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의 감성가곡] 가을의 기도

[손영미의 감성가곡] 가을의 기도

– 김현승 시 · 안정준 작곡
– 노래 | 소프라노 김영미 · 소프라노 김향란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가을 들판이 천천히 무르익어 간다.
하늘에는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은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나뭇잎 사이를 지난다.

계절이 이토록 깊어질 때면 문득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김현승의 시에 안정준이 선율을 입힌 <가을의 기도〉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지만, 김현승에게 가을은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시간이었다. 열매가 익을수록 가지는 낮아지고, 나무가 잎을 내려놓을수록 하늘은 더 많이 보인다. 어쩌면 시인은 그 오래된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끝내 배워야 할 겸허를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세 연을 이끄는 ‘~하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어조는 이 시를 한 편의 기도문처럼 만든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엇을 더 갖게 해달라는 청원이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게 해달라는 간구에 가깝다.

기도하고, 사랑하고, 마침내 홀로 서는 것.

그 세 단계 끝에 시인은 ‘절대 고독’의 자리로 걸어 들어간다.

김현승의 고독은 쓸쓸함이나 단절과는 조금 다르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외로움이 아니라, 온갖 소음과 욕망을 걷어낸 뒤 비로소 자기 영혼과 마주하는 고요에 가깝다.

그래서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는 구절은 더욱 깊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풍성한 때에 더 가지려 하지 않고오히려 낙엽이 지기를 기다리는 마음.
무언가를 채우기 전에 먼저 비울 줄 아는 마음

가을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많이 비워지는 계절이 가장 깊이 채워지는 계절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 기도는 사랑을 향한다. 시인은 수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라고 청한다. 사랑의 넓이가 아니라 깊이를 순간의 격정보다 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가꾸는 인내를 말한다.

사랑 역시 열매와 닮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익힐 수 없고, 오래 햇빛과 비를 견딘 것만이 제 향기를 갖는다.

마지막에 이르면 풍경은 더욱 적막해진다.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홀로 앉은 까마귀 모든 장식이 사라진 자리에서 영혼은 비로소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그곳이 김현승이 평생 탐색했던 ‘절대 고독’의 자리일 것이다.

시가 노래가 되었을 때

〈가을의 기도〉는 김현승이 1950년대에 발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랫동안 교과서 등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시가 되었다.

필자역시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이 작품을 만났을 때 우리는 ‘겸허’, ‘고독’, ‘종교적 성찰’ 같은 말에 밑줄을 그으며 시를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나는 시는 다르다.

사랑해 보고, 헤어져 보고, 무엇인가를 얻고 또 잃어본 뒤 읽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는 더 이상 시험문제의 문장이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생을 돌아보게 하는 한 사람의 간절한 독백이 된다.

좋은 시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가슴에 도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에 안정준의 선율이 깃들면서 〈가을의 기도〉는 또 하나의 생명을 얻었다.

안정준은 음악가의 길만을 걸었던 인물이 아니라 사업과 음악을 함께 품었던 독특한 이력의 작곡가였다. 〈아리 아리랑〉을 비롯해 우리 정서를 담은 음악을 남겼으며, 〈가을의 기도〉 역시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 곡의 선율에는 화려한 기교보다 기도의 호흡이 먼저 흐른다. 마치 저녁 미사의 종소리처럼 고요하게 시작해 사람의 마음을 텅 빈 들판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

낯선 타국에서 생을 마친 작곡가의 삶을 생각하면 이 노래는 더욱 애잔하게 들린다.
사람은 떠나지만 노래는 남는다.

한 사람이 남긴 음표는 국경도 생의 시간도 넘어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살아난다. 어쩌면 작곡가는 자신이 떠난 뒤에도 이 노래를 타고 고국의 가을 산하를 여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되어 들판을 지나고
낙엽 한 장의 흔들림 속에 머물며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한 번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고 노래하면서
가을은 우리를 천천히 타오르게 한다

〈가을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때로는 신의 향연처럼, 때로는 오래된 성가처럼 마음이 고요해진다.

가을 들판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해명도 변명도 작아진다. 나무는 잎을 떨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열매는 자신이 익었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자연은 그저 제 시간을 다 살아낼 뿐이다.
사랑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너무 뜨거워 서로를 태우기보다 한 계절의 햇빛과 비를 견디며 천천히 익어가는 것. 붙잡는 사랑보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랑, 많이 사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찰리 채플린은 우리가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적게 느낀다고 말했다. 어쩌면 가을은 그 순서를 잠시 뒤집어 놓는 계절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먼저 바람을 느끼고
말보다 먼저 낙엽의 빛깔을 바라보고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하나를 오래 품게 하는 계절.

그러므로 올가을에는 조금 덜 서두르기로 한다.

책 한 권을 천천히 읽고, 때로는 낯선 길을 여행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조금 더 오래 귀 기울이며 그렇게 자신의 계절을 완주해 보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때로 누추하고
이별마저 찬란하게 찾아온다 해도

낙엽이 모두 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하늘이 있듯

비워낸 마음 한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열매 하나가
조용히 익어가기를…

그리고 오늘도
〈가을의 기도〉의 선율 속에서
우리 모두의 가을이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따뜻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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