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난해, 40년 지기 벗을 보냈다. 추도사를 부탁받았다. 마음은 간절한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래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결국 AI에게 도움을 청했다. ’40년 우정을 함께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추도사를 써줘.’ 몇 초 만에 문장이 완성되었다. 격식도 갖추었고, 애도의 표현도 정중했다. 누가 읽어도 흠잡을 데 없는 글이었다. 그런데 그걸 찬찬히 읽어보는 순간, 나는 노트북을 접었다. 거기에 그 친구가 없었다. 신입사원 시절 퇴근 후 치맥 한 잔 하며 서로의 꿈을 떠들던 밤도, 내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말없이 봉투 하나 건네던 손도,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으며 지었던 그 억지웃음도 없었다. AI는 추도를 쓸 수 있었지만, 내 추도를 쓸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AI는 한글을 이해하는 것일까, 흉내만 내는 것일까? 이 질문 앞에서 세종대왕을 떠올리게 된다. 훈민정음 서문의 그 문장.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세종은 더 많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한글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를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언어는 태생부터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제도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또 하나의 존재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AI는 놀라울 만큼 언어를 잘 다룬다.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하고, 단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지 패턴을 찾아내고, 문맥에 맞는 문장을 조합해낸다.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AI와 대화하며 문법을 교정받기도 하고, 글쓰기가 서툰 사람이 AI의 도움으로 자기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기도 한다. 언어의 문턱을 낮추는 도구로서 AI의 가치는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인간에게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가 지나온 시간을 함께 사용한다. ‘집’이라는 글자 하나에 어린 시절 마당의 냄새가 있고, ‘미안하다’는 네 글자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어느 저녁이 있다. 언어는 사전 속 뜻풀이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고스라히 배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단어라도 사람마다 무게가 다르다. AI의 언어는 다르다. AI는 의미를 경험하지 않는다. 수많은 문장 속에서 단어들이 어떤 확률로 이어지는지를 계산할 뿐이다. 그래서 문장은 자연스럽지만, 그 문장 뒤에 삶의 무게가 없다. 내가 벗 앞에서 읽으려던 그 추도사처럼, 격식은 갖추었지만, 40년의 세월은 담기지 않은. 물론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인간도 어릴 때 수많은 문장을 들으며 패턴을 익히지 않느냐고. 맞다. 그 지적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패턴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로 약속을 만든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에 묶인다. ‘책임지겠다’고 쓰면 그 문장이 자신을 따라다닌다. 말 한마디가 관계를 세우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리기도 한다. 기계는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문장에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요즘 나는 묘한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지인의 SNS에 올라온 긴 추모 글이 AI가 쓴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함. 지인이 생일축하 카드를 AI로 만들었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줄 때의 묘한 서운함. 오래된 동료가 보낸 새해 인사 메시지의 문장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질 때의 거리감. 우리는 어느새 문장이 어디에서 왔는지보다, 얼마나 자연스러운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창함이 진심을 대신하는 시대. 그게 지금이다. 그래서 다시 세종대왕을 생각한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핵심은 문자의 효율성이 아니었다. 핵심은 ‘내 생각을 내 말로 쓸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AI가 대신 써주는 문장에 기대어, 정작 자기 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AI는 훌륭한 도구다. 글을 정리하고, 정보를 요약하고, 표현을 다듬는 데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문장의 마지막 한 단어를 고르는 건, 그 단어에 자기 삶을 거는 건,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할지 모른다. AI가 한글을 이해하느냐, 흉내 내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 우리는 아직도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있는가? 결국 나는 그 추도사를 직접 썼다. 문장은 어눌하고 서툴렀다. 중간에 말이 막혀 한참을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맥주잔 너머로 꿈을 떠들던 밤은 들어갔고, 말없이 건네던 봉투도 들어갔고, 병실의 그 억지웃음도 들어갔다. 쓰다가 읽다가 끝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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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교육: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교실은 종종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걸 왜 배워야 하지?” 학생의 질문은 종종 단순한 투정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교육의 본질을 찌른다. 배움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이유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교실 한가운데에 새로운 존재가 들어왔다. 생성형 AI다. 