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언 칼럼] 이당 김은호, 그는 왜 ‘친일’로 분류되었는가

[하정언 칼럼] 이당 김은호, 그는 왜 ‘친일’로 분류되었는가

 결과 중심 판단이 놓친 것들 [강남 소비자저널=하정언 칼럼니스트] 역사는 종종 한 인간의 생애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한다. 그리고 그 장면이 때로는 한 시대 전체를 대신해 버린다. 이당 김은호. 조선 왕실 어진화 전통을 계승한 마지막 화사이자, 한국 근대 인물화의 정점을 이룬 화가.…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교육: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교육: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교실은 종종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걸 왜 배워야 하지?” 학생의 질문은 종종 단순한 투정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교육의 본질을 찌른다. 배움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이유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교실 한가운데에 새로운 존재가 들어왔다. 생성형 AI다. 무엇이든 설명해주고, 예문을 만들어주고, 요약해주고, 문제도 출제한다. 그래서 질문이 바뀐다.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먼저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AI는 가르치는 도구로서 이미 강력하다. 학생이 밤늦게 질문을 해도 지치지 않고 답한다. 같은 설명을 열 번, 백 번 반복해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수준을 바꿔가며 예시를 내고, 부족한 개념을 찾아 채워준다. 어떤 학생에게는 이것만으로도 교육의 문턱이 낮아진다. 배움의 기회는 종종 시간과 비용, 지역과 배경에 가로막히는데, AI는 그 장벽을 상당 부분 무너뜨린다. 과외를 받을 형편이 안 되는 학생도, 야간 자율학습 뒤 홀로 책상에 앉은 학생도, 이제 물어볼 곳이 생겼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다. 가르칠 수 있는 것과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가르침은 전달이고, 스승은 관계다. 교육은 지식의 이동이 아니라 사람의 변화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는 순간은 대개 정보가 주어졌을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믿어줬을 때 찾아온다. 중학교 때 수학을 포기하려던 아이에게 “넌 원래 느린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해준 선생님, 진로를 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대학생에게 “아직 몰라도 괜찮다”고 말해준 교수님. 그 한마디가 성적표보다 오래 남는다. 그래서 교육에는 늘 눈빛과 망설임이 있다. 학생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 교사는 설명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단어 하나를 더 쉬운 말로 바꾸거나, 반대로 더 단단한 질문을 던진다. 그 미세한 조정이 배움의 방향을 바꾼다. AI는 그 조정에 유능해 보이기도 한다. 대화의 톤을 맞추고, 심지어 공감의 문장도 뽑아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AI의 공감은 정답처럼 보이는 공감일 수는 있어도, 함께 견디는 공감이 되기는 어렵다. 교육은 종종 아프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쉽게 되지 않는 것을 반복해야 하고, 실패와 수치심을 견뎌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동행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런 말은 정보가 아니라 사람의 체온이다. 스승은 지식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좌절의 시간을 함께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AI는 답을 잘하지만, 교육은 답보다 질문으로 완성된다. “답은 종종 생각을 끝내지만, 질문은 생각을 시작한다.” AI가 강한 건 빠른 답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교육이 목표로 하는 것은 빠른 답이 아니라 깊은 사고다. 학생이 AI에게 답을 얻는 순간, 학습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종종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배움은 “왜 그런가?” “다른 경우에도 성립하는가?” “내 삶에서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이 이어질 때 생긴다. 스승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잡아주는 데 더 가깝다. 그리고 교육에서 가장 민감한 지점, 책임이 남는다. AI는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설득력은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유창한 설명은 때로 가장 위험한 오답이 될 수 있다. 학생이 AI의 답을 그대로 믿고 제출하거나, 그 답을 근거로 판단을 내릴 때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까. 결국 책임은 학생과 교육기관, 그리고 사회로 돌아온다. 그래서 AI가 교실에 들어오는 순간, 교육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윤리 문제가 된다. “편리함은 비용을 숨기고 들어온다.” 