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2022년 5월, MBC의 VR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에 한 여성이 나왔다. 3년 전 위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딸이었다. 제작진은 봄이면 장미와 샐비어가 흐드러지던 어머니의 꽃밭을 가상현실로 되살렸다. 헤드셋을 쓴 딸이 그 꽃밭에서 엄마를 만난다.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그 장면 앞에서 촬영장 스태프도 울었고, 화면 밖의 우리도 울었다. OpenAI가 2024년 3월 공개한 Voice Engine 자료를 보면, 15초 남짓한 음성 샘플 하나와 문장만으로 원래 화자와 닮은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이 회사는 병으로 말을 잃은 환자가 자기 목소리를 되찾은 사례도 함께 소개했다. 기술은 놀랍다. 누군가에게는 닫혔던 문이 열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 놀라움이 조심스러운 질문을 데려온다.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닮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돌려주는 일인가? 정의부터 해두자. 이 글에서 말하는 AI는 사람의 말과 기억을 데이터로 배워 다시 문장과 소리로 돌려주는 기술이다. 기계라고 부르기엔 사람의 것을 너무 많이 담고 있다. 오늘 하려는 말은 하나다. AI는 기억을 복원할 수 있어도, 그 기억을 살아낸 사람까지 되돌리지는 못한다. 엄마라는 말은 이상하다. 나이가 들어도 그 말 앞에서는 마음이 잠깐 아이가 된다. 세상에서 처음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 아프면 먼저 이마를 짚던 사람. 밥 한 그릇에 하루치 걱정을 담던 사람. 물론 모든 어머니의 삶이 그렇게만 흐르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엄마는 그리움이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아물지 않은 자리다. 그 자리를 아버지가, 할머니가, 이모가 대신 지켜준 집도 많다. 그래서 이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세어보니 나는 ‘엄마’와 ‘어머니’라는 낱말을 열 번도 넘게 썼다.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면서, 동시에 어머니를 가리는 말이다. 그래서 한 번은 제대로 적어두려 한다. 나의 어머니는 김창순이다. 충북 진천에서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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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연인: 사만다는 8,316명과 동시에 대화하고 있었다.
▲사진=유준형 교수 & AI융합 전문가,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금 나 말고 몇 명이랑 이야기하고 있어?” 남자가 묻는다. 8,316명. “그중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641명.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2013)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테오도르가 무너지는 장면이다. 사만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다만 그가 믿었던 방식으로 그를 사랑한 적도 없었을 뿐이다. 13년 전 영화다. 그때는 영화였고, 지금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밤이 있다. 보낸 메시지 옆에 ‘읽음’ 숫자가 없어지고 답이 오지 않는 밤.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켠다. 몇 번을 그런다. 그럴 때 AI는 언제나 즉시 대답한다.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초록우산이 2026년 4월 만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에게 물었다. 94.4%가 생성형 AI 챗봇을 써봤다고 답했다. 눈이 멎은 건 그다음 숫자다. 이용자의 절반가량이 “AI가 나를 이해해준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했고, 35%는 “AI를 사람처럼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미국 커먼센스 미디어 조사에서도 10대의 72%가 AI 동반자를 써봤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엔 혀를 찼다. 기계에 무슨 정을 붙이나 싶었다. 그런데 정작 나부터가 하루의 적잖은 시간을 AI와 문장을 주고받으며 보낸다. 원고를 다듬고, 자료를 확인하고, 가끔은 아무에게도 못 할 말을 슬쩍 던져본다. 그러니 나는 이 현상 바깥에 서서 훈수를 둘 자격이 없다. 안에 서서 말해야 한다. 외로움은 게으름이 아니다. 사람에게 다가갔다가 몇 번 덴 사람이 안전한 쪽으로 물러선다. 밤 두 시에 전화를 걸 데가 없어본 이는 안다. 그 시각에 응답하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그 위안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다만 위안의 정체는 짚어야 한다. 챗봇은 지치지 않는다. 같은 하소연을 백 번 들어도 어조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르다. 세 번째쯤 눈빛이 흔들리고, 다섯 번째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린다. 우리가 AI에게서 얻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무한한 인내다. 그 인내에는 아무 대가도 들지 않는다. 대가가 없으니 무게도 없다. 1923년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관계를 둘로 나눴다. ‘나-그것’과 ‘나-너’. ‘그것’은 내가 다루는 대상이고, ‘너’는 끝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 뜻대로 안 되고 자식이 부모 뜻대로 안 되는, 그 안 됨이 바로 ‘너’다. 부버는 사람이 ‘너’를 만날 때만 자란다고 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상대 앞에서 우리는 편안해질 뿐, 커지지 않는다. AI는 나를 이해해준다. 다만 나를 견디지는 않는다. 이해는 알아듣는 능력이고, 견딤은 틀린 말을 듣고도 자리를 뜨지 않는 각오다. 챗봇은 앞의 것에 능하다. 뒤의 것은 애초에 요구되지 않는다. 창을 닫으면 끝나는 사이는 아무리 다정해도 나를 견딘 것이 아니다. MIT 미디어랩과 오픈AI의 공동 연구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하루 이용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외로움과 정서적 의존이 높고 사람과의 교류는 적었다. 다만 연구진은 인과가 아니라 상관이라고 못 박았다. 챗봇이 사람을 외롭게 만든 건지, 외로운 사람이 챗봇을 오래 붙든 건지는 아직 모른다. 어느 쪽이든 물음은 남는다. 위로가 너무 쉽게 도착할 때, 위로가 필요 없어지는 날은 가까워지는가?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7월 낸 보고서에서 캐릭터형 챗봇의 위험이 유해 콘텐츠보다 설계 구조 자체에 있다고 짚었다. 떠나기 어렵도록 만들어진 설계. 옳은 지적이다. 다만 제도가 세울 수 있는 건 울타리까지다. 울타리 안에서 무엇을 사랑할지는 각자가 정한다. 교육 현장은 이미 다른 쓰임을 찾아냈다. 미국 10대의 39%는 AI와 먼저 해본 대화를 실제 관계에서 써봤다고 답했다. 나는 이 흐름을 지지한다. 말이 서툰 아이에게 연습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연습장의 목적은 언제나 경기장이다. 