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정차조 칼럼니스트]
어느 작은 제조업체에서 신제품 보온병을 출시했다.
광고 문구는 자신만만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이 새지 않는 완벽한 보온병!”
디자인은 아름다웠고, 포장도 고급스러웠다. 주문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성공을 확신했다.
그런데 사흘 뒤, 한 고객이 사진을 보내왔다.
가방 안이 온통 물바다였다.
보온병에서 물이 새어 나왔고, 중요한 서류가 젖었으며, 휴대전화까지 물에 잠길 뻔했다.
사람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았겠지요.”
“가방을 너무 심하게 흔들었을 겁니다.”
“사용 방법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술력이었다.
보온병에서는 물이 새는데, 회의실에서는 책임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 한 기술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제대로 만들었는지는 확인해 보았습니까?”
회의실이 잠잠해졌다.
가장 당연한 질문이 가장 불편한 질문이 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묘한 능력이 있다.
성공하면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믿고, 실패하면 자신을 제외한 세상에서 원인을 찾는다.
잘되면 실력이고, 잘못되면 환경 탓이다.
그러니 세상은 늘 억울하다.
잘된 일의 공로는 인간이 가져가고, 잘못된 일의 책임은 세상이 떠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체면을 배려하지 않는다.
제품에 결함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한 광고도 물이 새는 것을 막아 주지 못한다.
잘못된 판단을 변명으로 덮는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여기서 실패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실패는 계획이 현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신호다.
우리는 계획을 세울 때 성공을 상상한다.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가능성을 판단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한 계획이라도 현실의 모든 변수를 담을 수는 없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고, 옳다고 믿었던 판단이 틀렸음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때 중요한 것은 계획을 끝까지 옹호하는 일이 아니다.
현실이 보여 준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실패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실패가 드러낸 사실을 받아들이고 행동을 바꿀 때 성장할 가능성이 열린다.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충분히 준비하고 검증했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는 실패가 있다.
반대로 확인해야 할 것을 확인하지 않고, 지켜야 할 기준을 무시해 발생하는 잘못도 있다.
두 가지를 모두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난 사람에게는 다시 일어설 기회가 필요하다.
그러나 예방할 수 있었던 피해를 무책임하게 발생시켰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실패를 존중하는 것과 무책임을 용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더구나 그 실패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았다면 배움에 앞서 피해를 바로잡는 일이 먼저다.
남에게 손해를 입혀 놓고 혼자 성장했다고 기뻐한다면 참으로 경제적인 자기계발이다.
수업료는 다른 사람이 냈으니 말이다.
실패를 교훈으로 바꾸려면 먼저 그 대가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조직에서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모든 업무가 정상이라고 보고된다.
계획은 순조롭고, 일정은 예정대로이며, 진행 상황은 언제나 양호하다.
그런데 결과는 없다.
실패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프로젝트는 실패한다.
보고서에는 파란불이 켜져 있지만 현실에서는 빨간불이 번쩍인다.
문제를 발견한 사람이 비난받고, 문제를 숨긴 사람이 무사하다면 이런 일이 반복된다.
결국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가 드러나지 않도록 애쓴다.
이런 환경에서는 실패보다 더 위험한 것이 생겨난다.
실패를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문화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옳다.
다만 현실이 계속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좋은 조직은 실패가 전혀 없는 조직이 아니다.
잘못된 것을 발견했을 때 사실을 확인하고, 필요한 결정을 내리며,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바꿀 수 있는 조직이다.
그렇다고 실패를 무조건 칭찬해서도 안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입니다.”
참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열 번 반복한다면 성공의 어머니도 슬슬 걱정할 것이다.
“도대체 이 아이는 언제 철이 들려나.”
실패를 한 번 하면 경험이 될 수 있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면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정기행사다.
중요한 것은 몇 번 넘어졌는가가 아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무엇을 발견했는가다.
그리고 다시 걸을 때 무엇을 바꾸었는가다.
이 원칙은 생산과 소비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상품이 많이 팔렸다는 사실이 반드시 좋은 상품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판매는 소비자가 기대를 가지고 선택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기대가 충족되었는지는 실제 사용 과정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손잡이가 불편할 수도 있고, 설명과 실제 성능이 다를 수도 있으며, 예상하지 못한 결함이 발견될 수도 있다.
그런데 생산자가 칭찬만 듣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될까.