그 비용이 무엇인지 교육은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고 결론이 “AI는 스승이 될 수 없다”로 끝나면 너무 쉽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결론은 이거다. “AI가 스승이 되느냐 마느냐보다, 인간이 스승으로 남을 수 있느냐가 더 큰 문제다.” AI가 학생의 질문을 빠르게 처리해주는 사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AI가 반복 설명을 대신한다고 해서 교사의 설명이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사는 더 깊은 맥락을 짚고, 지식이 삶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설명에 집중할 여유를 얻는다. 동시에 교사는, 학생이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지, 그 질문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아이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AI는 글을 매끈하게 다듬어줄 수 있지만, 학생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만드는 건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AI 시대의 교육은 이렇게 역할이 나뉜다. AI는 설명과 반복과 연습에 강하다. 인간 교사는 의미와 동기, 그리고 학생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에 강해야 한다. AI는 맞춤형 문제를 낼 수 있지만, 학생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까지 대신 만들어줄 수는 없다. 교육이란 결국 정보를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책임질 사람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보자. “AI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대신, “AI를 곁에 둔 시대에, 스승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남기고 싶다. “좋은 스승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학생이 자기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곁에서 버텨준다.” AI는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스승은 여전히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 사람이어야만 한다. 교육은 결국 지식을 넘어, 한 인간의 미래에 책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봉수 칼럼] 단체협상 교섭단위분리제도

[정봉수 칼럼] 단체협상 교섭단위분리제도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1. 교섭단위 분리의 의의     하나의 사업 또는 사업장에 복수노조가 2011년 7월 1일부터 도입되면서 복수노조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단체교섭 창구 단일화 제도가 시행되었다.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노사대등의 원리 위에서 적정한 근로조건의 구현이라는 단체교섭권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 요구되는 불가피한 제도이다.[1] 하나의 사업장에 2개 이상의 노동조합을 각각 사용자와 개별적으로 교섭하도록 허용하면 노동조합 사이에 갈등과 사용자의 교섭비가 증가하는 부작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2] 이러한 취지에서 현행법은 하나의 사업 또는 사업장에 조직형태를 같이 하는 노동조합이 2개 이상인 경우에는 그 대표교섭 노동조합을 정하여 교섭을 요구하여야 한다(노조법 제29조의2) 고 규정함으로써 1사 1교섭대표노조 원칙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현저한 근로조건의 차이, 고용형태, 교섭 관행 등이 있는 경우에는 단위를 분리하여 교섭하는 것이 노동조합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근로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기할 수 있다. 이러한 취지로 교섭단위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교섭단위를 분리할 수 있다(법 제29조의3).   노동조합이 단체교섭을 통해 사용자의 관계에서 힘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조합원으로 구성된 단결된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교섭단위 분리는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법은 노동조합의 단체교섭 창구 단일화를 원칙으로 하고, 교섭단위 분리 결정을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인정하고 있다. [3]       2. 교섭단위 분리절차    (1) 신청권자: 교섭단위 분리는 노동관계 당사자인 회사와 노동조합이 같이 할 수 있고, 노동조합이나 회사가 일방적 신청도 가능하다(법 제29조의3 제2항).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조합도 교섭단위 분리를 신청할 수 있고, 산별노조 산하의 지회나 분회가 교섭단위 분리를 신청할 수도 있다(법 시행령 제14조의 11 제1항 제2호).   (2) 신청시기: 노동조합 또는 사용자는 (i)사용자가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하기 전과 (ii)사용자가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한 경우에는 교섭대표노동조합이 결정된 날 이후에 교섭단위 분리의 결정을 신청할 수 있다(위 동법 제1호). 따라서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가 진행되는 기간을 제외하고 언제든지 교섭단위 분리결정 신청을 할 수 있다.  (3) 신청효과: 노동위원회는 교섭단위 분리신청을 받은 경우에는 해당 사업 또는 사업장의 모든 노동조합과 사용자에게 그 내용을 통지하고, 그 의견의 제출을 요구한다. 그리고 노동위원회는 신청을 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교섭단위 분리에 관한 결정을 하여야 한다. 교섭단위 분리 신청이 된 경우에는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의 진행이 중단된다(위 동법 제1항 내지 제5항).  (4) 결정효과: 노동위원회가 교섭단위 분리 결정을 하면, 노동조합은 사용자에게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단체교섭을 요구받은 사용자는 분리된 교섭단위별로 각각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개시해야 한다. 다만, 기존의 단체협약이 있는 경우에는 그 단체협약의 유효기간 만료일 이전 3개월이 되는 날부터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다(위 동법 제3항).    (5) 불복 절차 및 기준: 노동위원회의 교섭단위 분리 결정에 대한 불복 절차에 대해 중재재정의 불복절차에 관한 규정을 준용하고 있다(법 제29조의 3, 제69조). 따라서 노동위원회의 교섭단위 분리 여부 결정이 위법이나 월권인 경우에 한해 중앙노동위원회에 10일 이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대법원은 “중재재정은 그 절차가 위법하거나 그 내용이 근로기준법 위반 등으로 위법한 경우 또는 당사자 사이에 분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항이나 정당한 이유 없이 당사자의 분쟁범위를 벗어나는 부분에 대하여 월권으로 중재재정을 한 경우와 같이 위법이거나 월권에 의한 것임을 이유로 하는 때에 한하여 불복할 수 있다. 중재재정이 단순히 어느 일방에 불리한 내용이라는 사유만으로는 불복이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판시하고 있다.[4]   3. 교섭단위 분리 요건    교섭 단위의 분리 필요성을 판단할 때, 판례나 노동위원회는 4가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나의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i)현격한 근로조건의 차이, (ii)고용형태, (iii)교섭관행을 차례대로 판단한 후, (iv)교섭단위를 분리할 필요가 인정되어야 한다. 노동위원회는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 유지’와 ‘교섭단위 분리’ 사이의 이익 형량을 통해 교섭단위 분리의 필요성 유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 [5]   (1) 현격한 근로조건의 차이: 현격한 근로조건의 차이는 근로자의 개인적 속성에 의한 차이가 아니라 객관적인 차이로 단체교섭을 별도로 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근로조건이어야 한다. 이에 근로자의 개인적 속성 (숙련도, 경력, 학력, 근속년수 등)의 차이는 객관적인 사유에 의한 차이로 보지 않는다.[6]   (2) 고용형태: 고용형태의 경우 단순히 임시직, 계약직, 시간제 근로자 등으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타 직종과 달리 정년 이후 촉탁직 등으로 재고용 하도록 규정된 경우처럼 객관적으로 고용형태의 차이가 존재하여 교섭대표노조를 별도로 선출해 단체교섭을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실익이 있어야 한다.[7]   (3) 교섭관행: 교섭관행은 형식적으로 분리된 단위로 교섭했던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분리해 교섭할 필요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즉, 직종별, 합병, 사업장별 등의 사유로 인해 1사 다수노조 사업장으로 별개의 단체교섭 관행이 있다고 하여 항상 교섭단위 분리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8]    (4) 교섭단위 분리의 필요성: 교섭단위 분리 필요성에 대해 노동위원회는 별도의 교섭대표노조를 선출해 각각 독자적인 단체교섭을 해야 할 정도로 노사관계의 본질적인 기초를 달리하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한다. 노동위원회는 조합원의 분포, 조합원 수, 교섭요구사항, 근로관계의 내용과 성격, 인사노무 관리의 독립성 정도 등 해당 사업 또는 사업장의 노사관계 실태를 고려하여 판단한다. [9]     < 교섭단위 분리결정 사례 >   1. 위탁 근로자와 직영근로자의 경우[10] 회사의 노동조합은 일반직 노동조합과 위탁 택배배달원 노동조합으로 구성하고 있다. 회사의 일반직 노동조합은 교섭대표 노조를 중심으로 단체교섭을 실시하고 있다. 신생 택배노조는 회사의 정규직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 자격의 택배 배달원이므로 근로조건과 고용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교섭단위 분리신청을 하였다.   노동위원회는 일반직원과 위탁 택배원의 근로조건, 고용형태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고, 근로조건의 통일성을 기하기 어려우므로 노사 간 효율적인 교섭을 위하여 택배 직종을 별도의 교섭단위로 분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2. 방송연기자의 교섭단위 분리[11]  방송연기자들은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에 해당되므로 단체교섭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KBS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와 다른 근로조건을 가지고 있으므로 교섭단위 분리 신청에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3. 무기계약직(상용직)과 정규직의 경우[12]  상용직 근로자 59명은 사무보조나 주차, 운전, 시설, 상담 업무를 담당하였고, 공사의 정규직 근로자 137명은 일반직이나 기술직, 기능직으로 구성돼 있다. 공사는 정규직 근로자 구성된 노동조합을 교섭대표 노조로 인정하여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조합은 상용직의 노동조합 가입을 배제하고 있다. …

