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오면 문학의 공기는 쉽게 감지될 만큼 예민해진다.
데뷔라는 제도적 문턱 앞에서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고,
문장은 끝없이 의심되고,
창작자는 자신이 써 내려간 한 줄이 과연 자기 자신의 것인지를 묻는다.
AI가 창작의 주변부를 넘어 중심 영역으로 들어온 지금, 이 질문은 이전보다 훨씬 더 불가피해졌다.
AI는 금기인가, 아니면 새로운 감각을 여는 비밀 병기인가.
그러나 이 양극단의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도와 문학이 이 변화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이다.
문학은 언제나 변화의 한복판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해왔다. 활판 인쇄가 시의 형식을 흔들었을 때도, 타자기와 컴퓨터가 문장의 속도를 바꾸었을 때도 문학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술은 변해도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문학을 지탱해온 것은 늘 쓰는 자의 의식, 쓰는 자의 세계였다.
오늘날의 AI 역시 그러한 연속선상에 있다.
AI는 문장을 제안할 수 있고, 구조를 설계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감정의 모조품조차 그럴듯하게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기능은 결국 ‘원석’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은 원석을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문학은 해석을 요구하고,
경험을 통과한 언어를 요구하며,
세계관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고유한 결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적 판단의 기준은
AI의 개입 여부가 아니라
창작자가 그 도움을 어떻게 자기의 언어로 재해석하고 재배열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는가에 달려 있다.
이 지점에서 AI는 작가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한다.
오히려 작가의 주체적 시선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그럼에도 현재 많은 문예공모 제도들은
“AI 사용 금지”라는 단세포적 금기 규정을 두고 있다.
이는 기술에 대한 불안과 통제 가능성의 상실에서 비롯된 대응이며,
문학의 본질을 겨냥한 기준이라 보기 어렵다.
문예공모는 ‘도구의 순도’를 심사해서는 안 된다. 문예공모가 읽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 문장이 누구의 세계에서 비롯되었는가이다.
문학은 기술적 순수성으로 정당화되는 영역이 아니다. 문학은 언제나 인간의 상처, 기억,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해석의 구조 위에서 성립해왔다.
다시 말해, 문학의 진정성은 기계적 생성의 여부가 아니라 작가의 해석 주권,
즉 언어를 어떤 감각과 세계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는가에 있다.
앞으로의 문예공모 제도는
‘AI를 썼는가’를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포함한 모든 도구를 통해 무엇을 만들어냈는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의 미래는 배제에 있지 않다.
오히려 기술을 넘어서는 인간적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구조화하는 주체적 문장력에 달려 있다.
AI는 금기도, 만능 도구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시대의 문학적 조건이다.
결국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한 인간의 결핍, 그리고 그 결핍이 언어를 밀어 올리는 방식이다.
작가의 주체는 도구 이전에 있다.
문학은 여전히 자기 언어의 탄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탄생은, 어떤 기술도 대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