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 칼럼] 지식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단한 품성’ 위대함은 지식이 아니라 고난에서 탄생한다

[손영미 칼럼] 지식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단한 품성’ 위대함은 지식이 아니라 고난에서 탄생한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최근 세계 AI 반도체 시장을 리드하는 엔비디아(NVIDIA)의 CEO 젠슨 황이 한 방송에 출연해 성공과 위대함의 본질에 대한 묵직한 통찰을 던졌다. “우리가 겪은 고난으로부터 위대함이 탄생합니다.” 짧지만 강렬한 이 한마디는 화려한 성공 신화 뒤에 숨은 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한 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몇 번에 방대한 정보가 쏟아지고, 인터넷은 모든 지식을 손쉽게 대령한다. 이제 지식을 얻는 일은 더 이상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이토록 똑똑한 세상에서, 한 분야의 정점에 이르는 ‘위대함(Greatness)’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젠슨 황은 그 답을 ‘고난’에서 찾는다. 물론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고통이 필수 조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준의 성취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장인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 수십 년의 시행착오를 견디고, 예술가가 자신만의 언어를 찾기 위해 끝없는 고독을 통과하듯, 위대함은 반드시 ‘시련’이라는 통행증을 요구한다. 고난은…

[손영미 칼럼] 고결한 외면은 없다 정치적 무관심이 치르는 가장 비싼 대가

[손영미 칼럼] 고결한 외면은 없다 정치적 무관심이 치르는 가장 비싼 대가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언제부터인가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은 현대인의 세련된 태도처럼 소비되고 있다. “정치판은 답이 없다.” “그놈이 그놈이다.”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 마치 진흙탕 싸움에 발을 담그지 않는 고결한 선택인 양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이 관심을 거두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당신이 외면한 자리는 결국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2400년 전의 이 경고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를 혐오하면서도 정치가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시장을 외면하면서 좋은 물건만 팔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민이 감시를 멈추고 참여를 포기할 때 정치의 공간은 가장 무책임하고 가장 탐욕적인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다. 결국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온다. 내 삶을 바꾸는 법과 제도가 무능한 사람들의 손에 맡겨지고, 내가 낸 세금의 쓰임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며, 공동체의 미래가 소수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로 우리는 결국 나보다 못한 사람들의 결정에 의해 삶이 좌우되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 역시 같은 맥락에서 경고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나빠지는 이유는 악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 투표를 포기하는 것, 공공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 그 모든 무관심은 결국 현상을 유지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방관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때로 가장 강력한 동의가 된다. 정치가 추하게 보일 수는 있다. 반복되는 정쟁과 실망스러운 모습들 속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시민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때이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돌보고 지켜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치 참여란 거창한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삶과 연결된 정책에 관심을 갖는 일, 선거 때 후보와 공약을 비교하는 일, 최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하여 더 큰 위험을 막는 일, 권력에 질문하고 감시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시민의 최소한의 책임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어느 날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희생, 그리고 책임 의식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 권리를 누리면서도 책임은 외면한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정치를 향한 냉소는 쉽다. 비판 역시 쉽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는 냉소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심과 참여, 그리고 책임 있는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권력은 언제나 시민의 수준을 비추는 거울이다.우리가 외면한 자리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진정한 고결함은 세상을 외면하는 데 있지 않다.불완전한 현실 속에서도 공동체를 위해 책임 있게 참여하는 데 있다.…

