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용인에서 머물렀던 사료 발견 쾌거

– 훈민정음 창제 발표전 세종대왕이 왕비와 함께 용인에서 풍악을 울리게 했다 –

세종대왕이 용인에서 머물렀던 사료 발견 쾌거
▲사진=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한 조선왕조실록 중 관련 기사의 원본 ⓒ강남구 소비자저널

[강남구 소비자저널=김은정 대표기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해에 용인현(현재의 용인시)에 머물렀다는 사료를 발견했다고 용인시 의회 박남숙 의원실이 발표했다.

이번에 발견한 용인시 관련 기록은 세종실록 99권에 실린 세종 25(1443)년 음력 3월 1일 기사로 원문에는 ‘丙辰朔 上與王妃幸忠淸道 溫陽郡溫井王世子從之大君諸君及議政府六曹臺諫各一員扈駕以廣平大君璵壽春君玹守宮自後大君諸君輪次往來是日次龍仁縣刀川邊伶人十五人奏樂自昏至二鼓是行道經守令皆於境上迎謁凡民觀瞻者塡溢街路’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임금이 왕비와 더불어 충청도 온양군 온천에 거동하매, 왕세자가 따르고 대군 및 여러 군과 의정부·육조·대간의 각 한 사람씩을 호가하게 하고, 광평 대군 이여와 수춘군 이현으로써 궁을 지키게 한 후, 대군과 여러 군을 윤번으로 왕래하게 하였다. 이날에 용인현 도천의 냇가에 머무르는데, 악공 15인에게 초저녁 때부터 이고(二鼓)에 이르도록 풍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이번 거동에 길 처의 수령들은 모두 고을 경계에서 영알 하였으며, 구경하는 백성들이 거리에 넘치었다.’라는 내용이다.

‘세종대왕이 병 치료를 위해 온양온천에 거동하실 때 용인현을 지나치신 것이 아니라 임금이 왕비와 더불어 왕세자가 따르고 대군 및 여러 군과 의정부·육조·대간의 각 한 사람씩을 임금의 거가를 호위하며 좇아오게 하고, 용인현 도천의 냇가에 머무르면서 악공 15인으로 하여금 초저녁 때부터 밤 10시 야심한 시간에 이르도록 풍악을 연주하게 할 때 용인 근처의 수령들이 모두 고을 경계에서 마중을 나가서 찾아뵈었으며, 구경하는 백성들이 거리에 넘치었다.’라는 이 세종실록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로 인하여 누적된 피로와 환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용인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특별한 기록”이라고 강조한 박재성 이사장은 기록에 보이는 용인현 도천(刀川)은 현재 수인 분당선과 에버라인 전철의 환승역인 기흥역 옆을 흐르는 신갈천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현재 지역주민이나 용인시에서는 옛 지명이 갈천(葛川)으로 알려져 왔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번 세종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갈천은 칡이나 혹은 덩굴, 갈포를 뜻하는 한자 葛(칡 갈)이 아닌 도천(刀川)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刀(칼 도)의 훈인 ‘칼’의 고음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갈’이라고 기록된 사실로 미루어 ‘갈천’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또 다른 수확이라고 강조하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용인시와 협의해서 공식 토론회를 통해서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는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법인으로 중앙회가 용인시에 있다. 용인시의회 문화복지위원으로 용인시 최다선 의원인 박남숙 의원을 통해 발표한 이번 사료에 대해서 발견자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박재성 이사장은 한문 교육학박사로 한국고미술협회 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세종어제훈민정음 총록」과 「소설로 만나는 세종실록 속 훈민정음」의 저서가 있다. ‘세종실록을 통해서 세종대왕이 용인에 거동하시어 하룻밤을 거하시면서 풍악을 울리게 할 때 구경하는 백성들이 거리에 넘치었다는 기록은 앞으로 용인시의 문화정책에 크든 작든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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