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차조 칼럼] 출판 책 중심 테마 100선_제35 테마, 편리함의 역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문이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한다

[정차조 칼럼] 출판 책 중심 테마 100선_제35 테마, 편리함의 역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문이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한다

▲사진=정차조 (주)KN541회장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차조 칼럼니스트]

어느 도시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문이 등장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민문화센터에 설치된 최첨단 인공지능 출입문이었다.

개발회사는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이 문에는 생체인식과 인공지능 기술이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감탄했다.

드디어 문손잡이마저 실직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할머니가 문화센터를 방문했다.

문 앞에 서자 화면이 켜졌다.

‘회원가입을 진행해 주세요.’

할머니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이번에는 비밀번호를 만들라고 했다.

비밀번호를 만들었더니 본인인증을 요구했다.

인증을 마쳤더니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라고 했다.

설치를 마치자 이번에는 얼굴을 인식시키라고 했다.

할머니가 카메라 앞에 섰다.

‘인식에 실패했습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다시 시도해 주세요.’

오른쪽으로 돌렸다.

또 실패했다.

할머니가 마침내 소리쳤다.

“아니, 문 하나 열려고 이 나이에 얼굴까지 새로 만들어야 하나?”

주변 사람들이 웃었다.

그때 개발자가 다가왔다.

“어르신, 이 문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대답했다.

“그렇겠지. 나 하나 못 들어가게 하는 데 이렇게 많은 기술이 필요할 줄 누가 알았겠나.”

참으로 놀라운 문명이었다.

문은 똑똑해졌는데 사람은 문 앞에서 길을 잃었다.

기술은 발전했는데 출입은 더 어려워졌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할머니가 디지털 기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도 하고, 물건도 주문하고, 은행 업무도 처리했다.

다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드나들라고 만든 문인데, 왜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많은 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할머니는 기술의 원리를 몰랐지만 기술의 목적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여기서 편리함의 역설이 시작된다.

기술이 똑똑해진다는 것과 인간의 삶이 편리해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술의 발전을 기능의 증가로 판단해 왔다.

더 많은 메뉴.

더 많은 인증.

더 정교한 분석.

더 복잡한 자동화.

기술자는 기능 하나를 추가했다고 기뻐한다.

사용자는 눌러야 할 버튼이 하나 늘었다고 한숨을 쉰다.

개발자는 말한다.

“이제 열 가지 기능을 한 번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묻는다.

“그런데 제가 하려던 한 가지 일은 어디에서 하면 됩니까?”

누가 옳은가.

둘 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옳을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존재하는 목적을 생각하면 답은 분명해진다.

기술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가?

정수기를 사용하려면 설명서를 읽어야 한다.

상품 하나를 구매하려면 복잡한 가입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간단한 서비스를 이용하려는데 새로운 비밀번호를 만들라고 한다.

고객은 물건 하나 사러 왔다가 회원가입, 본인인증, 앱 설치라는 삼종 경기를 치른다.

이 정도면 구매 영수증보다 완주 메달을 먼저 줘야 할 판이다.

참으로 교육열이 높은 시장이다.

문제는 소비자가 디지털 전문가가 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사람은 물을 마시고 싶었고, 상품을 구매하고 싶었으며,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구별해야 한다.

작동하는 시스템과 사용하기 편리한 시스템은 다르다.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더라도 이용자가 그 기능을 이해하고 사용하기 어렵다면 편리함이라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복잡함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기업이 해결하지 않은 복잡함은 고객의 생활 속으로 이사한다.

가입 절차가 복잡하면 고객이 시간을 낸다.

안내가 부족하면 고객이 공부한다.

오류가 발생하면 고객이 해결 방법을 찾는다.

이해하지 못하면 고객센터에 전화하고, 기다리고, 다시 설명한다.

기업이 끝내지 못한 숙제가 고객의 일상으로 배달되는 것이다.

참으로 경제적인 경영 방식이다.

회사는 개발비를 아꼈다고 생각하는데, 고객은 자신의 시간과 인내심으로 그 비용을 지불한다.

그러나 이 비용에는 영수증이 없다.

고객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회계장부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용하다 포기한 사람, 구매 직전에 돌아선 사람, 다시는 방문하지 않은 사람이 그 비용을 증명한다.

기업이 절약한 비용이 고객의 이탈과 반복적인 문의, 신뢰의 손실로 돌아올 수도 있다.

여기서 놀라운 역설이 생긴다.

복잡한 시스템을 만든 기업은 고객이 더 똑똑해지기를 바란다.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기업은 고객이 새로운 기술을 공부하지 않아도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진정한 혁신은 인간에게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이 불필요한 수고를 덜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모든 절차를 없애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금융거래에는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개인정보는 보호되어야 한다.

중요한 계약에서는 충분한 설명과 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안전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도 있다.

다만 필요한 절차와 불필요한 복잡함은 구별해야 한다.

보안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누구에게나 과도한 인증을 요구해서도 안 되고, 편리함을 내세워 필요한 동의를 생략해서도 안 된다.

좋은 기술은 안전과 편리함을 무조건 서로 희생시키지 않는다.

둘을 함께 실현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찾는다.

이제 KN541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지향하는 소비생산 구조는 소비자의 실제 필요가 생산을 호출하고, 그 과정의 참여와 기여가 인정되며, 생산과 소비가 새로운 관계로 연결되는 시장이다.

철학은 거대하다.

그런데 그 철학이 아무리 위대해도 소비자가 참여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처음의 할머니가 KN541을 방문했다고 상상해 보자.

할머니는 지구사랑이라는 말에 관심이 생겼다.

필요한 상품을 찾아보고, 좋은 상품이라면 사전예약구매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자신의 가치가게에서 이웃에게 상품을 소개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가입부터 어렵다.