[김종우 칼럼] 반려동물산업 에세이_103 반려동물 연관 산업 육성법 본회의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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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전략산업 도약 기반 마련-   ▲사진=김종우 대한반려동물협회 회장 ⓒ강남구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김종우 칼럼니스트] 반려동물 연관 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육성·지원하기 위한「반려동물 연관산업의 육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반려동물 연관 산업 육성법)」이 1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반려동물 산업이 독립된 정책 대상 산업으로 법적…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김홍도: AI가 지운 ‘사람 냄새’의 정체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김홍도: AI가 지운 ‘사람 냄새’의 정체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아침 시장에 서 본 적 있나? 생선 비린내와 막 튀겨낸 기름 냄새가 섞이고, 좌판을 두드리는 손바닥 소리, 흥정하는 목소리, 아이가 칭얼대는 울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 소란 속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짜증을 내고, 누군가는 오늘 벌이가 시원찮아 어깨가 처진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지금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조선의 화가 단원 김홍도가 남긴 풍속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장의 소음이 그림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인데도 사람 냄새가 난다. 잉크와 종이 위에, 시대의 체온이 살아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매일 더 놀라운 장면을 본다. 몇 줄의 지시어만 입력하면 그림이 만들어지고, 문장이 완성되고, 그럴듯한 세계가 순식간에 펼쳐진다. 생성형 AI가 우리 일상에 들어온 뒤로, 창작은 더 쉬워졌고, 생산은 더 빨라졌다. 누구나 포스터를 만들고, 누구나 홍보 문구를 쓰고, 누구나 글의 형태를 갖춘 무언가를 내놓을 수 있다. 분명 대단한 변화다. 올려진 풍속화는 단 몇초 만에 AI가 그렸다. 얼핏 김홍도 화풍 같지만, 여기엔 장터의 땀 냄새가 없고 붓 터치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낯선 ‘디지털의 차가움’이 묻어난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허전하지 않나. 결과물을 보고 “우와!”라고 감탄하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지는 경험. 멋지긴 한데 오래 남지 않는 감정. 완벽한데도 이상하게 따뜻하지 않은 문장. 나는 그 허전함이 결국 하나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관찰과 학습의 차이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사람을 붙잡는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그는 삶을 보고, 삶에 머물렀다. 예를 들어보자. 국밥을 허겁지겁 들이키는 주막 손님의 불룩해진 볼, 젓가락을 쥔 야무진 손끝, 그 옆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까지. 김홍도는 그 찰나의 ‘생활’을 놓치지 않았다. 웃음의 모양만 그린 게 아니라 웃음 뒤의 피곤함까지 읽었다. 동작만 그린 게 아니라 그 동작이 나오기까지의 맥락을 붙잡았다. 그래서 그림 속 사람들은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그냥 산다. 그들이 사는 방식이,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까지 전염된다. 우리는 한 장면을 보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든다. “저 사람은 오늘 무슨 일로 저렇게 웃을까.” “저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 “저 둘 사이에는 어떤 기류가 흐를까.” 풍속화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해석의 공간을 남겨 둔다. 그 빈자리에 독자의 마음이 들어간다. 바로 그때 감동이 생긴다. 감동은 누가 만들어 주는 완성품이 아니라, 내가 참여하는 순간에 생기니까. 반면 AI는 관찰하지 않는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학습의 결과를 재조합한다. 이 과정이 놀라운 건 맞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는 종종 이런 성질이 있다. 평균적으로 안전하고, 평균적으로 매끄럽고, 평균적으로 만족스럽다. 문제는 그 평균이 사람의 마음을 설득하긴 해도, 깊게 흔들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삶을 바꾸는 문장, 기억에 남는 그림은 대개 평균에서 오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험, 말투, 사정, 망설임 – 그런 “되돌릴 수 없는 디테일”에서 온다. 김홍도는 그 디테일을 살렸고, AI는 그 디테일을 자주 평평하게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건 AI가 나쁘다는 결론이 아니다. AI는 도구다. 도구는 잘 쓰면 도움이고, 잘못 쓰면 위험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관찰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이해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요약이 먼저 오고, 결론이 먼저 온다. 질문보다 답이 앞서고, 경험보다 정리가 앞선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점점 이렇게 변한다. “내가 확인한 세계”보다 “누군가(혹은 AI)가 정리해 준 세계”에 더 빨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감동이 사라진다. 감동은 속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감동은 머무름에서 태어난다.  사람의 표정을 오래 바라보고, 말 한마디의 결을 곱씹고, 문장 하나를 내 입에서 다시 굴려보는 그 시간에서 나온다. 