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메로스에서 현대 스크린까지, 3천 년을 건너온 귀환의 철학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지난 8월 5일 국내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연일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키며 흥행의 항해를 이어가고 있다. 개봉 9일째인 14일 기준 누적 관객 약 285만 명. 3천 년 전 쓰인 고전이 첨단 영상의 시대에 다시 대중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부터 흥미롭다.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영웅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케로 향한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어도 그의 진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신들의 분노와 거대한 폭풍, 괴물과 유혹, 죽음과 망각이 그의 귀향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트로이에서 이타케까지는 20년을 떠돌아야 할 만큼 먼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호메로스는 왜 한 인간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다 위에 붙잡아 두었을까.
그 질문에서 『오디세이아』는 모험담을 넘어 인간에 대한 철학이 된다.
전쟁의 영웅에서 한 인간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세기경 성립된 것으로 알려진 서사시다.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노래한다면,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뒤 한 인간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전쟁 10년, 귀향 10년. 오디세우스는 무려 20년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향을 늦춘 것은 단지 성난 바다와 신들의 방해만이 아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욕망과 교만, 호기심과 쾌락, 망각이었다. 그래서 그의 항해는 지리적 이동이라기보다 인간이 자신에게 돌아가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내면의 지도에 가깝다.
전쟁터에서 적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어쩌면 자기 욕망을 이기는 일이다. 『오디세이아』가 3천 년을 살아남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칼립소, 사랑이라는 이름의 망각
그의 귀향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둔 존재는 여신 칼립소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에서 7년을 보낸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과 안락을 주고, 심지어 불멸까지 약속한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탐낼 법한 제안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밤마다 바닷가에 앉아 이타케를 바라보며 운다. 칼립소라는 이름에는 ‘감추다’라는 어원이 담겨 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세상으로부터 감추고, 시간으로부터 감추며, 마침내 그 자신으로부터도 감추려 한다.
여기서 사랑의 역설이 생긴다.
사랑은 상대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길까지 막아 버린다면 사랑은 보호가 아니라 아름다운 감금이 될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가 버린 것은 여신이 아니라 망각이었다. 그는 영원히 사는 것보다 유한한 인간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길을 택한다.
키르케, 인간 안의 야성을 마주하다
마녀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
이 장면은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기괴하면서도 상징적이다. 인간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것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욕망에 자신을 내맡길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이성과 품위를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키르케는 단순한 악녀가 아니다. 이후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돕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어떤 유혹과 실패는 인간을 파괴하지만, 어떤 실패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오디세우스는 키르케를 지나며 세상을 이기는 지혜보다 자기 안의 욕망을 다루는 지혜를 배운다.
세이렌, 가지 않은 길의 목소리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항해자를 유혹해 죽음으로 이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하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묶은 채 그 노래를 듣는다. 유혹을 없애는 대신, 유혹 앞에서 자신을 붙들 장치를 만든 것이다.
세이렌은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더 많은 성공, 더 높은 자리, 더 젊은 삶, 선택하지 못했던 사랑, 가지 못한 길….세이렌은 바다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산다. “저쪽으로 가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속삭이며 지금 가진 것의 가치를 잊게 만든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밧줄은 단순한 생존 도구가 아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만들어 둔 절제의 장치다. 자신이 강하다고 믿는 사람보다 자신이 흔들릴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 오히려 더 멀리 항해한다.
아르고스, 20년을 기억한 단 하나의 눈
수많은 괴물과 신들이 등장하는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은 뜻밖에도 한 늙은 개에게서 나온다. 20년 만에 이타케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거지로 변장한다. 사람들은 왕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늙고 병든 개 아르고스는 그를 단번에 알아본다. 한때 주인과 함께 뛰어다녔던 개는 이제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디세우스의 냄새와 기척을 알아차리고 마지막 힘을 내어 반응한 뒤 조용히 숨을 거둔다.
20년의 세월도 충성의 기억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아르고스는 묻는 듯하다. 세월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뒤에도 나를 알아보는 존재가 있는가. 그리고 나는 오래 떠나 있는 동안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귀향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일만이 아니다. 나를 기억하는 존재들에게 돌아오는 일이다.
페넬로페, 기다림은 수동적인 사랑이 아니다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떠도는 동안 페넬로페 역시 자신의 전쟁을 치른다. 왕이 사라진 이타케에는 수많은 구혼자가 몰려든다. 그들은 오디세우스가 죽었다고 단정하고 페넬로페에게 재혼을 요구하며 왕궁의 재산을 축낸다.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짜면 남편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낮에는 베를 짜고 밤이면 몰래 풀어 버린다. 그녀의 기다림은 무기력한 정지가 아니다. 시간을 견디고, 침입자로부터 가정을 지키며, 끝까지 자신의 선택권을 내주지 않는 적극적인 저항이다.
마침내 돌아온 오디세우스에게조차 그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둘만이 알고 있는 침대의 비밀을 통해 그가 진짜 남편인지 확인한다.
여기서 사랑은 감정보다 기억이고, 기다림보다 신뢰가 된다.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건너 이타케를 찾아왔다면, 페넬로페는 한자리에서 2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온 셈이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돌아가기 위해 각자의 오디세이를 견뎠다.
왜 집으로 돌아가는 데 20년이나 걸렸을까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데 그토록 오래 걸렸을까.
아마도 호메로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집까지의 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은 떠날 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으로 트로이를 떠났지만, 이타케에 도착할 때는 패배와 상실, 유혹과 죽음을 경험한 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얻어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잃으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낸 뒤 돌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20년은 귀향에 걸린 시간이 아니라 한 인간이 ‘집’의 의미를 깨닫는 데 필요했던 시간인지 모른다.
당신의 이타케는 어디인가
놀란의 <오디세이>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역시 여기에 닿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성공이라는 세이렌을 지나고, 안락이라는 칼립소의 섬에 머물기도 하며, 욕망이라는 키르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잃기도 한다. 때로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먼 곳까지 왔는지조차 잊는다.
현대인은 역사상 가장 빠르게 이동하지만, 정작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는 시대를 산다.
그래서 이타케는 더욱 절실하다.
이타케는 지도 위의 작은 섬만을 뜻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며, 누군가에게는 오래 잊고 살았던 꿈일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잃어버린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멀리 갔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항해 끝에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가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영웅의 완성은 트로이를 함락시킨 순간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한 사람에게 돌아와 다시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한 인간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인생도 하나의 오디세이다.
우리는 떠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떠남을 통해 마침내 돌아갈 곳의 의미를 배우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3천 년 전 호메로스의 질문은 오늘도 낡지 않는다.
당신을 붙잡는 칼립소는 무엇인가.
당신을 유혹하는 세이렌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모든 바다를 건너서라도
끝내 돌아가고 싶은 당신의 이타케는 어디인가.
인생이라는 긴 항해에서 중요한 것은 폭풍을 만나지 않는 일이 아니다. 폭풍 속에서도 내가 돌아갈 곳을 잊지 않는 일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