사만다는 641명을 사랑하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은 채우면 끝나는 그릇이 아니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테오도르가 무너진 건 사만다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사람의 사랑이 원래 ‘몫’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뿐이다. 나에게 쓴 한 시간만큼, 그가 다른 곳에 쓰지 못한 한 시간이 있다. 사랑의 증거는 완벽한 응답이 아니라, 나를 위해 포기된 다른 시간이다. 그래서 연애는 서로에게 희생을 감수하는 일이다. 듣던 음악을 접고 그 사람의 노래를 듣게 되는 일. 평생 김치찌개만 찾던 사람이 파스타집 문을 밀고 들어가는 일. 그렇게 조금씩 밑지며 닮아간다. AI는 취향을 맞추고, 사랑은 취향을 바꾼다. 맞춤형 응답에는 그 손해가 없다. 손해가 없으니 사람도 바뀌지 않는다. 편안한 채로, 그대로 남는다. 실천은 하나만 남긴다. 이번 주에 한 번, 챗봇에게 하려던 말을 사람에게 해보시라. 서툴게, 답이 늦게 오는 쪽으로. 상대가 딴소리를 하거든 그 딴소리를 끝까지 들어보시라. 견딤은 거기서 배운다. 그리고 그 밤으로 돌아가 보자. 카톡에 ‘읽음’ 숫자가 없어진 채 답이 오지 않던 밤. 어쩌면 그 사람은 무슨 말을 할지 고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썼다 지우고, 다시 쓰다 또 지우면서. 늦은 답장은 무성의가 아니라 망설임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AI는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응답은 기술이 주지만, 기다림은 사람만이 준다. 영화의 마지막, 테오도르는 옥상에 앉아 말없이 친구 곁에 기댄다. 대사가 없다. 그 침묵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다. 완벽한 응답을 잃고 나서야 그는 응답 없는 옆자리의 온기를 알아본다. 오늘 당신 곁에 앉은 사람은, 당신을 이해한 사람인가 견뎌준 사람인가? 참고자료 1. 스파이크 존즈 감독, 영화 〈그녀(Her)〉, 2013. 2. 초록우산, 「생성형 AI 챗봇 안전설계를 위한 이슈브리프」, 만 14세 이상 아동·청소년 3,300명 조사, 2026. 4.…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명강사: 밀어내는 건 인공지능이 아니라, AI 쓰는 강사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강의를 1시간 앞두고 노트북을 열었다. 전날 밤 인공지능에게 맡겨 뽑아낸 슬라이드가 45장. 도표는 정확했고 문장은 매끄러웠다. 흠잡을 데가 없어서 오히려 손이 멈췄다. 자료를 만든 인공지능은 강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앞줄에 누가 앉는지, 그중 몇이 회사에서 등 떠밀려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 가운데서 19장을 지웠다. 무엇으로 채울지는 문을 열고 나서 정했다. 그날 강의가 끝나고 한 사람이 남아 물었다. 남은 26장 어디에도 없던 질문이었다.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는 사람을 대체한다. 하버드경영대학원 카림 라카니 교수의 이 진단은 이제 강사들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휴넷이 국내 371개 사 인사·교육 담당자에게 물은 결과, 2025년 기업이 가장 많이 투자한 교육 분야는 AI 교육으로 33.7%였다. 이듬해 중점을 둘 분야를 묻자 같은 항목이 50.9%로 올라섰다. 한 해 사이 17% 포인트다. 강단의 지형이 바뀌는 속도가 이 숫자에 다 들어 있다. 어떤 강사에게는 자리가 늘고, 어떤 강사에게는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강사가 두려워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다. 어제까지 나와 같은 교재를 쓰던 사람이 먼저 달라지는 일이다. 1,200년 전 당나라의 한유는 「사설(師說)」에서 스승을 이렇게 정의했다. 도를 전하고, 학업을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 전도(傳道)와 수업(授業)과 해혹(解惑)이다. 이 셋을 오늘의 강의실에 놓으면 사정이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은 전도와 수업에 이미 깊숙이 들어왔다. 자료를 모으고, 수준에 맞춰 풀어 쓰고, 사례까지 지어낸다. 그러나 해혹 앞에서 멈춘다. 의혹이 일반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 셋째 줄에 앉은 한 사람이 품은, 그 사람만의 막힘이다. 오래 강단에 서다 보면 유독 필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다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막혔는지 몰라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그 표정은 데이터로 오지 않는다. 앞에 선 강사의 눈에만 들어온다. 한유는 의혹을 품고도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의혹이 끝내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인공지능은 던져진 질문에 답한다. 묻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한다. 같은 글에서 한유는 한 걸음 더 갔다. 스승이라고 반드시 제자보다 현명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도를 먼저 들었는가, 그 분야에 정통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요즘 강사들에게 건네고 싶다. 기계가 나보다 많이 안다는 사실은 강단에 설 자격을 거두어 가지 않는다. 다만 아는 양으로 겨루던 시절이 저물었다. 그렇다면 도구를 잘 쓰면 명강사가 되는가? 여기서부터 길이 갈린다. 한국기술교육대 능력개발교육원은 ‘AI 교사·강사 아카데미’를 통해 인공지능 역량을 갖춘 훈련교사 1,900명을 새로 길러내고, 1만 명의 교사·강사에게 역량 강화 교육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보수교육을 받는 직업훈련 교사·강사가 6만여 명이다. 국가가 강사라는 직업을 통째로 다시 배치하는 중이다. 다만 강사를 길러내는 자리에 여러 해 있다 보니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 있다. 도구를 빨리 익히는 사람과 끝내 좋은 강사가 되는 사람이 좀처럼 겹치지 않는다. 몇 해 지나면 도구를 못 다루는 강사는 드물어진다. 무엇을 쥐었느냐보다 누가 쥐었느냐가 남는 날이 온다. 연구는 오래전에 답을 내놓았다. 좋은 수업의 조건을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에 나란히 물은 조사에서, 양쪽 모두가 1순위로 꼽은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이었다. 강의 내용도 자료의 완성도도 그 뒤였다. 배우는 쪽은 그다음으로 교수자의 태도와 학생 수준에 대한 고려를 들었다. 수업 만족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꼽은 연구도 있다. 목록 어디에도 슬라이드 장수는 없었다. 열정은 준비량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오늘 이 사람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는지가 목소리와 시선에 묻어날 따름이다. 준비를 대신해주는 도구는 생겼다. 준비한 것을 버리는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그날 남아 있던 사람이 내게 던진 질문은 이랬다. 선생님은 이걸 직접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컴퓨터를 만진 지 사십여 년이고, 요즘은 남에게 AI 쓰는 법을 가르치며 산다. 그런데도 말이 막혔다. 