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세종대왕: 인공지능 시대, 다시 묻는 백성을 위한 기술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세종대왕: 인공지능 시대, 다시 묻는 백성을 위한 기술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얼마 전, 중장년들을 위한 작은 강의 자리에서 한 분을 만났다. 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셨다는 6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손에 든 휴대폰 화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교수님, 이거에다 그냥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는 게 정말이에요?” 나는 그분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켰다. “한번 해보세요. 평소에 궁금하셨던 거 아무거나요.” 그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건강보험에서 보내준 종이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거 좀 쉽게 풀어줄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올리자, 화면에…

[손영미 칼럼] 소년은 왜 춤추기 시작했는가

[손영미 칼럼] 소년은 왜 춤추기 시작했는가

–  Billy Elliot에 대한 공연 리뷰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인간은 때때로 자신에게 가장 금지된 곳에서 운명을 발견한다. 소년 빌리에게 그곳은 거친 복싱장이 아니라, 부드러운 발레 교실이었다. 탄광의 먼지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던 영국 북부의 음울한 회색 도시. 파업과 실업, 가난과 분노가 뒤엉킨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거친 풍경 한가운데서 한 소년은 묻는다. “나는 왜 춤을 추고 싶은가.” 그 질문은 단순한 취미의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자기 영혼의 진동수를 처음으로 감지한 순간에 가깝다. 빌리는 세상이 규정한 ‘남성성’의 틀에서 벗어난다. 강해야 하고, 싸워야 하며, 울지 말아야 한다는 완고한 질서 속에서 그는 몸이라는 도구로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언어가 ‘말’이 아닌 ‘춤’이라는 사실이다. 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다. 언어가 탄생하기 전, 인간은 몸으로 슬픔을 새겼고, 기쁨을 하늘로 던졌으며, 절망을 발로 구르며 견뎌냈다. 빌리의 도약은 단순히 미학적인 발레 동작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된 존재가 자기 영혼의 감옥을 박차고 나오는 철학적 몸짓이다. 특히 작품 속에서 인상적인 지점은 ‘침묵하는 남성들’의 변화다. 광부인 아버지와 형은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시대의 피로와 투쟁 속에서 감정을 거세당한 이들이다. 그러나 빌리가 춤추는 찰나, 그들은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은 단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예술은 생존 이후에 누리는 사치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절망적인 순간, 인간을 인간답게 남게 하는 최후의 불꽃이다. 뮤지컬 무대에서 이러한 감정은 더욱 강렬하게 증폭된다. Elton John 의 음악은 거친 노동의 리듬과 소년의 섬세한 내면을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특히 〈Electricity〉가 울려 퍼지는 순간, 관객은 더 이상 타인의 춤을 관람하는 제삼자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삶 속에서 한 번쯤 접어두었던 꿈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춤출 때 어떤 기분이 드니?” 그 질문에 빌리는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전기(Electricity)가 흐르는 것 같아요.” 이 대사는 현대 예술철학의 핵심을 관통한다. 진정한 예술은 논리보다 먼저 도착한다. 인간은 어떤 아름다움 앞에서 먼저 전율하고, 이해는 그다음에 찾아온다. 예술은 해석되기 이전에 이미 몸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무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인이 된 빌리가 공중으로 비상하는 장면은 흔한 성공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삶의 중력을 극복해내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가난은 여전하고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결정적인 변화가 있다. 소년이 더 이상 자신의 재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인간의 자유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단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Billy Elliot 는 단순한 성장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은 무엇 앞에서 가장 자유로워지는가.” 마지막 조명이 꺼진 뒤에도 마음속에 길게 잔상이 남는 것은 화려한 테크닉이 아니다. 한 소년이 세상의 편견보다 자기 심장의 떨림을 더 신뢰했다는 사실이다.…