[손영미 칼럼] 소년은 왜 춤추기 시작했는가

[손영미 칼럼] 소년은 왜 춤추기 시작했는가

–  Billy Elliot에 대한 공연 리뷰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인간은 때때로 자신에게 가장 금지된 곳에서 운명을 발견한다. 소년 빌리에게 그곳은 거친 복싱장이 아니라, 부드러운 발레 교실이었다. 탄광의 먼지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던 영국 북부의 음울한 회색 도시. 파업과 실업, 가난과 분노가 뒤엉킨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거친 풍경 한가운데서 한 소년은 묻는다. “나는 왜 춤을 추고 싶은가.” 그 질문은 단순한 취미의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자기 영혼의 진동수를 처음으로 감지한 순간에 가깝다. 빌리는 세상이 규정한 ‘남성성’의 틀에서 벗어난다. 강해야 하고, 싸워야 하며, 울지 말아야 한다는 완고한 질서 속에서 그는 몸이라는 도구로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언어가 ‘말’이 아닌 ‘춤’이라는 사실이다. 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다. 언어가 탄생하기 전, 인간은 몸으로 슬픔을 새겼고, 기쁨을 하늘로 던졌으며, 절망을 발로 구르며 견뎌냈다. 빌리의 도약은 단순히 미학적인 발레 동작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된 존재가 자기 영혼의 감옥을 박차고 나오는 철학적 몸짓이다. 특히 작품 속에서 인상적인 지점은 ‘침묵하는 남성들’의 변화다. 광부인 아버지와 형은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시대의 피로와 투쟁 속에서 감정을 거세당한 이들이다. 그러나 빌리가 춤추는 찰나, 그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예술은 생존 이후에 누리는 사치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절망적인 순간, 인간을 인간답게 남게 하는 최후의 불꽃이다. 뮤지컬 무대에서 이러한 감정은 더욱 강렬하게 증폭된다. Elton John 의 음악은 거친 노동의 리듬과 소년의 섬세한 내면을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특히 〈Electricity〉가 울려 퍼지는 순간, 관객은 더 이상 타인의 춤을 관람하는 제삼자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삶 속에서 한 번쯤 접어두었던 꿈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춤출 때 어떤 기분이 드니?” 그 질문에 빌리는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전기(Electricity)가 흐르는 것 같아요.” 이 대사는 현대 예술철학의 핵심을 관통한다. 진정한 예술은 논리보다 먼저 도착한다. 인간은 어떤 아름다움 앞에서 먼저 전율하고, 이해는 그다음에 찾아온다. 예술은 해석되기 이전에 이미 몸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무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인이 된 빌리가 공중으로 비상하는 장면은 흔한 성공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삶의 중력을 극복해내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가난은 여전하고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결정적인 변화가 있다. 소년이 더 이상 자신의 재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인간의 자유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단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Billy Elliot 는 단순한 성장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은 무엇 앞에서 가장 자유로워지는가.” 마지막 조명이 꺼진 뒤에도 마음속에 길게 잔상이 남는 것은 화려한 테크닉이 아니다. 한 소년이 세상의 편견보다 자기 심장의 떨림을 더 신뢰했다는 사실이다.…

[손영미 칼럼] 105억의 오페라, 부산의 축제

[손영미 칼럼] 105억의 오페라, 부산의 축제

–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작 〈오텔로〉, 불꽃을 넘어, 도시의 혈관을 여는 불씨로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지난해 부산콘서트홀의 개관은 하나의 건축이 아니라, 도시의 심장에 처음으로 음악이 이식된 사건이었다. 이어 도착한 부산오페라하우스는 그 심장에 성대를 얹는 일이다. 부산은 이제 항구의 파도만으로…

[손영미 칼럼] AI가 실시간으로 답을 내놓는 시대에, 문학은 왜 ? 여전히 필요한가

[손영미 칼럼] AI가 실시간으로 답을 내놓는 시대에, 문학은 왜 ? 여전히 필요한가

 –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찾은 단상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우리는 지금, 답이 질문을 앞지르는 시대를 산다. 속도는 미덕이 되었고, 요약은 이해를 대신하며, 감정은 알고리즘의 추천 목록으로 환원된다. 이 거대한 효율의 흐름 속에서 문학은 종종 “쓸모없는 장르”로 밀려난다. 느리고 비경제적이며, 즉각적인 해결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고 싶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정말 ‘시간’뿐인가. 아니면 인간을 인간답게 이해하는 방식, 그 자체인가… 최근 ‘손석희 질문들’에서 김애란과 손석희의  대화는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던진다. 그들은 문학의 효용을 말하기보다우리가 어떤 속도로 타인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묻는다. 오늘의 사회는 끊임없이 결론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곧바로 해석이 뒤따르고 해석은 평가로, 평가는 진영의 언어로 굳어진다.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시간’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자신의 속도로 말해질 권리, 그 감정이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여지, 문장이 끝까지 도달할 때까지의 기다림이 삭제된다. 김애란 작가가 말한 “집중력이 곧 도덕이다”라는 문장은 이 지점에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집중이란 단순한 주의력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함부로 축약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문학은 그 결심을 훈련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문학은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머무름을 요구한다. 텍스트 속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삶을 결론 없이 경험한다. 그 경험은 즉각적인 변화로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판단과 시선에 균열을 낸다. 문학은 그렇게 사회의 공기를 바꾼다. AI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인간의 정서적 완전한 이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해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머뭇거림의 시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 머뭇거림을 허락한다. 슬픔 앞에서 쉽게 위로하지 않고, 비극 앞에서 성급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침묵 그 느린 감각이야말로 오늘의 사회가 회복해야 할 윤리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설명 속에 살고 있다. 데이터와 통계, 논리와 해석이 세상을 규정한다. 그러나 설명이 많아질수록 이해는 깊어지지 않는다. 문학은 설명을 줄이는 대신 감각을 회복시킨다. 타인의 삶을 한 번 더 바라보게 하고, 그 감정의 결을 조금 더 오래 붙잡게 한다. 그래서 문학은 여전히 필요하다. 문학은 세상을 빠르게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결국 그 인지 지점에서 시작된다. 속도의 시대에 문학은 느림으로 저항하고, 효율의 시대에 문학은 비효율의 질문으로 응답한다. 우리가 더 많은 답을 얻을수록, 더 깊은 이해를 잃지 않기 위해… 문학은 세상을 앞서가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뒤처지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 걷는다.