풍속화가 주는 울림이 강한 건 그 그림이 우리에게 “빨리 결론 내리지 말고, 조금 더 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AI 시대의 창작 윤리를 표절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다루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저작권과 공정한 보상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큰 질문이 있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신 무엇을 잃고 있는가? 맥락을 잃고, 관계의 온도를 잃고, 생활의 질감을 잃고,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다움도 함께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인간다움을 비용처럼 절감하려 한다. 이때 기술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따뜻하지는 않다. 그러면 해답은 뭘까. “AI를 쓰지 말자”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를 더 잘 쓰자. 단, 우리는 AI를 비서로 쓸 것인가, 작가로 앉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는 AI를 관찰을 위한 도구로 쓰자고 제안한다. AI가 수만 건의 자료를 정리해 주는 시간, 그 아껴진 시간만큼 우리는 현장을 더 오래 응시해야 한다. 초안은 AI가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지막 한 줄은 오직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다. 내 눈이 포착한 떨림, 내 귀에 꽂힌 탄식, 내가 겪은 망설임이 그 재료다. 기억하자. AI는 정보를 주지만, 감동은 체온에서 온다. 당신의 체온이 묻어날 때, 그제야 글은 정보 덩어리를 넘어 살아있는 이야기가 된다. 김홍도는 붓으로 세상을 기록했다. 우리는 키보드와 AI로 세상을 기록한다. 시대는 달라졌고 도구도 달라졌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변하지 않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 그리고 더 아픈 질문이 따라온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네 말로 남길 수 있나?” AI가 만들어준 문장을 그대로 붙여넣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쉬움이 아니다. 독자는 완벽한 문장에 감동하지 않는다. 독자는 “아, 이 사람은 진짜 봤구나”라는 확신을 느낄 때 감동한다. 그 확신이 생기는 순간, 글은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로, 결과물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로 바뀐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아직도 우리 마음을 흔드는 건, 바로 그 목소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AI 시대에 가장 값진 능력은 잘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잘 보는 능력이라고. 더 많이 만들기 전에, 조금 더 보자. 조금 더 오래 바라보자. 그게 결국,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이 끝내 지켜야 할 창작의 윤리이자, 독자를 설득하고 감동시키는 가장 단단한 힘이다. ▲사진=구글 제미나이(Gemini)가 김홍도 화풍으로 생성한 장터 이미지. 붓 터치는 정교하지만 어딘가 낯선 ‘디지털의 차가움’이…

[정봉수 칼럼] 연차휴가에 관한 최근 판례와 개선방향 제안

[정봉수 칼럼] 연차휴가에 관한 최근 판례와 개선방향 제안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연차유급휴가의 목적은 장기간 근로에 지친 근로자에게 충분한 유급휴가를 보장해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하고 문화적 생활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1]  금전보상은 휴가를 사용할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된다. 최근 이러한 연차휴가의 목적에 충실한 대법원 판례가 일관성 있게 나오면서 기존에 근로의 대가성에 대한 금전보상에 근거한 판례를 수정하고 있다.   2021년 10월 14일 대법원(2021다227100)은 1년 기간제 근로자의 연차 휴가수당은 26일이 아니라 11일이라는 판결을 하였다. 기업의 정년 퇴직자의 경우에도 2018년 6월 28일 대법원(2016다48297)은 연차휴가 기산점을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로 하고 있는 경우, 퇴직일이 12월 31일인 경우 그 다음해에 발생하는 연차휴가수당은 없다고 판시하였다.  1. 정년퇴직자의 연차휴가 사례[2]    근로자들은 의정부시 시설관리공단에 고용되어 가로환경미화원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하였다. 사용자의 고용내규에는 정년에 관해 ‘만 61세가 되는 해의 12월 말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단체협약 규정에 따라 정년퇴직 대상자들은 특별유급휴가 20일을 사용하고, 12월 31일에 정년퇴직을 하였다. 근로자들은 “만 61세가 되는 해의 12월 말일이 특별유급휴가기간으로 근무를 한 것이고 그에 따라 실제 퇴직일은 다음해 1월 1일로 보아야 한다. 만61세가 되는 해에 계속 근로한 것에 대한 연차휴가는 발생했으므로 사용자는 근로자들에게 그 다음에 1월 1일 퇴직으로 사용하지 못한 연차휴가에 대한 수당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1심과 2심은 근로자들의 입장을 인용하였으나, 상고심인 대법원은 “사용자의 고용내규는 정년을 만 61세가 되는 12월 말일로 정하고 있다. 만 61세가 되는 12월 31일에 정년에 도달하여 근로관계가 당연히 종료된다. 따라서 근로자가 만61세가 되는 해의 근로에 대한 대가로서의 연차휴가에 관한 권리를 취득할 수 없다.”라고 판시하면서 “근로자들이 만 61세가 되는 해의 12월 31일 까지 특별유급휴가를 사용하였다고 하여 이들의 퇴직일이 다음해 1월 1일로 미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 기간제 근로자의 연차휴가 사례[3]   근로자는 2017년 8월 1일부터 2018년 7월 31일까지 1년간 노인요양복지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면서 15일의 연차휴가를 사용하였다. 