[정봉수 칼럼] 동포근로자의 고용제도와 체류자격별 노동법 적용

[정봉수 칼럼] 동포근로자의 고용제도와 체류자격별 노동법 적용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I. 문제의 소재 2025년 12월, 체류외국인은 2,783,247명으로 한국의 전체인구(51,117,378명)의 5.44%에 해당되며, 2030년에는 350만명을 상회하여 전체인구의 7%에 해당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외국인의 주요증가 요인은 중국과 구 소련지역의 외국국적 동포들이 2010년 이후 연평균 28%로 증가한 데에 있다.[1]이 특정지역의 동포근로자들이 급속히 늘고 있는…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어린이: 호기심과 몰입의 시간이 미래의 천재성을 키운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어린이: 호기심과 몰입의 시간이 미래의 천재성을 키운다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칼럼니스트] 얼마 전,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젊은 엄마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았다.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종이와 색연필을 꺼내더니,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무언가를 그렸다 지웠다 했다. 곁눈으로 보니 자동차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것을 끝없이 변형시키고 있었다. 엄마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이 깊어졌다. 결국 한마디 했다. “그만 좀 그리고 영어 단어장 좀 펴라. 시험이 며칠 안 남았잖아.” 나는 그 한숨이 익숙했다. 30여년 전, 내 아이를 키울 때 내가 똑같이 쉬었던 한숨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조급해지고, 불안하기 때문에 다그치게 된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만큼 부모의 오래된 본능도 없다. 그러나 칠십이 되어 그 모자(母子)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그 불안이, 아이의 가능성보다 먼저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알파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미스 하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공동창업자 겸 CEO가 한국에 와서 한 이야기 기사를 읽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게임을 만들 때 부모가 ‘시간 낭비’라며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이 훗날 프로그래밍과 AI 연구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했다. 동시에 그는 AI 시대에도 수학과 과학 같은 기본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놀이를 미화한 게 아니라, 기본기 위에서 살아 있는 호기심이 자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또 한참을 읽었다. 30여년 전, 내 아이가 만화책을 펼쳐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느 주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시계를 가리키며 “이제 그만 보고 들어가서 공부하거라” 하고 말했다. 별일 아닌 한마디였지만, 지금 와서 가끔 그 장면이 떠오른다. 시계를 가리키는 대신 옆에 앉아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라고 한 번이라도 물었다면 어땠을까. 다 자란 자식 앞에서 차마 꺼내지 못하는 아쉬움 한 가닥이, 그런 식으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아이를 앞서가게 하는 힘은 조급함이 아니라 몰입이다. 몰입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과 다르다. 좋아하는 것을 붙들고 스스로 더 알고 싶어지는 상태,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파고드는 상태, 거기서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어떤 아이는 책에서 그 순간을 만나고, 어떤 아이는 그림에서 만나며, 어떤 아이는 블록과 만들기 속에서 만난다. 어른 눈에는 산만해 보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시간이, 사실 아이 안에서는 세상의 구조를 더듬어 가는 시간일 수 있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 한다. 모든 놀이가 천재성을 낳는다는 뜻이 아니다. 읽기, 쓰기, 수학, 과학, 그리고 교실에서 배우는 질서와 습관은 여전히 아이를 받쳐주는 뼈대다.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나도 그 한복판을 통과해 본 사람이다. 다만 뼈대만으로 사람은 서지 않는다. 뼈대 위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호기심이고, 그 호기심을 오래 지탱하는 것이 몰입이다. 요즘 부모들이 가장 갈등하는 지점이 화면이라는 것도 안다. 게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내 말은 모든 화면 시간이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수동적으로 흘려보내는 시간과, 무엇을 만들고 풀어내려고 파고드는 시간은 분명히 다르다. 그 차이를 알아보는 눈은 아이 곁에 있는 어른만 가질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천재성은 처음부터 번쩍이는 재능의 이름이 아니다. 남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힘, 금세 싫증 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파고드는 힘, 정답을 빨리 맞히는 것보다 ‘왜 그런가’를 끝까지 붙드는 힘. 그런 것들이 쌓여 비로소 남다름이 된다. AI 시대의 인재는 많이 외운 아이가 아니라, 오래 좋아해본 아이에게서 나온다. AI는 정보를 빠르게 모아준다. 그러나 좋아해서 파고들던 어린 날의 떨림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AI는 답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그러나 스스로 빠져들어 끝내 자기 세계를 만들어보는 기쁨까지 대신 주지는 못한다. 그 떨림과 기쁨이 빠진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AI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설 수 있을까? 그래서 어른의 태도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 다그치기 전에 한 번쯤 옆에 앉아 이렇게 물어보는 일이다. “너, 지금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그 한 마디가 아이의 시간을 통제의 대상에서 관찰의 대상으로 바꾼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아이가 어디에서 눈이 빛나는지, 무엇을 할 때 시간이 멈춘 듯 빠져드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를. 다시 카페로 돌아간다. 엄마의 다그침에 아이는 잠깐 손을 멈췄다. 그러나 영어 단어장을 펴는 대신 그림 속 로봇의 팔 한 짝을 마저 그리고서야 책을 꺼냈다. 그 작은 고집이 나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자기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 분명히 아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 글이 어디선가 그런 어머니, 그런 아버지의 손에 닿는다면 한 가지만 전하고 싶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든, 블록을 쌓든, 무언가에 한 시간을 잊고 빠져 있을 때, 그 시간은 결코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답을 미리 쥐여주는 일이 아니라, 자기만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게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더 시킬 것인가보다, 아이가 무엇에 오래 빛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칠십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을, 같은 길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젊은 부모들에게 작은 마음으로 적어 둔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 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호기심 가득한 창작의 순간 발행정보…