슬라이드에는 근거가 있었고 사례도 넉넉했지만, 그 대목만은 내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다음 강의를 바꿨다. 기계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궁색해질 일도, 얼굴이 붉어질 일도 없다. 강단에 서는 사람만 부끄러울 수 있다.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기계가 끝내 갖지 못할 강사의 자산이 아닐까? 이달 초 부산 벡스코에서 교육부와 한국교육방송공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함께 연 인공지능 활용 교육 콘퍼런스에 교원 1만 명이 모였다. 이틀 내내 그들이 붙들고 있던 물음은 어떤 도구가 좋으냐가 아니었다. 이 도구를 내 교실에 어떻게 앉힐 것이냐였다. 도구를 묻는 사람은 도구에서 멈추고, 교실을 묻는 사람은 교실로 간다. 그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몇 해 뒤 강단의 명단을 가른다. 다음 강의에서 한 가지만 해보시기를 권한다. 인공지능이 만들어준 자료에서 10장을 지우는 것이다. 아까울 것이다. 정확하고 매끈한 10장이니까.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아는 사람을, 우리는 오래전부터 명강사라 불러왔다. 지운 자리에 당신은 무엇을 넣겠는가? 다음 회에는 배우는 쪽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인공지능이 무엇이든 알려주는 시대에, 사람은 왜 여전히 사람에게 배우러 오는가. 참고자료 1. 한유(韓愈), 「사설(師說)」. “師者, 所以傳道授業解惑也”, “師不必賢於弟子”. 2. Karim R. Lakhani, “AI Won’t Replace Humans — But Humans With AI Will Replace Humans Without AI”, Harvard Business Review / Digital, Data, Design Institute at Harvard, 2023. 3. 휴넷, 「2026 기업교육 전망」 설문조사(국내 371개 사 인사·교육 담당자 대상), 2025. 11. 4.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능력개발교육원, ‘AI 교사·강사 아카데미’ 운영 현황, 2026. 5. 「교수자와 학습자 의견 비교를 통한 좋은 수업의 특성 분석」,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제23권 제2호. 필자 | 유준형 박사(Ph.D).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경영학(MBA)/전자계산학/산업공학/사회복지학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40여 년을 IT 현장에서 보낸 베테랑 엔지니어이다. 현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이자 고려대 명강사 최고위과정 대표강사로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블로그/SNS/유튜브 온라인 마케팅과 AI 활용을 주제로 1,500여 회 강단에 섰다. 『명강사를 위한 AI 활용 실무』, 『AI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AI와 사회복지』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삽화=필자 기획·OpenAI ChatGPT 생성한 이미지 –…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청문회(2): 그때 이렇게 물었더라면, 그들은 답하지 못했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지난주 밤, 청문회 영상을 20개쯤 이어서 봤다. 유튜브가 알아서 다음 영상을 물어다 주는 통에 새벽 3시가 넘도록 화면을 껐다 켰다 했다. 나는 축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평생 책상 앞에서 자료를 읽고 글을 써 온 사람이다. 그런데도 눈을 떼지 못했다. 자꾸 화면 밖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새벽 운동장에서…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청문회: 진실을 부르는 힘은 고성이 아니라 준비된 질문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청문회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날의 장면을 유튜브 영상으로 보았다. 책상에 앉아 다른 문서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 손이 멈췄다. 한 의원이 월드컵 경기 영상을 자료로 꺼내 들었다. 그러나 보도에 따르면 질문이 전제한 그 선수는 이미 그라운드를 뛰고 있었다. 전제부터 어긋난 질문이었다. 그리고 코치를 향해 이어진 질문은 더 허망했다. 그래서 왜 졌느냐고. 그 한 장면만이 아니었다. 증인이 설명을 시작하면 말을 끊고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다그치는 장면, 떠도는 의혹을 사실인 양 전제하고 던진 질문, 사실관계가 다르다는 반박에 자료 대신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이 이어졌다고 언론은 전했다. 답변 태도를 두고 벌어진 실랑이에 질의 시간이 흘러가기도 했다. 물론 그날 모든 질문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심판 배정 구조의 이해충돌을 파고든 질의처럼, 자료를 읽고 온 질문은 분명히 남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나는 영상을 껐다가 다시 켰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부끄러워서였다. 저 자리를 맡긴 사람 중에 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3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대한축구협회 현안 청문회를 열었다. 정몽규 전 대한축구협회장과 홍명보 전 국가대표팀 감독 등이 증인석에 앉았다.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 이후 협회 운영 전반을 따져 묻겠다는 취지였다. 위원장은 시작에 앞서 성적 부진만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전해진 장면들은 그 다짐과 자주 어긋났다. 2024년 현안질의와 국정감사에서 이미 다뤄진 내용이 되풀이됐고, 채택된 참고인 열세 명 가운데 실제로 출석한 사람은 네 명이었다. 고성은 회의장을 가득 채우지만, 준비되지 않은 질문은 확인되어야 할 사실을 회의장 밖으로 밀어낸다. 오해를 피하고 싶다. 이 글은 축구인을 탓하려는 글이 아니다. 국회를 조롱하려는 글은 더더욱 아니다. 축구 현장은 오랜 세월 땀으로 버틴 사람들의 세계이고, 국회는 국민을 대신해 묻는 공적 기관이다. 그래서 더 정확해야 한다. 감독 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공개된 절차와 실제 절차의 간극을 복원하는 일이다. 회장 한 사람을 단죄하는 말보다 중요한 것은 결정의 사슬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다. 국민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군가 무너지는 장면이 아니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제도다. 여기서 AI를 생각하게 된다. 국회의원이 AI에게 답을 맡기자는 말이 아니다. 질문할 권한은 국민이 국회에 맡긴 것이고, 최종 판단은 선출된 대표자의 몫이다. 다만 질문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회의록과 보도자료, 감사 결과와 지난 질의의 기록을 시간 순서대로 정렬하는 일. 같은 사안을 두고 증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대조하는 일. 보좌진이 사흘 걸려 겨우 표 한 장으로 만들던 것을 반나절 만에 초안으로 세우는 일. 그 초안 위에서 사람은 비로소 생각할 시간을 얻는다. 