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립소를 떠난 오디세우스
– 사랑의 애도가 오래 걸리는 이유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사랑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질문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하던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이 질문과 가장 아름답게 겹쳐지는 인물이 칼립소다.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떠돌다 오기기아섬에 닿아 칼립소와 7년을 보낸다. 여신 칼립소는 그를 사랑했고, 그가 머물기를 원했다. 심지어 인간이 끝내 이길 수 없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까지 그의 앞에 놓는다.
아름다운 여신, 풍요로운 섬, 늙지 않는 삶.
사랑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조건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바닷가에 앉아 운다.
그의 눈이 향하는 곳은 칼립소가 아니라 바다 너머의 이타케다.
사랑하는데, 왜 떠나는가
이 장면은 사랑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사랑한다면 곁에 있어야 하는가.
떠난다면 사랑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파고드는 사랑의 역설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상대만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때로는 상대를 통해 일어난 자기 안의 욕망과 사랑의 상태에 더 깊이 사로잡힌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어쩌면 “당신으로 인해 사랑하고 있는 이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고백도 숨어 있다.
그래서 사랑이 위험해지는 순간이 있다.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사랑의 배역을 맡은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다. 상대는 한 인간에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는 존재, 나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 나를 사랑받는 사람으로 증명해주는 존재로 바뀐다.
그 순간 사랑의 주객은 뒤집힌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통해 완성되는 나의 욕망을 사랑하게 된다. 칼립소의 사랑에도 이러한 역설이 숨어 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사랑하기에 붙잡는다. 그러나 그가 진정 원하는 곳은 이타케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곁에 두고 싶은 욕망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삶으로 돌아가도록 놓아주는 일 사이에서, 사랑은 가장 어려운 시험을 받는다.
사랑의 깊이는 얼마나 오래 붙잡았는가보다, 때로는 상대가 가야 할 곳을 인정할 수 있는가에서 드러난다.
칼립소는 부족했고 페넬로페는 완벽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이타케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의 마음을 단순히 ‘칼립소보다 페넬로페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읽으면 『오디세이아』의 깊은 인간적 층위를 놓치게 된다.
이타케는 한 여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페넬로페가 있고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으며 왕으로서의 자리와 늙은 아버지, 자신의 이름과 기억이 있다.
칼립소가 그에게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사랑이었다면, 이타케는 끝내 돌아가야 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사랑의 배신이라기보다 자기 존재로의 귀환이라고 읽고 싶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그 사랑 안에서 내가 내가 아니게 된다면 인간은 언젠가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 사랑만으로 인생 전체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잃고 우는 것일까
이별 뒤의 고독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어제까지 한 사람에게 보내던 메시지가 사라지고, 함께 걷던 시간이 비고, 하루의 어느 시간마다 당연히 존재하던 목소리가 사라진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없어서” 아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조금 다른 진실을 만난다.
그 사람과 함께 사라진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다.
기다리던 나, 설레던 나, 누군가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나, 내일을 둘이서 상상하던 나도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이별은 사람 한 명의 부재보다 크다. 사랑으로 가능했던 하나의 미래가 사라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사람을 잃고 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라면 살아볼 수도 있었던 또 하나의 나의 생(生)을 잃고 운다.
그것이 사랑의 애도가 오래 걸리는 이유다.
사랑은 깨닫기 전에 오고, 깨달을 즈음 떠난다
사랑은 이상한 물과 같다.
언제 젖었는지 모르는데 어느 순간 온몸이 젖어 있다. 한 사람의 말투가 기다려지고, 그의 하루가 궁금해지고, 평범했던 길과 식당과 음악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며든다.
그런데 사랑이 빠져나갈 때는 반대다.
우리는 그 물이 조금씩 마르는 것을 너무나 선명하게 본다.
전화가 짧아지고, 침묵이 길어지고, 궁금함이 줄어들고, 마침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간다.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사랑이 사라질 때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차린다.
어쩌면 사랑의 비극은 오는 순간보다 떠나는 순간에 더 명료해진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랑은 실패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뗏목을 만든다.
영원한 삶을 피하고, 늙어가는 삶이 있는 바다로 나아간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만남이 한곳에 멈춰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사람을 얻는 것으로 끝나고, 어떤 사랑은 사람을 놓아주는 것으로 완성된다.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도, 그 사랑을 거치며 깊어진 나의 삶은 남는다.
한때 한계절 같은 바다를 보고 같은 파도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성숙은 “당신은 내 것이어야 한다”에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로 건너가는 항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항해가 남는다.
사랑했던 이를 내 욕망의 섬에 가두지 않고, 그에게 맡겨두었던 나의 삶을 거두어 다시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일.
마침내 나라는 이타케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긴 오디세이 끝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마지막 목적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