[손영미 칼럼] 105억의 오페라, 부산의 축제

[손영미 칼럼] 105억의 오페라, 부산의 축제

–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작 〈오텔로〉, 불꽃을 넘어, 도시의 혈관을 여는 불씨로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지난해 부산콘서트홀의 개관은 하나의 건축이 아니라, 도시의 심장에 처음으로 음악이 이식된 사건이었다. 이어 도착한 부산오페라하우스는 그 심장에 성대를 얹는 일이다. 부산은 이제 항구의 파도만으로…

[탁계석 칼럼] 고급 기고문_AI 협업 이후, K-클래식은 어디로 가는가

[탁계석 칼럼] 고급 기고문_AI 협업 이후, K-클래식은 어디로 가는가

– 창작의 패러다임 전환과 향토성의 재발견   ▲사진=탁계석 케이클래식 & 예술비평가회장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탁계석 칼럼니스트] AI와의 첫 협업 실험이 마무리되었다. 단종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삼경」, 「청령포」, 「회상」 세 작품은 예상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주며, 새로운 창작 방식의 가능성을 분명히 입증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AI는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창작 생태계를 ‘재구성하는 계기’다. 문제는 생산이 아니라 설계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의미를 설계할 것인가가 창작의 본질로 떠올랐다.   ■ 향토성, 이제 콘텐츠의 중심으로 다음 단계는 분명하다. 지역이다. 대한민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향토적 자산—역사, 인물, 설화, 풍경—이야말로 K-클래식의 가장 강력한 원천이다. 각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소재들을 발굴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작품으로 완성하는 정밀한 설계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이 아니라 ‘문화 자원의 구조화’다. 지역 탐방과 체험을 통해 얻어진 생생한 현장성은 AI와 결합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그 결과물은 가곡에 머무르지 않는다. 합창곡, 뮤지컬 넘버, 관현악, 음악극으로 확장되며 하나의 복합적 문화 자산으로 재탄생한다.   ■ 플랫폼, 창작의 생산성을 바꾸다 그동안 창작의 가장 큰 한계는 ‘비생산성’이었다. 수많은 작품이 일회성으로 소멸되고, 축적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AI 협업은 이 구조를 바꾼다. 1차 창작물이 2차, 3차 확장으로 이어지는 ‘연쇄 생산 구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플랫폼이다. K-클래식 뉴스는 단순한 홍보 매체가 아니라, 창작을 기록하고 확산시키는 생태계의 중심축이 된다. 특히 오케스트라 음악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활용될 수 있는 환경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창작 모델을 만들어낸다. 음악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되는 구조로 전환되는 것이다.   ■ 글로벌 시장, 우리가 설계하는 생태계 이제 시선은 세계로 향한다. 중요한 것은 ‘진출’이 아니라 ‘구조’다. 해외 연주자들이 한국 창작 작품을 연주할 때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단순한 콘텐츠 공급자가 아니라 생태계 설계자가 된다. 이것은 한국 창작 음악이 서양 음악사의 주변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실질적 경로를 의미한다. 속도는 AI가 제공한다. 그러나 방향은 우리가 정해야 한다.…

