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정차조 칼럼니스트]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세 번째 길을 보라
세상은 우리에게 자주 두 개의 문만 보여 준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찬성이냐, 반대냐.
보수냐, 진보냐.
성장이냐, 분배냐.
개인이냐, 공동체냐.
소비냐, 절약이냐.
돈이냐, 가치냐.
현실이냐, 이상이냐.
참 친절한 척하지만 사실은 무서운 방식이다.
두 개만 보여 주면 사람은 선택하는 줄 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갇히는 것이다. 두 개 중 하나를 고르는 순간,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판 안으로 들어간다. 문이 두 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건물의 다른 출입구일 때가 많다.
우리는 너무 오래 이 방식에 익숙해졌다.
A가 아니면 B라고 믿었다.
오른쪽이 아니면 왼쪽이라고 믿었다.
시장경제가 아니면 반시장이라고 믿었다.
성장을 말하면 사람을 잊는 것이고, 사람을 말하면 성장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돈을 말하면 속물이 되고, 가치를 말하면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이 얼마나 피곤한 세상인가.
인간은 원래 훨씬 넓은 존재인데, 세상은 자꾸 우리를 객관식 문제처럼 만든다. 보기 1번과 2번만 주고 “정답을 고르시오”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살아 보면 진짜 중요한 답은 보기 안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인생도 그렇고,
시장도 그렇고,
문명도 그렇다.
KN541이 보려는 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세 번째 길을 보라.
세 번째 길은 어중간한 타협이 아니다.
반은 이쪽, 반은 저쪽을 섞는 비빔밥도 아니다.
둘 다 눈치 보며 적당히 섞어 놓고 “상생입니다”라고 포장하는 회의용 문장도 아니다.
세 번째 길은 판을 바꾸는 길이다.
기존의 질문 자체를 다시 묻는 길이다.
“둘 중 무엇을 고를 것인가?”가 아니라 “왜 꼭 둘 중 하나여야 하는가?”라고 묻는 길이다.
“생산자냐 소비자냐?”가 아니라 “소비가 생산을 부르는 구조는 왜 안 되는가?”라고 묻는 길이다.
“기업의 이익이냐 소비자의 혜택이냐?”가 아니라 “좋은 소비가 좋은 생산과 참여가치로 다시 돌아오는 구조는 왜 안 되는가?”라고 묻는 길이다.
세 번째 길은 선택지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기존 시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비싼 것을 살 것인가, 싼 것을 살 것인가.
유행을 따를 것인가, 뒤처질 것인가.
플랫폼을 쓸 것인가, 시장에서 사라질 것인가.
참 거칠다.
소비자는 늘 마지막에 서 있었다.
이미 만들어진 상품 앞에서 고르고, 이미 정해진 가격 앞에서 망설이고, 이미 짜인 광고 앞에서 흔들리고, 이미 설계된 플랫폼 안에서 움직였다.
그러고도 시장은 말했다.
“고객은 왕입니다.”
왕이라는데, 신하들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왕이라는데, 이미 밥상은 차려져 있고, 왕은 결제만 한다.
왕이라는데, 마음에 안 들면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대기음 왕국에 입장해야 한다.
참 이상한 왕정이다.
세 번째 길은 이 왕정의 연극을 끝내는 길이다.
소비자는 끝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시작을 여는 사람이다.
필요를 말하고, 수요를 드러내고, 생산의 방향을 바꾸고, 사용 경험을 다시 시장에 돌려보내는 사람이다.
이 길에서는 소비와 생산이 적이 아니다.
소비와 생산은 서로를 부르는 한 바퀴다.
소비는 사라지는 지출이 아니라 생산을 부르는 신호가 된다.
생산은 기업의 일방적인 공급이 아니라 검증된 필요에 대한 응답이 된다.
후기는 장식이 아니라 재생산의 근거가 된다.
참여는 감동이 아니라 기록과 정산의 질서가 된다.
공동체는 분위기가 아니라 책임과 연결의 구조가 된다.
이것이 세 번째 길이다.
돈이냐 가치냐도 다시 물어야 한다.
기존의 사고는 돈과 가치를 자주 싸움 붙였다.
돈을 말하면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가치를 말하면 돈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돈을 모르는 가치이고, 가치 없는 돈이다.
돈을 모르는 가치는 좋은 뜻을 들고 길을 잃는다.
가치 없는 돈은 빠르지만 결국 사람을 소모한다.
세 번째 길은 돈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주인으로 모시지도 않는다.
돈은 흐름이다.
어디로 흐르는가가 중요하다.
누구의 시장을 키우는가가 중요하다.
어떤 생산을 부르는가가 중요하다.
그 흐름이 다시 사람과 지역과 공동체로 돌아오는가가 중요하다.
돈이 가치와 만나면 순환이 된다.
돈이 욕망과만 만나면 낭비가 된다.
그래서 KN541의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얼마를 벌 것인가만 묻지 않는다.
어떤 소비가 어떤 생산을 부르는가를 묻는다.
어떤 활동이 어떤 기록으로 남는가를 묻는다.
어떤 가치가 누구에게 다시 돌아가는가를 묻는다.
어떤 시장이 사람을 세우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이 세 번째 길의 문을 연다.
개인이냐 공동체냐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말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주 대립시켰다.
개인을 말하면 이기적인 것 같고, 공동체를 말하면 개인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만으로 살 수 없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지워져서도 안 된다.
개인이 살아야 공동체가 살아난다.
공동체가 살아야 개인의 선택이 오래간다.
혼자만 잘 사는 길은 결국 외롭다.