고용노동부는 2018년 5월 “1년 미만 근로자 등에 대한 연차휴가 보장 확대 관련 개정 근로기준법 설명자료를 배포하였는데, 위 자료에서 “1년 기간제 노동자의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경우에는 최대 26일분의 연차휴가 미사용수당을 지급하여야 함”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근로자는 중부지방노동청에 11일분의 연차휴가수당을 지급받지 못하였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사용자는 근로감독관의 계도에 따라 근로자에게 11일분의 연차휴가수당으로 717,150원을 지급하였다.  이에 사용자는 1년 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에게 최대 26일의 연차휴가가 발생한다는 취지의 이 사건 설명자료는 잘못되었고, 근로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연차휴가를 모두 사용하여 더 이상 연차휴가수당을 청구할 수 없는데도 사용자가 근로감독관의 잘못된 계도에 따라 11일분의 연차휴가수당을 추가로 지급하였으므로 근로자는 사용자에게 이를 반환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원심(2심)은 사용자의 주장을 인정하여 근로자에게 지급명령을 내렸다. 이에 근로자는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연차휴가를 사용할 권리 또는 연차휴가수당 청구권은 근로자가 전년도에 출근율을 충족하면서 근로를 제공하면 당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연차휴가를 사용할 해당 연도가 아니라 그 전년도 1년간의 근로에 대한 대가에 해당된다. 근로기준법 제60조 제1항이 규정한 유급 연차휴가는 1년간 80퍼센트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부여되는 것으로, 근로자가 연차휴가에 관한 권리를 취득한 후 1년 이내에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아니하거나 1년이 지나기 전에 퇴직하는 등의 사유로 인하여 더 이상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사용자에게 그 연차휴가일수에 상응하는 임금인 연차휴가수당을 청구할 수 있다.[4] 다만, 연차휴가를 사용할 권리는 다른 특별한 정함이 없는 한 그 전년도 1년간 근로를 마친 다음 날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전에 퇴직으로 근로관계가 종료되는 경우에는 연차휴가를 사용할 권리에 대한 보상으로 연차휴가수당도 청구할 수 없다.” 고 판단하였다. [5]  따라서 1년 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에게는 최대 11일의 연차휴가가 부여된다고 보았다.    3. 현 연차휴가의 내용과 개선방안    연차 유급휴가는 장기간의 근로로 인하여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부여되는 유급휴가로, 1년간 80퍼센트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15일을 부여한다. 그리고 매 3년마다 1개 씩 추가적으로 가산하여 지급하면서 최종 25일을 한도로 지급된다. 근로자가 연차휴가에 관한 권리를 취득한 후 1년 이내에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않거나 1년이 지나기 전에 퇴직하는 경우에는 사용자에게 그 연차휴가일수에 상당하는 임금인 연차휴가수당을 청구할 수 있다. 2018년에 변경된 근로기준법 연차규정에 따르면, 1년간 발생하는 연차휴가는 매월 만근시 1개의 월차휴가가 발생하여 1년간 11개가 된다. 만 1년되는 시점에 계속근무를 전제로 15개가 추가로 발생하여 1년 동안 사용하게 된다.  근로자가 만1년을 근속하고 그 다음날 그만 두는 경우, 매월 발생하는 연차 11개와 최종 1년 만근을 전제로 발생하는 15개의 휴가수당을 각각 청구할 수 있다. 이는 형평성의 원칙에 위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전년도 근무를 기준으로 발생하는 연차 유급휴가는 어느 특정한 날에 퇴사할 때 변화가 많다. 따라서 근로자들은 이때를 퇴직시점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현 연차휴가제도를 근속기간에 비례하여 정산하는 방법이 제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근속년수 최초 1년에 대해 11개를 부여하고, 2년차에 발생한 연차휴가 15개에 대해 연속적이거나 분할사용이 가능하도록 보장은 하되, 근로자가 중도에 퇴사한 경우에는 분기별로 그 발생 숫자를 비례해서 공제한다면, 기존의 연차휴가 부여 방식의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차휴가에 대한 2018년의 정년 퇴직자에 대한 판례와 1년 기간제 근로자에 대한 판례는 연차휴가의 보장 취지에 맞춘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본다. 연차휴가의 목적이 장기간의 노동에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 위해 충분한 유급휴가를 보장하는 것이지 금전보상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에 충실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연차휴가가 특정일에 퇴직함에 따라 연차휴가의 발생 일수가 크게 달라지는 점은 형평성의 원칙에 위배될 수 있고, 이는 근로자가 퇴직시점을 결정하는 이유도 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연차휴가 개선에 있어 어느 시점에 퇴직하더라도 근로의 대가에 대한 형평성 있는 유급휴가의 보장이 이뤄어진다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진=연차휴가(그림:정하은) ⓒ강남 소비자저널     [1] 헌법재판소 2015.5.28. 2013헌마619 결정; 김홍영, “휴식보장을 위한 연차휴가의 제도개선론”, 노동법연구, (40), 서울대학교 노동법 연구회, 2016. 3, 161면.  [2] 대법원 2018.6.28. 선고 2016다48297 판결. [3] 대법원 2021.10.14. 선고 2021다227100 판결  [4] 대법원 2017.5.17. 선고 2014다232296 판결.  [5] 대법원 2018.6.28. 선고 2016다48297 판결. 