[손영미 칼럼] 찬란한 봄밤, 듣기 좋은 곡~ 목소리는 사랑보다 오래 남는다

[손영미 칼럼] 찬란한 봄밤, 듣기 좋은 곡~ 목소리는 사랑보다 오래 남는다

– 비제 《진주조개잡이》 〈Je crois entendre encore〉와 알라냐의 기억의 미성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찬란한 봄밤에는 유난히 목소리가 먼저 계절을 적신다. 꽃은 지고 바람은 지나가도, 한 사람의 음성은 별빛보다 오래 귓가에 머문다. 그래서 봄밤에 듣는 음악은 늘 사랑의 현재보다, 지나간 사랑의 잔향과 기억을 더 깊이 흔든다. 19세기 프랑스 오페라는 감정을 격정으로 폭발시키기보다, 향기처럼 스며들게 만드는 예술에 가깝다. 그 섬세한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1863년 초연된 비제의 오페라 Les pêcheurs de perles이다. 고대 실론섬의 이국적 바다를 배경으로 우정과 사랑의 금기, 그리고 운명적 기억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비제 특유의 투명한 관현악 색채와 기억을 자극하는 선율적 서정성이 유난히 빛나는 프랑스 낭만오페라의 대표작이다.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도 애절한 순간은 1막, 나디르의 로망스〈Je crois entendre encore〉에…

