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차조 칼럼] 출판 책 중심 테마 100선_제29 테마, 번역의 가치, 소비자의 불편을 생산자의 설계도로 바꾸어라

[정차조 칼럼] 출판 책 중심 테마 100선_제29 테마, 번역의 가치, 소비자의 불편을 생산자의 설계도로 바꾸어라

▲사진=정차조 (주)KN541회장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차조 칼럼니스트]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손녀에게 선물받은 텀블러를 들고 가게를 찾았다.

디자인은 아름다웠고, 보온 기능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물이 새지 않는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문제는 뚜껑이었다.

아무리 돌려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말했다.

“이거 참 좋은 물건이라는데, 물 한 모금 마시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판매원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어르신, 이 제품은 밀폐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열리지도 않으니 물이 샐 일이 있겠나.”

참으로 완벽한 보온병이었다.

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능력은 훌륭했지만, 정작 주인이 물을 마시는 일은 어려웠다.

기술은 성공했는데 사용자는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틀린 말을 했을까.

판매원은 제품의 성능을 설명했고, 할머니는 자신의 불편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같은 물건을 바라보았지만 서로 다른 문제를 보고 있었다.

이것이 번역의 역설이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비자가 말하는 편리함과 생산자가 설명하는 성능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생활의 언어로 필요를 말한다.

생산자는 기술과 원가, 품질과 규격의 언어로 상품을 만든다.

소비자는 자신이 겪는 문제를 알고, 생산자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안다.

그런데 두 세계가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소비자는 자신의 요구를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고, 생산자는 그 요구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상품이 완성되면 소비자가 말한다.

“제가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닌데요.”

생산자가 대답한다.

“말씀하신 대로 만들었는데요.”

참으로 억울한 만남이다.

소비자는 말했고, 생산자는 들었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것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말의 부족이 아니라 의미의 불일치였다.

우리는 앞선 제28테마에서 경청의 가치를 살펴보았다.

경청이 사람의 필요를 발견하는 일이라면, 번역은 그 필요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조건으로 바꾸는 일이다.

잘 듣는 것과 제대로 만드는 것 사이에는 반드시 건너야 할 다리가 있다.

그 다리가 바로 번역이다.

할머니의 요구를 다시 생각해 보자.

“뚜껑이 쉽게 열렸으면 좋겠다.”

이 말을 생산자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뚜껑을 헐겁게 만들면 쉽게 열릴 수 있다.

하지만 내용물이 새기 시작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진짜 요구는 단순히 뚜껑을 쉽게 여는 데 있지 않다.

손에 힘이 약한 사람도 편하게 열 수 있으면서, 내용물이 새지 않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품의 설계조건이 탄생한다.

사용자가 얼마나 적은 힘으로 열 수 있어야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도 밀폐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지, 반복 사용에 따른 내구성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구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시제품으로 검증해야 한다.

할머니에게 기술적인 수치를 정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할머니는 자신의 생활을 설명하면 된다.

그 경험을 설계와 검증의 언어로 바꾸는 것은 상품을 기획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좋은 번역은 소비자에게 생산자의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생산자가 소비자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번역한다고 모든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소비자가 말한다.

“가볍고 튼튼하면서 기능도 뛰어나고 가격까지 저렴했으면 좋겠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소망이다.

생산자가 대답한다.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하려면 원가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소비자가 다시 말한다.

“그런데 가격은 절대 올라가면 안 됩니다.”

이쯤 되면 상품개발이 아니라 기적 개발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소비자를 탓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말할 수 있다.

생산자는 그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과 한계를 설명할 책임이 있다.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조정하며, 어떤 성능만큼은 포기해서는 안 되는지 함께 판단해야 한다.

번역은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기대를 현실적인 선택으로 바꾸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장의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한다.

좋은 뜻이 언제나 좋은 상품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고의 품질.”

“건강을 생각한 상품.”

“지구를 위한 친환경 제품.”

듣기에는 근사하다.

그러나 어떤 품질이 최고인지, 건강에 관한 표현은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는지, 환경 부담은 실제로 얼마나 개선되는지 확인할 수 없다면 그 말들은 여전히 구호에 머문다.

말을 아름답게 꾸미는 능력과 약속한 가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능력은 다르다.

좋은 번역은 소비자의 기대를 광고 문구로 부풀리는 일이 아니다.

그 기대를 확인 가능한 제품의 조건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것은 KN541이 지향하는 소비생산 구조에서도 중요한 원리다.

