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의 문학산책]문학의 경계를 지운 시인, 앤 카슨2026 노벨문학상, 고전의 언어로 현대문학의 미래를 쓰다

[손영미의 문학산책]문학의 경계를 지운 시인, 앤 카슨2026 노벨문학상, 고전의 언어로 현대문학의 미래를 쓰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시는 어디에서 끝나고 소설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번역은 원작의 그림자인가, 또 하나의 창작인가.

2026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는 캐나다의 시인이자 고전학자, 번역가인 앤 카슨(Anne Carson, 1950~)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고전적 전통과 자유롭게 대화하며 현대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개척한 그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높이 평가했다.

카슨의 문학은 시와 소설, 비평과 번역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그러나 그의 성취는 단순한 장르의 해체에 그치지 않는다. 고대의 언어로 현대인의 사랑과 욕망, 상실과 기억을 탐구하며 완전히 새로운 문학적 형식을 창조했다는 데 있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미학을 나는 ‘간극의 시학’이라 부르고 싶다.

사랑과 결핍, 기억과 망각, 원문과 번역 사이의 거리. 카슨은 그 간극을 억지로 메우기보다, 그 틈에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대표작 『빨강의 자서전』(1998)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괴물 게리온을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재탄생시킨 운문소설이다. 영웅 헤라클레스의 손에 죽임당하던 비극적 존재가, 사랑하고 상처받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로 변모한다. 카슨은 신화의 중심과 주변을 뒤집으며 타자성(他者性)의 문제를 서정적 서사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에로스, 달콤쌉싸름한』(1986)에서는 사랑을 결핍과 거리의 철학으로 탐구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욕망하며, 사랑하는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기에 끊임없이 갈망한다. 카슨에게 거리는 사랑의 장애물이 아니라, 도리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러한 사유는 『남편의 아름다움』(2001)에서 사랑과 배신, 아름다움과 진실의 역설로 이어진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아름다웠던 기억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그는 인간 감정의 모순을 섣불리 해명하려 들지 않는다.

상실의 미학은 『녹스』(2010)에서 절정에 이른다. 세상을 떠난 오빠를 기리며 사진과 편지, 기록과 번역을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책 속에 담아냈다. 이러한 파편적 형식은 결코 완전하게 복원할 수 없는 기억의 본질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기억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는 일인가, 아니면 끝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일인가. 카슨은 여백과 침묵마저 문학의 정수로 받아들인다.

사포의 시를 번역한 『겨울이 아니라면』(2002)에서도 원전의 훼손과 결손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그에게 번역이란 사라진 언어를 완벽하게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 사이의 거리를 사유하는 또 하나의 창조적 행위다.

이처럼 카슨의 문학에서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독자적인 언어가 된다.

이러한 시학은 AI 시대의 문학적 창조성에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인공지능이 문체를 모방하고 장르를 손쉽게 결합하는 시대, 문학의 독창성은 단순히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능력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그리고 왜 그 깊은 경험을 특정한 형식으로 표현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미학적 결단이 비로소 중요해진다.

앤 카슨의 문학에서 간극은 결핍이 아니라 창조의 정직한 출발점이다. 고대와 현대의 경계에서 신화는 다시 숨을 쉬고, 사랑과 상실의 틈새에서 새로운 서정이 태어난다.

문학은 모든 공백을 채워 넣는 기술이 아니다. 때로는 끝내 채울 수 없는 간극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다.

시란 어쩌면 말할 수 있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언어를 건져 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앤 카슨의 시학은 바로 그 경계 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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