사전예약 상품을 찾았지만 어떤 조건에서 생산이 시작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GWCP라는 참여가치가 표시되었는데 왜 지급되었고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없다.

할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지구를 사랑하러 왔는데 컴퓨터부터 사랑해야겠구먼.”

웃음이 나오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우리는 소비자를 새로운 시장의 주인공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주인공이 무대에 올라가는 길부터 찾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KN541이 지향해야 할 편리함은 복잡한 경제 구조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 구조를 이용자가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필요한 상품을 쉽게 발견하고, 구매와 사전예약 조건을 명확하게 이해하며, 자신의 참여와 정산 결과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가치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성과가 발생했는지 알기 쉽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GWCP와 GWC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긴 강의가 필요하다면 설명 방식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정확한 제도 설명은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의 복잡함을 이용자의 혼란으로 떠넘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한 화면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다.

소비주권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드는 문제다.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해도 무엇을 선택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 권리는 충분히 작동하기 어렵다.

참여할 기회가 주어져도 참여 방법이 지나치게 복잡하다면 그 기회는 일부 사람에게만 열릴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시장은 이용자의 이해를 시험하지 않는다.

이용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이용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작은 글씨를 읽기 어렵고, 누군가는 화면을 터치하는 동작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 필요한 도움이 달라진다.

문명의 수준은 가장 빠른 사람이 얼마나 멀리 갔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에게도 길이 열려 있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 문명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너무 어려운 입학시험을 치르게 해서는 안 된다.

소비자의 능력을 바꾸기 전에 시장의 문턱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끝없는 맞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본적인 이용 절차는 단순하게 만들고, 필요한 경우 적절한 안내와 접근 가능한 이용 방법을 마련하면 된다.

여기에는 경제적 의미도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참여할 수 있다면 시장의 가능성도 넓어진다.

그 경험이 만족과 신뢰로 이어질 때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반대로 기술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람이 떠난다면, 기업은 기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능을 사용하는 길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해서 고객을 잃는 셈이다.

그런데 편리함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다.

기술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면 인간은 반드시 더 자유로워질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추천 알고리즘이 필요한 상품을 찾아 주는 것은 편리하다.

그러나 왜 그 상품을 추천받았는지 알 수 없고 다른 선택지를 찾기 어렵다면 편리함은 새로운 의존이 될 수 있다.

자동결제는 수고를 줄여 준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에 동의했는지 모르고 해지하는 길도 찾기 어렵다면 그 편리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것은 문손잡이를 없애 주고 문을 여는 권한까지 가져가 버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편리해지는 것과 인간의 판단을 빼앗기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좋은 기술은 선택을 대신 독점하지 않는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불필요한 수고를 줄여 사람이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돕는다.

인간의 손을 자유롭게 하되 인간의 결정권까지 가져가서는 안 된다.

이것이 기술 발전과 소비주권이 만나야 할 자리다.

그리고 그 철학은 지구사랑으로도 이어진다.

소비자가 상품의 필요성과 정보를 쉽게 이해하고, 적절한 수량을 선택하며, 불필요한 구매를 피하도록 돕는 것 역시 편리함의 중요한 방향이다.

많이 사도록 만드는 편리함과 필요한 것을 제대로 선택하도록 돕는 편리함은 다르다.

구매 버튼을 빨리 누르게 하는 기술보다 후회할 구매를 줄여 주는 설계가 더 가치 있을 때도 있다.

시장 구조를 바꾸어 지구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소비자가 생각 없이 더 많이 사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다.

필요한 것을 더 잘 선택하고, 그 선택이 더 적절한 생산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일이다.

이제 처음의 똑똑한 문으로 돌아가 보자.

개발회사는 할머니의 불편을 계기로 출입 절차를 다시 살펴보았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해야 할 공간에는 불필요한 인증을 없앴다.

보안이 필요한 공간에는 목적에 맞는 확인 절차를 별도로 마련하고, 처음 방문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를 개선했다.

며칠 뒤 할머니가 다시 문화센터를 찾았다.

문 앞에 서자 출입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개발자가 다가와 물었다.

“어르신, 이제 문이 얼마나 똑똑해졌는지 아시겠지요?”

할머니가 웃었다.

“그건 모르겠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시험을 안 봐도 되더구먼.”

개발자가 다시 물었다.

“어떤 기능이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할머니는 문을 가리켰다.

“문이 열리는 기능이지. 문에 그보다 중요한 기능이 또 있나?”

사람들이 웃었다.

개발자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동안 자신은 문을 얼마나 똑똑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하는 데 열중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기술의 수준이 아니라 그 기술 덕분에 무엇이 가능해졌는가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할머니가 새로운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술이 할머니의 불필요한 수고를 덜어 준 것이었다.

그제야 문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가까워졌다.

이것이 편리함의 역설이다.

기술의 기능이 늘어났다고 반드시 문명이 발전한 것은 아니다.

그 기술로 인간이 감당해야 할 불필요한 수고가 줄어들고, 더 넓은 자유와 선택의 기회를 얻을 때 비로소 발전의 의미가 깊어진다.

우리는 기술을 얼마나 똑똑하게 만들었는지 자랑해 왔다.

이제는 그 기술이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했는지도 물어야 한다.

진정한 혁신은 사람이 기술을 위해 더 많이 공부하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복잡한 기술이 인간의 불필요한 수고를 대신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문명의 주인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다.

복잡함은 기술이 해결해야 할 숙제이지, 고객에게 떠넘길 시험지가 아니다.

문은 사람을 시험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우리가 열어야 할 미래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새로운 문명에 들어가기 위해 끝없이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넓은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기술이 똑똑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 기술 덕분에 사람이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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