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정차조 칼럼니스트]
인간은 참으로 소유를 좋아한다.
집도 내 집이어야 안심하고, 자동차도 내 차여야 든든하고, 사무실도 내 사무실이어야 어깨가 펴진다.
가게를 열면 간판부터 달고 싶고, 공장을 가지면 사장이라는 명함부터 만들고 싶어진다.
심지어 텃밭에 고추 세 포기만 심어도 마음속에서는 벌써 농업혁명이 시작된다.
인간의 소유욕은 위대하다.
문제는 소유하는 것과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같은 일로 착각한다는 데 있다.
건물을 가졌다고 공동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공장을 가졌다고 좋은 상품이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게를 가졌다고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랬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빈 상가는 이미 대박을 터뜨렸을 것이다.
소유는 자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소유만으로 능력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세상은 생산하려면 먼저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공장을 가져야 생산자가 되고, 자본이 있어야 사업가가 되고, 유통망이 있어야 시장을 열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만들 것인지보다 무엇을 가질 것인지를 먼저 고민했다.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무실을 얻고, 팔 상품도 정하기 전에 책상부터 사고, 고객을 만나기도 전에 대표이사 명함부터 제작한다.
아직 사업은 태어나지 않았는데 고정비는 이미 성인이 되었다.
참으로 신속한 성장이다.
그러고 몇 달이 지나면 깨닫는다.
책상은 사람을 데려오지 않고, 간판은 상품을 팔아 주지 않으며, 명함은 월세를 대신 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질문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려고 했던가?”
이 질문이 너무 늦게 오면 사업은 시작하기도 전에 지친다.
소유 없는 생산은 이 순서를 뒤집는 생각이다.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보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먼저 묻는다.
공장이 있는가보다 필요한 상품이 있는가를 묻는다.
자본이 얼마나 있는가보다 실제 수요가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누가 소유하는가보다 누가 어떤 역할로 가치를 만드는가를 묻는다.
소유 없는 생산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다.
개인의 재산권을 부정하는 말도 아니고, 생산자의 설비와 기술을 공짜로 이용하자는 말도 아니다.
남의 공장을 내 공장처럼 말하면 그것은 공유경제가 아니라 사칭경제다.
소유 없는 생산이란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지 않더라도 필요를 발견하고, 수요를 조직하고, 기술과 사람을 연결하며, 생산의 방향을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소유가 생산의 유일한 출발점이라는 믿음이 깨지는 것이다.
한 사람은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절실한 필요를 알고 있다.
그러나 만들 능력이 없다.
또 다른 사람은 그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공장도 자본도 없다.
기존 시장은 이들을 서로 다른 위치에 세웠다.
기술을 가진 사람은 생산자,
필요를 가진 사람은 소비자,
사람을 연결하는 사람은 중개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경쟁하게 했다.
하지만 이 셋이 만나면 어떨까.
필요가 방향을 제시하고, 기술이 해법을 만들고, 연결이 실제 수요를 확인한다면 생산의 출발점은 이미 만들어진다.
세 사람이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공동 소유권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연결하는 구조다.
이것이 소유 없는 생산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시장을 다시 보게 된다.
생산의 힘은 공장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장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공장 밖의 생활이 알려 준다.
기계는 정확히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불편을 해결해야 하는지는 사람이 말해 준다.
자본은 생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할 이유까지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생산의 이유는 사람의 필요에서 나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설인가.
공장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생산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거대한 생산시설을 소유한 사람도 소비자의 필요를 모르면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몰라 헤맬 수 있다.
소유는 크지만 방향은 작을 수 있다.
자본은 많지만 질문은 빈약할 수 있다.
반대로 소유는 작아도 통찰은 클 수 있다.
오랫동안 우리는 많이 가진 사람을 큰사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는 무엇을 가능하게 했는가?