함께만 외치고 개인의 역할이 없으면 그것은 구호다.
세 번째 길은 개인을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을 더 분명하게 세운다.
당신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당신은 어떤 상품을 선택하는가.
당신은 어떤 경험을 남기는가.
당신은 누구와 연결되는가.
당신의 소비는 어떤 시장을 키우는가.
당신의 활동은 어떤 공동체의 기록이 되는가.
개인의 선택이 공동체의 흐름이 되고,
공동체의 흐름이 다시 개인의 삶을 넓히는 구조.
이것이 세 번째 길이다.
현실이냐 이상이냐도 이제 그만 싸워야 한다.
이상만 말하면 붕 뜬다.
현실만 말하면 주저앉는다.
이상 없는 현실은 계산서가 되고,
현실 없는 이상은 포스터가 된다.
세 번째 길은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길이다.
지구사랑을 말한다면 오늘 무엇을 덜 버릴 것인지로 내려와야 한다.
좋은 소비를 말한다면 오늘 무엇을 어디서 왜 살 것인지로 내려와야 한다.
공동체를 말한다면 오늘 누구의 수고를 기록할 것인지로 내려와야 한다.
새 문명을 말한다면 오늘 어떤 작은 반복을 바꿀 것인지로 내려와야 한다.
큰 말은 작은 행동에 내려앉을 때 힘을 얻는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아름답다.
그러나 길을 밝히려면 그 별빛이 땅에 닿아야 한다.
KN541이 말하는 세 번째 길은 별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별만 보다가 발밑의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일을 줄이려 한다.
해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가끔 너무 거창한 말을 좋아한다.
“새 문명.”
“새 시장.”
“지구사랑.”
“참여가치.”
“소비생산.”
말은 참 크다.
입에 올리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런데 막상 누가 “그래서 오늘 무엇을 하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갑자기 회의실 공기가 조용해진다.
세 번째 길은 이 조용함을 깨는 길이다.
오늘 가치가게를 열 수 있다.
오늘 좋은 상품을 써 보고 기록할 수 있다.
오늘 사전예약구매의 의미를 한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다.
오늘 전자오두막에 경험을 남길 수 있다.
오늘 에코 베이스에서 작은 모임을 만들 수 있다.
오늘 교육에서 배운 것을 생활의 행동으로 바꿀 수 있다.
문명은 그렇게 시작된다.
거창한 선언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세 번째 길은 그래서 실천의 길이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사람은 빠르게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째 길을 여는 사람은 먼저 질문해야 한다.
이 판은 누가 만들었는가.
이 선택지는 누구에게 유리한가.
여기서 빠진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서 사라진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이 방식밖에 없다고 믿었는가.
다른 구조는 정말 불가능한가.
이 질문은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한 질문만이 닫힌 문을 연다.
사람들은 때로 세 번째 길을 두려워한다.
처음 듣는 길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편에 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직 길이 넓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길은 처음에는 길이 아니었다.
누군가 먼저 걸었고,
누군가 다시 걸었고,
발자국이 쌓였고,
그다음에 길이 되었다.
세 번째 길도 그렇다.
처음에는 낯설다.
다음에는 우스워 보인다.
그다음에는 위험해 보인다.
그러다 어느 날 모두가 말한다.
“원래 그런 방향으로 가야 했지.”
사람은 참 재미있다.
처음에는 새 길을 이상하다고 말하다가, 길이 넓어지면 자기가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괜찮다.
길은 원래 그렇게 넓어진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질문을 시작하느냐다.
KN541은 그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소비와 생산을 다시 묻고,
시장과 공동체를 다시 묻고,
돈과 가치를 다시 묻고,
개인과 지역을 다시 묻고,
기술과 사람을 다시 묻고,
교육과 실천을 다시 묻고,
문명과 일상을 다시 묻는 길.
이것이 세 번째 길이다.
세 번째 길은 중간이 아니다.
새로운 중심이다.
기존 시장과 반시장 사이의 애매한 회색지대가 아니다.
사람이 시장의 첫 질문을 다시 여는 새로운 중심이다.
소비자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는 중심.
생산자가 독주자가 아니라 응답자가 되는 중심.
기업이 지배자가 아니라 구조의 책임자가 되는 중심.
공동체가 구호가 아니라 기록과 실천의 장이 되는 중심.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순환의 도구가 되는 중심.
이 중심이 서야 새 문명이 보인다.
우리는 이제 선택지를 다시 써야 한다.
살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생산을 부르는 소비를 할 것인가.
벌 것인가, 나눌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벌고 어떻게 돌아가게 할 것인가.
나 혼자 살 것인가, 공동체에 묻힐 것인가가 아니라
내 선택이 공동체의 힘이 되고, 공동체가 내 삶의 토양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이상인가, 현실인가가 아니라
이상을 현실의 시스템으로 내리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이 세 번째 길이다.
오늘의 결론은 분명하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세상 앞에서,
우리는 세 번째 길을 열어야 한다.
그 길은 도망이 아니다.
타협도 아니다.
모호한 중간도 아니다.
그 길은 질문을 바꾸는 길이다.
판을 다시 짜는 길이다.
소비를 생산의 신호로 바꾸고,
참여를 기록으로 바꾸고,
가치를 순환으로 바꾸고,
공동체를 생활의 구조로 바꾸는 길이다.
세상은 늘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명은 대개 세 번째 길에서 시작된다.
남들이 만든 질문에 답만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문으로 새로운 길을 열 것인가.
KN541의 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선택지가 아니라 길을 만든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사람과 시장과 문명이 다시 만나는 세 번째 길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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