[손영미 칼럼] 한국예술가곡연주회 제200회 기념 공연 18년의 시간, 노래는 어떻게 뿌리가 되는가

[손영미 칼럼] 한국예술가곡연주회 제200회 기념 공연 18년의 시간, 노래는 어떻게 뿌리가 되는가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오는 2026년 3월 7일(토)14시 영산아트홀, 한국예술가곡연주회 제200회 공연이 열린다. 18년. 200번의 무대. 숫자는 기록이지만, 가곡은 기억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가슴에 내려앉아 조용히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그동안 한국예술가곡연주회 제200회 기념연주회는  18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여 이번 연주회는 하나의 공연이 아니라, 시간의 결을 꺼내는 자리다. 노래가 어떻게 뿌리가 되었는지를 묻는 자리다. 이번 무대의 화두는 ‘한국 가곡의 뿌리와 정수를 시와 선율로  말하는 무대가 될것이다. 1부에서는 〈내 맘의 강물〉, 〈그리운 금강산〉, 〈고향의 노래〉 <가고파> <마중> 등이 흐른다. 강물처럼 유장한 선율, 산맥처럼 묵직한 그리움, 고향이라는 단어가 가진 체온이 무대 위를 건넌다. 2부에서는 〈강 건너 봄이 오듯〉, 〈천년의 그리움〉, < 수선화> <첫사랑〉 <님이 오시는지>외 자연 친화적이고도 목가적인 고향풍경과 사랑에 대한 그리움등이 묻어난 곡들이 이어진다. 특히 선곡된 아름다운 우리 가곡들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의 감수성과 만나며, 한 사람의 사랑과 한 시대의 정서를 동시에 품는다. 무대에는 세대가 함께 선다. 원로의 깊은 호흡, 중견의 단단한 울림, 그리고 지금도 노래하며 삶을 건너는 성악가들 소프라노와 테너, 바리톤의 음색은 개인의 기교가 아닌 가곡을 아끼고 사랑하는 깊은 감성무대가 된다. 특히 음악감독 윤교생, 피아니스트 박은영을 비롯해 바이올린 알렉시 카노브, 첼리스트 키로바 다니엘라 등 협연진이 더해져 무대의 완성도를 높인다. 그동안에 한국예술가곡연주회는 화려한 조명만을 좇아온 단체가 아니다. 정기연주회와 병원 위로공연, 작은 공간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노래. 가곡은 무대 위에서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 끝, 마음 가장자리에서도 숨 쉬고 있었다. 200회라는 이정표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손영미 칼럼] AI 시대, 인간은 어떻게 주체성을 지킬 것인가, 속도의 문명에서 사유의 불씨를 지키는 일

[손영미 칼럼] AI 시대, 인간은 어떻게 주체성을 지킬 것인가, 속도의 문명에서 사유의 불씨를 지키는 일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우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는 자주 묻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볼 것을 먼저 안다. 추천 시스템은 우리가 좋아할 것을 미리 안다. 검색창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을 제시한다. 생각은 점점 짧아지고, 판단은 점점 가벼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말한다. “편리해졌다.” AI 시대의 가장 은밀한 변화는 지배가 아니라 위임이다. 우리는 판단을 빼앗기지 않았다. 다만 조금씩 맡겼을 뿐이다. 편리함은 달콤하다. 그러나 달콤함은 종종 방향 감각을 무디게 한다. 인지의 외주화, 사유의 축소 과거의 도구는 인간의 팔과 다리를 확장했다. 오늘의 AI는 인간의 두뇌를 확장한다. 기억을 대신하고, 계산을 대신하며, 예측을 대신한다. 문제는 확장이 아니라 ‘생각의 외주화’다.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외우지 않는다. 지도는 우리를 데려다 준다. 우리는 더 이상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요약이 대신 정리해 준다. 사유는 점점 압축되고, 의심은 점점 줄어든다. AI는 우리를 대신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익숙해진다.…

[인인칼럼 유준형] 기계는 상상하지 않는다: AI가 네안데르탈인을 닮은 이유

[인인칼럼 유준형] 기계는 상상하지 않는다: AI가 네안데르탈인을 닮은 이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며칠 전, 누군가의 요청으로 비즈니스 사과문 초안을 AI로 써 보았다. 문장은 매끈했고 논리는 완벽했다. “잘못을 깊이 반성한다”는 말도,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는 사람의 마음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틀린 말이 없는데, 닿지 않았다.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이 있다. 기계는 상상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은 ‘새로움’이나 ‘기발함’이 아니다. 여러 인문학·철학·윤리 논의를 종합해 보면, 상상은 대체로 세 요소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첫째는 의도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목적을 세우는 힘이다. 둘째는 상징이다. 보이지 않는 의미(규범, 약속, 이야기)를 만들어 타인과 공유하는 힘이다. 셋째는 책임이다. 선택이 낳을 결과를 감당하겠다고 결심하는 태도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될 때 상상은 단순한 창의가 아니라, 의미를 세우고 방향을 정하는 ‘판단’으로 기능한다. 반대로 기계는 이 지점에서 멈춘다. AI는 능숙하게 문장을 만들지만, 그 문장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 목적을 세우지 못한다. 상징이 사람에게 남기는 상처와 위로를 경험으로 살려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 Bender 등(2021)에 따르면, 거대언어모델(LLM)은 말의 형태는 정교하게 만들 수 있어도, 그 말이 놓이는 현실의 의미를 사람처럼 이해한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러니 AI의 산출물은 종종 정확해 보이면서도, 정작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한 끗이 비어 있는 채로 남는다. 바로 여기서 “네안데르탈인”이라는 비유가 의외로 정확해진다. 이 비유는 네안데르탈인을 깎아내리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네안데르탈인은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어 왔고, 그들도 환경에 적응하고 도구를 다루며 살아남은 유능한 존재였다. 