[손영미 칼럼] 한 사람의 안목이 시대의 유산이 되는 순간, 프리마아트센터에서 만난 이상준 회장의 수집 미학

[손영미 칼럼] 한 사람의 안목이 시대의 유산이 되는 순간, 프리마아트센터에서 만난 이상준 회장의 수집 미학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종로 인사동은 늘 시간을 품은 거리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붓끝의 숨결, 이름 모를 도자의 윤기가 골목 사이로 스며 나온다. 그 익숙한 예술의 결 위에 새롭게 문을 연 더프리마아트센터는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오랜 안목과 집념이 마침내 공공의 문화 자산으로 확장되는 뜻깊은 공간이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이상준 회장의 소장품 전시가 지닌 상징성이었다. 수집은 단순히 귀한 물건을 모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미감을 읽고, 사라질 뻔한 시간을 붙들어 미래에 건네는 조용한 사명이다. 이상준 회장이 오랜 세월 곁에 두고 아껴온 작품들은 이제 한 개인의 서재와 응접실을 떠나 더 많은 이들의 눈과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먼저 다가오는 것은 작품의 ‘가격’이 아니라 ‘시간’이다. 도자의 표면에 스민 미세한 균열, 오래된 회화의 바랜 색감, 손때 묻은 고미술의 온도는 모두 한 시대의 호흡을 품고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우리 역사와 한민족 삶의 결을 증언하는 침묵의 기록물처럼 다가왔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이상준 회장의 오랜 수집 철학이 놓여 있다. 그의 컬렉션은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끌림의 미학’이 수십 년간 응축된 결과다. 작품을 소유하는 차원을 넘어, 시대의 미감과 역사적 상흔을 지켜내려는 소명의식이 그 안에 서려 있다. 가장 상징적인 대표작은 단연 조선 18세기 달항아리다. 한때 해외에 머물던 이 백자는 치열한 경쟁 끝에 국내로 환수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둥글고 비어 있는 듯 충만한 그 형태는 조선 미학의 절정이자, 비움 속에서 완성을 이루는 한국 정신의 형상이다. 이상준 회장에게 이 달항아리는 단순한 명품 도자가 아니라 잃어버린 문화의 귀환이자 역사 회복의 상징물이다. 또한 전시장 곳곳에서 만나는 백자청화오조룡문호는 조선 왕실의 위엄과 상징 체계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용의 다섯 발톱이 상징하는 권위는 단순한 문양을 넘어 왕조의 질서와 미의식을 응축한다. 이 작품이 지닌 힘은 관람객에게 단순한 감상이 아닌 역사적 현존감을 선사한다. 근현대 회화 컬렉션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은 장욱진의 〈가로수〉다. 그의 소박한 선과 단순한 화면 속에 한국적 서정과 존재의 고요를 담아낸 이 작품은, 이상준 회장의 컬렉션이 고미술에 머물지 않고 근현대 미학의 결까지 폭넓게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 공간이 특별한 이유는 소장품이 더 이상 사적인 기쁨에 머물지 않고, 후대에게 전해질 교육적·문화적 유산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 있다. 예술품은 벽에 걸리는 순간보다 이야기를 얻는 순간 비로소 살아난다. 이곳의 작품들은 백자는 조선의 숨결을, 회화는 근현대의 사유를, 고미술은 한민족의 미감을 품으며 우리 문화사의 또 다른 문장으로 존재한다. 더프리마아트센터는 그 문장들을 단순히 벽 위에 거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관람객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역사와 감각을 다시 만나게 하는 문화적 해석의 장으로 기능한다. 개인의 안목이 공공의 미감으로 확장되는 이 순간, 수집은 더 이상 사적 취미가 아니라 시대에 대한 책임이며 후대에 대한 약속이 된다. 특히 고(故) 소운 이우복 회장이 5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총 487점의 도자 및 근현대 미술 컬렉션이 개관전으로 공개되며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3월 17일부터 8월 31일까지 더프리마아트센터 2층에서는  <완당묵언, 추사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열려 조선 후기 서예와 문인 정신의 깊이를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의 예술 세계는 물론, 아들 김상우의 〈소동파입극도〉, 김정희에게 보내는 서간 등 당대 지식인의 정신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인사동 특유의 역사성과 예술적 분위기 위에 세련된 동선과 품격 있는 전시 연출이 더해져, 작품 한 점 한 점의 수집 서사까지 오롯이 느낄 수 있다. 결국 이 전시는 소장품의 나열이 아니다. 한 사람의 취향을 넘어 시대를 관통한 미의식과 문화적 사명감이 후손에게 남기는 정신적 유산이다. 인사동 한복판에서 나는 다시 확인했다. 예술은 소유될 때보다 공유될 때 더 오래 빛난다. 그리고 그 빛을 세상으로 꺼내 놓은 이상준 회장의 안목과 결단은 오늘의 전시를 넘어 내일의 문화사로 오래 남게 될 것이다. <전시 정보> 더프리마아트센타 •위치: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7-11 •운영: 오전 10:30–오후 7:30…

[손영미 칼럼] 예술가 출신 기관장의 시대적 의미 장한나, 예술의 전당을 지휘하다

[손영미 칼럼] 예술가 출신 기관장의 시대적 의미 장한나, 예술의 전당을 지휘하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장한나의 예술의전당 사장 임명은 단순한 인사를 넘어, 한국 공연예술계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 인사다. 1987년 개관 이래 첫 음악인 출신 여성 수장이자세계 무대의 최전선에서 예술의 언어를…

