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말띠해, 연극 〈에쿠스〉의 시대적 소명 길들여진 인간과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 말과 인간 사이에 사라진 것들…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오랜만에 대학 선배의 초대로 대학로를 찾았다. 몇 해 전 예술의 전당에서 이미 한 차례 마주했던 연극 에쿠스를 다시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더 날카롭게 우리를 찌른다.
AI가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대신 설계하려는 시대에, 에쿠스는 우리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비춘다.
에쿠스는 1973년,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가 실제 신문 기사 하나에서 출발해 완성한 작품이다.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찔러 실명시킨 한 소년의 사건이다. 셰퍼를 사로잡은 것은 범죄의 잔혹함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던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이 아이는 왜 이렇게까지 느껴야 했는가.”
이 질문은 곧 연극의 중심이 된다.
에쿠스는 범죄극도, 단순한 정신분석극도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열정’을 어떻게 다루는 존재인가,
그리고 사회는 그 광기와 정상의 경계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는가를 묻는 철학극이다.
1970년대 영국은 전후 산업사회의 피로가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경제는 합리와 효율을 요구했고, 개인의 감정은 점점 관리의 대상이 되어갔다.
종교는 힘을 잃었고, 산업과 제도는 인간을 ‘정상적인 기능 단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에쿠스는 바로 그 균열의 시대에서 탄생했다.
AI 시대를 사는 지금, 그 질문은 더 선명해졌다. AI는 점점 더 정확해지고, 더 빠르며, 더 안전해진다.
그러나 그 정확함은 인간에게서 느림과 불확실성, 과잉의 감정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고통은 오류가 되고, 열정은 리스크가 되며, 몰입은 관리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에쿠스의 소년 알런은 불편하다.
그는 효율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끝내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AI 시대에 남아 있는 인간의 마지막 잔여물처럼 보인다.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믿고, 끝까지 몰입한 존재…
말띠해가 오면 우리는 으레 속도와 도약을 떠올린다. 하지만 필자가 이 해에 다시 꺼내 든 에쿠스의 말은 달리는 말이 아니다.
서서, 묵묵히 인간을 응시하는 말이다.
에쿠스 속의 말은 동물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며 본능이며, 한 인간이 세상과 맺을 수 있었던 가장 순도 높은 몰입의 대상이다. 알런이 말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은 광기가 아니라, 오래된 종교화 속 경배의 자세에 가깝다.
오늘의 사회는 말한다.
너무 깊이 사랑하면 위험하고,
너무 몰입하면 분리가 필요하다고.
감정은 관리되고, 열정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재단된다.
그래서 우리는 알런을 치료한다.
그리고 안도한다.
“이제 정상이다”라고.
그러나 연극은 끝까지 묻는다.
치료란 무엇을 회복시키는 일인가.
고통을 없애는 일인가, 아니면 사회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한 인간의 불꽃을 낮추는 일인가…
정작 가장 깊은 고백을 하는 인물은 소년이 아니라 치료자, 마틴 다이사트 박사다.
“나는 안전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이 문장은 2026년을 사는 우리의 귀에 유난히 또렷하다. 안정된 삶, 관리된 감정, 무탈한 일상…그 모든 것을 손에 쥔 뒤에 남는 질문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대가로 이것을 얻었는가.”
말은 원래 길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에쿠스의 말은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 말은 무대 위에서, 그리고 객석을 향해 조용히 묻는 듯하다.
“너는 무엇을 그렇게까지 사랑해본 적이 있느냐.”
AI가 인간을 대신해 생각하는 시대에,
이 연극의 시대적 소명은 분명하다.
인간은 여전히 ‘느끼는 존재’로 살아 남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말띠해를 맞아
나는 더 빨리 달리자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대신, 한 번쯤 멈춰 서서
자신의 내면에 아직 남아 있는 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말하고 싶다.
열정을 모두 치료한 뒤에 남는 안정은
과연 삶의 완성일까, 아니면 살아 있음의 증거를 잃은 흔적일까.
끝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연약함 하나쯤은
인간의 안장 위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연약함을 치료해 없애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장 자연 본능적인 인간다운 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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