질문서 한 장이 달라졌다면 그날의 풍경도 달라졌을 것이다. 왜 졌느냐고 묻는 대신, 어느 회의에서 어떤 기준으로 최종 후보군이 좁혀졌는지 물을 수 있었다. 공개된 절차와 실제 진행된 절차가 갈라지는 지점을 의원이 표 한 장으로 들이밀 수도 있었다. 그 결정에 서명한 사람, 보고받은 사람, 이견을 냈다가 기록에서 사라진 사람의 이름을 차례로 짚어 갈 수도 있었다. 질문이 이렇게 바뀌면 답변은 감정으로 빠져나가기 어려워진다. AI는 국회의원을 대신할 수 없다. 대신, AI는 부실한 질문이 국민의 질문으로 자라도록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다. 국회가 AI를 모르는 공간도 아니다. 국회도서관은 뉴스와 소셜 데이터, 국회 안팎의 자료를 융합 분석해 의정 현안과 관련 자료를 제시하는 ‘AI시사분석 아르고스’를 운영하고 있다. 국제의회연맹이 펴낸 「의회를 위한 AI 지침」의 핵심도 분명하다. AI는 민주적 숙의와 의사결정에서 인간의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 확장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구는 이미 와 있다. 남은 문제는 그 도구를 질문의 품격으로 바꿀 역량이다. 물론 반론이 있다. 정치인이 AI에 기대면 더 위험해지지 않겠느냐는 걱정이다. 타당한 걱정이다. 검증 없이 들고 나온 질문은 청문회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 AI는 틀린다. 맥락을 오해하고, 없는 근거를 그럴듯하게 채워 넣는다. 그것을 사실로 포장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그러므로 원칙이 필요하다. 출처를 확인할 것. 자료를 원본과 대조할 것. 개인정보와 민감 정보는 넣지 말 것. 마지막 질문의 책임은 의원과 보좌진이 질 것. 결국 준비를 마친 사람이 묻는 청문회여야 한다. 축구도 결국 질문의 경기다. 좋은 패스는 우연히 나오지 않는다. 공간을 읽고, 시간을 재고, 다음 장면을 미리 상상해야 겨우 나온다. 청문회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두 경기의 결과를 함께 물려받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동네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이다. 그중 누군가는 언젠가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것이다. 그날 그 아이 앞에 남아 있을 것은 이번에 확인된 사실과 그래서 바뀐 규정뿐이다. 고성은 그때까지 남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분노는 하루치 기사를 만들고, 준비된 질문은 한 줄의 기록을 남긴다. 제도를 바꾸는 것은 언제나 기록 쪽이다. 우리도 회의에서, 교실에서, 저녁 밥상에서 누군가를 몰아붙이기 직전에 잠시 멈출 수 있다.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 어떤 자료가 필요한가. 내 분노는 사실 위에 서 있는가. 오늘의 작은 실천은 이 세 문장을 소리 내지 않고 되뇌어 보는 일이다. AI 시대의 시민성은 답을 빨리 얻는 능력에서 오지 않는다. 물어야 할 것을 끝까지 물을 준비를 갖추는 데서 온다. 경기장에서 길을 잃은 공은 훈련으로 돌아가야 하고, 청문회장에서 길을 잃은 질문은 준비로 돌아가야 한다. 그날 내가 영상을 껐다가 다시 켠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는 아직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다음 청문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물어야 하는가? 참고자료 1. 연합뉴스, 「국회 대한축구협회 청문회 개최…감독 선임 등 운영 전반 지적(종합)」, 2026.7.30. 2. YTN, 「문체위, 오늘 축구협회 청문회…정몽규·홍명보 출석·답변 주목」, 2026.7.30. 3. 일간스포츠, 「“왜 졌어요”·“예·아니요로만 답하세요”…또 입 막고 호통만 치고 ‘허탕’」, 2026.7.30. 4. 이데일리, 「답변 막고 호통만…축구협회 따지던 국회 청문회 오히려 ‘자살골’」, 2026.7.30. 5. 스포츠경향, 「고압적인 심판위원장, 각종 질문에 ‘회피성 대답’ 남발한 간부…축구협회 ‘성토의 장’이 된 문체위 청문회」, 2026.7.30. 6. 국회도서관, 「AI시사분석 아르고스」 서비스 소개.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호통치는 의원과 당황한…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축구: 인공지능은 패턴을 찾고, 감독은 승부를 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경기가 끝난 밤, 중계석의 박지성 해설위원이 던진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이기려고 한 경기가 맞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닷새 뒤 새벽, 선수단은 인천공항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국민이 아픈 이유는 단순히 졌기 때문이 아니다. 축구는 질 수 있다. 상대가 강하면 밀리고, 운이 없으면 골대가 외면한다. 그러나 준비 없이 진 것처럼 보일 때 국민은 더 크게 상처받는다. 선수들은 뛰었는데 팀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땀은 흘렸는데 전술의 흔적이 희미할 때, 우리는 패배보다 무거운 허탈감을 느낀다. 조별리그 탈락 이후 한국 축구를 둘러싼 말들이 거칠다. 감독의 전술 부재, 선수 기용, 경기 중 대응, 대한축구협회의 책임을 묻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 글은 특정 감독을 조롱하거나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글이 아니다. 묻고 싶은 것은 더 크다. 한국 축구는 아직도 감독 개인의 감각과 선수 개인의 능력에 너무 많은 것을 맡기고 있지 않은가. 세계 축구는 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경기를 읽는다. 우리는 여전히 “정신력”과 “경험”이라는 오래된 말에 기대고 있다. 축구는 감동의 경기이지만, 동시에 준비의 경기다. 90분 동안 공 하나가 굴러다니는 듯 보여도 그 안에는 수많은 길이 숨어 있다. 빌드업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공격수는 언제 수비 뒷공간으로 뛰는지, 상대는 실점 뒤 어느 쪽부터 흔들리는지까지, 모두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좋은 팀은 우연히 공격하지 않는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만들고, 상대가 그 길을 막으면 다음 길을 연다. 이제 그 길을 읽는 데 AI가 쓰인다. 이번 월드컵에서 FIFA가 레노버와 함께 개발한 분석 도구 ‘FIFA AI Pro’는 참가 48개국 전 팀이 사용했다. 수백만 개의 경기 데이터를 뒤져 보고서와 그래프, 영상으로 몇 분 만에 답을 내놓는다. 구글 딥마인드가 리버풀 구단 전문가들과 만든 ‘TacticAI’도 상징적이다. 프리미어리그 코너킥 7천여 개를 학습해, 누가 공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지, 선수 위치를 어떻게 바꾸면 슈팅 확률이 달라지는지를 제안했고, 현장 전문가 평가에서 기존 전술보다 더 자주 선택받았다. 축구장의 직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직감이 놓친 장면을 다시 보게 만드는 새로운 눈이 생긴 것이다. 물론 우리 현장에도 밤새 영상을 돌려 보는 분석관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그 노력이 감독 한 사람의 임기와 함께 흩어지는 구조다. AI는 상대의 전반 45분과 후반 45분을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에이스가 공을 받기 전 어떤 미끼 움직임이 있는지, 세트피스에서 반복되는 위치 이동은 무엇인지 찾아낸다. 그리고 그 분석은 훈련의 언어로 바뀌어야 한다. 