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 영화 리뷰 칼럼] 인생이라는 오디세이, 당신의 이타케는 어디인가

[손영미 영화 리뷰 칼럼] 인생이라는 오디세이, 당신의 이타케는 어디인가

– 호메로스에서 현대 스크린까지, 3천 년을 건너온 귀환의 철학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지난 8월 5일 국내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연일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키며 흥행의 항해를 이어가고 있다. 개봉 9일째인 14일 기준 누적 관객 약 285만 명. 3천 년 전 쓰인 고전이 첨단 영상의 시대에 다시 대중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부터 흥미롭다.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영웅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케로 향한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어도 그의 진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신들의 분노와 거대한 폭풍, 괴물과 유혹, 죽음과 망각이 그의 귀향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트로이에서 이타케까지는 20년을 떠돌아야 할 만큼 먼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호메로스는 왜 한 인간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다 위에 붙잡아 두었을까. 그 질문에서 『오디세이아』는 모험담을 넘어 인간에 대한 철학이 된다. 전쟁의 영웅에서 한 인간으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세기경 성립된 것으로 알려진 서사시다.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노래한다면,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난 뒤 한 인간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전쟁 10년, 귀향 10년. 오디세우스는 무려 20년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향을 늦춘 것은 단지 성난 바다와 신들의 방해만이 아니다. 그를 붙잡은 것은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욕망과 교만, 호기심과 쾌락, 망각이었다. 그래서 그의 항해는 지리적 이동이라기보다 인간이 자신에게 돌아가기까지 통과해야 하는 내면의 지도에 가깝다. 전쟁터에서 적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어쩌면 자기 욕망을 이기는 일이다. 『오디세이아』가 3천 년을 살아남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칼립소, 사랑이라는 이름의 망각 그의 귀향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둔 존재는 여신 칼립소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에서 7년을 보낸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과 안락을 주고, 심지어 불멸까지 약속한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탐낼 법한 제안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밤마다 바닷가에 앉아 이타케를 바라보며 운다. 칼립소라는 이름에는 ‘감추다’라는 어원이 담겨 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세상으로부터 감추고, 시간으로부터 감추며, 마침내 그 자신으로부터도 감추려 한다. 여기서 사랑의 역설이 생긴다. 사랑은 상대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길까지 막아 버린다면 사랑은 보호가 아니라 아름다운 감금이 될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가 버린 것은 여신이 아니라 망각이었다. 그는 영원히 사는 것보다 유한한 인간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길을 택한다. 키르케, 인간 안의 야성을 마주하다 마녀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 이 장면은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기괴하면서도 상징적이다. 인간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것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욕망에 자신을 내맡길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이성과 품위를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키르케는 단순한 악녀가 아니다. 이후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돕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어떤 유혹과 실패는 인간을 파괴하지만, 어떤 실패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오디세우스는 키르케를 지나며 세상을 이기는 지혜보다 자기 안의 욕망을 다루는 지혜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