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 칼럼] 『님의 침묵』 100년, 다시 인제로 흐르다

[손영미 칼럼] 『님의 침묵』 100년, 다시 인제로 흐르다

– 제30회 만해대상 시상식 열려
– 평화·실천·문예로 이어진 만해 정신
– 박명성·정호승 문예대상, 박준영·안규리 실천대상, 니시모리 시오조 평화대상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만해 한용운 선사의 시집 『님의 침묵』 출간 100주년을 맞은 2026년, 그가 남긴 자유와 평화, 사랑과 실천의 정신이 가을의 인제에서 다시 깨어났다.

9월 9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군 하늘내린센터 대공연장에서 ‘제30회 만해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해 만해의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되새기고 수상자들의 삶과 업적을 축하했다.

시상식으로 향하는 길부터 특별했다. 오전 10시 서울 양재동 구룡사 주차장에는 대형 리무진 버스 3대가 줄지어 섰다. 원로배우 박정자를 비롯해 연극·뮤지컬 배우와 공연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함께 인제로 향했다.

필자에게도 이날의 여정은 남달랐다. 대학 선배이자 고향 선배인 박명성 신시컴퍼니 예술감독으로부터 오랜만에 안부와 함께 시상식 초청을 받았다. 『님의 침묵』이 세상에 나온 지 꼭 100년이 되는 해, 그 이름을 품은 상의 수상 현장을 함께한다는 뜻이 각별해 흔쾌히 길을 나섰다. 학교 선 후배 동료들이 축하를 함께했다.

42년 전 『님의 침묵』의 청년, 만해문예대상 수상자로

이날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박명성 예술감독의 만해문예대상 수상이었다. 박 감독과 만해의 인연은 무려 4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만해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창작 뮤지컬 『님의 침묵』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당시 만해의 발자취를 따라 충남 홍성의 생가와 서울 심우장 등을 찾아 공부하고, 배우들과 삭발까지 하며 작품에 몰입했다.

그 연극 청년은 이후 배우가 아닌 제작자의 길을 선택했다. 1987년 극단 신시에 입단해 기획 제작을 시작한 뒤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1세대 프로듀서로 성장했다.

『시카고』 『아이다』 『맘마 미아!』 『렌트』 등 세계적인 작품을 국내 무대에 소개하는 한편, 차범석의 『산불』을 뮤지컬 『댄싱 섀도우』로 재탄생시키고 5·18을 다룬 연극 『푸르른 날에』를 제작하는 등 창작과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프로듀서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먼 꿈을 꾸는 사람”이라는 그의 말처럼, 무대 뒤에서 일하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삶에도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 왔다. 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으로서 동료 예술인들의 복지를 위해 힘써온 행보 역시 그의 예술관이 무대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42년 전 『님의 침묵』을 부르던 한 청년이 긴 세월을 건너 ‘만해문예대상’ 수상자로 다시 만해 앞에 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날의 수상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정호승 시인부터 박준영·안규리까지

문예대상은 박명성 감독과 함께 정호승 시인이 수상했다. 정 시인은 반세기 넘게 절제된 언어로 인간의 외로움과 사랑, 희망을 노래하며 한국 서정시의 지평을 넓혀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만해실천대상에는 재심 사건을 통해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사법 정의를 실천해온 박준영 변호사와, 오랜 세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족 등 의료 사각지대의 이웃들을 돌봐온 안규리 라파엘나눔 이사장이 이름을 올렸다.

만해평화대상은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한일 화해와 동양평화를 위해 노력해온 니시모리 시오조 전 일본 고치현 의회 의장에게 돌아갔다.

문학과 예술, 법과 의료, 국가와 국경을 넘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살아온 수상자들의 궤적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났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만해의 실천정신이었다.

시가 노래가 되어 다시 울린 『님의 침묵』

시상식의 감동은 무대로 이어졌다.

배우 원기준의 사회로 진행된 축하공연은 국악과 뮤지컬이 어우러진 무대로 꾸며졌다. 동국대 박애리 교수의 오프닝에 이어 뮤지컬 배우들이 한정림 작곡의 『님의 침묵』을 독창과 합창으로 들려주었다.

100년 전 종이 위에 놓였던 만해의 언어가 오늘의 배우들의 목소리를 만나 다시 객석으로 흘러드는 순간이었다.

이어 루나와 이충주의 듀엣 무대가 펼쳐졌고, 뮤지컬 디바 최정원이 피날레를 장식하며 하늘내린센터를 가득 채운 축하의 무대를 완성했다.

『님의 침묵』 이후의 100년
만해가 말한 ‘님’은 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는다. 빼앗긴 조국일 수도, 자유일 수도, 사랑일 수도 있으며 우리가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될 인간의 존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님의 침묵』은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낡지 않는다.

서울에서 인제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원로배우와 후배 배우, 뮤지컬 제작자와 공연팀, 그리고 만해의 정신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세대도 하는 일도 달랐지만 이날만큼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 세기 전, 만해가 침묵 속에서 불러낸 ‘님’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앞으로의 100년, 우리는 어떤 평화를 선택하고 어떤 사람과 공존하며 무엇을 지켜낼 것인가.

『님의 침묵』 100년의 가을, 인제에서 울려 퍼진 시와 노래가 또 다른 100년을 향한 첫 문장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