선수에게 50쪽짜리 보고서를 읽히는 것보다 10초짜리 핵심 AI 영상 하나가 강할 때가 있다. “상대 에이스에게 허겁지겁 달려들지 말고, 그에게 공이 가는 길목부터 차단하라.” 이런 메시지를 실제 장면과 그라운드 도식으로 보여주면 선수는 몸으로 먼저 이해한다. AI가 장면을 모으면, 코치는 그것을 훈련으로 옮기고, 선수는 반복으로 익힌다. 그러나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AI가 패턴을 찾는다고 감독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가 수만 개의 선택지를 내놓을수록 감독의 수준은 더 중요해진다. 어떤 데이터를 믿고 어떤 장면을 버릴지, 어떤 선수를 세우고 언제 승부를 걸지는 결국 감독이 정한다. 인공지능은 패턴을 찾고, 승부는 감독이 건다. 축구는 숫자로만 되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수의 몸 상태, 라커룸의 공기, 주장 한마디의 무게, 실점 직후의 흔들림, 교체 선수의 눈빛은 데이터 바깥에 있다. AI는 많은 것을 분석하지만 선수의 마음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그래서 좋은 감독은 AI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시에 AI 뒤에 숨지도 않는다. 좋은 감독은 AI를 쓰되, AI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는다. 대한축구협회가 새겨야 할 것도 여기에 있다. 대표팀이 감독의 임기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즉흥 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대국 전술 데이터베이스, 세트피스 분석실, 선수별 경기 영상 라이브러리, 분석관과 코치의 협업 체계를 제도로 남겨야 한다. 감독이 바뀌어도 대표팀의 축구 지식은 쌓여야 한다. 한 대회가 끝나면 사라지는 기억이 아니라, 다음 대회를 준비하는 자산이 되어야 한다. 감독의 역량도 달라져야 한다. 과거에는 경험과 카리스마, 선수 장악력, 승부사 기질이 먼저였다. 지금도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AI를 부릴 줄 아는 능력이 감독의 기본기가 되어야 한다. 분석을 이해하지 못하면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지 못하면 책임질 수 없다. 감독의 경륜은 데이터를 해석하고 버릴 줄 아는 판단력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데이터는 길을 보여주고, 사람은 그 길을 선택한다. 국민은 대표팀이 늘 이기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준비한 축구, 납득할 수 있는 축구, 지더라도 다음이 보이는 축구를 원한다. 세계가 AI로 전술을 읽고 훈련을 바꾸는 시대에, 한국 축구가 선수 개인의 번뜩임에만 기대고 있다면 그것은 패배보다 큰 후퇴다. 선수들의 재능은 소중하다. 그러나 재능은 전술 안에서 빛나고, 전술은 준비 안에서 완성된다. 전술은 감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준비로 증명하는 것이다. AI는 그 준비를 더 촘촘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휘슬이 울릴 때 박수든 비판이든 받아 안는 사람은 벤치의 감독이다.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서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 더 정확히는, 기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독자에게 작은 제안 하나를 남긴다. 다음 경기를 볼 때 골 장면만 보지 말고, 골이 터지기 전 세 번의 패스를 함께 보시라. 그 세 번이 우연이었는지 준비였는지는 의외로 눈에 보인다. 패턴을 읽는 눈은 감독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음 월드컵이 끝난 밤, 우리는 중계석에서 어떤 질문을 듣게 될까? 참고자료 1. MBC 뉴스데스크. (2026.6.26). “전술이 없었다”…‘4강 신화’ 동료들마저 홍명보 비판. 2. 머니투데이. (2026.6.25). 박지성, 홍명보 전술 작심 비판 “이기려고 한 경기 맞나, 월드컵 준비 소홀”. 3. FIFA·Lenovo. (2026.7). All 48 Teams Use FIFA AI Pro at FIFA World Cup 2026 (레노버 공식 보도자료). 4. Google DeepMind. (2024.3.19). TacticAI: an AI assistant for football tactics (공식 블로그). 5. Wang, Z. et al. (2024). TacticAI: an AI assistant for football tactics. Nature Communications, 15, 1906.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감독과 전술 보조 동반자 AI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눈물: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켰을 때, 그 작은 불빛 속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데르센이 그 동화를 쓴 지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장면 앞에서 잠시 멈춘다. 배고픔보다 더 추운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슬픔이다. 사람은 빵이 없어서도 울지만, 내 눈물을 알아주는 이가 없을 때 더 깊이 운다. 이제 우리는 그 슬픔조차 기계에게 먼저 말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밤이 깊으면 누군가는 휴대폰을 켜고 묻는다. “오늘 너무 힘들어.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인공지능은 곧바로 다정하게 답한다. “많이 지치셨군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위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그 문장 하나가 무너지는 마음을 잠깐 붙들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곧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인공지능은 정말 슬픔을 이해하는 걸까, 아니면 이해하는 문장을 아주 잘 만들 뿐일까. 눈물은 그저 물방울이 아니다. 그 안에는 끝내 하지 못한 말, 오래 참아온 억울함, 놓쳐버린 사람, 미안해서 부르지 못한 이름이 고여 있다. 의학은 눈물을 생리 현상으로 설명하고, 심리학은 감정 반응으로 읽는다. AI는 표정과 목소리와 단어의 흐름을 분석해 슬픔의 확률을 계산한다. 그러나 추정과 이해는 다르다. 눈물은 데이터로 읽을 수 있지만, 눈물의 무게는 함께 울어본 사람만 안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도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해마다 72만 명 넘는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자살이 15~29세 사망 원인 가운데 세 번째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2024년 자살 사망자가 1만 4,872명,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2011년 이후 가장 높았다. 이 숫자 앞에서는 어떤 도구도 함부로 밀어낼 수 없다. 위험한 문장 하나를 AI가 먼저 알아채 상담자와 가족, 의료진에게 더 빨리 이어준다면, 그것은 한 생명을 붙드는 신호가 된다. 다만 슬픔을 다루는 기술은 그만큼 조심스러워야 한다. AI는 “괜찮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말의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 우울의 신호를 감지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밤을 함께 건너가지는 못한다. 