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오늘은 오랜만에 대학로로 마실
나와 평소 아끼는 작가 ‘안톤 체홉’의 작품을,
친애하는 배우의 초대로 관람했다.
늘 민낯으로 삶을 묻는 공연장 무대는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
안톤 체홉의 『바냐 삼촌』,
‘안톤 체홉의 인간학
침묵으로 무너지는 삶, 그럼에도 살아간다.’
•손영미|극작가·시인
안톤 체홉, 삶의 ‘사소함’에 귀 기울인 작가
러시아의 황혼기, 의사이자 극작가 ‘안톤 체홉'(1860~1904)은 인간의 병든 육체뿐 아니라, 병들어가는 영혼까지 진찰한 작가였다. 단편소설과 희곡을 통해 그는 거창한 사건보다 일상에서 배어나는 무기력, 사랑의 결핍, 존재의 허무를 들여다보았다.
체홉은 도덕적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침묵과 여백으로 인물을 감싸며 독자와 관객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의 희곡들은 전통적인 희곡 구조를 거부한다. 기승전결도, 명확한 클라이맥스도 없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무대 위에서, 인물들의 삶 전체가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가만히 보여준다.
『갈매기』, 『세 자매』, 『벚꽃동산』, 그리고 『바냐 삼촌』은 그 체홉식 고요한 파열의 정점을 이룬다.
침묵으로 무너지는 삶의 무대 『바냐 삼촌』의 세계는 러시아의 한적한 시골 농장이다. 겉보기엔 평온하지만 그 안에서는 희망의 감정의 침식이 무대 전체를 감싼다. 『바냐 삼촌』은 그런 연극이다.
사건이 아니라 정적 대사가 아니라 말 사이의 침묵, 변화보다는 무위(無爲)의 반복 속에서 인물들은 서서히 무너진다.
또한 체홉은 단언하지 않는다. 그의 연극은 교훈또한 없다. 대신 조용히 보여준다.
지속되는 일상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바꿀 수 없는 현실 그 속에서 인간은 어떤 자세로 삶을 감내해야 하는가 묻는다.
정적 속에 새겨진 감정의 파문
『바냐 삼촌』은 전체 4막의 구조 속에서 한 줄기 긴 한숨처럼 흘러간다.
1막, 바냐와 소냐의 피로한 일상 속으로 관객은 초대된다. 오랜 세월을 헌신했던 교수의 방문 그리고 그의 아내 옐레나의 등장은 일상의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러나 파국은 오지 않는다. 감정의 지층이 서서히 얇아질 뿐이다.
2막, 아스트로프와 옐레나의 미묘한 대화 바냐의 무력한 분노 소냐의 억눌린 짝사랑이 교차하며 침묵의 밀도는 짙어진다.
3막, 바냐는 교수에게 총을 겨누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주저앉는다. 감정이 격화되지 못한 채 무너지는 그 장면은 체홉적 인간 이해의 진수다.
4막, 교수는 떠나고 바냐와 소냐는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 소냐의 마지막 대사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쉬지 않고 일하고…”
이 고요한 독백은 체홉이 인간에게 남긴 가장 슬프고도 따뜻한 기도문이다.
인물은 고요히 말하고, 침묵은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체홉의 인물들은 격정적인 대사를 뱉지 않는다. 그들은 말 대신 눈빛으로 정지된 걸음으로, 숨결의 무게로 감정을 전한다.
바냐, 헌신했던 이상이 배신당했음을 알고도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절망에 무너진다.
소냐, 사랑받지 못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다.
옐레나, 삶의 무료함을 안고 아스트로프를 바라보지만 끝내 행동하지 않는다.
아스트로프, 몰락해가는 세상을 안타까워하며 숲을 지키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방치한다.
이들은 모두 실패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체홉은 그들을 비웃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침묵 속에 놓는다. 침묵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진실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체홉은 끝내 그렇게 인간의 고요한 존엄을 말한다.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견딜 것인가”를 묻는다.
그의 희곡은 비극이 아니라, 비극을 견디는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바냐 삼촌』은 격렬하지 않지만 깊고 고요하지만 뼈아프다. 변화하지 못한 사람들 이루지 못한 사랑 사라져가는 꿈,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간다.
지금 이 시대 우리는 체홉에게 묻는다.
“이 변화 없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숨을 쉬며 살아가야 합니까?”
그는 말할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