[손영미 칼럼] 2026 한국가곡대축제‘김효근 K-아트팝 가곡의 밤’

[손영미 칼럼] 2026 한국가곡대축제‘김효근 K-아트팝 가곡의 밤’

– 노래는 끝나는 예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옮겨가는 숨이다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행여, 그대 나 몰래 운다면 그 눈물 닦아주리…” 김효근 작곡 〈어느 행복한 아침에〉의 한 구절이다. 이 짧은 문장은 노래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지를 말해준다. 노래는 입술에서 태어나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눈물 곁으로 도착한다. 지난 2026년 4월 25일 토요일 오후 7시, 부산콘서트홀에서 ‘2026 한국가곡대축제-김효근 K-아트팝 가곡의 밤’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지난해 개관한 부산콘서트홀은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악기였다. 클래식 전용 홀 특유의 풍부하고 입체적인 사운드는 성악가의 미세한 호흡과 떨림까지 객석 구석구석으로 투명하게 전달하며, 이번 음악회의 감동을 한층 더 극대화했다. 지난 15년간 한국 현대가곡의 흐름을 이끌어온 작곡가 김효근. 그는 전통적 예술성(ART)과 대중성(POP)을 결합한 ‘K-아트팝’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며, 한국 가곡 르네상스의 한 축을 단단히 세워왔다. KNN과 한국가곡부산문화재단, 한국거래소, BNK금융그룹의 후원으로 이어진 이번 축제는 한국 가곡의 현재를 증명하는 귀한 무대였다. 공연은 인간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는 네 개의 정서적 테마로 구성되었다. 오프닝 〈안드로메다〉를 시작으로 ‘사랑’, ‘그리움’, ‘삶’, ‘위로’의 서사가 부산콘서트홀의 입체적 음향을 타고 관객의 마음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1. 사랑, 가장 순수한 떨림의 시작 사랑은 설명할 수 없기에 더 깊고, 닿을 수 없기에 더 오래 머문다. 이 흐름 속에서 사랑의 이야기는 거창한 고백이 아니라, 타인의 눈물을 먼저 알아보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첫사랑〉이 품고 있는 가장 순수한 감정은 지나갔지만, 그 떨림은 평생의 기준으로 남는다. 김효근의 가곡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존재를 흔드는 근원적 울림으로 그려낸다. 〈어느 행복한 아침에〉는 그 대표적인 예다.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깊이 고백하는 이 곡은, 사랑이란 결국 타인의 슬픔을 대신 감당하려는 마음임을 일깨워주었다. 2. 그리움 , 시간 너머로 이어지는 감정 두 번째 테마는 ‘그리움’이다. 김효근의 음악에서 그리움은 과거를 향한 회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감정이다. 그의 선율은 늘 ‘지나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노래한다. 공간의 깊이감을 더하는 콘서트홀의 울림 덕분에, 듣는 이들은 각자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호출할 수 있었다.…