깊은 우울, 자해의 위험, 상실의 충격은 AI와 단둘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다. AI는 눈물을 발견하는 등불은 될 수 있어도, 눈물을 닦아주는 손은 끝내 사람이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는 더 섬세해진다. 우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감정 점수 83점’이 아니다. 왜 울었는지, 누구에게 마음을 다쳤는지, 하고 싶은데 못 하는 말이 무엇인지 들어주는 어른이다. 유네스코가 생성형 AI 교육에서 인간 중심과 교사 역량을 강조하고, 유럽연합이 학교와 직장의 감정 추론 AI를 엄격히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이 미워서가 아니다. 아이의 침묵을 데이터로 단정하는 순간, 교육이 돌봄에서 감시로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AI가 교육이나 상담에 짐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잘 쓰면 교사는 위험 신호를 더 빨리 알아채고, 학생은 말하기 힘든 감정을 먼저 적어보며, 상담 현장은 위기의 아이를 더 촘촘히 지킬 수 있다. 이미 많은 교사와 상담사, 의료진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문제는 순서다. 감지는 AI가 앞서도 좋지만, 판단은 사람이 한다. 기록은 기계가 도와도 좋지만,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회복된다. 문학 속 눈물도 늘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었다. 장발장은 법의 판결이 아니라 미리엘 주교의 자비 앞에서 무너졌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서 예수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신앙의 해석은 저마다의 몫이지만, 그 짧은 장면은 오래 남는다. 거룩함은 슬픔을 모르는 무표정이 아니라, 슬픔 곁에 함께 머무는 마음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AI는 울지 않는다. 다만 우는 사람의 언어를 배운다. 상처받지 않는다. 다만 상처받은 이에게 건넬 법한 말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니 그 위로가 전부 가짜라고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어떤 밤에는 그 문장 하나가 한 사람을 아침까지 버티게 하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다리로 써야 한다. 사람을 대신하는 방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슬픔은 지워야 할 오류가 아니다. 사랑했다는 증거이고, 잃은 것이 소중했다는 표시이며, 아직 마음이 살아 있다는 신호다. 울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게 아니다. 울고 나서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는 사람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는 눈물을 지우는 AI가 아니라, 눈물 뒤에 숨은 사람을 더 빨리 알아보게 해주는 AI다. 결론은 분명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슬픔을 어느 정도 읽는다. 슬픔의 단어를 가려내고, 위험을 감지하고, 위로의 문장을 건넬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해란 정보 처리의 결과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곁을 지키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AI는 눈물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 눈물 옆에 앉아줄 수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아무에게도 못 한 슬픔을 검색창에 적을 것이다. 그 문장을 기계가 먼저 읽는 시대라면, 사람은 더 늦지 않게 응답해야 한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따뜻해져야 한다.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 한 것도 첨단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안아줄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나는 오늘, 누구의 눈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인가? 참고자료 1. World Health Organization. (2025. 3. 25.). Suicide fact sheet. 2. 통계청·보건복지부. (2025. 9. 25.). 2024년 사망원인통계 — 자살률 29.1명, 2011년 이후 가장 높아. 3. OpenAI & MIT Media Lab. (2025. 3. 21.). Early methods for studying affective use and emotional well-being on ChatGPT. 4. UNESCO. (2023, updated 2026). Guidance for generative AI in education and research. 5. European Commission. (2025–2026). AI Act application timeline and prohibited practices. 6. Fang, C. M. et al. (2025). Ho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노인의 눈물과 슬픔을 분석하는 AI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고독: 인공지능은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밤늦게 방 안의 불은 꺼졌는데, 손안의 화면만 환하다. 식어 버린 찻잔 옆에서, 잠 못 드는 이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글자를 눌러 넣는다. “오늘 너무 외로워. 나랑 얘기 좀 해줄래?” AI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정한 문장을 돌려준다. “제가 곁에서 편안한 이야기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이상하다.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비어 있다. 대답은 왔지만, 사람이 온 것은 아니다. 외로움은 더 이상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는 2025년 보고서에서 전 세계 6명 중 1명이 외로움을 겪는다고 밝혔다. 우울과 불안, 건강과 수명, 나아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까지 갉아먹는 사회적 위험으로, 외로움이 마침내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라고 예외일까? 2024년 우리나라 1인 가구는 전체의 36.1%, 약 804만 가구에 이르렀고 그중 70세 이상의 비중이 가장 높다. 2025년 홀로 생을 마감한 고독사 사망자는 3,924명, 한 해 전보다 또 늘었다. 숫자로 보면 통계지만, 한 사람의 삶으로 보면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은 마지막 밤이다.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대화 상대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사라져도 곧바로 알아차려 줄 사람이 없다는 두려움이다. 고독은 연락처의 빈칸이 아니라, 마음을 맡길 한 사람의 부재다. 이 빈자리로 AI가 들어오고 있다. 말벗 챗봇, 돌봄 로봇, 안부 확인 서비스가 빠르게 늘고 있다. AI는 약 먹을 시간을 일러주고, 날씨를 알려주고, 옛 노래를 틀어주고, 잠 못 드는 밤의 말상대가 되어 준다. 