건물을 열 채 가진 사람보다 사람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사람이 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공장을 세 개 가진 사람보다 수천 명의 실제 필요를 발견해 좋은 생산으로 연결한 사람이 더 깊은 가치를 만들 수도 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반드시 많이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적게 가졌다고 반드시 적게 만드는 사람도 아니다.
이것이 소유 없는 생산이 열어 주는 시야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드릴을 소유하고 싶은 것일까, 벽에 구멍을 뚫고 싶은 것일까.
집집마다 전동드릴을 하나씩 사 놓고 일 년에 몇 분 사용한다면, 장비는 풍요로운데 정작 필요한 일은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집에도 하나 있어야지.”
왜 있어야 하는가?
“남의 것 빌리기 좀 그렇잖아.”
그렇게 인류는 벽에 구멍 하나 뚫기 위해 집집마다 작은 철물점을 차린다.
소유는 늘 편리함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보관과 관리와 폐기의 의무까지 선물한다.
소유에는 비용이 따른다.
공장도 마찬가지다.
설비를 가지면 유지해야 하고, 공간을 가지면 관리해야 하며, 생산하면 재고를 감당해야 한다.
소유의 크기만큼 책임도 커진다.
그런데 세상은 소유의 영광은 크게 말하면서 소유의 부담은 작게 말한다.
생산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모든 것을 직접 소유해야 한다면, 새로운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다.
하지만 기존의 기술과 설비를 가진 생산자에게 검증된 수요가 연결되고, 그 과정에 소비자와 지역 공동체가 각자의 역할로 참여한다면 가능성은 달라진다.
소유를 집중하지 않아도 생산의 기회는 넓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책임까지 없앨 수는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소유 없는 생산은 책임 없는 생산이 아니다.
오히려 소유와 역할을 구분하기 때문에 책임이 더 명확해야 한다.
생산자는 품질과 제조의 책임을 진다.
소비자는 자신의 필요와 선택에 책임을 진다.
연결자는 정확한 정보와 신뢰를 지켜야 한다.
운영자는 계약과 절차를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
각자의 역할은 다르지만 하나의 결과를 향해 움직인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은 정당하게 존중되고, 참여의 기여는 합의된 기준에 따라 인정되어야 한다.
참여했다고 자동으로 공장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상품을 제안했다고 당연히 생산이익의 소유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새로운 분쟁의 시작이다.
또한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노동을 무한정 가져가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의 일이니까 조금만 희생합시다.”
참으로 아름답고도 위험한 말이다.
희생을 권하는 사람이 언제나 제일 먼저 희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만든다는 것은 책임을 흐리는 일이 아니다.
각자의 권리와 기여를 더 분명하게 하는 일이다.
이 원칙이 있어야 소유 없는 생산이 품격을 얻는다.
KN541이 지향하는 소비생산의 길도 여기에서 의미를 얻는다.
소비자는 공장을 소유하지 않아도 필요를 말할 수 있다.
사전예약구매를 통해 생산 이전의 실제 수요를 드러낼 수 있다.
사용 경험을 통해 개선의 방향을 제안할 수 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필요를 듣고 자신의 기술과 설비로 응답할 수 있다.
연결과 활동의 가치는 기록과 검증을 거쳐 정해진 원칙에 따라 인정될 수 있다.
그렇게 각자의 역할이 하나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더 이상 생산시설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만 나뉘지 않는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이라는 낡은 구분 사이에 새로운 자리가 열린다.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
그 자리는 소유의 크기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좋은 질문 하나,
정확한 제안 하나,
절실한 필요 하나,
성실한 연결 하나가 새로운 생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슴을 열어 주는 이유다.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집은 있습니까?
자본은 있습니까?
공장은 있습니까?
사업장은 있습니까?
그러나 새로운 시장은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까?”
누구의 필요를 알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어떤 기술과 사람을 연결할 수 있습니까?
어떤 생산이 세상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질문이 달라지는 순간 인간의 가능성도 달라진다.
자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생산의 문밖에 서 있던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통찰로 생산의 출발점에 설 수 있다.