생산소비 구조에서는 생산자가 먼저 상품을 만들고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소비생산은 그 순서를 바꾸어 사람의 실제 필요를 생산의 출발점에 놓는다.

그러나 필요를 먼저 묻는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상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의 소망을 제조 가능한 조건으로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KN541이 새로운 믹스커피를 개발한다고 생각해 보자.

소비자가 말한다.

“너무 달지 않으면서 담백하고, 그래도 커피 맛은 좋아야 합니다.”

일상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요구다.

하지만 제조사는 무엇을 기준으로 만들어야 할까.

사람마다 달다고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담백함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누군가는 진한 커피 향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부드러운 뒷맛을 원한다.

그러므로 소비자의 표현을 원료와 배합, 맛의 특성, 제조원가와 품질의 조건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시제품을 만들어 실제 소비자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처음부터 완벽한 답을 얻기 어렵다면 부족한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 확인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감각을 생산자의 기술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의 경험과 생산자의 전문성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전예약구매는 실제 수요를 확인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예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제품의 품질과 안전성이 검증된 것은 아니다.

수요의 확인과 제품의 검증은 구분되어야 한다.

이 두 과정이 정확하게 연결될 때 소비자의 필요가 생산을 호출한다는 철학도 현실적인 힘을 얻는다.

KN541이 발전시켜야 할 시장은 소비자의 요구를 단순히 모으는 시장이 아니다.

그 요구를 상품기획의 기준으로 정리하고, 생산자의 기술로 검토하며, 실제 사용 경험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시장이다.

소비자는 생활 속 문제를 발견하고, 생산자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시장은 두 사람의 언어를 연결한다.

이것이 소비생산에서 번역이 만들어 내는 경제적 가치다.

지구사랑에도 번역이 필요하다.

친환경이라는 좋은 뜻을 원료와 포장, 사용기간과 자원 소비에 관한 검증 가능한 조건으로 바꾸어야 한다.

포장지에 초록색 나뭇잎을 그렸다고 상품의 환경 부담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를 실제 생산의 기준으로 옮기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일.

시장의 구조를 바꾸어 지구사랑을 실천한다는 철학도 이러한 번역을 통해 구체화된다.

번역의 가치는 상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말을 번역하며 살아간다.

한 사람이 새로운 사업을 제안한다.

“지금 시작해야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다.

“위험이 너무 큽니다. 조금 더 검토합시다.”

겉으로 보면 찬성과 반대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서로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은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은 공동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둘 다 같은 목적을 지키려는 마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의 말을 곧바로 공격과 반대로 받아들이면 협력은 어려워진다.

평생의 동역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동의가 아니다.

서로의 말이 지키려는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함께 실행할 수 있는 판단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상대방의 말 뒤에 있는 뜻을 발견하지 못하면 같은 목표를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싸울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번역에는 기술만큼 겸손이 필요하다.

내가 이해한 뜻이 상대방이 말하려던 뜻과 같은지 다시 확인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처음의 텀블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할머니의 불편을 들은 생산자가 뚜껑의 구조를 개선했다고 생각해 보자.

밀폐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손에 힘이 약한 사람이 편하게 열 수 있도록 설계를 바꾸었다.

시제품을 만들고 실제 사용자에게 다시 사용해 보도록 했다.

할머니가 텀블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돌렸다.

이번에는 부드럽게 열렸다.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물 마시려고 팔씨름 안 해도 되겠구먼.”

그 웃음이야말로 기술이 자신의 역할을 했다는 가장 분명한 장면이었다.

할머니는 어려운 기술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물을 편하게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바람을 실현하려면 누군가는 불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누군가는 설계를 바꾸며, 누군가는 실제로 편리해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소비자의 경험은 생산의 조건이 되었고, 생산자의 기술은 다시 소비자의 생활로 돌아왔다.

이것이 번역의 가치다.

번역은 서로 다른 말을 같은 말로 바꾸는 재주가 아니다.

사람의 필요를 생산의 조건으로 바꾸고, 그 생산이 다시 사람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힘이다.

할머니가 원했던 것은 뛰어난 밀폐기술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물을 편하게 마실 수 있는 텀블러였다.

새로운 문명은 어쩌면 그 단순한 차이를 알아보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자랑하는 시장에서, 그 기술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나아지게 했는지 묻는 시장으로.

우리는 소비자의 말을 상품의 설명으로 바꾸고 있는가.

아니면 소비자의 삶을 바꾸는 설계로 옮기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소비생산이라는 새로운 시장의 품격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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