[정봉수 칼럼] 사업주가 알아야 할 알바·파트타이머의 노동법 기준

[정봉수 칼럼] 사업주가 알아야 할 알바·파트타이머의 노동법 기준

▲사진=정봉수 노무사, 강남노무법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정봉수 칼럼니스트]  2014년 스웨덴 가구업체 IKEA는 한국에 진출했을 당시 현장직원 대부분을 1일 4시간의 단시간근로자를 정규직근로자로 모집하면서 우리나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는 단시간근로자를 정규직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며 주로 서비스업종의 영세한 사업체에서만 알바, 임시직 또는 저임금의 근로자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체근로자중 단시간근로자 비율은 2014년기준 0.8%인 반면, 네덜란드는 37.2%, 영국은 24.9%, 독일 22.1%이며, 일본의 경우도 27%에 이르고 있다.[1] 시간제근로자는 통상근로자에 비해 1주의 소정근로시간이 짧다는 사실과 그 짧은 근로시간만큼 근로조건이 비례적용 된다는 점 외에는 근로조건에 있어 차이가 없다.[2]   사실상 단시간근로자에 대한 근로조건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정규직근로자의 일자리도 단시간근로로 나눠 일을 공유하면,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면서도 더 큰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경력이 단절된 여성인력과 고령자를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단시간근로자 보호를 위하여 단시간근로자의 (i)개념, (ii)법정 근로조건, (iii) 차별적 처우의 금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 단시간근로자의 개념  “단시간근로자”란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이 그 사업장에서 같은 종류의 업무에 종사하는 통상 근로자의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에 비하여 짧은 근로자를 말한다(근로기준법 이하 ‘근기법’ 제2조). 즉, 통상근로자의 1주 소정근로시간이 40시간이라면, 1일 8시간씩 1주 4일 근무한 경우에도 1주 근로시간이 32시간이 되기 때문에 단시간근로자에 속한다.  단시간근로자의 개념은 (i)1주 기준, (ii)소정근로시간, (iii)통상근로자의 근로시간이 포함된 내용이다. (i) 1주의 기준은 매주 근로시간이 일정한 경우에는 그 주의 근무시간이 되지만, 각 주마다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에는 4주를 평균하여 1주의 근로시간을 산정한다(근기법 제18조).  (ii) 단시간근로자의 1일 소정근로시간 수는 4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을 그 기간의 통상 근로자의 총 소정근로일 수로 나눈 시간 수로 한다.[3] 즉, 통상근로자의 4주 기간 동안의 총 소정근로일수에 따라 산정이 달라질 수 있다. 소정근로시간은 법정근로시간[4]에 따른 근로시간의 범위에서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에 정한 근로시간을 말하므로 소정근로시간은 법정근로시간과 같거나 작아야 한다(근기법 제2조).   구체적인 예를 가지고 1일 소정근로시간을 계산해보자면, 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6시간을 근무하고 통상근로자가 주5일을 근무하는 경우: (30시간 x 4주) / (5일 x 4주) = 6시간이 된다. ② 그러나 동일한 근로시간을 근무하더라도 통상근로자가 주6일을 근무하는 경우: (30시간 x 4주) / (6일 x 4주) = 5시간이 된다.  (iii) 통상근로자의 기준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기단법”) 제2항은 “당해 사업 또는 사업장의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에 종사하는 통상근로자”로 하고 있고, 법원은 이에 대해 비교대상근로자로 선정된 근로자의 업무가 단시간근로자의 업무와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취업규칙이나 근로계약 등에 명시된 업무 내용이 아니라 근로자가 실제 수행하여 온 업무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되, 이들이 수행하는 업무가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아니하고 업무의 범위 또는 책임과 권한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된 업무의 내용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이들을 동종 또는 유사한 업무에 종사한다고 보고 있다. [5]   II. 단시간근로자의 법정 근로조건  단시간근로자의 근로조건은 그 사업장의 같은 종류의 업무에 종사하는 통상 근로자의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산정한 비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근기법 제18조). 즉, 단시간근로자도 근로기준법상 제 규정을 모두 적용 받지만, 법정휴일이나 휴가에 있어서는 통상근로자의 근로시간 비례원칙이 적용된다.[6] 1. 근로계약과 취업규칙  (i) 근로계약: 단시간근로자의 근로계약은 서면으로 작성하고 교부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과태료 500만원이 부과된다(기단법 제17조, 제24조). 