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의 클래식 음악 칼럼] 가을의 속삭임, 그리고 복도 끝에 남겨진 피아노 선율

[손영미의 클래식 음악 칼럼] 가을의 속삭임, 그리고 복도 끝에 남겨진 피아노 선율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가을이 오는 길목, 조금씩  신선해진 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는 유난히 짙은 아련함이 배어 있다.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A Comme Amour〉를 듣고 있노라면, 투명하게 흐르는 아르페지오 위로 가만히 얹히는 선율이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어느 계절의 기억을 두드린다.

프랑스어 제목 A Comme Amour는 직역하면 ‘A는 Amour의 A’, 곧 ‘A는 사랑의 A’ 정도의 의미를 품고 있다. 우리에게는 오래도록 <가을의 속삭임>이라는 제목으로 사랑받아왔다. 원제에는 가을이라는 말이 없지만, 잔잔하면서도 쓸쓸한 그 서정이 가을의 온도와 닮아 있다.

이 아름다운 선율은 연주자인 클레이더만이 직접 작곡한 곡은 아니다. 그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시킨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폴 드 세네빌(Paul de Senneville)과 그의 음악적 동료들이 만들어낸 프렌치 팝 특유의 서정이 담긴 작품이다.

클레이더만의 음악은 정통 클래식의 무거운 형식에서 한 걸음 벗어나 클래식 피아노의 우아함과 대중음악의 친근한 선율을 이어주었다. 그래서 그의 피아노는 거대한 담론을 말하기보다, 지친 하루의 저녁과 오래된 사랑, 잊고 지냈던 한 사람과 한 계절을 조용히 불러낸다.

그리고 내게 이 곡은 언제나 한 장면으로 돌아온다.
중학교 3학년, 어느 해질녘이다.
나는 방과 후 아무도 없는 교실에 혼자 남아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면 학교는 낮과 전혀 다른 공간이 되었다. 운동장의 소음도 사라지고 긴 복도에는 늦은 햇살과 적막만 남았다.

그때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맑으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선율이었다.
나는 책을 덮고 소리가 흘러오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텅 빈 복도를 따라가다 음악실 앞에 이르면, 서울에서 교생실습을 위해 내려왔던 젊은 음악 선생님이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문을 열어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저 복도 끝에 가만히 앉아 들었다.
늦은 오후의 빛이 음악실 창문을 비스듬히 지나가고, 피아노 앞에 앉은 젊은 선생님의 등 뒤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이 어려 있었다.

그가 왜 혼자 남아 피아노를 쳤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선율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게 알 것 같았다. 사람에게는 말로는 다 꺼내놓을 수 없는 마음이 있고, 때로 음악은 그 마음 대신 울어준다는 것을.

한 사람은 건반 앞에 앉아 자신의 외로움을 연주하고 있었고, 한 소녀는 복도 끝에 앉아 그 외로움의 이유도 모른 채 오래도록 듣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가 음악을 사랑하게 된 최초의 순간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음악은 반드시 이해해야만 마음에 닿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생을 알지 못해도 한 음의 떨림만으로 그 사람의 고독을 느낄 수 있었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한 곡의 음악으로 잠시 같은 시간 속에 머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때 복도 끝에 앉아 있던 소녀도 이제 수많은 계절을 지나왔다. 사랑과 이별을 알고, 만남과 헤어짐을 겪으며 삶에도 저마다 장조와 단조가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어떤 멜로디 하나는 수십 년의 시간을 단숨에 건너뛴다.
오늘 다시 <가을의 속삭임>을 듣는다.
피아노의 첫 음이 흐르는 순간, 오래전에 사라진 학교의 복도가 다시 길어지고 늦은 햇살이 창문에 걸린다. 그리고 그 끝에는 여전히 한 사람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

그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가을을 맞고 있을까…
아마 그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가을날 자신이 연주하던 피아노 소리를 복도 끝에서 한 소녀가 숨죽여 듣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어쩌면 음악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연주한 사람에게는 지나간 한 곡이었지만
듣고 있던 누군가에게는 평생 사라지지 않는 한 계절이 되는 것을…

그래서 가을이 오면 우리는 낙엽보다 먼저 오래된 음악을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피아노 한 대가 조용히 울리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속 오래된 복도 끝에는 아직도 그날의 선율이 흐른다.

가을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어떤 가을은 음악이 되어
한 사람의 생 안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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