과 푸치니의 《나비부인(Madama Butterfly)》 중 〈어느 아름다운 날(Un bel dì, vedremo)〉을 노래했다. 분단의 현실에서 고향 산천을 그리는 민족적 염원과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는 초초상의 비극적 희망은 기다림이라는 공통된 정서로 연결된다. 하나는 잃어버린 땅을, 다른 하나는 떠나간 사랑을 향하지만, 두 작품 모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담고 있다.

테너 강신욱은 박화목 시·임긍수 곡 〈그대 창밖에서〉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중 〈그녀 없이는 행복도 없네(Lunge da lei)〉를 선보였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서정적 고백에서 연인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알프레도의 열정으로 이어졌다. 베르디 특유의 극적 선율은 자연스러운 호흡과 유려한 프레이징이 뒷받침될 때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Ⅲ. 환희와 희생, 사랑의 두 얼굴
소프라노 황진영은 이병기 시·윤학준 곡 〈별〉과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Roméo et Juliette)》 중 줄리엣의 왈츠 〈꿈속에 살고 싶어(Ah! Je veux vivre)〉를 노래했다. 한국 가곡의 서정적 감성에 이어 사랑을 꿈꾸는 젊은 여인의 생기와 환희를 펼쳐 보였다. 구노의 경쾌한 리듬과 우아한 선율은 성악적 민첩성과 밝은 음색을 요구하며, 줄리엣의 순수한 생명력을 부각한다.

마지막 무대는 소프라노 정민희의 김소월 시·김동진 곡 〈진달래꽃〉과 푸치니의 《투란도트(Turandot)》 중 〈얼음으로 뒤덮인 당신(Tu che di gel sei cinta)〉으로 장식되었다.

〈진달래꽃〉이 떠나는 이를 붙잡지 않는 역설 속에 한국적 정한(情恨)을 담았다면, 류의 아리아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생명까지 내어놓는 숭고한 희생을 노래한다. 두 작품은 사랑의 본질을 소유가 아닌 떠나보냄과 헌신에서 찾는다. 푸치니 특유의 서정성과 비극적 긴장이 응축된 마지막 아리아는 공연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마무리했다.

Ⅳ. 기량의 화려함과 절제의 미학
이번 연주회는 한국 가곡과 서양 오페라 아리아를 나란히 배치해 서로 다른 음악 언어에 담긴 인간 감정의 보편성을 탐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한국 가곡이 시어의 울림과 내면의 정서를 중시한다면, 오페라 아리아는 극적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성악적 기교로 확장한다. 한국어의 명료한 전달력과 이탈리아어의 유려한 모음 연결, 독일어의 정교한 자음 처리와 프레이징은 각각 다른 음악적 접근을 요구한다.

성악가들은 저마다의 음색과 풍부한 성량, 축적된 음악적 경험으로 감정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였다. 넘치는 열정이 무대마다 생생한 에너지로 전해졌고, 여기에 호흡의 여유와 프레이즈의 매끄러운 연결이 더해진다면 그 감동은 한층 깊어질 것이다.

성악의 완성도는 성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호흡의 지속성과 레가토, 다이내믹의 섬세한 조절이 조화를 이룹쓸 때 음악은 깊이를 얻는다. 감정의 절정에서 오히려 소리를 거두고 여백을 남기는 절제야말로 더욱 강렬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피아니스트 임수정과 진영진의 반주 역시 성악가들의 표현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가곡과 오페라에서 피아노는 단순한 화성적 배경을 넘어 성악의 호흡과 감정의 흐름을 함께 이끄는 음악적 동반자다.

1946년부터 이어져 온 한국성악(학)회의 80년 역사는 이번 제140회 정기연주회에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선후배 성악가들이 한 무대에서 음악적 경험과 해석을 나누는 일은 전통의 계승이자 한국 성악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교류다.

특히 한국 가곡을 서양 오페라와 동등한 비중으로 조명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말의 시적 아름다움과 민족의 정서, 역사적 기억을 담은 한국 가곡은 독자적인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이번 무대는 그 가능성을 세계 성악 레퍼토리와의 조화 속에서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무대의 여운은 오래 이어졌다. 쓸쓸해서 더 아름다운 늦가을, 한국성악회 김철호 회장은 연주의 순간마다 묻어난 선율의 감동을 객석의 관객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감동이 묻어나는 연주의 순간들을 객석의 숨결까지 함께 나누었다”는 김철호 회장의 말처럼, 이날의 노래는 비로소 소리의 깊이에서 완성되었다.

▲사진=좌로부터 한국성악(학)회 회장 김철호, 부회장 정민희, 필자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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