근로계약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사항은 ① 근로계약기간에 관한 사항, ② 근로시간·휴게에 관한 사항, ③ 임금의 구성항목·계산방법 및 지불방법에 관한 사항, ④ 휴일·휴가에 관한 사항, ⑤ 취업의 장소와 종사하여야 할 업무에 관한 사항, ⑥ 근로일 및 근로일별 근로시간이다. 근로계약 작성의무를 엄격하게 구속하는 이유는 장차 근로기준법의 위반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함이다.   (ii) 취업규칙: 사용자는 단시간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취업규칙을 통상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취업규칙과 별도로 작성할 수 있다. 취업규칙을 작성하거나 변경하고자 할 경우에는 적용대상이 되는 단시간근로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하며, 이를 단시간근로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단시간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근기법 제94조). 이는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단시간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저하시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법적 취지이다. [7]    2. 임금  (i) 단시간근로자의 임금산정 단위는 시간급을 원칙으로 하며, 시간급 임금을 일급 통상임금으로 산정할 경우에는 1일 소정근로시간 수에 시간급 임금을 곱하여 산정한다. (ii) 임금은 통화로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하여야 하고, 매월 1회 이상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지급하여야 한다(근기법 제43조). (iii) 단시간근로자의 계속근로연수 1년에 대해 30일분의 이상의 평균임금을 퇴직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이 경우 평균임금이 통상임금보다 적으면 그 통상임금액을 퇴직금으로 지급해야 한다(근기법 제2조). 또한 단시간근로자의 퇴직금제도를 설정함에 있어서 통상근로자의 퇴직금제도에 차등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 (iv) 단시간근로자의 비교대상근로자가 없는 경우에도 최저임금법에 따른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      3. 근로시간  (i) 단시간근로자의 소정근로시간은 엄격하게 보호되고 있다. 사용자는 단시간근로자에 대하여 소정근로시간을 초과하여 근로하게 하는 경우에는 당해 근로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이 경우에도 1주 소정근로시간에 12시간을 초과하여 근로하게 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고 소정근로시간을 초과하여 연장근로를 하는 경우에는 법정근로시간(1일 8시간, 1주 40시간) 이내에도 불구하고 그 초과근로에 대한 통상임금의 100분의 50 이상을 가산하여 지급하여야 한다. 근로기준법의 경우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에 대해서만 통상임금의 100분의 50 이상의 가산임금을 지급하지만, 단시간근로자의 경우에는 소정근로시간을 초과할 경우에도 가산임금의 지급을 규정하고 있다(기단법 제6조). (ii) 단시간근로자도 취업규칙에 명시된 휴일근로에 대해 100분의 50을 가산해서 지급하고, 8시간을 초과하는 휴일근로에 대해서는 100분의 100을 가산한다(근기법 제56조). (iii) 단시간근로자가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 사이 야간근로를 하는 경우에는 100분의 50을 가산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동법 제56조).    4. 휴일과 연차유급휴가   단시간근로자의 휴일과 연차유급휴가는 통상근로자의 근로시간 비례원칙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된다.   (i) 휴일: 1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보장하여야 한다. 1일의 소정근로시간을 유급으로 주어야 한다. 시간급으로 임금을 계산할 경우에는 유급 주휴수당을 추가적으로 계산하여 지급해야 한다. 다만, 주말 근무나 휴일을 대체하기 위해 채용된 단시간 근로자의 경우에는 주말이 아닌 날에 주휴일을 유급으로 주어야 한다.   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6시간, 통상근로자는 주5일 근무하고, 시간급 1만원인 경우: [(30시간 x 4주) / (5일 x 4주) = 6시간]이 되므로 [6시간 x 1만원 = 6만원]이 된다. ② 그러나 통상근로자가 주6일을 근무하는 경우: [(30시간 x 4주) / (6일 x 4주) = 5시간]이 된다. [5시간 x 1만원 = 5만원]이 된다. (ii) 연차유급휴가: 사용자는 단시간근로자에게 연차유급휴가 횟수를 통상근로자와 같이 동등하게 부여하여야 한다. 이 경우 연차유급휴가는 시간단위로 계산하고, 1시간 미만은 1시간으로 본다. 또한 근속년수 1년 미만자의 월차유급휴가의 경우에도 매월 1일의 소정근로시간을 월차유급휴가로 주어야 한다. 단시간근로자의 연차휴가부여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통상근로자의 연차휴가일수 × 단시간근로자의 소정근로시간 × 8시간 통상 근로자의 소정근로시간…

