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옥 칼럼] 트럼프의 ‘쿠르드 카드’와 중동 지정학

[강대옥 칼럼] 트럼프의 ‘쿠르드 카드’와 중동 지정학

– 대리전의 도구인가, 배신의 희생양인가

▲사진=강대옥 국회입법정책연구회 수석연구원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강대옥 칼럼니스트]

21세기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은 근본적인 전환기를 맞이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값비싼 교훈은 미국으로 하여금 대규모 지상군 투입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피하게 만들었다. 자국 군인의 희생은 곧 여론 악화와 정권 위기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결과다. 이에 따라 현대 미국 전쟁 교리의 핵심은 ‘지상군의 현지화’, 즉 냉혹한 대리전(Proxy War)으로 옮겨갔다. 이 거대한 지정학적 체스판에서 미국이 가장 유용하게 활용해 온 패가 바로 ‘쿠르드 카드(Kurdish Card)’다.

국가 없는 최대 민족, 강대국의 ‘용병’으로 전락하다

중동 전역에 걸쳐 약 3,000만~4,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쿠르드족은 ‘국가를 갖지 못한 세계 최대의 민족’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산다. 이들의 터전인 ‘쿠르디스탄(Kurdistan)’은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4개국으로 갈가리 찢겨 있다.

이 지역은 단순한 산악지대가 아니다. 풍부한 석유 매장량과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입지를 갖춘 ‘중동의 급소’다. 주변국들이 이들의 독립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척박한 환경은 쿠르드족을 중동 내 가장 강력한 비국가 무장 세력으로 단련시켰고,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이들의 전투력을 ‘차용’해 왔다.

대(對)이란 압박의 선봉장: 미국의 3중 포석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를 연상시키는 미국의 대이란 압박 시나리오에서 쿠르드 세력은 다시금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만약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격화된다면, 미국은 이라크 내 쿠르드 자치지역을 배후 기지로 삼아 이란 북서부 쿠르드 반군의 무장 봉기를 유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에는 미국의 명확한 3가지 전략이 깔려 있다.

첫째는 이란 군사력의 분산이다. 이스라엘, 페르시아만, 헤즈볼라 등 다중 전선을 관리해야 하는 이란에 내부 국경의 쿠르드 반란은 치명적인 과부하를 초래한다.

둘째는 미군 사상자의 최소화다. ISIS 격퇴전에서 증명되었듯 지상전의 피는 쿠르드 전사들이 흘리게 하는 모델의 재가동이다.

셋째는 이란 내부의 체제 분열이다. 다민족 국가인 이란에서 쿠르드의 봉기는 다른 소수 민족의 연쇄 봉기를 촉발하는 뇌관이 될 수 있다.

100년에 걸친 배신의 역사, ‘토사구팽’의 기시감

그러나 쿠르드족에게 강대국의 감언이설은 희망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기시감을 준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철저한 ‘이용과 배신’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1923년 로잔 조약은 쿠르드 독립국 창설 약속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었고, 1975년 알제 협정 당시 미국은 이란-이라크 간 국경 합의가 타결되자마자 쿠르드 지원을 끊어버렸다. 그 결과는 사담 후세인의 가혹한 보복과 1988년 할라브자 화학무기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가장 최근인 2019년,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돌연한 시리아 철군 선언은 ISIS 격퇴를 위해 피 흘린 쿠르드족을 튀르키예의 포화 속에 방치한 사건이었다. 쿠르드 사회가 이를 “또 하나의 치명적인 배신”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스라엘이라는 변수와 냉혹한 현실의 벽

최근 이 방정식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란과 튀르키예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쿠르드 자치’를 지지한다는 암묵적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만약 이란 체제가 흔들린다면 쿠르드족은 이란 북서부에도 ‘이라크식 자치 모델’을 이식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차갑다. 쿠르드 독립의 불씨가 자국 내로 번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주변 4개국의 연합 저항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튀르키예의 저항은 미국으로서도 무시하기 힘든 지정학적 장벽이다.

끝나지 않은 카드의 운명

쿠르드족은 중동에서 가장 독보적인 전투력을 지닌 집단이자 강대국의 매력적인 지렛대다. 그러나 지정학적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가장 먼저 버려지는 가혹한 운명을 안고 있기도 하다.

다시금 고조되는 중동의 전운 속에서 쿠르드족은 또 한 번 역사의 변곡점에 섰다. 다가올 충돌이 마침내 그들에게 ‘국가 탄생’이라는 100년의 숙원을 안겨줄 것인가, 아니면 역사책에 기록될 ‘또 다른 배신’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인가. 결과가 무엇이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강대국들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피로 얼룩진 ‘쿠르드 카드’는 아직 테이블 위에서 치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진=강대옥 국회입법정책연구회 수석연구원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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