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선주성 칼럼니스트]
10여 년 전, 한국을 찾은 일본의 고령사회 전공 교수들의 수첩에는 ‘경로당’이라는 단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을 곳곳에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한국 특유의 사랑방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여기서 얻은 힌트로 일본식 노인 커뮤니티인 ‘살롱’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역전됐다. 정작 종주국인 한국의 경로당은 “내가 갈 만큼 늙지 않았다”는 액티브 시니어들의 외면 속에 시골에만 남은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실제로 고령자 대상 설문조사를 보면 경로당을 찾지 않는 첫 번째 이유로 “나는 아직 그렇게 노인이 아니다”라는 대답이 꼽힌다. 오늘날의 시니어들에게 ‘경로(敬老)’라는 단어는 시혜적이고 수동적인 낙인으로 다가온다. 이제 경로당은 이름부터 운영 방식까지 대대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노년기 건강의 가장 큰 적은 고혈압이나 당뇨보다 무서운 ‘사회적 고립’이다. 고령화 선배 국가인 일본이 최근 의료 현장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약 처방이 아닌 ‘사회 참여’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활동이 신체 기능을 유지하고 치매 진행을 늦추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처방전’이기 때문이다.
사회 참여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동네 살롱에 모여 차 한 잔을 나누고, 어느 집 음식이 맛있는지, 어느 미용실이 머리를 잘 깎는지 정보를 교환하는 사소한 일상이 바로 그 핵심이다. 이처럼 ‘지역력(地域力)’이 강하고 이웃과의 ‘교제력’이 풍부한 이들이 더 건강하게 장수한다는 것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개인이 식단 관리를 아무리 잘해도, 고립된 환경에서는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다. 내가 사는 동네가 진정으로 ‘내 동네’가 될 때 비로소 장수의 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지자체는 이제 획일적인 경로당 운영에서 벗어나 ‘소규모 다품종’의 커뮤니티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첫째, 명칭부터 현대화해야 한다. ‘경로당’ 대신 ‘시니어 라운지’나 ‘동네 살롱’처럼 거부감 없는 명칭을 도입해 심리적 문턱을 낮춰야 한다.
둘째, 공간의 기능을 ‘도시형 동호회’로 진화시켜야 한다. 바둑과 TV 시청 중심에서 벗어나 인문학, 디지털 교육, 스포츠 댄스 등 은퇴자들의 지적·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킬 콘텐츠를 채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예방 의학의 전초기지인 이른바 ‘노치원(노인 유치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집 근처에서 일상적인 건강 체크와 맞춤형 운동 처방이 이루어질 때 국가적인 의료비 부담도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장수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어르신들이 “갈 곳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그들이 주인공으로 머물 수 있는 세련된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지자체가 서둘러야 할 복지의 정석이다. 잘 가꿔진 동네 살롱 하나가 백 명의 의사보다 더 나은 예방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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