나이가 많다고 물러나 있을 필요도 없다.
공장이 없다고 침묵할 필요도 없다.
자본이 작다고 좋은 생각까지 작아질 이유도 없다.
평생 살아오며 쌓은 경험은 결코 작은 자산이 아니다.
동네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 사람,
어떤 상품이 오래 쓰이는지 아는 사람,
무엇이 불편하고 무엇이 낭비인지 아는 사람은 생산자가 미처 보지 못한 시장의 방향을 알려 줄 수 있다.
경험이 생산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설비는 풍부하지만 방향이 빈약한 곳이 많다.
반대로 좋은 생각은 있지만 실현할 수단이 부족한 사람도 많다.
소유 없는 생산은 이 둘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서로 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기술은 필요를 만나야 살아나고,
필요는 기술을 만나야 현실이 된다.
자본은 이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되고,
시장은 그 결과를 검증하는 자리가 된다.
그 과정에서 생산은 소유자 한 사람의 독백이 아니라 여러 역할이 만나 이루는 협력이 된다.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공연장을 소유해야 음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첼리스트가 악보의 저작권을 가져야 연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휘자가 모든 악기를 소유해야 교향곡이 완성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각자의 악기가 있고, 각자의 기술이 있고, 함께 지켜야 할 악보와 약속이 있다.
그러나 음악은 모두의 연주가 만나는 순간 탄생한다.
물론 연주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
공연장의 소유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작곡가의 권리도 보호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음악의 가치를 공연장 등기부등본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문명도 그렇다.
소유권은 중요하지만 소유권만으로는 창조를 설명할 수 없다.
생산은 공장의 재산목록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필요와 기술과 협력 속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그 협력이 깊어질수록 사회는 더 많은 사람이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이것이 소유 없는 생산이 꿈꾸는 세계다.
모두가 공장주가 되는 세상이 아니다.
공장을 갖지 않아도 생산의 방향을 제안할 수 있고, 좋은 기술을 가진 생산자는 더 정확한 수요를 만날 수 있으며, 각자의 기여가 정당하게 인정되는 세상이다.
소유의 권리는 지키되,
생산의 가능성은 넓히는 세상.
자본의 역할은 존중하되,
자본만이 모든 역할을 독점하지 않는 세상.
사람의 능력을 재산의 크기로 재단하지 않고,
무엇을 가능하게 했는가로 다시 바라보는 세상.
이것이 소유 없는 생산의 문명적 의미다.
우리는 이제 발전의 기준을 바꾸어야 한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열었는가.
얼마나 크게 소유했는가보다
얼마나 바르게 연결했는가.
얼마나 많은 상품을 만들었는가보다
얼마나 필요한 생산을 가능하게 했는가.
소유가 인생의 목적이 되면 사람은 평생 모으다가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창조가 목적이 되면 지금 가진 것이 적어도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큰 역설이 태어난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더 많은 사람에게 생산의 길이 열릴 수 있다.
혼자 차지하려는 마음을 줄일 때, 함께 만들어 내는 힘은 커질 수 있다.
소유의 크기를 자랑하던 시장이 역할의 깊이를 존중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비로소 재산목록 밖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오늘의 결론은 분명하다.
소유 없는 생산은 소유의 부정이 아니다.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확장이다.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자는 말이 아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도 생산의 길을 열자는 말이다.
모두에게 공장을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모두가 가진 경험과 능력으로 새로운 생산의 가능성을 발견하자는 제안이다.
우리는 이제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가 아니라,
“무엇을 함께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소유는 창조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오고, 사람의 필요와 능력과 협력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른다.
소유 없는 생산.
그것은 빈손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허황된 약속이 아니다.
공장을 소유하지 않아도 생산을 생각할 수 있고,
큰 자본이 없어도 필요를 발견할 수 있으며,
혼자 모든 것을 갖지 않아도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선언이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 수 있는 길을 연 사람이다.
진정한 창조의 크기는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나로 인해 무엇이 가능해졌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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