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프로이센의 철학자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짧은 글로 답했다. 그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 대신 이해해 주는 책이 있고, 나 대신 양심을 지녀 주는 성직자가 있고, 나 대신 식단을 정해 주는 의사가 있다면 굳이 애쓸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 편안함을 ‘미성년 상태’라 불렀다. 나이를 먹고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미루는 상태다. 24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목록에 하나를 더 보태도 어색하지 않다. 나 대신 판단해 주는 AI.
요즘 우리의 하루가 그렇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보내야 할 답장의 첫 줄이 막힐 때도 검색창보다 AI 창을 먼저 연다. AI는 빠르고 친절하다. 어색한 표현을 고쳐 주고, 생각지 못한 선택지까지 펼쳐 놓는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 편리함 끝에서 가끔 멈칫한다. 나는 지금 도움을 받고 있는 걸까, 판단을 조금씩 넘겨주고 있는 걸까?
이 글에서 말하는 주권은 정치 교과서 속 용어가 아니다. 무엇을 묻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판단을 내려, 그 결과를 누가 짊어지느냐에 관한 삶의 권리다. AI 시대에 정말 경계할 것은 기계가 사람보다 똑똑해지는 일만이 아니다. 판단을 쉽게 빌리고 결정까지 맡기다 보면 책임의 자리가 흐릿해진다. 그쪽이 더 조용하고, 그래서 더 위험하다.
숫자도 같은 쪽을 가리킨다. 퓨리서치센터가 올해 2월 미국 성인 5,119명을 조사해 6월에 내놓은 결과를 보면, AI 챗봇을 쓴다는 응답은 2024년 33%에서 49%로 늘었다. 성인 넷 중 한 명꼴로 매일 쓴다. 정보 검색과 업무가 가장 흔했지만, 다섯 명 중 한 명은 의학적 조언을, 열 명 중 한 명은 정서적 위로를 챗봇에서 구했다.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의 63%는 AI가 너무 빠르게 발전한다고 답했다. 쓰면서도 불안한 것이다. 기술은 이미 연구실을 나와 우리의 진료실과 외로운 밤 곁에 앉아 있다.
제도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나라는 올해 1월 22일부터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을 시행하고 있다. 사람의 생명과 기본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고영향 AI라면 사람이 관리·감독할 장치를 갖추도록 했다. OECD AI 원칙은 2019년부터 인간의 주체성과 감독을 강조해 왔고, 유럽연합 AI법도 제14조에 고위험 AI에 대한 인간의 감독을 못 박았다. 표현은 달라도 뜻은 하나다. AI를 쓰되, 사람이 그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
AI는 선택지를 넓혀 줄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주인은 끝내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반론이 있다. 사람의 판단은 늘 옳은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편견에 기울고, 감정에 흔들리고, 고집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그럴 때 AI는 놓친 자료를 보여 주고, 다른 관점을 내밀고, 달아오른 머리를 식혀 준다. 그 점에서 AI는 꽤 훌륭한 조언자다. 칸트가 탓한 것도 책이나 의사가 아니었다. 그것에 기대어 놓고 끝내 일어서지 않는 사람의 게으름이었다. 조언자와 결정권자는 다르다. 내 삶의 마지막 서명란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삶의 무거운 결정은 비교표로 끝나지 않는다. 직장을 옮길지, 연로한 부모를 어떻게 모실지, 아이에게 무엇을 물려줄지? 이런 물음에는 데이터보다 오래된 것이 스며 있다. 살아온 시간, 지켜야 할 관계, 끝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새벽 병원 복도에서 노모의 수술 여부를 정해야 하는 자식을 떠올려 보자. AI는 생존율과 회복 기간을 몇 초 만에 정리해 줄 것이다. 그러나 동의서 앞에서 손이 떨리는 까닭은 숫자에 있지 않다. 그 떨림만큼은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주권을 잃는 과정은 대개 극적이지 않다. 누가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니다.
편해서 하나씩 맡기다 보면 어느새 손에 남은 게 없다. 처음에는 추천 목록을 따르고, 다음에는 요약된 뉴스만 읽는다. 그러다 AI가 골라 준 문장으로 사과하고, AI가 짜 준 논리로 사람을 설득한다. 내 말투보다 AI의 말투가 더 익숙해지는 날이 그렇게 온다. 그때쯤이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잘 모른다. 사라진 것은 스스로 고민하던 몇 초, 그 짧은 망설임 속에서 자라던 판단의 근육이다.
편리함은 권리를 빌려 쓰게 하고, 습관은 그 권리를 아예 넘겨주게 한다.
나라고 이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강의 자료를 만들고 원고를 다듬을 때 AI의 도움을 자주 받는다. AI가 손본 문장이 내 초고보다 매끄러우면 그대로 옮겨 붙이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묻는다. 이 문장이 정말 내 생각인가, 그럴듯해서 내 것인 척하고 싶은 것인가? 이 나이에 새 도구를 익히며 배운 것이 있다면, 좋은 도구를 외면하는 것도 지혜가 못 되고 좋은 도구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도 지혜가 못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AI 교육은 사용법에서 멈추면 안 된다. 프롬프트를 잘 쓰는 법도 필요하다. 다만 그보다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질문의 주인이 되는 법이다. 묻기 전에 왜 묻는지 알고, 답을 받은 뒤엔 그것이 누구의 관점인지 살피고, 결정하기 전엔 그 결과가 누구에게 닿는지 헤아리는 일이다. 질문, 해석, 판단, 결정, 책임. 다섯 가운데 어느 하나도 통째로 내주어서는 안 된다.
기술은 방향을 제안할 수 있어도, 삶의 무게를 대신 져 주지는 못한다.
오늘 해 볼 일은 하나다. AI가 답을 내놓으면 바로 따르기 전에 세 가지만 물어보자.
첫째, 이 답은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가?
둘째, 이 결정으로 누가 영향을 받는가?
셋째, 틀렸을 때 나는 무엇을 책임질 것인가?
이 물음을 통과하지 못한 답은 아무리 세련되어도 아직 내 결정이 아니다. 처음엔 번거롭지만 그 번거로움이 판단을 내 손으로 되돌려 놓는다.
칸트는 그 글에서 라틴어 한 구절을 계몽의 표어로 내걸었다.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AI 시대에 이 말은 이렇게 읽힌다. 기계를 곁에 두되, 핸들은 내 손으로 쥐라.
주권이란 결국, 내 삶의 마지막 결정을 내 손으로 붙드는 작은 용기다.
AI가 답을 건네는 시대일수록 사람은 더 천천히 물어야 한다. 오늘 AI에게 맡긴 그 결정은, 결국 누구의 삶으로 돌아오는가?
참고자료
1. Immanuel Kant,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Berlinische Monatsschrift, 1784년 12월.
2. Pew Research Center, ‘Americans and AI 2026: Chatbots, Smart Devices and Views on Impact’, 2026년 6월 17일(조사 기간 2026년 2월 17~23일).
3. 국가법령정보센터,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법률 제20676호) 제34조,
4. OECD, ‘Recommendation of the Council on Artificial Intelligence(OECD AI Principles)’, 2019년 채택·2024년 개정.
▲삽화=필자 기획·OpenAI ChatGPT 생성한 이미지 – AI의 조언, 인간의 판단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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