무엇이든 설명해주고, 예문을 만들어주고, 요약해주고, 문제도 출제한다. 그래서 질문이 바뀐다.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AI는 가르치는 도구로서 이미 강력하다. 학생이 밤늦게 질문을 해도 지치지 않고 답한다. 같은 설명을 열 번, 백 번 반복해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수준을 바꿔가며 예시를 내고, 부족한 개념을 찾아 채워준다. 어떤 학생에게는 이것만으로도 교육의 문턱이 낮아진다. 배움의 기회는 종종 시간과 비용, 지역과 배경에 가로막히는데, AI는 그 장벽을 상당 부분 무너뜨린다. 과외를 받을 형편이 안 되는 학생도, 야간 자율학습 뒤 홀로 책상에 앉은 학생도, 이제 물어볼 곳이 생겼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가르칠 수 있는 것과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가르침은 전달이고, 스승은 관계다. 교육은 지식의 이동이 아니라 사람의 변화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는 순간은 대개 정보가 주어졌을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믿어줬을 때 찾아온다. 중학교 때 수학을 포기하려던 아이에게 “넌 원래 느린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해준 선생님, 진로를 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대학생에게 “아직 몰라도 괜찮다”고 말해준 교수님. 그 한마디가 성적표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교육에는 늘 눈빛과 망설임이 있다. 학생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 교사는 설명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단어 하나를 더 쉬운 말로 바꾸거나, 반대로 더 단단한 질문을 던진다. 그 미세한 조정이 배움의 방향을 바꾼다. AI는 그 조정에 유능해 보이기도 한다. 대화의 톤을 맞추고, 심지어 공감의 문장도 뽑아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AI의 공감은 정답처럼 보이는 공감일 수는 있어도, 함께 견디는 공감이 되기는 어렵다. 교육은 종종 아프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쉽게 되지 않는 것을 반복해야 하고, 실패와 수치심을 견뎌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동행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런 말은 정보가 아니라 사람의 체온이다. 스승은 지식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좌절의 시간을 함께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AI는 답을 잘하지만, 교육은 답보다 질문으로 완성된다. “답은 종종 생각을 끝내지만, 질문은 생각을 시작한다.” AI가 강한 건 빠른 답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교육이 목표로 하는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깊은 사고다. 학생이 AI에게 답을 얻는 순간, 학습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종종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배움은 “왜 그런가?” “다른 경우에도 성립하는가?” “내 삶에서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이 이어질 때 생긴다. 스승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잡아주는 데 더 가깝다. 그리고 교육에서 가장 민감한 지점, 책임이 남는다. AI는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설득력은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유창한 설명은 때로 가장 위험한 오답이 될 수 있다. 학생이 AI의 답을 그대로 믿고 제출하거나, 그 답을 근거로 판단을 내릴 때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까. 결국 책임은 학생과 교육기관, 그리고 사회로 돌아온다. 그래서 AI가 교실에 들어오는 순간, 교육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가 된다. “편리함은 비용을 숨기고 들어온다.” 그 비용이 무엇인지 교육은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고 결론이 “AI는 스승이 될 수 없다”로 끝나면 너무 쉽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결론은 이거다. “AI가 스승이 되느냐 마느냐보다, 인간이 스승으로 남을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다.” AI가 학생의 질문을 빠르게 처리해주는 사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AI가 반복 설명을 대신한다고 해서 교사의 설명이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사는 더 깊은 맥락을 짚고, 지식이 삶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설명에 집중할 여유를 얻는다. 동시에 교사는, 학생이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 그 질문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아이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AI는 글을 매끈하게 다듬어줄 수 있지만, 학생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만드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AI 시대의 교육은 이렇게 역할이 나뉜다. AI는 설명과 반복과 연습에 강하다. 인간 교사는 의미와 동기, 그리고 학생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에 강해야 한다. AI는 맞춤형 문제를 낼 수 있지만, 학생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까지 대신 만들어줄 수는 없다. 교육이란 결국 정보를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책임질 사람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보자.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대신, “AI를 곁에 둔 시대에, 스승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남기고 싶다. “좋은 스승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학생이 자기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곁에서 버텨준다.” AI는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스승은 여전히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 사람이어야만 한다. 교육은 결국 지식을 넘어, 한 인간의 미래에 책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