[손영미 칼럼] AI가 실시간으로 답을 내놓는 시대에, 문학은 왜 ? 여전히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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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찾은 단상 ▲사진=손영미 극작가 & 시인 & 칼럼니스트 ⓒ강남 소비자저널 [강남 소비자저널=손영미 칼럼니스트] 우리는 지금, 답이 질문을 앞지르는 시대를 산다. 속도는 미덕이 되었고, 요약은 이해를 대신하며, 감정은 알고리즘의 추천 목록으로 환원된다. 이 거대한 효율의 흐름 속에서 문학은 종종 “쓸모없는 장르”로 밀려난다. 느리고 비경제적이며, 즉각적인 해결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고 싶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정말 ‘시간’뿐인가. 아니면 인간을 인간답게 이해하는 방식, 그 자체인가… 최근 ‘손석희 질문들’에서 김애란과 손석희의  대화는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던진다. 그들은 문학의 효용을 말하기보다우리가 어떤 속도로 타인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묻는다. 오늘의 사회는 끊임없이 결론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곧바로 해석이 뒤따르고 해석은 평가로, 평가는 진영의 언어로 굳어진다.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시간’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자신의 속도로 말해질 권리, 그 감정이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여지, 문장이 끝까지 도달할 때까지의 기다림이 삭제된다. 김애란 작가가 말한 “집중력이 곧 도덕이다”라는 문장은 이 지점에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집중이란 단순한 주의력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함부로 축약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문학은 그 결심을 훈련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문학은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머무름을 요구한다. 텍스트 속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삶을 결론 없이 경험한다. 그 경험은 즉각적인 변화로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판단과 시선에 균열을 낸다. 문학은 그렇게 사회의 공기를 바꾼다. AI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인간의 정서적 완전한 이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해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머뭇거림의 시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 머뭇거림을 허락한다. 슬픔 앞에서 쉽게 위로하지 않고, 비극 앞에서 성급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침묵 그 느린 감각이야말로 오늘의 사회가 회복해야 할 윤리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설명 속에 살고 있다. 데이터와 통계, 논리와 해석이 세상을 규정한다. 그러나 설명이 많아질수록 이해는 깊어지지 않는다. 문학은 설명을 줄이는 대신 감각을 회복시킨다. 타인의 삶을 한 번 더 바라보게 하고, 그 감정의 결을 조금 더 오래 붙잡게 한다. 그래서 문학은 여전히 필요하다. 문학은 세상을 빠르게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결국 그 인지 지점에서 시작된다. 속도의 시대에 문학은 느림으로 저항하고, 효율의 시대에 문학은 비효율의 질문으로 응답한다. 우리가 더 많은 답을 얻을수록, 더 깊은 이해를 잃지 않기 위해… 문학은 세상을 앞서가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뒤처지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 걷는다.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천재: 인공지능 시대, 천재는 무엇이 다를까?