일부 연구는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상징 활동의 흔적 가능성을 제기한다(Hoffmann et al., 2018). 그러니 비교의 핵심은 “지능의 높낮이”가 아니다. 정곡은 따로 있다. AI와 네안데르탈인이 닮았다는 말은, ‘과제 수행’에는 강하지만 ‘공유된 상상’으로 사회의 방향을 세우는 방식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성립한다는 뜻이다. 인간(호모 사피엔스)의 강점은 단지 도구를 쓰는 능력만이 아니었다. 모르는 타인과도 함께 살아가게 만드는 ‘공유된 상상’이 있었다. 규범과 약속을 만들고, 상징과 이야기로 서로를 묶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공동의 계획으로 당겨 오는 능력이다. Tomasello(2014)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과 목적과 규칙을 함께 세우는 공유된 의도(shared intentionality)에 강점을 보이고, 이런 협력 구조가 문화의 누적과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이 인간 사회를 크게 만들었다. 반면 AI는 뛰어난 실행자이지만, 공동체가 함께 믿고 지킬 목적을 스스로 발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AI는 ‘왜’를 만들기보다 ‘어떻게’를 수행한다. 이 비유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핵심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AI는 ‘왜’를 만들지 못하고 ‘어떻게’를 잘한다. 상상은 목적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AI의 출발점은 목적이 아니라 프롬프트다. “요약해라, 비교해라, 써라”라는 지시가 주어지면 놀라운 속도로 해낸다. 그러나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세우지는 못한다. 목적을 던지는 쪽은 늘 인간이다. 둘째, AI는 상징을 ‘살지’ 못하고 언어를 ‘맞춘다’. 인간에게 상징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다. 돈 한 장, 깃발 한 조각, 약속 한 문장이 사람을 움직이는 이유는 그 속에 경험과 기억과 공동체의 감정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AI는 그 압축의 무게를 체감하지 못한다. 대신 그 상징을 설명하는 문장을 능숙하게 조합한다. 그래서 그럴듯하지만, 때로는 비어 있다. 셋째, AI는 책임이 없어서 상상이 판단으로 끝나지 못한다. 인간의 상상은 선택의 윤리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말이 누군가를 살릴 수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감당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판단이다. 기술문명이 커질수록 책임 윤리가 중요해진다는 문제의식은 Hans Jonas(1984)의 논의에서 대표적으로 제기된다. 그런데 AI는 그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는 판단의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니 AI의 결과물은 의견처럼 보이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생성물에 가깝다. 마지막 책임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온다. 여기까지 오면 결론은 단순해진다. AI는 뛰어난 해결자이지만, 상상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AI를 깎아내리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남은 자리를 또렷하게 비추는 문장이다. AI가 자료를 모으고 초안을 만들어주는 시대일수록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다. 효율이 높아져도 존엄이 무너질 수 있고, 편리함이 늘어도 약자가 배제될 수 있다. 그 균형을 잡는 힘이 상상이다. 나는 그래서 이 시대의 인문학을 “기술을 반대하는 학문”으로 보지 않는다. 인문학은 기술의 속도를 늦추려 하기보다, 기술의 방향을 묻는다. AI가 답을 더 잘 만들수록 인간은 질문을 덜 하게 된다. 하지만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상상도 사라진다. 그리고 상상이 사라진 사회는 결국 누군가의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따뜻하게 구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만 남기고 싶다.기계가 만드는 것은 답이고, 인간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이유다.기계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상상은 인간의 책임이다.  

[손영미 칼럼] 카리아 앙상블 제2회 정기연주회, 봄 빛 선율과 현이 그리는 서사의 밤

[손영미 칼럼] 카리아 앙상블 제2회 정기연주회, 봄 빛 선율과 현이 그리는 서사의 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오는 2026년 3월 5일(목) 오후 7시 30분, 세라믹팔레스홀에서 카리아 앙상블 제2회 정기연주회가 열린다. ENSEMBLE이 말하는 것 KARIA ENSEMBLE은 우아의 정신을 담은 노래가 함께 울림으로 완성되는 음악 공동체를 지향한다. 배려와 나눔의 철학 위에서 이번 무대는 단순한 갈라 콘서트를 넘어, 목소리와 현악이 어우러지는 입체적 앙상블의 서사를 펼친다. 소프라노 김미현, 백현애, 김숙영·메조소프라노·박춘선, 손영미, 테너·정세욱, 하석천, 바리톤 이광석의 다채로운 음색 위에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가 색채를 더하고, 예술감독 석성환의 지휘와 피아니스트 최은순의 섬세한 해석이 음악의 깊이를 완성한다. 1부 성가곡  동요 메들리 사랑과 서정 — 인간의 가장 오래된 노래 1부는 성가곡 메들리로 문을 연다. 사랑, 고통, 신념, 기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오래도록 품어온 정서를 담아내며 맑고 절제된 선율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 인간 내면의 갈망과 위로를 전한다. 특히 동요 메들리에서는 과수원길 관객과 공유하며 신귀복 작곡 〈얼굴〉을 박영란이 편곡한 ‘보고 싶은 얼굴’은 인상적인 선율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생동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