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바리톤 양준모 주연의 리얼리티 오페라 〈기억의 향기〉를 관람했다. 공명이 뛰어난 압구정 광림아트센터 장천홀에서 만난 이번 작품은 대극장 오페라의 화려한 스펙터클보다, 한 인간의 내면을 밀도 있게 들여다보는 2인극이자 음악으로 쓴 모노드라마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탁월한 가창력과 묵직한 존재감을 지닌 양준모를 통해, 주인공 구무진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사랑과 상실, 그리고 다시 살아가려는 한 인간의 절박한 내면을 깊이 몰입하여 따라갈 수 있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마음을 따라다녔다.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을 기억하는가. 이름일까, 얼굴일까. 아니면 한때 깊이 사랑했던 누군가의 흔적일까.’
빈 의자 하나에서 시작되는 기억
구무진은 한때 음악계를 주름잡던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러나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고, 이제는 지방 축제 음악을 만들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의 곁을 지키는 유일한 동거인은 인간이 아닌 AI ‘아카시아’다. 아카시아는 무심한 목소리로 데이터를 읊으면서도 조금씩 인간의 감정을 학습해 나간다.
그리고 작업실 한편, 옛 연인 미지가 앉아 있던 빈 나무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작품 속에서 나는 그 빈 의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사람이 떠나도 자리는 남는다. 어쩌면 상실이란 사람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머물던 자리가 계속해서 눈에 들어오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진은 아카시아의 도움을 받아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러나 기억은 위로가 되는 동시에 깊은 고통을 남긴다. 사랑했던 연인과 어머니, 빛나던 자신의 순간들이 되살아날수록 현재의 초라함은 더욱 선명해진다.
술에 취해 무너져 내리던 밤, 마침내 미지가 환영처럼 그의 방에 나타난다.
그 모습이 실체인지 기억인지, 혹은 무진의 절박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재회를 통해 두 사람이 생전에 미처 건네지 못했던 진심을 비로소 나눈다는 사실이다.
무진은 미지를 위해 노래한다, 〈기억의 향기〉를.
그리고 미지는 나지막이 말한다.
“사라져도 향기로 여기에 있어.”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다시 모습을 감춘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서
사람이 떠나면 관계는 끝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 존재했던 ‘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억의 향기〉는 떠나간 연인을 다시 불러내는 신파에 머물지 않는다.
무진이 기억을 하나씩 더듬으며 끝내 찾아가는 존재는 미지만이 아니다. 미지를 사랑했던 자기 자신, 음악을 사랑했던 자신, 그리고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은 자신이다.
이 작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기억을 과거로 퇴행하는 통로가 아닌, ‘현재의 나’에게 돌아오는 길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사랑은 끝났어도 사랑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시간은 한 인간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삶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사랑의 완성은 반드시 끝까지 함께 남는 데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때로 사랑은 떠난 사람을 담담히 놓아주고, 그 사랑으로 변화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로소 완성된다.
AI 시대,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
특히 흥미로운 점은 AI 아카시아와 인간 구무진을 한 무대 위에 세워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동시대적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AI는 인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저장한다. 목소리와 얼굴, 문장과 음악, 날짜와 사건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재생한다.
그러나 ‘저장’하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과연 같은가.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지워지고 뒤섞이며, 때로는 실제보다 아름답게, 때로는 더 아프게 남는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그리움과 후회가 피어나고, 용서와 사랑이 태어난다.
아카시아가 데이터를 통해 감정을 학습하는 동안, 무진은 도리어 잊고 있던 인간의 감정을 되찾아간다. 이 역설이 매우 흥미롭다.
기계는 과거를 저장하지만,
인간은 과거에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이 기억하느냐가 아니라, 그 기억으로 인해 ‘오늘의 내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추락이 아니라 비상으로
다음 날 아침.
미지는 더 이상 없다. 빈 의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과거 역시 변함이 없다.
그러나 무진은 달라져 있다. 그는 아카시아에게 노르웨이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작품의 진정한 결말이다.
노르웨이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죽은 자에게서 산 자에게로, 과거에서 미래로, 추락에서 비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강렬한 상징이다.
떠난 사람을 잊었기에 떠나는 것이 아니다. 깊이 기억하기에 비로소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상실을 지워버린 사람이 아니라, 상실마저 자신의 일부로 품어안은 사람만이 다시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기억의 향기, 존재의 귀환
공연이 끝난 후 제목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았다. 왜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향기’였을까.
향기는 손으로 잡을 수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오래 닫혀 있던 시간의 문을 열어 우리를 가장 먼 기억 속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먼 곳에서 우리는 떠나간 사람뿐만 아니라, 잊고 살았던 ‘자기 자신’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에게 〈기억의 향기〉는 상실의 아픔을 넘어 ‘존재의 귀환’을 노래한 작품으로 남았다.
〈기억의 향기〉는 잃어버린 누군가를 되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동안 잊고 지냈던 ‘나’를 다시 찾아가는 음악적 귀환이다.
▲사진=공연 후 기념촬영하고 있는 필자(좌)와 배우 겸 바리톤 양준모씨 ⓒ강남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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