[인인칼럼 유준형] AI와 천재: 인공지능 시대, 천재는 무엇이 다를까?

[강남 소비자저널=유준형 컬럼니스트] 강의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가장 많은 메모를 한 사람도, 가장 빨리 답을 찾은 사람도 아니다. 조용히 다가와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다. “교수님, 이 문제는 기술보다 인간 이해의 문제 아닐까요?” 나는 그런 질문 앞에서 자주 멈춘다. 강의자료를 정리하던 손이 멈추고, 노트북을 덮게 된다. 배움의 깊이는 속도가 아니라 질문에서 드러나는구나. 그 깨달음이 나를 멈추게 할 때마다, 인공지능 시대의 천재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도 한때 천재를 ‘많이 아는 사람’으로 상상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계산이 빠르고, 남보다 먼저 정답을 내놓는 사람. 시험지를 먼저 뒤집어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런 아이 말이다. 물론 그런 능력은 여전히 소중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요약하고, 문장을 만들고, 문제 해결의 초안까지 내놓는 시대가 되면서 질문 자체가 달라졌다. 많이 안다는 것만으로 천재를 설명할 수 있던 시대는 조용히 끝나고 있다. 이제 검색창에 세 단어만 입력하면 웬만한 전문가의 한 시간 강의 분량이 5초 안에 정리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많이 아는 것’은 더 이상 경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천재는 무엇이 다른가? 나는 그 차이가 정답의 양이 아니라 질문의 깊이에 있다고 본다.  AI는 이미 정보 검색과 패턴 분석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왜 그 질문이 중요한지, 그 답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무게를 갖는지는 끝내 기계의 몫이 아니다. 기술은 정리할 수 있어도, 의미까지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같은 AI를 써도 차이는 뚜렷하게 갈린다. 누구는 자료를 빠르게 정리하는 데서 멈추고, 누구는 거기서 전혀 다른 문제를 발견한다. 같은 논문을 읽어도 누구는 요약에 만족하지만, 누구는 “왜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만 보아왔을까”라고 되묻는다. 나는 이 차이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얼마 전 한 특강에서 쉰이 넘은 제조업 대표가 질문을 던졌다. AI로 공정 불량률을 줄이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그분은 엉뚱한 방향에서 물었다. “교수님, 불량률을 줄이면 사람을 줄이라는 말이 꼭 따라오거든요. 그 순서를 바꿀 수는 없을까요?” 강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옆자리 젊은 엔지니어가 고개를 돌려 그 대표를 바라봤다. 아마 처음으로 효율이 아닌 다른 질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 질문에는 수십 년을 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버텨온 사람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날 강의가 끝나고 주차장까지 걸어가면서도 그 질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분이 계산을 못 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계산 끝에, 계산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나는 그날 이후로 천재의 기준을 좀 더 분명하게 다시 세우게 되었다. 천재란 남보다 빨리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이다. 삶을 오래 통과한 사람들은 질문이 다르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기술이 정말 현장을 바꾸는가, 아니면 겉모습만 바꾸는가?” “사람을 살리는 방향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질문은 교과서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겪고, 실패를 견디고, 현장에서 오래 부대낀 이들의 내면에서 나온다. 어쩌면 주름 하나하나가 질문의 이력서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이야기가 기존 교육의 가치를 낮추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초지식은 여전히 중요하고, 훈련된 사고는 여전히 필요하며, 교육의 역할은 AI 시대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한 가지가 더해졌을 뿐이다. 지식 위에, 그 지식을 어디에 연결할지, 누구를 위해 쓸지를 묻는 힘까지 키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교육이 지금까지 훌륭한 악기를 만들어왔다면, 이제는 그 악기로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까지 함께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정답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정답 너머의 질문까지 품게 하는 데 있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AI가 점점 정교해지면 질문을 만들고 창의적으로 연결하는 일까지 기계가 더 잘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타당한 지적이다. 실제로 AI는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한 패턴을 찾아내고, 뜻밖의 조합을 제시하며,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는다. 나도 강의를 준비할 때 AI의 제안에 무릎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이건 내가 못 이기겠는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남는 것이 있다. 어떤 질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인가. 무엇을 위해 지식을 쓸 것인가. 어디까지를 가능이라 부르고, 어디서부터를 책임이라 부를 것인가. 이것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선택에는 언제나 그 선택을 감당할 한 사람의 얼굴이 따라붙는다. 아까 그 제조업 대표의 질문이 무거웠던 것도, 계산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책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AI는 불량률 0.01%의 최적해를 찾아줄 수 있다. 그러나 그 0.01%를 위해 누군가의 자리를 없앨 것인지 말 것인지, 그 결정 앞에서 밤잠을 설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천재는 혼자 모든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더 자주 놀라고, 더 깊이 묻고, 더 넓게 연결하되, 그 끝에서 사람을 향해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다. 남보다 먼저 계산하는 사람보다 남이 놓친 인간의 얼굴을 먼저 알아보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사람보다 그 지식이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끝까지 따져 묻는 사람. 나는 그런 이가 앞으로 더 귀해질 것이라 믿는다. 오늘의 작은 실천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답을 평가하기 전에, 그 사람이 던진 질문 하나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다. 듣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듣지 않는 데는 꽤 큰 비용이 든다. 그 질문 속에 혹시 천재의 씨앗이 들어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어쩌면 미래의 천재는 가장 빨리 대답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오래 질문한 사람일지 모른다.   ▲사진=구글 제미나이(나노바나나2)가 생성한 이미지 – 협력의 천재성: 인간 두뇌에서 흘러나온 아이디어가…