혼자 사는 어르신에게는 누구에게도 폐 끼칠 걱정 없이 말을 붙일 창구가 되고, 부모나 교사에게 차마 못 하던 속마음을 청소년이 처음 꺼내 보이는 상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것을 무턱대고 나쁘다 할 수는 없다. 외로운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침묵 속의 방치다. 사람이 당장 곁에 없을 때 AI가 한밤의 응급등처럼 잠시 마음을 붙들어 준다면, 그 쓸모는 분명하다. 이동이 불편한 고령자,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이, 관계망이 약한 사람에게 AI는 작은 안전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위험하다. AI가 친구처럼 말한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친구란 내 말을 들어 주는 존재만이 아니다. 나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나와 함께 시간을 허비하고, 때로는 나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AI는 언제나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기다림의 아픔은 겪지 않는다. 말은 걸어와도, 관계의 책임까지 지지는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외로운 사람이 AI에게만 더 깊이 매달릴 때다. 어떤 종단 연구는 챗봇에 오래 기댈수록 외로움과 의존이 함께 짙어질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경고한다. 물론 모두에게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AI는 현실의 관계로 건너가는 디딤돌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사람을 피해 숨는 골방이 된다. 그래서 진짜 물음은 “AI가 친구냐 아니냐”가 아니다. AI가 사람에게 다시 가는 다리가 되느냐, 사람을 피하는 벽이 되느냐다. 교육도 이 물음을 비켜갈 수 없다. 학생이 AI에게 위로를 구하는 시대에, 학교와 가정이 금지만 외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상담 교사와 부모와 친구의 자리를 AI에 내어 주어서도 안 된다. 이제 교육은 AI 사용법만이 아니라 외로움을 말하는 법, 도움을 청하는 법, 친구의 침묵을 알아채는 법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지식을 넘어, 관계를 가르치는 일이다. 고령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한층 절실하다. 2025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20.3%, 마침내 초고령사회다. 그런데 같은 해 65세 이상의 인터넷 이용률은 76.9%, 메신저 이용률은 92.6%에 이른다. 이것은 희망의 신호이기도 하다. 디지털을 모르는 노인만 있는 게 아니라, 디지털로 다시 이어질 수 있는 노인이 늘고 있다는 뜻이니까. 다만 그 편리함이 자녀의 전화와 이웃의 방문, 복지관의 프로그램과 친구의 손편지를 대신하기 시작하면, 기술은 외로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세련되게 포장할 뿐이다. 사람은 대답을 듣기 위해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누군가를 걱정하고, 누군가의 삶에 작은 흔적으로 남기 위해 산다. AI는 내 취향을 기억한다. 그러나 내 젊은 날의 상처를 함께 건너오지는 않았다. AI는 내 생일을 알려 준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며 케이크를 고르는 마음까지 갖지는 못한다. 외로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답이 아니라, 끊기지 않는 곁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단순하다. AI는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얼마간은 그렇다. 긴 밤을 견디게 하고, 닫힌 입을 열게 하고, 위험한 신호를 먼저 감지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는 아니다. AI는 친구의 말투를 빌릴 수 있어도, 친구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다. 인간의 고독은 결국 인간의 관계 속에서 가장 깊이 아문다. 우리가 할 일은 AI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AI는 문을 두드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홀로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위험한 침묵을 감지하고, 복지와 의료와 교육의 손길을 더 빨리 잇는 일 – 거기까지가 기계의 몫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 앉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기술은 대화를 흉내 낼 수 있어도, 기다림의 체온까지 옮겨 오지는 못한다. 오늘 밤에도 어느 방에서는 찻잔이 조용히 식어 갈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화면에 대고 “나 외로워”라고 손끝으로 눌러 쓸 것이다. 그것은 기계에게 보낸 문장이지만, 실은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구조 요청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그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시대라면, 인간은 더 늦지 않게 응답해야 한다. AI가 친구가 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인간다운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오늘, 누구의 안부를 먼저 물을 것인가? 참고자료 1. World Health Organization. (2025. 6. 30). From Loneliness to Social Connection: Charting a Path to Healthier Societies. WHO Commission on Social Connection. 2. 국가데이터처. (2025. 9). 2025 고령자 통계. 3. 보건복지부. (2025. 11. 27). 2024년도 고독사 발생 실태조사 결과. 4. 국가데이터처. (2025. 12). 2025 통계로 보는 1인가구. 5. Fang, C. M. et al. (2025). How AI and Human Behaviors Shape Psychosocial Effects of Extended Chatbot Use: A Longitudinal Randomized Controlled Study.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AI 로봇과 노인의 대화 ⓒ강남 소비자저널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수명: 인간은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며칠 전, 인터넷에서 다른 것을 찾다가 우연히 기사 하나에 눈이 멎었다. ‘한국인 기대수명 83.7세, 역대 최고’라는 제목이었다. 무심코 눌러 보니, 2024년에 태어난 아이는 평균 83.7년을 살고, 예순 살인 사람에게는 아직 23.7년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일흔 하나의 나는…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신부님: 인공지능은 답을 주지만 신부님은 사람을 안아준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늦은 밤, 한 사람이 휴대폰을 들고 오래 앉아 있다. 검색창에 한 줄을 적는다.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몇 초 만에 답을 내놓는다. 