[손영미 칼럼] 치유의 봄밤, 별빛은 창밖에 머물고 노래는 마음에 머문다

[손영미 칼럼] 치유의 봄밤, 별빛은 창밖에 머물고 노래는 마음에 머문다

– 봄밤, 병원에 별빛이 내려앉는 시간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한국예술가곡연주회가 오는 3월 31일(화) 오후 6시,보바스 기념 병원 본원 로비(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왕판교로 155-7)에서 따뜻한 위로의 무대 <보바스 기념 병원  별빛콘서트〉를 다시 연다. 작년에 깊은 울림을 남겼던 이번 음악회는 클래식 성악과 대중가요가 어우러지는 크로스오버 콘서트로 꾸며져 환자와 가족, 의료진 모두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을 선사할 예정이다. 1부는 〈가고파〉, 〈남촌〉, 〈친구여〉, 〈꽃 구름 속에〉, 나폴리 민요 〈Santa Lucia〉 등으로 시작해 고향의 향수와 삶의 추억을 불러내는 친숙한 선율로 무대를 연다. 이어 <보랏빛 엽서 > 와 슈베르트의 <Ständchen> 을 비롯해 〈청산에 살리라〉, 〈그리움〉,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전통 민요 〈새타령〉까지 세대를 잇는 폭넓은 레퍼토리가 병원 로비를 한 편의 봄밤 풍경처럼 물들인다. 특히 공연의 마지막은 테너 5인의 특별 무대 〈O Sole Mio〉로 장식된다. 한국예술가곡연주회 최금주 회장은 이번 위문 연주회에 대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환자들과 함께 따라 부르는 이 시간이 단순한 연주를 넘어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는 작은 하모니가 될 것” 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번 공연은 일회성 행사를 넘어 앞으로 연 1~2회 정기적으로 이어질 병원 위문 음악회로 발전할 예정이어서 음악을 통한 치유와 공감의 문화가 더욱 깊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음악은 병을 고치지는 못해도, 마음이 견디는 힘을 선물한다. 3월의 마지막 밤, 별빛처럼 내려앉는 노래가 누군가의 오늘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밝혀주리라 믿는다. 치유는 약에서 시작되지만, 견디는 힘은 결국 노래에서 피어난다. 삼월의 마지막 밤, 별빛은 창밖에 머물지만 우리의 노래는 오래도록 마음의 머문다.  

[손영미 칼럼] K-가곡 슈퍼스타, 전통과 세계 사이의 무대

[손영미 칼럼] K-가곡 슈퍼스타, 전통과 세계 사이의 무대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K-가곡 슈퍼스타 본선 경연이 어제 여의도 KBS홀에서 열렸다. 650명의 예선 지원자들 가운데 단 10명만이 본선에 진출한 무대였다. 이번 무대는 한국 가곡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공연 진행은 다소 길게 느껴졌지만, 연주자들의 뛰어난 기량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음정과 호흡, 표현의 완성도는 국제 콩쿠르 무대를 연상시킬 만큼 정교했고, 무대 전반은 세련된 오케스트라와 안정된 음향 속에서 탄탄하게 구축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질문이 남는다. 기술이 완성될수록,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우리 가곡의 힘은 단순한 성악적 기교에 있지 않다. 말의 결을 살리는 호흡, 시어 사이에 스며드는 여백, 그리고 삶의 체온을 담아내는 절제된 울림 그 ‘맛’에 있다. 그 맛은 화려함이 아니라 스며듦이며, 과시가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 정서다. 이번 무대에서는 그 고유한 결이 다소 옅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동시에 전통을 향한 의미 있는 시도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민요와 전통 가곡이 주요 수상으로 이어진 점은, 우리 음악의 뿌리를 다시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임선혜 교수와 박미혜 교수의 심사평은 단순한 평가를 넘어, 가곡이 지켜야 할 미학적 기준을 짚어주는 품격 있는 제안이었다. 또한 본선 수상 곡들을 보니 한국 가곡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예술임을 상기시킨다. 이번 경연은 그 규모와 방식에서도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었다. 총상금 1억 1천만 원이라는 국내 가곡 콩쿠르 최고 수준의 파격적인 규모는, 가곡이 더 이상 소수의 장르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대상 5천만 원, 금상 3천만 원, 은상 2천만 원, 동상 1천만 원이라는 구성은 단순한 보상을 넘어, 차세대 K-가곡 스타를 향한 실질적 발판을 마련한다. 경연은 1차 동영상 예심, 2차 현장 예심, 그리고 파이널 무대로 이어지는 구조로 진행되었다. 예심 단계부터 지정곡 중심의 선별 과정을 거치며, 가곡의 정체성과 완성도를 동시에 요구하는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이탈리아와 독일 등지에서 수학한 성악가들의 참여, 그리고 ‘두남재’ 출신 성악가들의 두드러진 활약 역시 한국 가곡의 세계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단순한 경연을 넘어, 새로운 가곡 콘서트 문화로 확장되고 있는 흐름의 징표이기도 하다. 관계자의 말처럼, 가곡은 한국의 언어와 정서를 가장 아름답게 담아내는 예술이다. 이 무대는 그 오래된 장르가 어떻게 현재와 만나고, 다시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자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