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용운과 이당 김은호 [강남 소비자저널= 하정언 칼럼니스트] 이당 김은호는 3.1 운동 33인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마지막 어진 화사로서 고종과 함께 한 시간이 가장 많았던 이당은 이미 어진화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고문과 취조가 더욱 심했다. ▲사진=판결문 ⓒ강남 소비자저널 1919년…
![[하정언 칼럼] 독립운동가 이당 김은호의 삶과 예술_3 [하정언 칼럼] 독립운동가 이당 김은호의 삶과 예술_3](https://i0.wp.com/blog.kakaocdn.net/dn/8MmAs/btsLPA9tAHV/If72Wzok8qSO3XaX6g1VG0/img.png?fit=395%2C235&ss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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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과 이당 김은호 [강남 소비자저널= 하정언 칼럼니스트] 이당 김은호는 3.1 운동 33인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마지막 어진 화사로서 고종과 함께 한 시간이 가장 많았던 이당은 이미 어진화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고문과 취조가 더욱 심했다. ▲사진=판결문 ⓒ강남 소비자저널 1919년…
– 이당 김은호의 고향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 [강남 소비자저널=하정언 칼럼니스트] 1892년 인천 문학산 밑 향교리 현에서 부농인 상산 김씨 2대 독자로 출생하였다. 예로부터 백학이 많이 날아오는 문학산이 선산이었으며 . 향교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훈장을 하시며 학문과 예절을 배운다. 조부는 김용의, 부친은 김기일, 모친은 의성 김씨이다. 어린 시절 글방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하였는데 이때부터 신당 (神堂)의 탱화를 모사하는 등 그림에 상당한 재주를 보였지만 글을 중시하는 집안에서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자연스레 신학문의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06년 개화기에 들면서 인천에 새로 생긴 인천 관립 일어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그 후 사립 인천 인흥 학교 측량과에 입학을 한다. 당시 모두 인천에 새로 생긴 학교였다. 2년의 단기 과정을 마치고 이듬해에 부친이 사망을 하여 갑자기 집안이 몰락하는 일들이 기게 된다. 이로 인해 어린 이당이 가족을 책임져 야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 떄 부터 시작된 배고픔과 어려운 시절은 서울에 상경하여 궁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된다. ▲사진= 이당 17세 인흥학교 측량과 졸업증서 ⓒ강남 소비자저널 ▲사진= 당시 학우들과…
▲사진=이당 김은호 작 “춘항” ⓒ강남구 소비자저널 [강남구 소비자저널=하정언 칼럼니스트] 이당 김은호의 남원 춘향이의 영정이 떼어진다는 사실에 다시 또 한번 논개 영정의 이야기와 그 외에 있었던 친일 화가의 오명으로 가슴 아팠던 일들을 떠올리며 이제는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