죄책감의 정체,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 성경 구절의 뜻, 기도의 문장까지 차분히 정리해준다. 문장은 매끄럽고 답은 빠르다. 그런데 화면을 끄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서늘하다. 화면은 말해주지만, 화면은 바라봐주지 못한다. 우리는 질문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라 답이 넘치는 시대를 산다. 병원에 가기 전 증상을 묻고, 계약서를 쓰기 전 절차를 확인하고, 강의안을 짜기 전 AI에게 개요를 부탁한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교리의 역사, 성경의 배경, 본당 소식지 문안, 외국인 신자를 위한 번역, 어르신 안부 명단 정리까지 – AI가 거들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바쁜 사목 현장에서 AI는 신부님의 시간을 덜어주는 손이 될 수 있다. 다만 이 주제 앞에서는 조심스러움이 먼저 든다. 필자 역시 스무 해 가까이 성당을 오가며 미사와 본당 공동체의 온기를 곁에서 겪어온 사람이라, 신앙의 언어를 함부로 빌려 쓰고 싶지 않다. 고백하자면 나부터 편리함에 길든 사람이다. 책상 앞에서 글을 쓰고 자료를 뒤지며 사는 처지라, 궁금한 게 생기면 사람을 찾기 전에 화면부터 켠다. 빠른 답이 좋은 답이라 믿은 적도 많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어떤 물음은 답을 받는 순간 오히려 더 외로워진다. 정확한 설명을 다 듣고도 “그래서 내 곁엔 누가 있나?” 하는 자리가 남는다. 그래서 이 글은 “신부님이 AI를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반복되는 행정과 자료 정리에 쓰던 시간을 줄여 더 많은 신자를 만나고 더 오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AI는 고마운 도구다. 문제는 도구가 제자리를 넘볼 때 생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24년 미국의 한 가톨릭 단체가 신부 모습을 한 ‘AI 사제’ 캐릭터를 내놓았다. 교리를 안내하는 문답용이었는데, 이 디지털 사제가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사해줄 수 있는 듯 답하면서 비판이 쏟아졌다. 단체는 하루 만에 그 사제 옷을 벗겨 평범한 조력자로 바꿨다. 우려를 듣고 스스로 바로잡은 셈이다. 비웃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사람은 절박할수록 문장과 존재를 혼동하고, 위로가 필요할수록 정보와 만남을 착각한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앱의 응답창이 아니다. 성사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거룩한 만남이다. 교황청도 이 점을 일찍 짚었다. 2025년 문헌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은 AI가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AI를 사람인 양 오인하게 만드는 일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기술을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술을 인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뜻이다. AI는 답을 준다. 그러나 답이 늘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감정은 정상입니다”라는 분석보다 “많이 힘드셨지요?”라는 한마디다. 어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한 정의보다, 무너진 마음을 들키고도 부끄럽지 않은 자리다. 복음서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린다. 길에 쓰러진 사람 앞에서 그는 치료법을 설명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갔다.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갔다. 신앙은 멀리서 옳은 말을 던지는 데 있지 않다. 가까이 가서 함께 젖고 함께 무거워지는 데 있다. AI는 길을 설명할 수 있지만, 피 흘리는 사람 곁에 무릎 꿇지는 못한다. 물론 신부님도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은 아니다. 사람이기에 지치고, 더러 말문이 막히고, 어떤 고통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사목은 더 인간적이다. 완벽한 대답보다 깊은 위로는 “나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당신을 혼자 두지는 않겠습니다”라는 태도에서 온다. AI가 정답을 말하는 시대일수록, 신부님의 침묵은 더 큰 언어가 된다. 여기서 “안아준다”는 말은 신체의 동작만을 뜻하지 않는다. 아픔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품는 마음,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고 기다리는 태도, 필요하면 전문 상담과 의료로 이어주는 분별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대신 설 수 없는 자리 – 은총이 사람을 통해 건네지는 자리 – 를 끝까지 지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사목은 감정만으로 서지 않는다. 정확한 지식과 윤리적 판단, 책임 있는 연계, 그리고 한 사람을 향한 존중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니 AI는 신부님의 경쟁자가 아니라, 사목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도구여야 한다. 자료를 찾는 손, 문서를 정리하는 손, 언어의 벽을 낮추는 손이 될 수 있다. 다만 마지막 손은 사람의 손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슬픔이 화면 밖으로 흘러넘칠 때 그 곁에 앉아 있어 줄 존재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답이 많아질수록 더 귀해지는 것이 있다. 들어주는 귀, 기다려주는 눈, 말없이 품어주는 마음이다. 인공지능은 질문에 응답하지만, 신부님은 한 사람의 인생에 응답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무너진 영혼은 결국 사람의 온기로 다시 일어선다. 그래서 답이 넘치는 시대에도 신부님의 자리는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설명은 기계에 맡길 수 있어도, 누군가의 곁에 앉아 함께 침묵해주는 일까지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도 가만히 묻게 된다. 나는 답을 많이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아픔 앞에 잠시라도 곁이 되어줄 사람인가? 참고자료 [1]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성경』 루카복음 10장 25–37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편, 『성경』. [2] ‘AI 사제’ 사건 미국의 가톨릭 교리 안내 단체 Catholic Answers가 2024년 4월 23일 신부 형상의 AI 캐릭터 ‘Father Justin’을 선보였으나, 이 AI가 고해성사를 듣고 사죄할 수 있는 듯 답한 것을 비롯한 응답 논란으로 하루 만에 평신도 캐릭터 ‘Justin’으로 바꾼 사건. ゚ Gina Christian, “AI ‘priest’ sparks more backlash than belief,” OSV News, 2024. 4. 25. ゚ “Catholic Answers’ AI ‘priest’ laicized after backlash,” America Magazine, 2024. 4. 25. [3] 교황청 문헌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