좋은 후기만 모으고 불편한 의견은 외면한다면 시장은 점점 현실과 멀어진다.
별 다섯 개가 아무리 많아도 불량품이 저절로 수리되지는 않는다.
좋은 생산자는 소비자의 불만을 모두 옳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 불만 속에서 확인해야 할 사실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필요를 확인하고, 생산하고, 사용 경험을 살피며,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는 것.
이러한 순환이 가능해질 때 소비와 생산의 관계도 달라진다.
KN541이 지향하는 소비생산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소비자는 자신의 필요와 경험을 전하고, 생산자는 그 내용을 검토해 더 나은 상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의 의견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며, 생산자의 최초 판단이 언제나 완벽한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경험과 전문성이 만나 부족한 부분을 확인하고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소비생산의 가치는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잘못된 생산을 바로잡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지구사랑 역시 다르지 않다.
불필요한 상품을 만들고, 사용하지 못할 제품을 폐기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낭비되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원재료와 에너지, 생산자의 노동과 소비자의 시간까지 함께 사라진다.
지구는 인간의 실수를 이유로 이미 사용한 자원을 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생산 이전의 검증과 사용 이후의 개선은 환경을 위한 실천이기도 하다.
잘못된 생산을 줄이는 것은 좋은 생산을 늘리는 일만큼 중요하다.
환경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같은 낭비를 반복하지 않도록 바꾸는 행동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실패의 가치는 시장과 조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에도 있다.
누구나 잘못된 판단을 한다.
믿었던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옳다고 생각했던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며, 오랫동안 고집했던 생각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순간 사람은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과거의 자신을 끝까지 변호하는 길과, 더 나은 자신으로 바뀌는 길이다.
첫 번째 길은 당장 편할 수 있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고, 잘못을 인정하는 불편함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위험이 있다.
어제의 체면을 지키느라 내일의 가능성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얼마나 비싸기에 자신의 미래까지 담보로 맡기는가.
우리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한다.
시장의 구조를 바꾸고,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바꾸며, 새로운 문명을 열겠다고도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잘못된 생각 하나 바꾸지 못한다면 세상이 먼저 당황하지 않겠는가.
“나를 바꾸겠다면서 당신 생각은 왜 그대로입니까?”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기술만으로 열리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열린다.
어제의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오늘의 내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평생의 동역자에게 필요한 태도도 이와 같다.
좋은 동역자는 모든 말에 찬성하는 사람이 아니다.
서로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 역시 체면보다 공동의 목적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존중한다는 이유로 중요한 문제를 침묵해서도 안 되고, 자신이 옳다는 이유로 상대의 존엄을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동행은 잘못된 길까지 함께 고집하는 일이 아니다.
필요할 때 방향을 바로잡고 다시 함께 걷는 일이다.
이제 처음의 보온병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기술자는 제품을 다시 시험했다.
사용 조건을 바꾸어 가며 살펴본 결과, 특정한 방향으로 반복해서 흔들릴 때 뚜껑의 밀폐력이 약해지는 문제가 발견되었다.
사용자를 탓하기 전에 제품을 확인하자 비로소 원인이 드러난 것이다.
제조업체는 문제를 알리고, 피해에 대한 필요한 조치를 진행했으며, 밀폐 구조와 검사 기준을 개선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비용이 들었다.
이미 발생한 고객의 불편을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제품에서 같은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다.
문제를 감춘 채 더 많이 파는 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당장의 매출을 지킬지 몰라도 미래의 신뢰를 잃게 만들 수 있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에는 체면이 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고치는 과정에서 신뢰를 회복할 기회가 생긴다.
이것이 실패가 가치를 얻는 순간이다.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해도 넘어질 때가 있다.
그때 중요한 것은 넘어졌다는 사실을 숨기는 일이 아니다.
왜 넘어졌는지 살피고, 다친 사람을 먼저 돌보며, 같은 곳에서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길을 고치는 일이다.
실패의 가치.
그것은 넘어졌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넘어진 자리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길을 발견하는 데 있다.
실패의 기록은 과거에 남지만, 그 기록을 통해 바꾼 행동은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넘어졌다면 부끄러워만 하지 말라.
길을 고쳐라.
그리고 다시 걸어라.
넘어졌다는 사실은 실패의 기록이지만,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길을 고치는 일은 문명의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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